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마음이 근심걱정으로 가득하다면

담마다사 이병욱 2023. 5. 24. 06:44

마음이 근심걱정으로 가득하다면

 


명학공원에서 고뇌하는 노인을 봤다. 산책 삼아, 운동 삼아 명학공원을 도는데 벤치에 앉아 있는 사람을 보았다.

두 번째 돌 때도 그 자세이고, 세 번째 돌 때 그 자세였다. 지팡이를 머리에 대고 고뇌에 찬 모습이다. 머리가 허옅게 센 팔십대의 모습이다.

 


어디가 아픈 것 같다. 홀로 된 독거노인일까? 신음 하듯이 괴로운 표정을 짓는다. 눈을 감고 오래도록 그 자세를 유지하고 있다. 신록의 계절에, 생명의 계절에, 화창한 봄날에 괴로워 하는 사람을 보았다.

누구에겐가는 행복일 때 어떤 이에게는 괴로울 때가 있다. 몸에 병이 있거나 해결되지 않는 문제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이다.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고통이 지배 했을 때 세상 사는 맛이 없을 것이다. 이럴 때 누가 보호해 줄까? 어디에 의지해야 할까?

지금 괴로운 자는 이 괴로움이 빨리 끝나기를 원한다. 괴로움의 끝은 행복일 것이다. 지금 행복한 자는 이 행복이 오래 지속되기를 바랄 것이다. 그러나 누구도 이 괴로움을 끝내주지 못한다. 누구도 나의 행복을 보장해 주지 않는다. 어떻게 해야 괴로운 세상에서 보호 될 수 있을까?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힘들 때 경전을 펼쳐 들면 효과적이다. 행선을 해 보고 좌선을 해 보아도 마음의 평정에 이를 수 없을 때 경전을 펼치면 마음이 차분해진다. 방금 전에도 그랬다.

여기 불안한 마음이 있다. 달마대사는 안심법문을 했다. 불안한 마음을 가져 오라고 했다. 불안한 마음은 아무리 찾으려 해도 찾을 수 없었다. 불안한 마음을 찾으려 했을 때, 불안한 마음은 이미 이전 마음이 되어 버렸기 때문에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지금 마음이 불안하다면 그 마음을 돌려 놓아야 한다. 어떻게 돌려 놓는가? 다른 마음을 내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불안한 마음은 이전 마음이 되어 버린다. 안심이다. 편안한 마음이 되었다.

안심에 경전읽기만한 것이 없다. 니까야 아무 곳이나 펼치면 편안한 마음이 된다. 근심걱정은 멀리 달아나 버린다. 방금전에도 그랬다.

열 가지 수호법이 있다  자신을 지키는 열 가지 법을 말한다. 나열하면 1)학습계율을 수용하여 배우는 것, 2)가르침을 자주 배우고 기억하는 것, 3)선한 동료를 갖는 것, 4)가르침을 공경하는 것, 5)해야 할 일에 전념하는 것, 6)보다 높은 가르침과 보다 높은 계율에 기뻐하는 것, 7)사대필수품에 만족하는 것, 8)열심히 정진하는 것, 9)새김을 확립하는 것, 10)소멸로 이끄는 지혜를 갖추는 것이다. 이와 같은 열 가지는 디가니까야 '합송의 경'(D33)에 실려 있다.

열 가지 수호법에서 현실적으로 다가 오는 것은 두 번째인 "가르침을 자주 배우고 기억하는 것"이다. 마음이 불안할 때, 마음이 근심과 걱정으로 가득할 때 마음의 갈피를 잡을 수 없는데 그 때 경전을 펼쳐 들면 반전된다. 불안한 마음은 이전 마음이 되어 버린다. 이것이 경전읽기의 힘이다.

수행도 마음이 편해야 한다. 내가 지금 지옥같은 마음이라면 수행 할 마음이 일어날 수 있을까? 내가 지금 몸에 상처가 나서 쓰리고 아프다면 수행할 마음이 일어날까? 그래서 지옥과 같은 악처에 나면 수행할 수 없다고 했나보다.

마음이 괴로울 때 의지처가 있어야 한다. 신의 이름을 부르거나 주문을 외워도 될 것이다. 그러나 한계가 있다. 괴로움의 원인을 모르기 때문에 마음의 평정을 이룰 수 없다. 이럴 때는 니까야를 열어 보아야 한다. 니까야를 보는 순간 안심, 편안한 마음이 된다. 한두번 해 본 것이 아니다.

아까 불안한 마음은 이전 마음이 되었다. 지금 마음은 안심이다. 어떻게 마음의 평정을 찾은 것일까? 그것은 업의 가르침에 따른 것이다. 행위가 자신의 주인이고 자신은 행위의 상속자라고 받아들이면 마음이 평안하다.

어느 누구도 타인의 업에 관여할 수 없다. 누구도 나의 업에 개입할 수 없다. 자신에게 닥친 문제는 자신이 해결해야 한다. 시간 지나면 해결되는 것도 있고, 시간 지나도 해결되지 않는 것도 있다.

근심하고 걱정한다고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다.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려면 업의 가르침을 알아야 한다. 지금 겪고 있는 괴로움이나 불행에 대해서 나의 업이라고 알아야 한다.

괴로움은 남이 만든 것도 아니고 내가 만든 것도 아니다. 괴로움은 조건발생한 것이다. 접촉이 있어서 괴로움이 발생했다. 접촉이 없으면 괴로움도 발생하지 않는다. 접촉이 되어서 괴로움이 발생하면, 괴로움을 괴로움으로 알면 그뿐이다.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아는 것이다.

괴로울 때 "아, 괴롭다!"라고 말하면 더 괴롭다. 이럴 때는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알아야 한다. 알면 사라진다고 했다.

캄캄할 때는 알 수 없지만 환할 때는 모든 것이 드러난다. 몰라서 괴로운 것이다. 알고 나면 아무것도 아니다. 모르기 때문에 답답한 것이다.

경전을 보면 환해지는 것 같다. 마음에 불이 켜지는 것 같다. 구구절절 옳은 말이다. 어느 것 하나 버릴 것이 없다. 특히 괴로운 자에게 니까야는 구원서와 같다. 틀림없는 내 경우를 말하는 것 같다.

마음이 우울할 때 경전을 읽어야 한다. 경전이 있어서 안심이다. 언제 어느 때나 불안한 마음, 근심걱정이 생겼을 때 의지할 것이 있다는 것은 안심이다. 마치 든든한 뒷배경을 가진 것 같다. "폭류에 휩쓸렸으나 부처님께 안식처를 얻었네.”(M86)라는 앙굴리말라 게송이 연상되는 새벽이다.

2023-05-24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