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적멸은 자각될 수 있을까?

담마다사 이병욱 2023. 1. 16. 10:52

적멸은 자각될 수 있을까?


"아무 보상이 없어도 글만 쓰겠어요." 어제 밤에 본 영화 '호밀밭의 반항아'(2018년)의 마지막 대사이다. 호밀밭의 파수꾼의 저자가 말한 것이다. 저자는 책의 출간으로 유명세를 타자 숨어 버렸다.

스마트폰이 있어서 좋다. 메모 할 수 있어서 좋다. 이렇게 엄지치기 할 수 있어서 좋다. 좋은 생각이 나면 글을 쓴다. 출간하기 위해서 쓰는 것은 아니다. 어떻게 감히 출간 할 수 있겠는가? 그때그때 느낌을 쓰는 것이다.

새벽에 글 쓰는 것을 즐긴다. 지상에서 가장 편한 자세로 쓴다. 떠오르는 생각을 붙잡는 것이다. 주로 법에 대한 것이다. 경전이나 수행관련 서적에서 본 것들이 떠오른다. 이를 법념처라고 할 수 있을까?

사띠가 확립된 상태에서 떠오르는 생각은 건전한 것이다. 경전에서 봤던 것들이 떠 오를 때 법념처라고 말할 수 있다. 왜 그런가? 사띠는 선법이기 때문이다.

선법의 상태에서는 선법이 떠오를 수밖에 없다. 선법이 선법을 부르는 것이다.

경전을 볼 때 새겨두고 싶은 구절이 있다. 사띠가 확립된 상태에서 떠오른다. 이것도 사띠라고 말할 수 있다. 왜 그런가? 오래 전의 기억을 가져 올 수 있는 것은 새겼기 때문이다. 새김이 없다면 기억도 없을 것이다.

사띠는 단지 기억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사띠는 단지 마음을 챙기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새김이 없는 사띠는 있을 수 없다. 기억하고 싶은 것을 새기는 것이다. 그런데 그 기억은 착하고 건전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선법을 말한다.

경전에 있는 가르침은 모두 선법이다. 모두 새겨야 할 법들이다. 그래서 오랜 옛날부터 수행승들은 경전을 외웠을 것이다.

어떤 학문이든지 외우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구구단도 외워야 하는 것이다. 영어 단어도 외워야 한다. 화학하는 사람이라면 주기율표를 외워야 한다. 물리를 공부한다면 물리공식을 외워야 한다. 불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기본적인 교리는 외워야 한다.

불교인이라면 사성제, 팔정도, 십이연기와 같은 교리를 알아야 한다. 이해 하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된다. 외워야 한다.

사성제 교리는 초전법륜경(S56.11)으로 외웠다. 팔정도 교리는 팔정도분석경(S45.8)으로 외웠다. 십이연기 교리는 십이연기분석경(S12.2)으로 외웠다. 모두 빠알리 원문으로 외웠다. 외우는 것은 새기는 것이다. 외워두면 경전을 보지 않아도 된다. 머리에서 곧바로 꺼내올 수 있다.

사띠가 확립된 상태에서 떠오르는 기억은 선법에 대한 것이다. 이를 법념처라고 했다. 그런데 새긴 만큼 떠 오른다는 것이다. 모든 것을 다 기억할 수 없다. 새긴 것 이상 떠오르지 않는다.

기억나지 않을 때 경전을 열어 볼 수 없다. 경전을 열어 보는 순간 사띠는 깨진다. 마치 말을 했을 때 사띠가 깨지는 것 같다. 글을 쓸 때도 사띠가 깨질 것이다. 그러나 말하는 것보다는 덜한 것 같다.

사띠는 선법을 기억해 낼 수 있는 능력이다. 특히 사띠가 지혜와 결합되었을 때 강력해 진다. 가르침을 몸으로 겪었을 때 확실히 내것이 된다. 가르침을 자신이 처한 현실에서 이해 했을 때 지혜가 된다.

아는 것과 이해하는 것은 다르다. 지식과 지혜는 다른 것이다. 경전에서 본 문구가 떠 올랐다면 이해 되었음을 뜻한다. 몸으로 알게 되는 것이다. 지식이 지혜가 되는 것이다.

사띠가 확립되었을 때 가르침이 떠오른다. 새겨 두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인상 깊었기 때문에 떠오른 것이다. 그러나 새김이 약하면 기억도 희미할 것이다. 가르침이 떠올랐다면 내것이 된다.

경전을 읽다보면 꼭 기억하고 싶은 구절이 있다. 그런 구절은 새겨두어야 한다. 외우면 좋을 것이다. 외우는 것도 새김의 과정이다. 단지 외우는 것으로 끝나면 쉽게 잊어 버린다.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이해가 뒤따라야 한다. 그래서 사띠에 대하여 기억 플러스 지혜라고 말한다.

사띠는 단지 기억만을 말하지 않는다. 새겨야 사띠가 된다. 이해가 바탕이 되어야 한다. 가르침을 이해해서 내것이 되었을 때 지혜가 된다. 사성제, 팔정도, 십이연기를 외우는 것도 좋지만 이를 자신의 삶에 비추어 이해되었을 때 지혜가 된다. 삶의 지혜가 되는 것이다.

어제 디가니까야 마하빠리닙바나경을 보다가 인상적인 구절을 발견했다. 그것은 지각에 대한 것이다.


출가자들은 적멸에 들어 지냅니다. 그대는 지각하면서 깨어 있었는데 비가 쏟아지고 천둥이 치고 번개가 떨어지고 벼락이 치는데도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아무소리도 듣지 못했습니다.”(D16. 103)


어떤 사람이 부처님의 적멸을 찬탄한 것이다. 여기서 적멸은 아띡깐따(atikkanta)를 말한다. 이 말은 ‘went beyond; passed over’의 뜻이다. 이는 현재의 상태를 초월한 것이다. 공무변처 또는 상수멸의 상태이다. 열반의 상태라고도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상태에 대하여 ‘지각하면서 깨어있다’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열반이라 하여 기절한 상태가 아님을 말한다.

열반은 상수멸로도 설명된다. 지각(saññā) 느낌(vedanā)이 소멸된 상태를 말한다. 이는 기절한 상태가 아니다. 이는 정신적 의식(nāma saññī)이 있는 있는 상태를 말한다. 다음과 같은 가르침으로도 알 수 있다


벗이여, 또한 수행승이 지각하는 것도 아니고 지각하지 않은 것도 아닌 세계를 완전히 뛰어넘어 지각과 느낌의 소멸에 듭니다. 지혜로 보아, 그에게 모든 번뇌는 부서집니다. 벗이여, 이러한 이유로 실로 열반은 행복으로 자각될 수 있습니다.”(A9.34)


이 가르침은 상수멸에 대한 것이다. 상수멸은 열반으로 설명되기도 한다. 그런데 부처님은 열반을 행복이라고 했다. 그리고 ‘자각’할 수 있는 것이라고 했다. 느낌이 없는데 어떻게 행복이라고 할 수 있을까? 지각도 없는데 어떻게 행복이라고 할 수 있을까? 역설적으로 느낌도 지각도 없기 때문에 최상의 행복이 될 수 있다. 그런데 열반은 느낌도 지각도 없지만 자각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열반은 행복으로 자각될 수 있습니다. (veditabba yathā sukha nibbāna)”(A9.34)"라고 했을 것이다.

지각(saññā)과 자각(veditabba)은 다른 것이다. 지각은 언어적 형성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외부적 대상에 반응한다. 수레가 지나가는 소리나 천둥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러나 적멸에 들면 천둥 치는 소리를 들을 수 없다. 어느 한 대상에 집중했을 때 소리가 들리지 않는 이치와 같다. 그래서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다.’(Stn.71)라고 했을 것이다.

경에서는 상수멸에 드는 것에 대해서 자각하는 것이라고 했다. 상수멸이라 하여 기절한 상태가 아님을 말한다. 여기서 자각은 언어적 개념을 뜻하는 산냐가 아니다. 산니(saññī)라 하여 깨어 있는 상태(being aware)를 말한다. 일종의 아는 마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말은 자각으로 번역된 베디땁바(veditabba)와도 같은 뜻이다. 여기서 베디땁바는 ‘should be known’의 뜻이다.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관찰에 의해서 아는 것을 말한다. 이를 한국빠알리성전협회에서는 ‘자각한다’라고 번역했다.

적멸에 들었을 때 끝까지 놓치지 않는 것이 있다. 그것은 사띠이다. 적멸에 들어도 자각이 있다고 했는데 이는 사띠가 있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적멸에 든 것에 대해서 "그대는 지각하면서 깨어 있었는데"(D16. 103)라고 한 것이다. 여기서 지각은 언어적 개념을 떠난 것으로 자각에 대한 것이다. 이는 '깨어 있다'라는 말로도 알 수 있다.

사띠는 깨어있음과 동의어이다. 이는 "감각능력의 문을 수호 하는 것과 음식을 먹을 때에 알맞은 분량을 아는 것과 깨어 있음에 전념하는 것이다.”(S35.239)라는 가르침으로도 알 수 있다. 여기서 깨어 있음은 사띠를 말한다.

부처님은 항상 깨어 있으라고 했다. 이는 늘 사띠하라는 말과 같다. 심지어 적멸에 들 때도 깨어 있는 것이다. 적멸이라 하여 기절한 것처럼 의식이 단절되는 상태가 아님을 말한다. 늘 깨어 있으라는 것이다. 늘 사띠가 확립된 상태에 있으라는 말과 같다.

사띠는 단지 마음챙김이나 기억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사띠는 기억 플러스 지혜를 말한다. 이를 새김이라고 말한다. 사띠에 대한 최상의 번역어가 새김임을 알수 있다. 사띠는 가르침에 대한 기억과 가르침을 이해한 지혜가 결합된 것인데 이를 우리말로 새김이라 하는 것이다.

사띠는 가르침을 새기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사띠가 확립된 상태에서 가르침을 새기면 지혜가 된다. 그래서 사띠는 계발될 수 있는 것이다.

오늘 새벽에도 줄기차게 썼다. 새벽 3시에 시작한 것이 현재 시각 5시 39분이 되었다. 잠에서 깨었을 때 달리 할 것이 없다. 암송을 하고 행선을 한 다음에 엄지치기 한다. 출간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 모아 두면 나중에 책이 된다.


2023-01-16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