수행기

나는 존재에서 경외를 보노라

담마다사 이병욱 2023. 4. 26. 08:28

나는 존재에서 경외를 보노라


사무실에 기적이 일어났다. 양애깐이 올라 온 것이다. 그제 화분을 봤더니 양하(蘘荷)가 쑤욱 올라왔다. 없던 것이 새로 생겨난 것이다.

 


양하는 다년생 식물이다. 함평에서는 양애깐이라고 한다. 부르는 대로 적은 것이다. 고향 큰집 뒤켠에 자생한다. 작년 6월 사촌모임 때 캐 온 것이다.

양하는 갈대처럼 생긴 것이다. 시골에서 가져온 양하를 화분에 심었다. 고향 흙에서 고향 식물이 가을까지 자랐다.

양하는 늦가을이 되자 시들해졌다. 혹시 내년에 싹이 나올지 모른다는 기대감과 함께 물을 주었다. 마침내 마치 대나무 죽순처럼 쑤욱 싹이 나온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기적이 아니고 무엇일까?

생명은 경이롭다. 없던 것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봄에 꽃이 피고 새싹이 나는 것을 보면 경이 그 자체이다.

아기가 태어나는 것은 불가사의하다. 무에서 유가 되는 것 같다. 이런 것에 대해서 어떤 이는 신의 섭리라고 말할지 모른다. 알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신의 뜻 또는 신의 탓으로 돌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어느 것 하나 원인이나 조건없이 생겨나는 것은 없다.


"
경외가 생긴 경우의 경외와 경외자의 이치에 맞는 노력입니다."(D33.9)


머리맡에 있는 디가니까야에 있는 가르침이다. 33번 합송의 경에서 둘로 이루어진 원리에 대한 것이다. 법수가 두 개로 되어 있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키워드는 경외이다.

경외는 빠알리어 상베가를 번역한 것이다. 상베가는 일종의 두려움 같은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경외는 두려움과 동의어이다. 어떤 두려움인가? 그것은 생겨남에 대한 두려움이다.

생겨남이 왜 두려움인가? 그것은 죽음과 관련 있다. 생겨난 것은 반드시 소멸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노와 병이 있다. 그래서 생, , , 사는 두려운 것이다.

경외의 근거는 생노병사이다. 아기가 태어나면 즐거운 것이 아니라 두려운 것이라고 봐야 한다. 식물에서 싹이 나오는 것도 두려운 것으로 봐야 한다. 좀더 고상한 말로 경외이다.

경외를 한자풀이하면 놀랍고 두려운 것이다. 새싹이 나고 아기가 태어나는 것은 놀랍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두려운 것이다. 물론 수행의 관점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없던 것에서 새로운 것이 생겨났을 때 경이롭다. 그런데 이런 현상은 반드시 눈에 보이는 것에만 해당되는 것일까?


단지 손가락 튕기는 순간만이라도 무상에 대한 지각을 닦는다면, 그것이 더욱 커다란 과보를 가져올 것입니다.” (A9.20)


손가락을 튕기면 ""하고 소리가 난다. 그런데 이런 소리는 오래 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불과 0.5초 머물 것이다. 그 소리는 어디로 갔을까?

어느 스님이 있다유튜브에서 본 그 스님은 신도들에게 깨달음에 대해서 설명해 주고자 했다. 스님은 종을 쳤다. 작은 종을 연신 치면서 "이것"이라고 말했다.

어떤 재가법사가 법문을 했다. 유튜브에서 본 것이다. 법사는 법문 내내 "이것뿐입니다."라는 말만 반복했다. 대체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어떤 이는 법문할 때 책상을 탕탕 친다. 책상을 치면서 "이것입니다."라고 말한다. 그는 이것을 알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을 답답해 한다. 이렇게 뻔히 드러나 있음에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투로 말한 것이다.

이것을 말하는 자들이 있다. 유튜브에서도 제목을 이것으로 뽑는다. 흥미를 유발해서 들어오게 하기 위함이다. 자신의 말을 듣다 보면 이것을 알게 될 것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그러나 들어가지 않게 된다. 어떤 주제로 말하려 하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약장수 같다고 생각한다. 호기심을 유발하여 호객행위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현상은 생겨났다가 사라진다. 그것도 곧바로 사라진다. 이것이 본질이다. 번개가 치는 것과 같다. 번개가 치면 빛과 소리가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손가락 튕기기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손가락을 튕기면 소리가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소리가 계속 머무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런데 시각은 다르다. 지금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사라지지 않는다. 계속 영원히 그 자리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어느 것 하나 영원한 것은 없다. 조건적으로 형성된 것은 조건이 다하면 소멸하기 마련이다. 손가락 튕기는 소리도 즉시 사라진다. 라일락 향기도 금방 사라진다. 꿀차의 단 맛도 오래 가지 못한다. 따스한 감촉도 일시적이다. 어느 것 하나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유독 시각적으로 보이는 것만큼은 영원히 그대로 있는 것처럼 보인다.

철학에 대해서 잘 모른다. 특히 서양철학에 대해서는 더욱더 모른다. 유튜브에서 들은 것이 있다. 서양 철학자들은 있는 것에서 경이를 느꼈다고 한다. 이에 대해서 "왜 없지 않고 있을까?"에 대해서 놀라워했다고 한다.

나는 여기 이렇게 존재하고 있다. 이렇게 존재하고 있는 나는 누구일까? 이런 질문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시대를 막론하고 풀리지 않는 의문이었다. 이렇게 있는 것 자체가 기적으로 보인 것이다. 그런데 이는 시각적인 것이다. 청각적으로 본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손가락 튕기기를 했을 때, 종을 쳤을 때, 책상을 탕탕 쳤을 때 소리는 사라지고 없다.

있는 것보다 오히려 없는 것이 자연스럽다. 소리를 예로 들 수 있다. 향기도 맛도 감촉도 없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럼에도 눈으로 보이는 것은 영원히 그 자리에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영원주의가 생겨났을 것이다.


"
자아와 세계는 영원한 것으로 새로운 것을 낳지 못하고, 산봉우리처럼 확립되어 있고, 기둥처럼 고정되어 있어, 뭇삶들은 유전하고 윤회하며 죽어서 다시 태어나지만, 영원히 존재한다."(D1.34)


이것이 영원주의자의 견해이다. 어떤 고정된 실체가 있어서 영원히 존재함을 말한다. 아뜨만, 자아, 영혼 같은 것을 말한다. 정신적인 존재는 몸이 죽어도 영원히 산다고 보는 것이다.

영원주의자는 새로운 것을 낳지 못한다고 보았다. 자아나 영혼이 새로운 것을 낳지 못하는 것과 같다. 한번 형성된 것은 영원히 지속되는 것과 같음을 말한다. 마치 지금 눈앞에 있는 저 바위산이 영원히 그 자리에 있는 것과 같다.

눈 앞에 있는 바위산은 어제도 그 자리에 있었고 그제도 그 자리에 있었다. 눈 앞에 있는 관악산은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있었고 내가 죽은 후에도 그 자리에 있을 것이다. 아뜨만, 자아, 영혼처럼 어떤 변치 않는 정신적 실체는 마치 저 바위산처럼 항상 존재할 것이라고 보는 것이 영원주의자의 시각이다.

서양 철학자들은 지금 여기에 이렇게 있는 것이 경이로웠나 보다. 그래서 "왜 없지 않고 이렇게 있을까?"라며 존재론적 고민 했던 것 같다. 그러나 이는 시각적으로 사물을 바라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사물은 항상 그 자리에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상을 청각적으로 접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왜 그런가? 소리는 항상 있지 않기 때문이다.

손가락을 튕길 때 ""하는 소리는 생겨났다가 금방 사라진다. 종을 칠 때도, 책상을 탕탕 칠 때도 금방 사라진다. 이에 대해서 어떤 이들은 "이것"을 말한다. 이론적으로 설명이 안되니 "바로 이것입니다. 이것뿐이라니까요."라며 연신 이것타령을 한다. 그렇다면 대체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부처님도 이것을 말했다. 부처님도 손가락을 튕기면서 "이것"이라고 했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이것은 무상을 아는 것이다. 그래서단지 손가락 튕기는 순간만이라도 무상에 대한 지각을 닦는다면, 그것이 더욱 커다란 과보를 가져올 것입니다.” (A9.20)라고 했다 이렇게 부처님은 말로써 언어로써 누구나 알기 쉽게 설명 했다.

부처님은 이것타령 하지 않았다. 어느 스님처럼 신도 귀에다 종을 치며 "이것입니다."라고 말하지 않았다. 누구나 알아 들을 수 있는 말로 설명했다. 그래서 "경외가 생긴 경우의 경외와 경외자의 이치에 맞는 노력입니다."(D33.9)라고 말했다.

서양철학자들은 존재에 대해 탐구했다. 지금 여기 이렇게 있는 것이 경이롭다는 것이다. 그런데 부처님은 여기서 하나 더 나갔다. 그것은 두려움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경외를 말씀하셨다.

경외는 경이와 두려움에 대한 것이다. 이는 존재에 대한 두려움이다. 존재가 왜 두려움일까? 이는 부처님이 하느님(Brahma) 바까에게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말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
존재에서, 나는 두려움을 보고
없는 것을 추구하려는 존재를
나는 그 존재를 긍정하지 않고
어떠한 환희에도 집착하지 않았네."(M49)


부처님은 존재에서 두려움을 본다고 했다. 이는 영원주의를 대표하는 하느님 바까에게 한 말이다.

하느님 바까는 색계 초선천에 사는 중생이다. 수명은 고작 일겁밖에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너무 오래 살다보니 전생을 잊어 버렸다. 그래서 마치 눈 앞에 있는 바위산처럼 영원히 살 것으로 보았다.

하느님 바까는 사라짐에 대한 공포가 있었다. 그것은 다름아닌 죽음에 대한 공포이다. 마치 지금 천상락과 같은 행복을 누리는 자가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 같다. 이에 부처님은 바까에게 "없는 것을 추구하려는 존재"(M49)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아뜨만, 자아, 영혼 같은 정신적 실체를 말한다. 이런 것은 본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있는 것처럼 여기는 것에 대해서 "없는 것을 추구하려는 존재"(M49)라고 한 것이다.

아뜨만, 자아, 영혼은 본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영원주의자들은 본래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더 나아가 진짜 나인 참나도 있다고 말한다. 또한 존재의 근원도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조건발생적 연기법에 따르면 이런 것들은 있을 수 없다. 있다면 사람의 머리에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런 영원주의자에게 "추론자이자 탐구자이다."(D1.34)라고 말했다. 들어서 알고 사유해서 알고 측량해서 아는 것을 말한다.

영원주의자에게 가장 두려운 것은 사라지는 것이다. 영원주의자는 소멸을 가장 두려워한다. 그래서 영원히 존재하는 실체가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는 생각일 뿐이다. 언어적으로 존재하는 것이고, 오로지 명칭으로만 존재하는 것이다.

누구든지 명칭 붙일 수 있다. 사람 이름 부르는 것과 같다. 그래서 사람이름을 그 사람과 동일시 한다. 그런데 명칭은 죽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누군가 그 이름을 기억하고 있으면 영원히 사는 것이 된다. 하느님 바까도 그랬다. 이는 존재를 자아와 동일시 하는 것이다. 이런 하느님 바까에게 부처님은 다음과 같은 가르침을 주었다.


"
하느님이여, 존재를 존재로 곧바로 알고 존재가 존재라는 것으로 경험되는 것이 아님을 곧바로 알고, 나는 존재라고 생각하지 않고 존재 가운데 생각하지 않고 존재로부터 생각하지 않고 존재는 내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존재를 긍정하지 않았습니다."(M49)


부처님은 존재를 긍정하지 않는다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조건발생한 것은 조건이 다하면 사라지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마치 손가락을 튕길 때 소리나는 것과 같다.

부처님은 깨달음을 설명할 때 손가락 튕기기 예를 들었다. 어쩌면 부처님은 손가락을 튕기면서 "이것입니다."라고 말 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경에서는 무상에 대한 지각이라고 했다. 소리가 조건 발생해서 생겨났다가 즉각 사라짐을 말한다. 이는 다름아닌 찰나생찰나멸이다.

찰나생찰나멸은 청각적으로 설명이 잘된다. 그래서 부처님은단지 손가락 튕기는 순간만이라도 무상에 대한 지각을 닦는다면, 그것이 더욱 커다란 과보를 가져올 것입니다.” (A9.20)라고 했다. 그러나 시각적으로 찰나생찰나멸을 설명하기는 힘들다.

사람들은 눈으로 보는 것만 믿고자 한다. 지금 눈 앞에 사물이 그대로 있다면 영원히 있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따라서 찰나생찰나멸이 적용될 수 없다. 어찌보면 시각이 우리를 속이고 있는지 모른다. 그래서 "자아와 세상은 산봉우리처럼 확립되어 있어서 영원히 변치 않는다."라는 영원주의적 견해가 생겨났는지 모른다.

견해는 견해일 뿐이다. 머리속에서 사유한 것이다. 이는 다름아닌 언어적 형성에 대한 것이다. 언어적으로만 존재하는 것이다. 아뜨만, 자아, 영혼은 단지 명칭에 지나지 않는다. 실체가 있는 것도 아니다.

존재하는 것은 경이롭다. 특히 없던 것에서 새로 생겨나는 것을 보면 경이롭다. 화분에서 작년에 죽었던 양하가 솟아났을 때 경이로웠다. 그렇다면 아기가 태어 났을 때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아기가 태어나면 축복이라 여긴다. 그러나 수행자라면 경외감이 들 것이다. 없는 것에서 있는 것이 되었으니 경이로운 것임에는 틀림없다. 그런 한편 두려움도 느낀다. 그래서 놀랍고도 두려운 경외가 생겨나는 것이다.

부처님은 경외에 대해서 "경외가 생긴 경우의 경외와 경외자의 이치에 맞는 노력입니다."(D33.9)라고 했다. 여기에 두 개의 법이 있다. 이는 경외와 노력이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경외는 생노병사에 대한 두려움이다. 생명이 경이로운 것이기는 하지만 동시에 두려운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태어남에 대한 두려움, 늙음에 대한 두려움, 질병에 대한 두려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말한다.

생노병사에 두려움이 생겨나면 어떻게 해야 할까? 두려움을 극복하는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다름아닌 불사의 길로 가는 것이다. 불사불생의 열반을 실현하는 것이다. 그래서 노력을 해야 하는데 이는 네 가지 정근을 말한다.


2023-04-26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