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갈 때는 간다고 분명히 아는 것에 대하여

담마다사 이병욱 2023. 5. 18. 06:54

갈 때는 간다고 분명히 아는 것에 대하여

 


아침에 도를 이루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말이 있다. 법구경 에서는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을 보지 못하고 백년을 사는 것보다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을 보면서 하루를 사는 것이 낫다."(Dhp.113)라고 했다.

진리를 알면 먹지 않아도 배부를 것 같다. 진리를 알면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 같다. 경전을 읽다가 새겨두고 싶은 문구를 발견했을 때 뿌듯하다. 마음이 충만해 지는 것 같다. 마치 세상의 모든 것을 가진 것 같다.

그가 아무리 많은 재물을 가졌어도 세상의 원리를 모른다면 조금 가진 것이 된다. 그가 비록 물질적으로 가진 것은 없어도 경전 한 구절에 마음이 충만해 있다면 모든 것을 다 가진 것과 같다. 다음과 같은 문구에서도 한없는 마음의 충만을 느낀다.

"여기서 들어올릴 때, 들어 올리려고 하는 현상, 또한 들어 올리는 것이라는 현상에 의해서 생겨난 정신-물질 법들은 뻗을 때는 존재 하지 않는다.

그처럼 뻗을 때 생겨난 물질-비물질 법 들은 옮길 때는 존재하지 않는다. 옮길 때 생겨난 물질-비물질 법들은 내려놓을 때는 존재하지 않는다. 내려놓을 때 생겨난 물질-비물질 법들은 땅을 디딜 때는 존재하지 않는다. 디딜 때 생겨난 물질-비물질 법들은 누를 때는 존재하지 않는다.

각각의 순간 정도만 부분 부분, 마디마디, 조각 조각 생겨나서는 사라져 버린다. 비유 하자면 마치 매우 뜨겁게 달구어진 냄비 위에 던져진 참깨처럼 따 닥파닥 소리를 내며 빠르게 부서지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거기에 즉 그렇게 사라지고 있는 물질과 정신에 앞으로 나아가는 이가 어 떻게 있겠는가?

이 앞으로 가는 것이 어느 누구의 동작인가? 스스로 직접 경험하여 알 수 있는 거룩한 의미인 빠라맛타 실재성품으로 보면 중생-나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요소들이 가고, 요소 들이 서고, 요소들이 앉고, 요소들이 눕는다. 그 가는 것. 생각하는 것 등의 각각의 부분에서 물질과 더불어,

별개인 이전의 마음이 소멸하고 별개인 새 마음이 생겨난다.
마치 강물의 흐름처럼 마음의 연속은 끊임없이 이어져 생겨난다.

이와 같이 나아감 등에 대해서 미혹하지 않음을 '미혹없음' '바른앏'이라고 한다."
(위빳사나 수행방법론 1권, 457-458쪽)

마하시사야도의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에 실려 있는 가르침이다. 이 문장을 읽고 마음이 충만했다.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알아 버린 듯 했다. 법구경 113번 게송이 이를 설명한 것인처럼 보였다.

위 문장은 행선에서 나아 갈 때를 설명한 것이다. 이런 설명은 "갈 때는 간다고 (분명히) 안다.(gacchanto và gacchamiti pajanāti)"라는 대념처경(D22) 가르침에 따른다. 갈 때 사띠하는 것을 말한다.

사람들은 갈 때 아무생각없이 간다. 그러나 수행자는 갈 때 알아차림하며 간다. 이는 "가려고 하는 마음이 제일 먼저 생겨난다. 그 마음 때문에 특별하게 앞 으로 밀어 주는 동작들과 함께 앞으로 향하는 단계적인 움직임들이 생 겨난다. 그러한 움직임들이 전체에 퍼져 생기기 때문에 몸이라고 부르는 모든 물질들의 한 동작, 한 동작들이 움직이며, 생멸하며 가는 것을 '간다'라고 부른다."(448쪽)라고 설명된다.

마하시사야도의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은 철저하게 경전과 주석에 근거해서 설명된다. 가는 것에 대해서 한동작 한동작을 생멸로 설명했는데 이와 관련된 주석을 보면 다음과 같다.

"갈때는 '간다'라고 새겨 아는 수행자인 그는 다음에 말할 방법을 통해 이와 같이 분명히 구분하여 안다. '가리라'라고 마음이 일어나면 그것, 그 마음은 바람 요소(지탱함, 움직임)를 생기게 하고, 바람 요소(지탱함, 움직임)는 암시(밀어 주는 특별한 움직임 들)를 생기게 하여 마음이 만든 마음의 작용에서 생긴 바람 요소(지탱함, 움직임)의 확산에 의해서 온몸이, 혹은 몸이라 불리는 물질 전체가 원하는 곳으로, 앞으로 한 동작 한 동작 움직이는 것을 '간다'라고 말한다."(DA.ii.357)

 


대념처경 주석에 따르면 가는 것은 풍대의 작용에 따른 것이다. 물론 가려는 의도가 있기 때문에 발이 움직인다. 이때 움직임을 풍대의 작용으로 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갈때는 '간다'라고 새겨 아는 것이 왜 중요할까? 그것은 견해를 청정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아무생각없이 간다면 '내가 간다'라는 견해가 생겨날 것이다. 그러나 가는 동작을 잘 관찰하면 내가 가는 것이 아니다. 가려는 의도와 움직임만 있는 것이다. 그런데 가려는 의도와 움직임은 일시적이라는 사실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발을 옮길 때 듦, 뻗음, 옮김, 놓음, 딛음, 누름이라는 여섯 단계가 있는데 모두 의도와 움직임이 다름을 말한다.

어느 것 하나도 고정되어 있지 않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아무생각없이 '내가 간다'라고 말한다. 위빠사나 수행은 이런 생각을 부수어 버린다.

위빠사나 수행을 하면 오로지 의도와 움직임이라는 정신-물질 현상만 있게 됨을 알게 된다. 그래서 "수행자는 '내가 간다, 그가 간다'라는 말은 단지 부르는 명칭일 뿐이다. 갈 수 있는 '나', '그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없다. 가려고 하는 마음 과 움직임들을 기본으로 하는 물질 무더기, 모임만 존재한다."(451쪽)라고 아는 것이다.

나라고 하는 것은 명칭에 지나지 않는다.  나라는 실체가 있는 것은 아니다. 나는 언어적으로만 존재하는 것이다. 이처럼 개념적으로만 존재하는 것은 많다. 남자, 여자, 중생, 자아, 영혼 등과 같은 개념이다.

행위에 대해서 관찰하면 정신과 물질의 현상만 있게 된다. 가는 것을 예로 든다면 "가려고 하는 마음과 움직임들을 기본으로 하는 물질 무더기, 모임만 존재한다."(451쪽)라고 아는 것이다.

어떤 것도 가만 있지 않는다. 이는 무엇 말하는가? 항상하지 않은 성품만 존재함을 말한다. 그래서 "각각의 순간 정도만 부분 부분, 마디마디, 조각 조각 생겨나서는 사라져 버린다."(458쪽)라고 했다. 이는 다름 아닌 무상이다.

무상을 알면 무아를 알 수 있다. 어느 것도 항상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자아가 있을 수 없다. 자아는 명칭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자아가 없기 때문에 무아라고 말할 수 있다. 이는 연기법적으로 설명될 수 있다.

연기법은 조건발생하는 것을 말한다. 조건발생은 사건발생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연기법은 사건과 사건의 발생이 된다. 그래서 "마치 강물의 흐름처럼 마음의 연속은 끊임없이 이어져 생겨난다."(458쪽)라고 했다.

마음은 끊임없이 생겨나고 마음이 소멸한다. 이에 대하여 "뜨겁게 달구어진 냄비 위에 던져진 참깨처럼 따 닥파닥 소리를 내며 빠르게 부서지는 것과 같다."(458쪽)라고 했다. 이는 마음의 속성을 말한다. 끊임없이 조건발생하는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닌 무상을 말한다. 무상하기 때문에 무아가 된다.

부처님은 무상과 무아를 설명하는데 있어서 소리를 예로 들었다. 그래서 “단지 손가락 튕기는 순간만이라도 무상에 대한 지각을 닦는다면, 그것이 더욱 커다란 과보를 가져올 것입니다.” (A9.20)라고 했다.

무상을 지각하게 하는데 있어서 소리보다 좋은 예는 없는 것 같다. 왜 그런가? 시각을 예로 들지 않은 것에서 알 수 있다. 시각은 우리를 속이기 때문이다. 시각도 청각처럼 순간적으로 생멸한다. 눈을 깜박이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눈을 깜박임 없이 계속 뜨고 있을 수 없다. 설령 깜박인다고 해도 대상은 계속 그 자리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본래 없는 것에서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것임에도 계속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눈은 사람을 속이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시각에 속고 있다. 지금 보고 있는 것이 영원할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저 바위산처럼 '자아와 세상은 영원하다'라고 보는 영원주의 개념이 생겨났다. 그러나 청각으로 설명하면 얘기가 달라진다.

손가락을 튕기면 소리가 난다. 그러나 0.5초가량 머물다 사라진다. 소리는 본래 없던 것에서 생겨난 것이다. 조건발생해서 생겨난 것이다. 소리는 조건이 다 했을 때 즉시 사라진다. 찰나생찰나멸이다. 그래서 무상을 설명하는데 있어서 청각을 예로 드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손가락튕기기는 무상을 설명하기에 좋다. 그런데 더 좋은 예는 참깨 볶는 소리이다. 한번으로 그치지 않고 계속해서 소리가 나기 때문이다. 그것도 한개 한개가 내는 소리이다. 마음이 계속 생성하고 소멸하는 것과 같다.

눈은 사람을 속인다. 보는 것이 생멸하고 있음에도 항상하는 것처럼 보여서 사람을 속인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참깨 볶는 소리는 속이지 않는다. 생멸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소리는 생겨났다가 곧바로 사라진다. 본래 없는 것에서 조건발생했다가 즉시 사라지는 것이다. 다시 없는 상태로 되돌아 간다. 이런 이유로 무상을 보기 쉽다. 무상을 보면 무아도 볼 수 있다. 무상과 무아를 설명하는데 있어서 소리보다 좋은 예는 없을 것이다.

머리맡에 있는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을 읽고 있다. 진도는 극히 부진하다. 그럼에도 읽을 때마다 감동의 도가니이다. 어느 것 하나 버릴 것이 없다. 한구절 한구절이 새롭다. 틀림없는 사실을 말하는 것 같다. 경전과 주석에 있는 것을 어떻게 이렇게 자세하게 설명할 수 있을까?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을 읽는 것은 큰 즐거움이다. 구구절절 옳은 말이다. 어느 것 하나 놓치고 싶지 않다. 이런 책을 접한 것은 행운이다.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을 저술한 마하시사야도에게 감사 드린다. 그리고 미얀마어로 된 것을 우리말로 직접 번역한 일창스님에게도 감사하게 생각한다.

2023-05-18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