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존재지속심의 근거가 되는 경을 발견하고

담마다사 이병욱 2023. 3. 19. 08:49

존재지속심의 근거가 되는 경을 발견하고

 


새벽에 잠에서 깨었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 법정스님에 따르면 잠에서 깨면 일어나라고 했다. 잠에서 깨었음에도 계속 자려 한다면 게으름이 될 것이다.

새벽에 몸이 찌뿌둥 했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할까? 나만의 방법이 있다. 암송하는 것이다. 앉아서 할 수도 있고 일어서서도 할 수 있다. 분명한 사실은 암송전과 암송후가 다르다는 것이다.

빠다나경을 암송했다. 한동안 암송하지 못했다. 마치 모임에 빠지기 시작하면 계속 빠지게 되듯이, 한번 암송하지 않게 되자 계속 하지 않게 되었다. 마음을 다 잡는데 암송만한 것이 없다. 경행을 하면서 빠다나경을 암송했다.

암송하고 나면 확실히 다른 상태가 됨을 느낀다. 집중이 된 상태가 된 것이다. 이런 상태에서 행선이나 좌선을 하면 쉽게 들어간다. 사띠가 확립되는 것이다.

사띠가 확립된 상태는 평소와는 다르다. 이전의 상태와 비교해 보면 알 수 있다. 한발한발 내딛을 때 알아차림이 선명한 것이다. 발바닥으로 전달된 방바닥의 차고  따뜻함을 알 수 있다. 그 아는 마음도 알아야 한다. 어느 것도 무상하지 않는 것을 아는 것이다.

암송으로 집중된 힘을 행선에 적용하면 효과적이다. 또한 행선에서 집중된 힘을 좌선에 적용하면 효과적이다. 좌선에서 집중된 힘을 글쓰기에 적용하면 어떨까?

암송과 행선과 좌선 중에 좋은 생각이 떠오른다. 사띠가 확립된 상태에서 떠오른 생각은 착하고 건전한 것이다. 주로 경전문구나 수행과 관련된 책에서 보았던 문구가 떠오른다.

요즘 두 개의 책을 읽고 있다. 디니니까야와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이다. 머리맡에 있어서 수시로 열어 본다. 그러다 보니 교차해서 읽게 된다. 우연의 일치일까 두 개의 책에서 사리뿟따 존자에 대해서 읽게 되었다. 마치 융의 분석심리학에 나오는 동시성을 접하게 되는 것 같다.

디가니까야에 '견고한 믿음의 경'(D28)이 있다. 사리뿟따 존자의 사자후에 대한 경이다. 그런데 위빳사나 수행방법을 읽다보니 사리뿟따 존자의 직접관찰 위빳사나에 대해서 읽게  되었다는 것이다.

사리뿟따 존자는 16가지를 관찰하여 아라한이 되었다. 어떤 것인가? 이는 사유, 숙고, 희열, 행복, 심일경성, 느낌, 지각, 의도, 마음관찰, 바람관찰, 결심관찰, 정진, 새김, 중립, 마음기울임에 대한 것이다. 이를 직접관찰한 것이다.

사리뿟따 존자는 직접관찰 위빳사나를 해서 아라한이 되었다. 이에 대하여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에서는 "사리뿟따 존자는 그 열여섯 가지의 법들을 차례로 분석하여 안다."(1권 346쪽)라고 했다. 2주동안 직접관찰 위빳사나로 분석해서 안 것이다.

직접관찰 위빠사나의 핵심은 무엇일까? 그 이전에는 없다가 새로 생겨난 법을 관찰하는 것이다. 어떻게 관찰하는가? 이는 생멸의 지혜와 무너짐의 지혜로 찰나현재에 해당하는 법을 관찰하여 아는 것이다.

경전과 논서를 읽다 보면 다른 것은 읽지 않게 된다. 왜 그럴까? 한마디로 시시하여 양이 차지않기 때문이다. 읽어도 그만이고 읽지 않아도 그만이다. 유튜브를 보는 것 같다. 알면 좋고 몰라도 그만인 것이다. 그러나 경전에서 본 문구는 꼭 새겨 두고 싶다. 그런 문구 중의 하나는 다음과 같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확립되고 저 세상에서도 확립되는 양자에서 끊임이 없는 사람의 의식의 흐름을 분명히 압니다."(D28.9)

 


이 문장에서 키워드는 의식의 흐름이다. 한국빠일리성전협회 각주에 따르면 이를 존재의 흐름이라고 했다. 빠알리어로 바왕가찟따이고 한역으로는 유분심이다. 아비담마에서는 바왕가의 마음이라고 한다.

아비담마와 청정도론은 테라와다 불교에서 부동의 준거틀이라고 말한다. 니까야에 실려 있는 부처님의 말씀을 체계적으로 정리해 놓은 백과사전과 같은 것이다. 초등학교때 전과를 접하는 것 같다.

아비담마와 청정도론에 등장하는 용어 중에 바왕가의 마음이 있다. 이를 일생의 마음이라 볼 수 있다. 현재 나의 일생의 마음은 바왕가의 마음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결생의 순간부터 마지막 죽음의 마음에 이르기까지 일생을 지배하는 마음이다.

논서에서 바왕가의 마음을 접했을 때 논서에서만 있는 줄 알았다. 그런데 이번에 디가니까야를 읽다  보니 근거가 되는 경을 발견했다. 그것은 바로 디가니까야 '견고한 믿음의 경'에 실려 있는 "이 세상에서 확립되고 저 세상에서도 확립되는 양자에서 끊임이 없는 사람의 의식의 흐름"(D28.9)라는 말이다. 이 말과 각주의 설명을 접하자 그야말로 경전 읽는 맛을 느꼈다. 논서에서 사용된 핵심술어가 경전에 있었던 것이다!

아비담마와 청정도론을 접하면 불교의 진수를 보는 것 같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것을 체계적으로 분석해 놓았는데 이제까지 고민했던 것들이 모두 거기에 있었던 것이다. 또한 모르고 있었던 것들도 있었다. 그 중에 하나가 죽음과 재생에 대한 것이다.

불교인이라고 해서 다 불교인은 아니다. 단언하건데 아비담마와 청정도론을 읽지 않은 불교인은 무늬만 불교인이라고 볼 수 있다. 그가 제아무리 수행을 오래 하고 수많은 책을 읽었어도 인생의 비밀을 모른다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된다. 그런데 놀랍게도 아비담마와 청정도론에는 누구나 고민하던 의문이 속시원하게 설명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런 것중의 하나가 바왕가찟따, 존재지속심에 대한 것이다.

나는 왜 이모양 이꼴로 태어났을까? 이런 얼굴과 이런 성향으로 태어난 것은 어떤 연유일까? 이런 의문에 대한 해답은 아비담마와 청정도론에 있다. 내가 이런 형상과 이런 성향으로 태어난 것은 전생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비담마와 청정도론에 따르면 임종의 순간에  재생연결식이 일어난 것이다.

재생연결식은 이 생과 저 생을 연결시켜 주는 마음이다. 마치 이 언덕에서 저 언덕으로 줄을 타고 건너가는 것 같다. 이 언덕에 있는 줄을 놓고 저 언덕에 있는 줄을 잡아 건너가는 것과 같다.

죽음의 순간에 마지막 의식이 있다. 마지막 죽음의식의 대상이 다음생을 결정한다. 죽는 순간에 업이나 업의 표상, 태어날 곳의 표상을 대상으로 재생연결식이 일어나는 것이다.

마음은 대상이 있어야 일어난다. 대상 없이는 마음이 생겨나지 않는다. 재생연결식도 대상이 있어야 일어난다. 그 대상이 업, 업의 표상, 태어날 곳의 표상이다. 세 가지 중에서 하나를 대상으로 하여 재생연결식이 일어나는 것이다.

재생연결식이 일어나면 다음생이 결정된다. 천상으로 결생되었다면 일생을 천상의 존재로 살게 된다. 결생이 축생으로 되었다면 일생을 축생으로 살게 된다. 이렇게 일생을 지배하는 마음이 있다. 이를 바왕가찟따, 존재지속심이라고 한다.

나에게는 나의 존재지속심이 있다. 그래서 나의 정체성이 유지된다. 결생해서 죽을 때까지 가져 가는 마음이다. 일상의 마음은 존재지속심이 동요할 때 일어난다. 평소에는 잠잠하다. 마치 잠자는 것과 같은 마음이다. 그래서 바왕가찟따, 존재지속심에 대하여 잠재의식이라고도 말한다.

나에게는 일생을 지배하는 존재지속심이 흐르고 있다. 평소에는 알 수 없다. 잠재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일상에서 희로애락은 존재지속심의 동요에 의한 것이다. 동요가 끝나면 다시 고요의 마음, 잠재의 마음이 된다.

존재지속심은 나라는 한 존재의 일생의 마음이다. 최초 결생 했을 때부터 최후 임종의 순간까지 내가 나임을 증명하는 마음이다. 그래서 도중에 다른 존재지속심이 될 수 없다. 인간으로 살다가 도중에 개가 되는 일은 없는 것이다.

한번 결생되면 평생 존재지속심의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 잠재되어 있는 일생의 마음이다. 죽음의 순간에 존재지속심은 바뀐다. 업과 업의 표상, 태어날 곳의 표상을 대상으로 재생연결식이 일어날 때 다음생이 결정된다. 살생업과 같은 중업을 지었다면 그 업의 표상이나 태어날 곳의 표상에 따라 악처에 태어날 것이다. 반대로 선정수행과 같은 중업을 지었다면 그 업의 표상이나 태어날 곳의 표상에 따라 선처에 태어날 것이다.

가장 이상적인 삶은 태어나지 않는 것이다. 어떻게 해야 태어나지 않을까? 그것은 임종순간에 달려 있다. 마음은 대상이 있어야 일어난다. 다음 생도 대상이 있어야 일어난다. 다음생을 받지 않고자 한다면 임종순간에 업, 업의 표상, 태어날 곳의 표상이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마지막 죽음의 순간에도 알아차림을 유지해야 한다.

마지막 임종순간에 사띠가 유지되면 다음 생을 받지 않는다. 윤회가 끝나는 것이다. 재생연결식의 대상이 없으니 다음생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범부들은 업으로 살기 때문에 업을 대상으로 재생연결식이 일어나고, 업의 표상으로 재생연결식이 일어나고, 태어날 곳의 표상으로 재생연결식이 일어난다. 한번 재생연결식이 일어나면 평생간다. 마지막 죽음의 순간까지 존재지속심, 바왕가의 마음이 유지된다.

죽음의 마음은 잠들기 직전의 마음과 같다. 잠들면 다른 의식 상태가 되어 버리는데 죽음의 마음은 다른 존재의 마음이 되어 버린다. 그래서일까 부처님은 늘 깨어 있으라고 했다. 어느 정도일까? 다음과 같은 가르침으로 알 수 있다.

“수행승들이여, 깨어있음에 철저한 것이란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수행승은 낮에는 거닐거나 앉아서 장애가 되는 것들로부터 마음을 정화시킨다. 밤의 초야에는 거닐거나 앉아서 장애가 되는 것들로부터 마음을 정화시킨다. 밤의 중야에는 오른쪽 옆구리를 밑으로 하여 사자의 형상을 취한 채, 한 발을 다른 발에 포개고 새김을 확립하여 올바로 알아차리며 다시 일어남에 주의를 기울여 눕는다. 밤의 후야에는 일어나 거닐거나 앉아서 장애가 되는 것들로부터 마음을 정화시킨다. 수행승들이여, 깨어있음에 철저한 것은 이러한 것이다.”(A3.16)

경에서 핵심은 사띠에 대한 것이다. 이는 "새김을 확립하여 올바로 알아차리며 다시 일어남에 주의를 기울여 눕는다."라는 말이다. 잠들기 전에도 사띠하고 잠에서 깼을 때도 사띠하라는 것이다. 이렇게 했을 때 꿈을 꾸지 못할 것이다. 꿈없이 깊은 잠을 잘 것이다.

잠이 들 때가 있다. 가장 행복한 순간이다. 나른한 오후에 졸릴 때 막 잠이 들려는 순간은 황홀하다. 잠들기 직전의 마음은 어쩌면 죽음의 마음 같은 것인지 모른다. 그런데 부처님은 이런 마음조차 알아차리라고 했다.

잠들기 직전에도 사띠를 유지하고 잠에서 막 깼을 때도 사띠를 유지하라고 했다. 이렇게 하면 각극이 없을 것이다. 이는 훈련을 하지 않으면, 수행을 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잠자기 전후에 사띠하는 것에 대해서 "깨어있음에 철저한 것"이라고 했다. 아라한이라면 가능할 것이다.

아라한은 모든 번뇌가 소멸된 자들이다. 행위를 해도 업이 되지 않는다. 새로운 업을 짓지 않기 때문에 다음 생을 받지 않는다. 설령 과거전생에 지은 업이 임종순간에 표상으로 나타나더라도 알아차리면 다음생을 받지 않는다.

다음생이 없다는 것은 완전한 열반을 의미한다. 어느 순간에도 늘 사띠하고 있기 때문에 과거에 지은 업이 과보로 나타나지 않는다. 심지어 죽음의식 같은, 잠들기 전의 마음도 사띠하라고 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죽음을 기뻐하지 않고
삶을 환희하지도 않는다.
일꾼이 급여를 기다리듯,
단지 나는 때를 기다린다.”(Thag.654)

“죽음을 기뻐하지 않고
삶을 환희하지도 않는다.
올바로 알아차리고 새김을 확립하여,
단지 나는 때를 기다린다.” (Thag.654)

아라한의 인생관에 대한 게송이다. 아라한은 삶도 죽음도 바라지 않는다고 했다. 무아의 성자이기 때문에 삶과 죽음을 초월해 있는 것이다. 그런 아라한에게도 오온의 죽음이 있을 것이다. 그때 불사가 된다.

유아의 범부는 오온의 죽음은 진짜 죽음이 된다. 업과 업의 표상, 태어날 곳의 표상으로 재생연결식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아의 성자는 매순간 알아차린다. 심지어 잠들기 직전처럼 죽음의 마음도 알아차리기 때문에 재생연결식이 일어나지 않는다.

새벽에 일어나서 암송을하고 행선을 하고 좌선을 했다. 이것으로 부족해서 글을 썼다. 집중된 힘을 글쓰기로 보낸 것이다. 그결과 2시간동안 줄기차게 엄지치기 했다.

사띠는 반드시 행선이나 좌선과 같은 수행용어는 아니다. 부처님 가르침을 새기는 것도 사띠에 해당된다.

디가니까야를 보다가 바왕가찟따, 존재지속심의 근거가 되는 경을 발견했다. 매우 기뻤다. 이럴 때 경전 읽는 맛을 느낀다. 경에서 "이 세상에서 확립되고 저 세상에서도 확립되는 양자에서 끊임이 없는 사람의 의식의 흐름을 분명히 압니다."(D28.9)라는 문구가 바왕가찟따에 대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환희했다.

논서에 실려 있는 술어는 논사가 만들어 낸 것은 아니다. 모두 니까야에 근거한다. 어느 것 하나 예외가 아니다. 심지어 미소짓는 마음도 니까야에 근거한다. 니까야 읽기하기를 잘 했다. 또한 위빳사나 수행방법론과 같은 논서 읽기를 잘 했다.

"그 법들은 지나갔다. 사라졌다. 무너졌다."(M.iii.77)

2023-03-19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