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좀처럼 공감하지 않는 사람

담마다사 이병욱 2022. 12. 4. 08:12

좀처럼 공감하지 않는 사람


유익한 것을 가르쳐주는 사람이 친구이다. 여러 가지 친구의 조건이 있는데 그 중에서 하나의 조건에 해당된다. 나는 친구들에게 얼마나 유익한 존재일까?

어제 페이스북친구(페친)을 한명 차단했다. 끊기도 아니고 차단해 버린 것이다.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아서이다. 지나고 보니 내가 지나쳤다고 생각한다. 순간적인 감정에 치우쳤기 때문이다. 끊기로 올려 놓아야겠다.

발단은 댓글에 따른 것이다. 그는 평소 선불교 화두와 관련된 글을 올리고 있는데 그날은 책에 대해서 올렸다. 이에 "니까야도 있죠."라고 댓글을 달았다. 그랬더니 '양파를 까는 거냐'는 식으로 조롱했다. 니까야가 없는 조선시대 때도 도를 깨친 사람도 많았다는 것이다. 아마도 니까야 지상주의자로 보아 반감이 있었던 것 같다.

좀처럼 공감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 자신의 글 이외에는 보지 않는 사람 같다. 그래서일까 그 사람의 이름을 다른 데서 발견하기 힘들다. 나는 열심히 '좋아요' 등으로 공감을 표현하고 때로 댓글을 달기 까지 하는데 그는 요지부동이다. 그럴 때는 "내가 목석과 상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라고.

페이스북에 새계정을 만들었다. 이제 2주 되었다. 이전 계정에는 허수가 많아 공감능력 있는 페친으로 새로 세팅하고자 한 것이다. 그 결과 현재 433명의 페친이 확보되었다.

내가 먼저 친구요청한 경우가 있다. 이럴 때는 공감하기를 바라는 것은 힘들다. 그러나 친구요청을 한 사람들에게는 '좋아요' 등으로 공감해 주기를 요청했다. 그러나 실제로 실천에 옮긴 사람들은 극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은 대체 왜 친구하자고 했을까?

사람과의 소통을 중요하게 여긴다. 한번도 보지도 알지도 못하는 사이버공간에서도 친구가 될 수 있을까? 오로지 콘텐츠만 볼 수 있기 때문에 글로서 소통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시간이 없기 때문에 간단히 아이콘을 터치하는 것으로 표현한다.

 


글을 올릴 때 정과 성을 다한다. 읽어서 유익한 글이 되고자 한다. 때로 나의 주장이 강하게 실려 있기는 하지만 누구나 공감하는 글을 쓰고자 한다. 때로는 불리한 글도 쓴다. 자신의 내면을 드러내는 글이다. 이런 글이 어떤 이에게는 약점으로 잡혀 공격당하기도 한다.

내면을 드러내는 것은 어제 보다 더 나은 오늘이 되기 위해서이다. 그날이 그날 같다면 발전이 없다. 어제 보다 더 나은 오늘이 되기 위해서는 성찰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페이스북에서 성찰의 글은 거의 찾아 보기 힘들다. 그러다 보니 대부분 감각에 대한 것이거나 자랑이기 쉽다.

페이스북은 가상공간이다. 전원을 끄면 사라진다. 가상공간에서 사람들은 꿈속에서의 사람들 같다. 꿈 깨면 사라지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과 친구가 되기는 쉽지 않다. 그럼에도 친구라고 하니 친구맺기를 하는 것이다. 그것은 공감으로 나타난다. 그렇다면 공감이 없는 페친들을 어떻게 해야 할까?

나중에 듣는 말이 있다. 안면 있는 사람 이야기에 따르면 글을 잘 보고 있다고 했다. 공감표현을 전혀 하지 않기 때문에 전혀 알 수 없지만 글을 보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새로 세팅된 페친들도 보고 있는 것일까?

어떤 페친에게 문자를 날렸다. 나는 열심히 공감을 표현하고 글까지 남기는데 왜 반응이 없느냐는 식으로 항의한 것이다. 이런 글에도 그는 반응하지 않는다. 오로지 자신의 일만 하는 것 같다. 남의 뭐라고 하든 말든 자신의 길만 가는 것 같다. 그는 자신의 글은 보지만 다른 사람 글은 보지 않은 것 같다. 이런 사람을 페친이라 할 수 있을까? 마치 짝사랑하는 것 같다.

어떤 이는 메세지를 자주 보낸다. 메세지로 소통하고자 하는 것 같다. 이럴 때는 본문에 '좋아요' 등으로 공감 표현하고 댓글을 남겨 달라고 주문한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 사람은 여전히 페이스북 메신저로만 소통하고자 하는 것 같다.

페이스북에서 갖가지 군상의 사람들을 본다. 사람들 얼굴 생긴 모습만큼이나 다양한 성향을 본다. 콘텐츠가 아예 없는 사람들도 있다. 마치 머리가 텅 빈 사람들 같다. 이런 사람들도 친구하자며 친구 요청을 한다. 일단 다 받아 주었다. 다만 본문에 '좋아요' 등으로 공감을 표현해 달라고 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친구를 한정할 필요가 있다. 설령 그 사람이 아무리 글을 잘 쓰고 이름 있는 사람일지라도 공감능력이 결여 되어 있다면 친구라고 할 수 없다. 공감을 끌어 내려고 노력해도 요지부동인 사람을 친구라고 할 수 없다.

인터넷에 매일 글을 쓰고 있다. 요즘에는 두 개도 쓰고 세 개도 쓴다. 길이 남을 글을 쓰고자 한다. 그리고 쓴 글에 대해서 무한책임을 지고자 한다. 또한 내용과 형식을 갖춘 글을 쓰고자 한다. 하나라도 건질 수 있는 유익한 글이 되고자 한다. 그래서 제목을 달고 날자와 서명을 하는 것이다.

남의 글도 열심히 읽는다. 읽고 나면 공감을 표현하고 댓글도 단다. 자비의 마음에서 하는 것이다. 왜 그런가? 디가니까야 31번 경을 보면 친구의 조건 중의 하나가 "연민할 줄 아는 사람이 친구"라고 했기 때문이다.

친구도 친구나름이다. 어떤 이는 가상공간의 사람들에 대해서 신경쓰지 말라고 한다. 너무 '좋아요' 등 공감해주기를 바라는 것에 대해 집착하지 말라고 한다. 그럼에도 내 콘텐츠를 보아 주기를 바라는 것은 갈애와 집착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사람의 이름이 있으면 힘을 받는다.


2022-12-04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