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없었던 것이 생겨난 것에 대하여

담마다사 이병욱 2023. 4. 1. 11:27

없었던 것이 생겨난 것에 대하여
 
 
볼 때는 볼 때뿐이다. 들을 때는 들을 때뿐이다. 이 간단한 진리를 잘 이해하지 못했다. 왜 볼 때는 볼 때뿐이고, 들을 때는 들을 때뿐이라고 했을까? 이는 위빠사나 수행관점에서 고찰해 보아야 한다.
 
그 동안 의문하던 것이 풀렸다. 그것은 “왜 볼 때는 볼 때뿐이고, 들을 때는 들을 때뿐이라고 했을까?”에 대한 것이다. 마하시사야도의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을 보고서 비로서 그 의미를 알게 되었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오염원
 
욕망이라는 이름의 오염원이 있다. 하루 한시라도 욕망에서 자유롭지 않다.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 모른다. 왜 그런가? 우리는 욕계중생이기 때문이다. 욕망으로 이루어진 존재이기 때문에 욕망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욕망의 세계에 살고 있다.
 
성냄이라는 오염원도 있다. 항상 탐욕과 함께 쓰인다. 탐욕이 있는 곳에 성냄이 있고, 성냄이 있는 곳에 욕망이 있다. 왜 그런가? 마치 시소를 타는 듯하여 길항적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느낌과 관련이 있다.
 
느낌이란 무엇인가? 수만가지 느낌이 있다. 세 가지, 다섯 가지, 서른 여섯 가지, 백팔 가지 느낌이 있다. 경전에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기본적인 느낌은 세 가지이다.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이다.
 
사람들은 세 가지 느낌에 지배 받는다. 즐거운 느낌이면 거머쥐려 하고, 괴로운 느낌이면 밀쳐 내려 한다. 전자는 탐욕이고, 후자는 성냄이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중립적인 느낌은 무덤덤한 느낌이다.
 
중립적은 느낌은 조건에 따라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 이런 것도 평온이라고 하지만 무지의 평온이 된다. 대게 어리석음이라고 한다.
 
나이를 아무리 많이 먹어도
 
중생에게는 특징이 있다. 그것은 탐, 진, 치이다. 중생은 일생동안 이 세 가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래서 중생이라고 한다. 나이를 아무리 많이 먹어도 탐욕으로 살고, 성냄으로 살고, 어리석음으로 산다면 어린아이와 같다. 그래서 이런 가르침이 있다.
 
 
바라문이여, 태어난 이래 여든 살, 아흔 살, 백 살의 노인이라도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즐기고, 감각적 쾌락의 욕망속에서 살고,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서 비롯된 고뇌에 불타고,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서 비롯된 사념에 삼켜지고,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추구한다면, 그를 어리석은 장로라고 합니다.” (A2.37)
 

 

 
법구경에 따르면 머리가 희다고 해서 모두 장로가 아니라고 했다. 생물학적 장로를 부정한 말이다. 정신적으로 장로가 되어야 한다. 나이가 어려도 장로가 될 수 있다. 그래서 "바라문이여, 검은 머리를 하고 꽃다운 청춘이고 초년의 젊음을 지니고 나이 어린 청년이라도,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즐기지 않고, 감각적 쾌락의 욕망속에서 살지 않고,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서 비롯된 고뇌에 불타지 않고,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서 비롯된 사념에 삼켜지지 않고,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추구하지 않는다면, 그를 슬기로운 장로라고 부릅니다.” (A2.37)라고 했다.
 
머리가 갈수록 백발이 되어 간다. 언젠가부터 흰머리가 나기 시작하더니 점차 확대 되었다. 반백이 되니 나이 들어 보인다. 염색이라도 하면 오년 내지 십년은 젊어 보일 것이다. 백발이 다 된 나는 어른일까?
 
탐욕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어른이 아니다. 왜 그런가? 어린이나 어른이나 욕망으로 산다면 똑 같은 중생이기 때문이다. 탐욕에서 벗어나야 어른이다. 다른 말로 장로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감각적 욕망을 추구하지 않는 삶을 산다면 나이가 칠세일지라도 어른이라고 했다.
 
누구나 나이를 먹으면 노인이 된다. 노인이 되었다고 해서 다 어른이 아니다. 어른이 되려면 어른다운 행위를 해야 한다. 그것은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즐기지 않고, 감각적 쾌락의 욕망속에서 살지 않고,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서 비롯된 고뇌에 불타지 않고,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서 비롯된 사념에 삼켜지지 않고,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추구하지 않는 삶”을 말한다. 어떻게 해야 이런 삶을 살 수 있을까?
 
어른이 되는 가르침
 
부처님 가르침은 어른이 되는 가르침이기도 하다. 어른이 되려면 수행을 해야 할 것이다. 위빠사나 수행을 말한다. 그런데 초기경전을 보면 위빠사나 수행방법에 대한 가르침이 도처에 널려 있다는 것이다. 그 중에 하나가 아마도 볼 때는 볼 때뿐이고, 들을 때는 들을 때뿐이라는 가르침일 것이다.
 
 
Ettha ca te, mālukyaputta, diṭṭhasutamutaviññātabbesu dhammesu diṭṭhe diṭṭhamatta bhavissati, sute sutamatta bhavissati, mute mutamatta bhavissati, viññāte viññātamatta bhavissati. Yato kho te, mālukyaputta, diṭṭhasutamutaviññātabbesu dhammesu diṭṭhe diṭṭhamatta bhavissati, sute sutamatta bhavissati, mute mutamatta bhavissati, viññāte viññātamatta bhavissati
 
자, 말룽끼야뿟따여, 그대에게 보이고, 들리고, 감각되고 인식된 것에 관하여 말한다면, 보인 것 안에는 보인 것만이 있을 뿐이며, 들린 것 안에는 들린 것만 것 있을 뿐이며, 감각된 것 안에는 감각된 것만이 있을 뿐이며, 인식된 것 안에는 인식된 것만이 있을 뿐이다.”(S35.95)
 
 
이 가르침은 우다나 ‘바히야의 경’과 병행한다. 그런데 이 가르침을 접하면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잘 모른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고도로 의미가 함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석을 보지 않으면 의미가 잘 파악되지 않는다.
 
경에서 “보인 것 안에는 보인 것만이 있을 뿐(diṭṭhe diṭṭhamatta bhavissati)”이라고 했다. 이에 대한 주석을 보면 “시각의식에 보여진 형상 속에는 오로지 보여진 것만이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시각의식은 오로지 형상 속에서 형상만을 보고 영원한 어떤 본질을 보는 것이 아니다.”(Srp.II.383)라고 설명해 놓았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시각대상에 대하여 집착하지 말라는 말과 같다. 시각대상과 관련하여 과거의 기억을 떠올려 집착하지 말라는 말과 같다.
 
혼란된 새김으로 형상을 보았을 때
 
경에서 언급된 구절은 고도로 압축되어 있다. 특히 “뿐이며”라는 말이 그렇다. 이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한계를 짓는 것이라고 했다. 단지 보여진 것뿐이라는 말이다. 보여진 것뿐이기 때문에 집착하지 말라는 말과 같다. 이는 말룽끼야뿟따의 경에 실려 있는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알 수 있다.
 
 
Rūpa disvā sati muṭṭhā, piya nimitta manasi karoto;
Sārattacitto vedeti, tañca ajjhosa tiṭṭhati.
Tassa vaḍḍhanti vedanā, anekā rūpasambhavā;
Abhijjhā ca vihesā ca, cittamassūpahaññati;
Eva ācinato dukkha, ārā nibbānamuccati
 
혼란된 새김으로 형상을 보면
매혹적인 인상에 마음이 쏠려
오염된 마음으로 그것을 경험하고
마침내 그것에 탐착하고 만다.
그래서 형상에서 생겨난 갖가지
느낌들이 안에서 자라나
마음이 혼란하게 되어
탐욕과 분노도 더불어 자라난다.
이와 같이 괴로움을 키운다면
그에게 열반은 멀다고 하리.”(S35.95)
 
 
혼란된 새김으로 형상을 보았을 때 괴로움이 생긴다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이는 ‘사띠를 놓치는 것(sati muṭṭhā)’을 말한다. 사띠하는 것을 ‘잊어 버리는 것(muṭṭhā: forgotten; passed into oblivion)'을 말한다.
 
마음은 대상이 있어야 일어난다. 대상 없이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런데 대상이라 하여 모두 다 마음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강한 대상에서 마음이 일어난다. 경에서는 매혹적인 인상이라고 했다. 대상이 강렬해서 마음이 거기에 가 있는 것이다.
 
늘 알아차리라고 하는데
 
대상과 접했을 때 사띠하지 않으면 느낌이 발생한다.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에 따르면 대상과 접하는 순간에서 느낌까지 “눈, 감성물질, 눈 의식, 접촉, 느낌”이렇게 다섯 개의 법이 일어난다고 했다. 이 모든 과정을 단계별로 알아차리기 힘든다. 너무 빨리 일어나기 때문이다. 거의 동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알아 차릴 수 있다. 그것은 가장 마지막 단계 느낌 하나만 보아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위빠사나 수행센터에서 늘 하는 말이 있다. 그것은 알아차리라는 말이다. 이 말은 사띠하라는 말과 같다. 몸에서, 느낌에서, 마음에서, 법에서 일어난 현상을 알아차리라는 말이다. 최종적으로는 느낌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느낌을 알아차리지 못하면 연기가 회전되기 때문이다.
 
어떻게 해야 느낌을 알아차릴 수 있을까?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에 따르면, 볼 때는 “본다, 본다”라고 명칭을 붙이고, 들릴 때는 “들린다, 들린다”라고 명칭 붙이라고 했다. 물론 수행 초보단계에서 명칭 붙이는 것이다. 이렇게 명칭 붙이면 대상에 끄달려 가지 않는다.
 
명칭 붙이는 것은 독을 독으로써 제독하는 것과 같다. 명칭은 빤냣띠(개념)에 대한 것으로 붙여서는 안될 것이다. 수행자라면 있는 그대로의 실재를 관찰해야 한다. 그럼에도 명칭를 붙이는 것은 명칭을 붙여서 언어적 개념을 제거하고 실재하는 성품을 보기 위한 것이다. 마치 간화선에서 작은 의심으로 큰 의심을 제거하는 것과 같다.
 
왜 동사형 명칭을 붙이는가?
 
명칭을 붙일 때는 명사형이 있고 동사형이 있다. 대부분 명사형을 붙인다. 그래서 볼 때는 “봄, 봄”이라고 하고, 들릴 때는 “들림, 들림”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미얀마에서는 동사형으로 명칭붙인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볼 때는 “본다, 본다”라고 명칭 붙이고, 들릴 때는 “들린다, 들린다”라고 명칭 붙이는 것이다.
 
미얀마에서는 왜 동사형으로 명칭을 붙이는 것일까? 이에 대하여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에서는 다섯 가지 법, 즉 “눈, 감성물질, 눈 의식, 접촉, 느낌”을 동시에 새기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는 각 단계를 단계별로 새기는 것이 가능하지 않음을 말한다. 그래서 “한번씩 볼 때마다 다섯 번씩 관찰해야 한다고 알아서는 안된다.”(위빳사나 수행방법론 1권, 378쪽)라고 했다.
 
다섯 가지 법을 왜 한번씩 단계별로 관찰해서는 안되는 것일까? 이에 대하여 “다섯 번씩 관찰하고 있으면 그렇게 관찰하고 있는 동안에도 봄 등이 많이 계속해서 생겨나기 때문이다.”(위빳사나 수행방법론 1권, 378쪽)라고 했다.
 
법이 한번씩 생겨날 때 마다 다섯 번씩 관찰하면 따라잡을 수 없을 것이다. 설령 따라 잡을 수 있다고 하더라도 “대상의 소멸을 알고, 그 아는 마음의 소멸을 바로 다음의 인식과정으로 알 수 있어야 무너짐의 지혜가 생겨난다.”라고 하는 주석서 빠띠삼비다막가(무애해도)의 가르침과도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볼 때는 볼 때뿐이라고 한다. 이는 볼 때 다섯 가지 단계, 즉 “눈, 감성물질, 눈 의식, 접촉, 느낌”을 동시에 관찰하는 것이다. 그래서 대상을 접했을 때 “본다, 본다”라고 하여 동사형으로 하는 것이다.
 
다섯 가지 단계 중에서 분명하게 드러나는 법 하나만 관찰해야 한다. 그래서 “특별히 분명한 한 가지 법만을 대표해서 어는 것에 의해 다섯 가지 법들 모두를 관찰하는 일이 성취된다.”(위빳사나 수행방법론 1권, 378-379쪽)라고 했다.
 
대상이 분명한 것만
 
대상을 볼 때 모두 다 보는 것은 아니다. 대상이 분명한 것만을 본다. 이렇게 분명한 대상에 대하여 “본다, 본다”라며 명칭붙이는 것은 어떤 이유일까? 이는 그 법으로 인하여 즐겁거나 괴로운 느낌이 발생했을 때 끄달려 가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다.
 
대상을 접했을 때 즐거운 느낌이나 괴로운 느낌,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이 생겨난다고 했다. 매혹적인 대상을 보았을 때는 즐거운 느낌이 일어날 것이다. 이때 새김(사띠)을 놓치면 어떻게 될까? 경의 게송에서와 같이 “매혹적인 인상에 마음이 쏠려 오염된 마음으로 그것을 경험하고 마침내 그것에 탐착하고 만다.”(S35.95)가 될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오염된 마음’이다.
 
오염된 마음은 처음부터 있었던 것은 아니다. 과거에 경험했었던 것이다. 사람을 예로 들 수 있다. 그 사람에 대하여 좋지 않은 감정을 가졌을 때 마음 속에 잠재 되어 있다. 그 사람 이름이나 사진을 보았을 때 싫어하는 마음이 일어날 것이다. 이는 접촉 단계에서 괴로운 느낌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싫어하는 대상을 보았을 때 과거 좋지 않았던 경험이 더해져서 분노가 일어나는 것이다.
 
볼 때는 모두 시야에 들어온다. 강한 대상이 아니면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다. 알지 못하는 대상은 지나칠 것이다. 약한 대상도 지나칠 것이다. 대상이 분명하지 않은 것은 지나친다. 한번도 가보지 않았던 마을이나 사람들은 지나친다. 약한 대상을 접했을 때 “그러한 형색과 관련해서는 탐욕, 성냄 등의 번뇌들이 결코 생겨날 수 없다.”(위빳사나 수행방법론 1권, 381쪽)라고 했다.
 
즉문즉설로 유명한 스님이 있다. 스님은 주로 가정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하여 말한다. 갈등의 대부분은 가까운 사이에서 일어난다고 했다. 나와 무관한 사람에게서 갈등은 일어나지 않는다. 강한 대상에서 괴로운 느낌이 발생한다.
 
예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것에 대해서는
 
약한대상은 지나쳐 버린다. 약한대상은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이기 때문에 중립이다. 이를 무지의 평정이라고 말한다. 언제든지 조건이 바뀌면 즐겁거나 괴로운 상태로 된다. 반면에 강한 대상에 대해서는 즐겁거나 괴로운 느낌이 발생한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부처님 가르침에 답이 있다. 부처님은 말룽끼야뿟따에게 다음과 같이 물었다.
 
 
말룽끼야뿟따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대에게는 지금까지 보지 못했고, 예전에도 결코 본 적이 없고, 지금도 보지 못하고,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도 할 수 없는, 시각에 의해 인식될 수 있는 형상들에 대한 욕망이나 탐욕이나 애착이 있는가?”(S35.95)
 
 
예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것에 대해서는 욕망이나 탐욕이 일어날 수 없다. 나와 무관한 사람을 만났을 때 무덤덤한 것과 같다. 그러나 내 돈을 떼먹고 달아난 사람의 이름이나 사진을 접했다면 분노가 일어날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지금까지 보지 못했고, 예전에도 결코 본 적이 없는 대상에 대하여 욕망이나 탐욕이나 애착이 일어날 수 있는지 물어 보는 것이다.
 
말룽끼야뿟따는 부처님의 질문에 “세존이시여,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이렇게 문답하는 것에 대하여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에서는 “마음에 분명하지 않아 생각할 수도 없고 사유할 수도 없는 형색들에 대해서는 저절로 번뇌가 사라진다는 것을 직접 알려 주고 있다.”(위빳사나 수행방법론 1권, 382쪽)라고 했다.
 
예전에 경험하지 않았던 것은 번뇌가 되지 않는다. 예전에 경험했던 것이 번뇌가 된다. 볼 때 마음에 분명하게 드러나는 대상들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사유하여 번뇌가 생겨남을 말한다. 이는 맛지마니까야 ‘꿀과자의 경’(M18)에서 망상이 일어나는 과정으로도 알 수 있다.
 
위빠사나 수행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말룽끼야뿟따의 경을 보면 위빠사나 수행을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 알려 주는 것 같다. 분명한 대상에 대하여 분명하지 않은 대상처럼 여기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분명한 대상에 끄달려 가지 않음을 말한다. 그래서 “분명하지 않은 형색들처럼 되도록, 분명한 형색들만 위빳사나로 관찰하여 번뇌를 제거해야 한다.”(위빳사나 수행방법론 1권, 383쪽)라고 말하는 것이다.
 
분명한 대상은 알아차려야 한다. 내버려 두면 탐욕이나 성냄이 된다. 분명한 대상을 어떻게 알아차려야 할까? 이는 법의 생성과 소멸의 특성을 보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정신-물질 구별의 지혜, 조건파악의 지혜들이 청정해지고 분명해졌을 때 ‘본다’하며 새길 때마다 ‘이러한 봄 등은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가 지금에서야 생겨난다’라고 그 다섯 가지 법들의 생겨남도 안다.”(위빳사나 수행방법론 1권, 379쪽)
 
 
위빠사나 1단계와 2단계 지혜로 대상을 파악하는 것이다. 보는 순간 “눈, 감성물질, 눈 의식, 접촉, 느낌”을 동시에 들어 오는데, 이 중에서 가장 강한 대상 하나를 선택해서 파악하는 것이다. 어떻게 파악하는가? 이전에 없었던 것이 생겨남을 아는 것이다.
 
없었던 것이 생겨난 것에 대하여
 
탐욕이나 성냄은 본래 있는 것이 아니다. 조건 발생하는 것이다. 대상을 보았을 때 느낌에 따라 발생한다. 이는 없었던 것이 생겨난 것이다. 어떤 사람 이름을 접했을 때 싫어하는 마음이 일어났다면 성냄이라는 법이 생겨난 것이다. 없던 것에서 생긴 것이다. 조건발생하여 생긴 것이다.
 
조건 발생한 것은 조건이 다하면 사라지기 마련이다. 그래서 꼰당냐는 부처님의 사성제에 대한 설법을 듣고서 “생겨난 것은 사라지기 마련이다.”라 하여 법안이 생겨났다. 이런 법안이 생겼을 때 어떤 것을 알게 될까? 다음과 같이 알 수 있다.
 
 
생멸을 경험하여 보게 되었을 때부터 시작하여 생겨나서는 사라져 가는 것만을 경험하기 때문에 ‘항상하지 않구나’라고 무상의 특성도 바르게 안다.
 
생멸과 떨어질 수 없는 것을 경험하기 때문에 ‘괴로움일 뿐이구나. 좋지 않은 것들일 뿐이구나’라고 괴로움의 특성도 바르게 안다.
 
생겨나게 하고 싶지 않아도 생겨나는 것, 사라지게 하고 싶지 않아도 사라지는 것만을 경험하기 때문에, ‘원하는 대로 되게 할 수 있는 나라고 하는 것이 아니구나. 자아라고 하는 것이 없구나’라고 무아의 특성도 바르게 안다.” (위빳사나 수행방법론 1권, 379쪽)
 
강한 대상을 보았을 때 마음이 일어난다. 과거 경험이 곁들인다면 즐거운 느낌이나 괴로운 느낌이 일어날 것이다. 이때 알아차리지 못하면 연기가 회전된다. 어떻게 알아 차려야 하는가? 정신과 물질을 구분하는 지혜와 원인과 결과를 아는 지혜로 알아차려야 한다. 없던 법이 생겨난 것에 대하여 무상, 고, 무아의 특성으로 아는 것이다.
 
위빠사나 수행방법론에 대하여
 
부처님은 말룽끼야뿟따에게 여섯 가지 감역에 대하여 질문했다. 그것은 “지금까지 보지 못했고, 예전에도 결코 본 적이 없고, 지금도 보지 못하고,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도 할 수 없는, 시각에 의해 인식될 수 있는 형상들에 대한 욕망이나 탐욕이나 애착이 있는가?”(S35.95)에 대한 것이다. 당연히 있을 수 없다. 다음은 위빠사나 수행방법론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부처님은 위빠사나 수행방법론을 말룽끼야뿟따에게 알려 주었다. 그것은 “자, 말룽끼야뿟따여, 그대에게 보이고, 들리고, 감각되고 인식된 것에 관하여 말한다면, 보인 것 안에는 보인 것만이 있을 뿐이며, 들린 것 안에는 들린 것만 것 있을 뿐이며, 감각된 것 안에는 감각된 것만이 있을 뿐이며, 인식된 것 안에는 인식된 것만이 있을 뿐이다.”(S35.95)라는 가르침이다. 그러나 이 가르침을 이해하기 쉽지 않다. 주석을 읽어 보아도 와 닿지 않는다. 마하시사야도의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을 읽고서 어느 정도 파악했다. 이 가르침은 다음과 같이 재구성된다.
 
 
말루짜뿟따 비구여, 보이고, 들리고, 감각되고, 알게 된 이러한 법들 중에서도 그대에게 보이는 형색에 대해서는 보는 것만 생겨날 것이다. 들리는 소리에 대해서는 듣는 것만 생겨날 것이다. 감각된 것에는, 즉 맡아진 냄새에는, 맛보아진 맛에는, 닿은 감촉에는 감각하는 것만 생겨날 것이다. 알아지는 성품에 대해서는 아는 것만 생겨날 것이다.
 
말루짜뿟따 비구여, 어느 때 그대에게 보이고, 들리고, 감각되고, 알게 된 이러한 법들 중에서 보이는 형색에 대해서는 보는 것만 생겨난다면, 들리는 소리에 대해서는 듣는 것만 생겨난다면, 즉 맡아진 냄새에는, 맛보아진 맛에는, 닿은 감촉에는 감각하는 것만 생겨난다면, 알아지는 성품에 대해서는 아는 것만 생겨난다면, 말루짜뿟따 비구여, 그때 그대는 그 보이는 형색, 들리는 소리, 감각된 냄새-맛-감촉, 알아지는 성품들과 관련하여 번뇌와 함께 생겨나지 않을 것이다.
 
말루짜뿟따 비구여, 그때 그대가 그 보이는 대상 등과 관련하여 번뇌와 함께 생겨나지 않는다면 말루짜뿟따 비구여, 그렇게 관계하지 않을 때에 그대는 그 보이는 형색 등에 번뇌로 머물지 않을 것이다.
 
말루짜뿟따 비구여, 그때 그대가 그 것(보이는 형색) 등에 번뇌로 머물지 않는다면, 말루짜뿟따 비구여, 그렇게 번뇌에 따라서 머물지 않을 때, 그대는 이곳(이 세상)에도 없고, 저곳(저 세상)에도 없고, 아 세상, 저 세상, 양쪽(세상) 모두에도 없다. 바로 이것, 즉 물질과 정신의 연속이 없는 것만이, 또는 이 두 세상 모두에 번뇌로 집착하는 그대가 없는 것만이, 번뇌의 고통, 윤회윤전 고통의 끝인 열반이다.” (위빳사나 수행방법론 1권, 387-388쪽)
 
 
2023-04-01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