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고는 순간에, 허리 아픈 환자처럼 천천히
새벽이다. 지금은 4시 5분이다. 참 좋은 시간이다. 귀한 자나 천한 자나, 부자나 빈자나 시간은 평등하다. 귀한 자나 부자라 하여 시간부자가 아니고, 천한 자나 빈자라 하여 시간빈자가 아니다. 누구에게나 24시간이 공평하게 주어진다. 시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한다면 시간부자가 된다.
새벽 4시에 일어나면 2시간이 확보된다. 남들 6시에 일어난다면 그렇다는 것이다. 남들이 7시에 일어나면 3시간이 확보된다.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귀중한 시간이다. 이런 시간을 잠으로 보낼순 없다.
새벽시간은 성적표를 받는 시간이다. 아무것에도 의지할 수 없다. 책을 열어 보아야 알 수 있는 지식은 필요 없다. 검색해서 알 수 있는 지식도 소용없다. 오로지 머리 속에만 있는 지혜가 진정한 자신의 것이다.
아무리 책을 많이 읽었어도 체화 되지 않았다면 무협지를 읽은 것이나 다름없다. 아무리 많은 강연을 들었더라도 기억나지 않는다면 연속극 보는 것과 다름 없다. 머리 속에서 꺼내 쓸 수 있어야 진정한 자신의 것이다.
개인사업자는 6개월에 한번씩 성적표를 받는다. 매년 1월과 7월에 부가가치세 신고를 할 때 매출과 매입이 드러나기 때문에 얼마를 벌었는지 알 수 있다. 세금을 많이 내면 낼수록 성적표는 좋은 것이다. 인생의 성적표도 있을 것이다.
대차대조표가 있다. 부기에서 대변과 차변의 합계를 내 보면 흑자인지 적자인지 알 수 있다. 인생의 대차대조표도 있다. 선행과 악행의 대차대조표를 말한다. 대변과 차변을 비교해 보면 공덕인지 악덕인지 드러난다.
아무리 부자라도 악덕이 더 많다면 그는 가난한 자가 된다. 그가 비록 가난하게 살았다고 할지라도 공덕이 많다면 그는 부자로 산 것이다. 나의 인생 대차대조표는 어떤 것일까?
하루 대차대조표는 새벽에 드러난다. 인생 대차대조표는 임종순간에 드러난다. 그것은 자신이 지은 행위에 대한 것이다. 저 세상에 갈 때 행위(kamma)만 가져 간다. 이는 마지막 죽음의식이 일어날 때 알 수 있다.
마음은 대상이 있어야 일어난다. 눈에는 형상이라는 시각대상이 있어서 시각의식이 일어난다. 삼사화합촉에 따라 과거 지은 업에 따라 의식이 일어난다. 부처님은 이것을 세상의 발생이라고 했다. 정신에도 대상이 있다. 문득 일어나는 생각을 보면 알 수 있다.
정신은 생각을 대상으로 정신의식이 생겨난다. 이것도 세상의 발생이다. 마찬가지로 임종순간에는 태어날 곳의 표상, 업의 과보, 그리고 업 중에 하나를 대상으로 마음이 일어나는데 이를 재생연결식이라고 한다. 또 하나의 인생이 시작되는 것이다.
재생연결식에 따라 인간은 천신이 될 수도 있고 축생이 될 수도 있다. 과거 지은 행위에 걸맞는 세상에 태어나는 것이다. 그런데 부처님은 태어남은 고통이라고 했다. 어떤 세계에 형성되었든지간에 태어남에 대하여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과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 생겨난다. 이 모든 괴로움의 다발들은 이와 같이 생겨난다.”(S12.2)라고 했다.
여기 행복해 보이는 자가 있다. 그는 정말로 행복할까? 한꺼풀만 들여다 보면 말 못할 고민이 있다. 에스엔에스(SNS)를 보면 행복한 사진만 올려 놓는 사람이 있다. 한발자국만 들여다 놓으면 누구에게도 털어 놓지 못하는 괴로움이 있을 것이다. 사람을 겉으로만 보고서 판단할 수 없다.
사람을 함부로 믿어서는 안된다. 이 말에 근거가 되는 경을 발견했다. 머리맡에 있는 디가니까야 빠야시의 경을 읽다가 “여보게들, 그러나 이 사람은 우리의 친구도 아니고 친척도 아닙니다. 어떻게 우리가 그를 믿고 가겠습니까?”(D23.24)라는 말을 새겨 두고자 했다.
사막을 횡단하는 대상이 있었다. 두 명의 카라반 지도자가 있었는데 한 사람은 맞은 편에서 오던 사람의 말만 믿고 사막을 횡단하다가 죽음을 맞이 했다. 사막에 물과 음식이 풍부하다는 말을 듣고서 무거운 식량을 버리고 출발한 것이다. 반면에 현명한 리더는 남의 말을 함부로 믿지 않았다. 그 결과 무사히 횡단할 수 있었다. 더구나 죽은 자의 귀한 물건도 가질 수 있었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결론적으로 말했다.
“왕자여, 이처럼 그대도 그 앞서 간 카라반의 지도자처럼, 어리석고 바보 같아서 이치에 맞지 않게 저 세상을 찾으면서 불운과 파멸에 빠질 것입니다. 그리고 들은 것을 당연히 믿어야 한다고 여긴다면, 그들도 그 마차꾼들처럼 불운과 파멸에 빠질 것입니다. 왕자여, 나쁜 사견을 버리십시오. 그것으로 인해 오랜 세월 불익을 겪고 고통을 겪지 마십시오.”(D23.24)
부처님은 빠야시 왕자에게 사견(邪見)을 경고하고 있다. 어떤 사견인가? 그것은 “저 세상도 없고, 홀연히 생겨나는 화생의 뭇삶도 없고, 선행이나 악행도 없고, 업의 과보도 존재하지 않는다.”(D23.24)라는 사견을 말한다. 이른바 무작설(akiriya)이다. 업과 업의 과보를 무시하는 삿된 견해를 말한다.
무작설은 대표적으로 숙명론, 신의론, 우연론을 들 수 있다. 이를 삼종외도설이라고 한다. 모든 것을 과거 업의 탓이라고 보는 숙명론, 모든 것을 신의 뜻으로 돌려 버리는 신의론, 모든 것을 우연발생론으로 보는 우연론을 말한다. 이런 말을 믿으면 망하기 쉽다. 사막을 건너는 대상의 지도자가 반대편에서 온 사람의 말만 믿고 여행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남의 말을 함부로 믿지 말라고 했다.
사람의 말을 믿으면 실망하기 쉽다. 성직자나 수행자도 사람이기 때문에 그들의 말을 믿어도 실망하기 쉽다. 진리의 말씀을 믿어야 한다. 당연히 부처님 말씀이 진리의 말씀이다. 부처님이 깨달은 연기법은 자연의 법칙과도 같다. 그래서 “원리로서 확립되어 있으며 원리로서 결정되어 있으며 구체적인 것을 조건으로 하는 것이다.”(S12.20)라고 했다. 연기법은 부처가 출현하거나 출현하지 않거나 원리로서 항상 있는 것이다.
부처님 말씀이 위력을 발휘할 때가 있다. 그것은 위기에 닥쳤을 때이다. 자신도 어찌할 수 없는 지경에 처해 졌을 때 경전을 열어 보면 구구절절 맞는 말이다. 경전에 있는 말이 내 처지를 말하는 것 같을 때 공감한다. 이런 것이다. 부처님이 사고와 팔고를 말씀하시면서 “이것이 괴로움이다.”라며 고성제를 설했을 때 이를 부정할 수 있을까? 고성제를 자신이 처한 상황에 비추어 보았을 때 틀림 없음을 알게 된다. 이럴 때 확신에 찬 믿음으로 진리를 받아 들이게 될 것이다.
경전을 접하면 마음이 편안하다. 하루라도 경전을 접하지 않을 수 없다. 구구절절 가슴에 와 닿는다. 경전을 해설한 주석서 역시 울림이 있다. 이런 경전의 말씀은 믿어도 된다.
요즘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을 읽고 있다. 경전읽기와 병행해서 읽는다. 새기고 싶은 내용이 많다. 그 중에서 현재에 집중하라는 말이 와 닿는다. 이는 “그 순간 생겨나고 있는 현재의 법들을 ‘물질과 정신, 무상, 고, 무아’라고 알고 보도록 관찰해야 한다.”(304쪽)라는 말이다. 이 말은 다음과 같은 가르침에 근거한다.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지 말고
미래를 바라지도 말라.
과거는 이미 버려졌고
또한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
그리고 현재 일어나는 상태를
그때 그때 잘 관찰하라.
정복되지 않고 흔들림없이
그것을 알고 수행하라.”(M131)
이 게송은 매우 유명하다. 맛지마니까야에서도 여러 번 언급되어 있다. 이 게송을 이용하여 수많은 글을 썼다. 그런데 이번에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을 읽으면서 이 게송에 대한 분석이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과거로 거슬러 가지 말라고 했다. 이에 대하여 미하시 사야도는 이미 지나가 버린 과거의 오취온 법들은 사라져 버렸다고 말하면서 “사라져 버린 그러한 법들을 갈애, 사견으로 집착해서 생각하며, 그리워하며 지내면 안된다.”(303쪽)라고 했다. 여기서 갈애와 사견이라는 말에 주목한다.
오취온은 오온에 대한 집착을 말한다. 어떻게 집착하는가? 이는 니까야에서 무수히 나오는 정형구로 알 수 있다. 그것은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고, 이것은 내가 아니고,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는 말이다. 이는 오온에 대하여 갈애, 자만, 유신견으로 집착하는 것을 말한다.
과거의 법은 제대로 볼 수 없다. 당연히 과거생도 사실대로 알 수 없다. 당장 5분 전의 일도 사실대로 파악할 수 없다. 직접 관찰하지 않는 한 추론으로 알 수밖에 없다.
게송에서는 미래도 바라지 말라고 했다. 나중에 생겨날 법들은 알 수 없는 것이다. 현재 그러한 법들은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미래 법들을 기대하는 것에 대하여 마하시 사야도는 복권당첨을 바라는 것과 같다고 했다.
복권은 사람을 꿈꾸게 만든다. 당첨되면 이렇게 저렇게 쓸 것을 꿈꾼다. 복권은 당첨될 수도 있고 당첨되지 않을 수도 있다. 불확실한 것이다. 만일 미래에 대해서 사실대로 바르게 알 수 있다면 점치는 사람들이나 신을 모시는 이들은 할 일이 없게 될 것이다.
미래 법들은 알 수 없다. 추측한대로 일이 일어날 수도 있고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다. 마치 홀짝 게임 하는 것 같다. 복권을 기대하는 것과 같다. 미래는 다만 추론으로만 알 수 있는 것이다.
수행자가 마음이 과거나 미래에 가 있다면 어떻게 될까? 이전에 관찰이 잘 되었던 것 또는 관찰이 잘 되지 않았던 것을 돌이켜 생각하며 지낸다면 마음이 과거에 가 있는 것이다. 반면에 관찰이 좋기를 기대한다든가 특별한 체험, 특별한 지혜가 생겨나기를 기대한다면 마음은 미래에 가 있는 것이 된다.
수행자는 마음이 항상 현재에 있어야 한다. 그래야 정신과 물질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바르게 관찰할 수 있다. 물질과 정신들이 마치 대면하는 것처럼 관찰하는 것이다. 이처럼 순간에 분명하게 현재 상태를 관찰하는 것을 ‘직접위빠사나’라고 한다.
직접관찰이 있다면 추론관찰도 있다. 현재는 직접관찰로 알 수 있지만 과거나 미래는 추론으로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과거나 미래 법들에 대해 일부러 마음을 기울여 관찰해서는 안된다. 직접관찰 위빳사나 지혜가 성숙되었을 때 현재법들과 비교하여 유추하는 추론관찰 위빳사나 지혜만으로 관찰해야 한다.”(298쪽)라고 했다.
“지나간 일을 슬퍼하지 하지 않고
오지 않은 일에 애태우지 않으며
현재의 삶을 지켜 나가면
얼굴빛은 맑고 깨끗하리.”(S1.10)
숲 속에 사는 수행승은 얼굴이 맑고 깨끗하다. 하루 한끼만 먹어도 행복한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가? 그것은 지나간 일을 슬퍼하지 하지 않고
오지 않은 일에 애태우지 않는 것이다. 이 말은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지 말고 미래를 바라지도 말라.”(M131)라는 말과 동의어이다.
마하시 사야도의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을 보면 동어(同語)가 무수히 반복된다. 문학작품에서는 동어반복은 금물이다. 그러나 수행지침서는 다르다. 동어반복이 무수하게 나오는 것은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런 동어반복은 경전에서도 볼 수 있다.
과거는 지나갔고 미래는 오지 않았다. 현재만 관찰해야 된다. 이 말은 위빠사나 수행자에게 금과 옥조와 같은 말이다. 만약 마음이 과거나 미래에 가 있다면 어떻게 될까? 사고가 날지 모른다.
언제나 그렇듯이 사고는 순간적이다. 마음을 놓고 있을 때 발생한다. 사고는 마음의 헛점을 파고 드는 것 같다. 이럴 때는 항상 부처님이 말씀하신 “현재 일어나는 상태를 그때 그때 잘 관찰하라.”(M131)라는 말을 새겨야 한다. 마하시 사야도는 이 말에 대해서 “각각의 물질과 정신들이 생겨날 때 그러한 생겨나는 순간에 관찰해야 한다.”(306쪽)라고 했다.
위빠사나 수행은 현재 생겨나는 법만을 관찰하는 것이다. 그것도 거듭관찰해야 한다. 현상을 거듭관찰하다 보면 현상의 고유한 특성과 일반적 특성이 드러난다. 특히 일반적 특성에 대해서 “현재의 다섯무더기라는 법들도 각각 생겨나는 그 순간에 어떤 일곱가지 거듭관찰을 통해 관찰한다.”(300쪽)라고 했다.
일곱가지 거듭관찰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이는 “무상(anicca), 괴로움(dukkha), 무아(anatta), 염오(nibbidā), 애착 빛바램(virāga), 소멸(nirodha), 다시 내다 버림(paṭinissagga)”(307쪽)을 말한다. 이와 같은 일곱 가지를 거듭관찰 했을 때 위빠사나 지혜를 얻게 되어서 궁극적으로 도의 지혜와 과의 지혜에 이르게 됨을 말한다.
시간이 많이 경과 되었다. 현재시간은 7시 26분이다. 새벽 4시 5분부터 3시간 21분 동안 쉼없이 엄지치기를 했다. 눈은 침침하지만 피곤하지 않다. 이런 것도 진리에 대한 열정일 것이다.
엄지치기를 오래하면 글의 양도 늘어난다. 이를 보는 독자들은 긴 글에 피곤할지 모른다. 그러나 어떤 독자들은 단숨에 읽을지 모른다. 분명한 사실은 동어반복에 진실이 있다는 것이다. 진리의 말씀에는 동어를 아무리 반복해도 지나치지 않다.
사고는 순간에 일어난다. 조금만 방심하면 사고가 난다. 나이들수록 현재에 집중해야 한다. 노인이 현재 순간을 놓쳐서 낙상사고가 나면 치명적이다. 수행자라면 환자처럼 행위해야 한다. 그래서 “위빠사나 수행을 할 때 마음을 현재에 두기 위해서는 병자와 같이 천천히 움직여야 한다.”(위빠사나 수행자 근기를 돕는 아홉요인, 77쪽)라고 했다. 허리 아픈 환자처럼 움직이는 것이다.
허리환자는 아주 천천히 앉고, 아주 천천히 일어서고, 물건을 잡을 때도 천천히 잡는다. 허리 아플 것을 염려하여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수행자도 허리가 아픈 사람처럼 천천히 움직여야 한다. 아픈 사람처럼 움직여서 현재의 움직임을 알아차리면 법을 볼 수 있다.”(위빠사나 수행자 근기를 돕는 아홉요인, 78쪽)라고 했다.
지금 이 순간 생겨나고 있는 법들을 물질-정신, 무상, 고, 무아로 관찰해야 한다. 이렇게 관찰하면 욕망에서 해방되기 때문에 대자유인이 되지 않을까? 욕망이 배제된 세상은 달라 보일 것이다. 새로운 하늘과 땅이다. 나는 언제나 새로운 하늘과 땅을 볼 수 있을까?
2023-03-02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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