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새벽 잠에서 깨었을 때

담마다사 이병욱 2023. 6. 10. 12:45

새벽 잠에서 깨었을 때


새벽이다. 여섯 시 이전은 새벽으로 본다. 당연히 여섯 시 이후는 아침이다. 새벽에 한번은 깬다.

잠에서 깨었을 때 무엇을 해야 할까? 잠에서 깨면 잠들지 말라는 말이 있다. 한번 잠에서 깨면 일어나 해야 할 일을 하라는 말과 같다.

잠에서 깨어 책을 볼 수도 있고 글을 쓸 수도 있다. 운동을 할 수도 있고 행선이나 좌선같은 수행을 할 수도 있다. 또한 게송이나 경을 외울 수도 있고 암송할 수도 있다. 한마디로 아까운 시간을 잠으로 보내지 말라는 말과 같다.

요즘 잠에서 깨면 더 자려고 한다. 낮에 피곤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부담스러운 상황은 아니다. 일인사업자는 홀로 있기 때문에 눈치 볼 일이 없다. 그러나 직장인들은 다를 것이다. 잠을 못 자서 피곤해도 피로한 모습을 보이지 않아야 한다. 약한 모습을 보여 주기 싫은 것이다. 그래서 잠을 잘 자야 한다.

생각이 많으면 잠을 자기 힘들다. 잠에서 깨면 생각이 밀려 온다. 이런 생각 저런 생각하다 보면 시간이 잘 간다. 생각이 꼬리를 물었을 때 잠은 싹 달아난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할까? 가장 좋은 것은 호흡을 보는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닌 알아차림이다. 사띠하는 것이다.

사띠는 일거수일투족이 대상이 된다. 팔을 뻗는 것도 사띠의 대상이고 다리를 움직이는 것도 사띠의 대상이다. 움직임이 없을 때는 호흡이 대상이 된다. 또한 사띠의 대상은 생각도 된다. 망념이 일어 났을 때 망념임을 아는 것도 사띠하는 것이다. 이렇게 사띠하며 다시 잠을 청하면 다시 자게 될지 모른다.

잠에서 깼을 때 다시 자지 말아야 한다. 인생을 잠으로 보낼 수 없다. 짧지만 깊은 잠을 자면 개운하다. 최상의 컨디션이 되었을 때 안온함을 느낀다. 이럴 때 저절로 "모든 사람들이 행복했으면!"이라는 마음이 나온다 .

부처님은 자애의 마음을 내라고 했다. 자애의 마음은 자애경(Sn.1.8)에서 잘 나타나 있다. 핵심은 "삽베 삿따 바완뚜 수키땃타(sabbasattā bhavantu sukhitattā)(Stn.147)라는 말이다. 이는 "일체중생이 행복하기를!"이라는 뜻이다.

 


자애의 마음은 내가 편했을 때 나온다. 내가 편하지 않으면 자애심을 내기 힘들다. 내가 고통스러울 때, 내가 슬플 때도 자애의 마음을 내기 힘들다. 내가 힘들면 만사가 귀찮아 진다. 내가 불행에 처해 있을 때 타인에 대한 자애의 마음이 일어날 수 있을까?

새벽에 잠에서 깨면 몸과 마음이 편안하다. 이럴 때 사람들은 멀리 떠나 있는 가족 생각이 날 것이다. 그래서 "우리 부모가 행복하기를!"이라고 할지 모른다. 또한 "우리 아들이 행복하기를!"이라거나, "우리 딸이 행복하기를!"이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해외여행 가면 대개 사성급 호텔에 머문다. 또한 음식도 왕의 식탁이 부럽지 않을 정도이다. 어떤 이는 진수성찬을 접했을 때 가족생각이 난다고 말한다. 자신이 누리고 있는 행복을 가족과 함께 하고 싶은 것이다. 이것이 자애의 마음이다.

자애심은 내가 편했을 때 나온다. 새벽에 일어나 몸과 마음이 안락했을 때 자연스럽게 타지에 있는 가족 생각이 난다. 가족 중에 병고가 있는 사람에게는 "하루빨리 고통에서 벗어나기를!"이라고 연민의 마음을 낼 것이다.

자애심은 내가 편안하고 안온하고 행복해야 낼 수 있다. 내가 불편하고 괴롭고 불행에 처해 있다면 자애의 마음이 나오기 힘들다. 그래서 자애의 마음은 가장 먼저 자신이 대상이 되어야 한다. 내가 행복해야 타인도 행복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내가 괴롭지 않아야 타인도 괴롭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다.

자애는 아름다운 마음이다. 부처님은 자애에 대하여 무량하다고 했다. 그래서 한량없는 자애의 마음을 내라고 했다. 우주 끝까지 내는 것이다. 우주 끝까지 자애의 마음으로 가득채웠을 때 자애로 인한 해탈로 이룰 것이라고 했다. 이른바 '자심해탈'을 말한다.

자애로 해탈에 이를 수 있다는 가르침은 놀라운 것이다. 누구든지 자애의 마음을 한량 없이 내는 자가 있다면 그는 해탈자, 깨달은 사람이다. 그런데 부처님은 자애만 말하지 않았다. 연민도 말했고, 기쁨도 말했고, 평온도 말했다.

부처님은 자, , , , 사무량심을 말했다. 여기서 자애는 사무량심의 대표주자이다. 그래서 부처님이 자애의 마음을 내라고 했을 때는 연민, 기쁨, 평온의 마음도 함께 내라는 말과 같다.

자애는 "일체중생이 행복하기를!"이라고 바라는 마음이다. 자신부터 시작해서 가장 가까운 사람, 먼 사람, 우주 일체중생에 이르기까지 행복하고 안락하고 무탈하기를 바라는 아름다운 마음이다. 이는 다름아닌 우정이다.

자애의 마음이 실패할 때가 있다. 자애가 애정으로 변질 되었을 때 그렇다. 그래서 자애심은 연인에게 내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당연히 아내나 남편에게 자애의 마음을 내서는 안된다.

자애는 남녀간의 사랑이나 신의 절대적인 사랑이 아니다. 자애는 친구에게 볼 수 있는 우정이다. 모든 존재에 대하여 친구로 보았을 때 우정의 마음이 나오는 데 바로 그 우정이 자애심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자애는 살아 있는 사람을 대상으로 한다. 죽은 자는 자애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돌아 가신 부모님은 자애의 대상이 아니다어떤 존재이든 살아 있는 것이 자애의 대상이다. 동물이나 심지어 초목도 자애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자애의 마음이 있으면 자연스럽게 연민의 마음도 있게 된다. 또한 기쁨의 마음과 평정의 마음도 있게 된다. 자애, 연민, 기쁨, 평정은 항상 함께하는 마음이다. 그래서 자애가 있는 곳에 연민이 있고, 자애가 있는 곳에 기쁨이 있고, 자애가 있는 곳에 평정이 있다. 우정이 있는 곳에 자애, 연민, 기쁨, 평정이 있다.

친구를 보면 반갑다. 친구를 보면 기쁘다. 친구와 함께 있으면 즐겁다. 자애의 마음은 친구의 마음이다. 자애의 마음은 우정이다. 우정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음이다.

친구가 자신과 같이 늘 행복하기를 바란다. 친구가 병고에 시달린다면 하루빨리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바란다. 친구가 성공했을 때는 진심으로 기뻐해준다. 친구가 인생의 파란곡절을 겪고 있다면 업이 자신의 주인임을 반조하며 마음의 평정을 유지한다. 불교는 우정의 종교임에 틀림없다.

오늘 새벽 잠에서 깼을 때 더 자기를 포기했다. 그 대신 자애의 마음을 냈다. 멀리 타지에 가 있는 아들에게도 자애의 마음을 냈다. 병고에 시달리고 있는 페이스북 친구에게도 "어서 괴로움에서 벗어나길!"이라며 연민의 마음을 냈다. 성공을 이룬 자에게는 당연히 기쁨의 마음을 내야 할 것이다.

자애의 마음을 내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이것이 평정의 마음일 것이다. 불교는 사무량심의 종교이다. 불교는 우정의 종교이다.

불교는 사랑의 종교이기 보다는 우정의 종교이다. 일체중생을 우호적으로 보는 것이다. 일체중생을 친구로 보는 것이다. 일체중생을 자애, 연민, 기쁨, 평정으로 대했을 때 적이 있을 수 없다. 나는 정말 자, , , 사를 잘 실천하고 있는가?

새벽 잠에서 깨었을 때 자애의 마음이 일어난다. 잘 잔 것 같다.


2023-06-10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