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무심할 것인가 사띠할 것인가?

담마다사 이병욱 2023. 5. 29. 08:00

무심할 것인가 사띠할 것인가?


나는 나를 얼마나 알고 있을까? 여기서 나는 인습적인 나, 관습적인 나, 세상에서 통용되는 나를 말한다. 그렇다고 하여 "나는 누구인가?"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정신과 물질로서 나를 말한다.

부처님은 분별론자이다. 선종에서 가장 싫어하는 그 분별과는 다른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부처님은 분석론자이다.

부처님은 왜 분석론자인가? 이는 부처님이 경전에서 그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부처님은 우리 몸을 정신과 물질로 분석해서 관찰했다는 사실이다. 오온, 십이처, 십팔계로 분석한 것이다. 그 결과 나는 없다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내가 없다는 것을 알려면 나를 잘 관찰해야 한다. 어떻게 관찰하는가? 마하시사야도의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에 이런 일화가 있다.


(일화)
어떤 장로스님이 많은 제자들과 말을 하다가 손을 갑자기 굽혔다 가 원래대로 천천히 펴신 후에 다시 천천히 구부리셨다고 한다. 그때 제 자들이 "스님, 손을 왜 원래대로 펴셨다가 다시 천천히 굽히십니까?"라 고 물었다. "여보게들, 나는 수행을 처음 시작한 이래로 수행주제를 놓치고 손을 굽힌 적이 없었네. (그런데) 지금 그대들과 이야기하면서 수행주제를 놓쳐 버리고 손을 굽혀 버렸네. 그래서 원래대로 편 후에 다시 굽힌 것일세"라고 말하였다. 그러자 제자들이 "훌륭하십니다. 스님, 비구라면 응당 이런 성품이 있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위빳사나 수행방법론 1, 464-465)


마하시사야도와 제자들과 대화에 대한 것이다. 마하시사야도도 들은 것을 말한 것이다. 그렇다면 사야도는 왜 이런 일화를 소개한 것일까? 그것은 수행주제를 놓치지 말라는 것이다. 한국 선종식으로하면 화두를 놓치지 말라는 말과 같다.

위빠사나 수행에서 수행주제는 사띠에 대한 것이다. 어떤 경우에서라도 사띠를 놓쳐서는 안된다. 일화에서와 같이 무심코 팔을 굽혔을 때 수행주제를 놓친 것이다. 사띠를 놓친 것이다. 그래서 다시 팔을 굽혔다 편 것이다. 물론 천천히 알아차림 하면 굽혔다 편 것이다.

종종 사고가 난다. 목욕탕에서 미끄러지면 골절상 될 수 있다. 발을 헛디디면 역시 골절상 될 수 있다. 세상은 온통 위험으로 가득한 곳이다.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위험이 치고 들어 올 수 있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할까?

위빠사나 수행지침서에 이런 말이 있다. 수행자는 허리아픈 환자처럼 행동하라고 했다. 일어날 때도 천천히 일어나고 앉을 때도 천천히 앉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매사에 사띠하며 행, , , 와 하라는 것이다.

어느 수행승이 무심코 하늘을 보았다. 하늘이 맑고 깨끗했다. 수행자는 무심코 "하늘 참 좋네."라고 말했다. 수행승은 수행 주제를 놓쳤다. 그것도 두 번이나 놓쳤다. 무심코 하늘을 쳐다 본 것과 무심코 말한 것이다. 사띠를 놓친 것이다.

사띠를 놓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그것은 나라는 개념에 지배 받는다. 팔을 굽혀도 내가 굽힌다고 생각한다. 길을 걸어도 내가 걷는다고 생각한다. 하늘을 쳐다 봐도 내가 쳐다 본다고 생각한다. 이처럼 내가 개입하면 모든 것을 내 것으로 본다. 당연히 이 몸과 마음도 내것으로 보는 것이다.

마하시사야도는 장로의 일화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했다.


이 일화에서와 마찬가지로 굽힐 때마다, 펄 때마다 수행주제를 놓치지 말고 '굽힌다. 굽힌다', '핀다. 핀다'하며 새기면서 굽히리는 마음, 펴려는 마음과 함께 굽히고 펴는 동작들을 통해서 한 동작씩 움직여 나가는 물질들을 아는 것을 '영역 바른 앎'이라고 한다. (영역에 대한) 바른 앎이 예리해지면 '몸 안에 굽히도록, 피도록 해 주는 나라고 하는 것 은 없다. 굽히려는 마음, 펴려는 마음 때문에 한 동작씩 생겨나는 움직임들만 존재한다. 굽히려는 마음. 펴려는 마음이 굽히는 동작, 펴는 동작에 이르지 못하고 사라져 버린다. 단계 단계 굽히는 동작, 펴는 동작도 한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 이르지 못하고 사라져 버린다. 항상하지 않은 것이다. 괴로움인 법이다= 좋지 않은 법일 뿐이다.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아닌, 성품법일 뿐이다'라고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통찰지가 생겨 난다. 이 지혜를 미혹없음 바른 앎이라고 한다.” (위빳사나 수행방법론 1, 465)


수행주제를 놓치지 않고 관찰 했을 때 나라는 개념은 사라진다. 거기에는 오로지 정신과 물질의 현상만 있게 된다. 굽히려는 의도와 굽히는 행위만이 있게 되는 것이다.

정신과 물질로 분석해서 관찰하면 나라는 개념이 사라진다. 그 결과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 탐욕, 분노, 근심, 걱정은 내것이 아니라 조건발생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일어날만 해서 일어난 것이다. 그럼에도 집착한다면 괴로움이 된다. 탐욕, 분노, 근심, 걱정은 내것이 아니라 조건에 따라 생멸하는 정신적 현상으로 보아야 한다.

정신물질적 현상은 생멸을 특징으로 한다. 그것도 매우 빠르게 일어났다가 사라진다. 그럼에도 붙잡고 있다면 이미 사라져 없어져 버린 것을 붙잡고 있는 꼴이 된다. 우리 속담에 있는 것처럼 죽은 자식 불알 만지기와 같다.

수행주제를 놓치지 않아야 한다. 사띠를 놓치지 않아야 한다. 이는 다음과 같은 말로도 알 수 있다.


사마타 수행을 하는 이가 어떤 곳을 보려고 할 때는 수행주제를 놓치고 보면 안 된다. 마치 어린 송아지를 데리고 있는 어미 소가 어린 송아지를 보면서 여물을 먹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수행주제를 중시 하면서, 수행주제에 마음기울이면서 보아야 한다.” (위빳사나 수행방법론 1, 463)


사마타수행 주제를 가진 자는 수행주제를 놓쳐서는 안된다. 이에 대하여 어미소와 송아지 비유를 들었다.

어미소가 풀을 뜯고 있지만 마음은 항상 송아지에 가 있다. 마찬가지로 위빠사나 수행자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 이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무더기(5)-요소(18)-감각장소(12)들을 관찰 하는 위빳사나라는 수행주제를 가진 이들은 자신의 수행주제에 따라서만 앞을 보거나 뒤를 돌아보는 것을 행해야 한다.”(DA.i.173, 463)라고 했다.

위빠사나 수행자는 오온, 십이처, 십팔계가 관찰대상이 된다. 이렇게 분별해서 보아야 제대로 볼 수 있다. 분별해서, 분석해서 보지 않으면 나라는 개념이 개입된다. 그 결과 집착이 되어서 괴로움을 겪게 된다.

그 사람에 대해서 불쾌하게 생각한다. 자만과 교만으로 똘똘 뭉쳐진 그 사람을 생각하면 불편하고 불쾌해진다. 그러나 이미 지난 일이다.

불쾌했던 느낌을 지금 여기에서 끌어 온다면 나만 손해이다. 과거는 지나 간 걱이다. 이미 지난 일을 후회하거나 아쉬워하는 것은 현재 삶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빨리 알아차려야 한다. 이 몸과 마음은 내것이 아니라 정신물질의 현상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오늘 나는 사띠를 잘 할 수 있을까? 장로가 그랬던 것처럼, 무심코 굽혔다 폈던 것을 팔을 다시 굽혔다 펴서 알아차림 할 수 있을까? 무심할 것인가 사띠할 것인가?


2023-05-29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