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니까야모임

머물지도 않고 애쓰지도 않으면서, 중도는 초월이다

담마다사 이병욱 2023. 1. 30. 10:29

머물지도 않고 애쓰지도 않으면서, 중도는 초월이다


무엇이든지 첫 경험은 강렬하다. 그리고 오래 기억에 남는다. 처음 학교에 갔었을 때, 처음 해외여행 갔었을 때 등을 말하다. 모임도 그러할 것이다. 그러나 매번 반복되면 기억에 없다. 매일 밥을 먹지만 어떤 밥을 먹었는지 기억나지 않는 것과 같다.


금요니까야 첫모임이 한국빠알리성전협회 서고에서 열렸다. 왜 첫모임인가? 이는 새로운 교재로 시작하기 때문이다. 교재는 ‘오늘 부처님께 묻는다면’이다. 상윳따니까야 엔솔로지로서 가려뽑은 경을 모아 놓은 것이다.


니까야모임은 올해로서 8년째이다. 2016년에 처음 모임이 시작되었다. 2017년 2월부터는 금요모임으로 정착되었다. 교재 생활속의 명상수행은 2022년 11월에 회향되었다. 무려 5년 9개월만에 종료된 것이다.

이제 새로운 금요니까야 모임이 시작되었다. 2023년 1월 27일 첫모임이 열렸다. 첫 모임에 모두 아홉 명 참석했다. 첫모임에는 도현스님을 비롯하여 이병욱, 장계영, 홍광순, 김경예, 방기연, 김민희, 이혜림, 유경민 선생이 참석했다.


머물지도 않고 애쓰지도 않으면서

첫모임에서 처음으로 합송한 경은 ‘어떻게 험난한 세상의 거센 물결을 건널 것인가?’이다. 이는 상윳따니까야 첫번째 경인 ‘거센 물결을 건넘의 경’(S1.1)이다.

합송한 경은 ‘건넘’에 대한 가르침이다. 경에서는 하늘 사람이 등장하여 부처님에게 물어 본다. 하늘 사람은 “존자여, 당신은 어떻게 거센 물결을 건넜습니까?”(S1.1)라며 물어 보았다. 이에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벗이여, 나는 참으로 머무르지도 않고, 애쓰지도 않고, 거센 물결을 건넜습니다. 벗이여, 내가 머무를 때에는 가라앉으며 내가 애쓸 때에는 휘말려 들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처럼 머무르지 않고 애쓰지도 않으면서 건넜던 것입니다.”(S1.1)


전재성 선생에 따르면 이 게송은 부처님의 중도사상이 잘 드러난 것이라고 했다. 이는 “머무르지 않고 애쓰지도 않으면서”라는 말로 알 수 있다. 이에 붓다고사는 주석에서 일곱 가지 예를 들어서 설명했다.


“1)번뇌 때문에 머무르고 가라앉게 되고, 조건적 발생과 의도적 형성 때문에 애쓰게 되고 휩쓸리게 된다.
2) 갈애 때문에 머무르고 가라앉게 되고, 견해 때문에 애쓰게 되고 휩쓸리게 된다.
3) 영원주의 때문에 머무르고 가라앉게 되고, 허무주의 때문에 애쓰게 되고 휩쓸리게 된다.
4) 존재주의 때문에 머무르고 가라앉게 되고, 비존재주의 때문에 애쓰게 되고 휩쓸리게 된다.
5) 해태 때문에 머무르고 가라앉게 되고, 혼침 때문에 애쓰게 되고 휩쓸리게 된다.
6) 감각적 쾌락의 몰두 때문에 머무르고 가라앉게 되고, 자기학대에 대한 몰두 때문에 애쓰게 되고 휩쓸리게 된다.
7) 모든 악하고 불건전한 의도적 형성 때문에 머무르고 가라앉게 되고, 모든 세속적인 선하고 의도적 형성 때문에 애쓰게 되고 휩쓸리게 된다.”(Srp.I.19-20)


이를 일곱 가지 중도라고 말할 수 있다. 일곱 가지 중에서 3번은 유무중도라고 말할 수 있고, 4번은 생사중도, 6번은 고락중도, 7번은 선악중도라고 말할 수 있다.

여러 가지 중도가 있는데

중도란 무엇일까? 불자라면 중간길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진정한 중도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어떤 이는 팔정도를 중도라고 말한다. 이는 ‘초전법륜경’(S56.11)에서 고락중도를 설명할 때 팔정도가 언급되어 있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십이연기를 중도라고 말할지 모른다. 이는 ‘깟짜야나곳따의 경’(S12.15)에서와 같이 유무중도를 말하고 난 다음에 십이연기의 순관과 역관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요즘 한국불교에서 중도라는 말을 자주 사용한다. 성철스님도 백일법문에서 양변을 여읜 중도, 무변중도를 말했다. 이를 쌍차쌍조 등으로 해석했다. 고우스님도 성철스님의 백일법문을 참조해서 부처님의 진정한 가르침을 중도로 해석했다.

대승불교의 아버지라 불리우는 용수도 중도를 말했다. 용수는 팔불중도라고 하여불생불멸(不生不滅), 불상부단(不常不斷), 불일불이(不一不異), 불래불거(不來不去)를 말했다. 그런데 중도는 용수가 처음 말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니까야에는 부처님의 다양한 중도사상이 있다. 니까야에 있는 중도사상을 보면 유무중도 (有無中道, S12.15), 자타중도(自他中道, S12.17), 단상중도(斷常中道, S12.17), 일이중도(一異中道, S12.35), 고락중도(苦樂中道, S56.11), 오염중도(汚染中道, M3) 등이 있다. 상윳따니까야 1번경 “머무르지 않고 애쓰지도 않으면서”(S1.1)도 중도사상에 대한 것이다.


부처님의 중도사상은 기본적으로 십이연기에 근거한다. 이는 유무중도를 설명하고 있는 ‘깟짜야나곳따의 경’(S12.15)을 보면 알 수 있다. 부처님은 “여래는 그러한 양극단을 떠나서 중도로 가르침을 설한다.”라고 말씀하시면서 십이연기의 순관과 역관을 설하고 있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중도에 대하여 팔정도와 십이연기로 설명하는 것은 타당하다. 이는 경에서 그렇게 설명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 한편 중도에 대하여 ‘초월’로 설명할 수 있다. 왜 그런가? 이는 상윳따니까야 1번경에서 “나는 이처럼 머무르지 않고 애쓰지도 않으면서 건넜던 것입니다.”(S1.1)라고 말한 것으로 알 수 있다. 부처님은 저 언덕으로 건너 가는 것을 중도라고 한 것이다.

가르침의 뗏목으로

이 언덕과 저 언덕이 있다. 이 언덕은 윤회하는 세계이고, 저 언덕은 윤회가 끝난 열반의 세계이다. 부처님은 초기경전 도처에서 저 언덕으로 건너 갈 것을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부처님은 저 언덕으로 어떻게 건너 갔을까?

디가니까야 16번경 ‘마하빠리닙바나경’에서 부처님은 갠지스강을 건너갔다. 이에 대하여 “그러자 세존께서는 수행승의 무리와 함께 마치 힘센 사람이 굽혀진 팔을 펴고 펴진 팔을 굽히는 듯한 사이에, 갠지스 강의 이쪽 언덕에서 모습을 감추고 저쪽 언덕으로 건너가셨다.”(D16.33)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부처님은 신통으로 강을 건넌 것이다.

여기 폭류가 있다. 보통사람은 소용돌이 치는 광대한 폭류를 도저히 건널 수 없다. 뗏목을 만들어 건너면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뗏목도 폭류에는 안심할 수 없다. 윤회의 바다에서 저 언덕으로 건너가기는 힘들다. 그래서 이 언덕에서 머물고자 할 것이다.

저 언덕으로 건너가는 자는 극히 드물다.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저 언덕으로 건너 갈 수 없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서 건너가야 할까? 이에 부처님은 “사람이 뗏목을 엮는 사이에 다리를 만들어 늪지를 떠나서 바다와 하천을 건너는 사람들, 그들은 지혜로운 자, 건너는 자들이네.”(D16.33)

지혜로운 자만이 저 언덕으로 건너갈 수 있다고 했다. 어떻게 건너는가? 가르침의 뗏목으로 건너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그 사람은 풀과 나무와 가지와 잎사귀를 모아서 뗏목을 엮어서 그 뗏목에 의지하여 두 손과 두 발로 노력해서 안전하게 저 언덕으로 건너갔다.”(M22)라고 했다. 건너가기 위한 의지와 노력이 있어야 함을 말한다.

저 언덕으로 건너가기 위해서는 의지와 노력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과도하게 노력하면 휩쓸려 버리고 만다. 애쓰면 애쓸수록 말려 드는 것이다. 그렇다고 머물 수도 없을 것이다. 머물면 가라앉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 이 언덕에서 저 언덕으로 건너가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 학인 우빠시바도 그런 사람이었다. 그러나 어떻게 건너갈 줄 몰랐다. 우빠시바는 “싸끼야여, 저는 아무 것에도 의존하지 않고 혼자서 커다란 거센 흐름을 건널 수 없습니다. 제가 의지해 이 거센 물결을 건널 수 있도록 의지처를 가르쳐 주십시오. 널리 보는 눈을 지닌 님이여.”(stn1069)라고 물었다.

부처님은 바라문 학인에게 저 언덕으로 건너 갈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주었다. 부처님은 “우빠씨바여, 새김을 확립하여 아무 것도 없는 경지를 지각하면서, 나아가 ‘없다’에 의존하여 거센 물결을 건너십시오.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버리고 의혹에서 벗어나 갈애의 소멸을 밤낮으로 살펴보십시오.”(stn1070)라고 말해 주었다.

저 언덕으로 건너가려면 자신의 힘으로 건너 갈 수 없다. 이럴 때는 부처님 가르침에 의지하면 쉽게 건너갈 수 있다. 어떻게 건너가는가? 가르침의 뗏목을 타고 건너가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 하셨다.


“수행승들이여, 그래서 그 사람은 풀과 나무와 가지와 잎사귀를 모아서 뗏목을 엮어서 그 뗏목에 의지하여 두 손과 두 발로 노력해서 안전하게 저 언덕으로 건너갔다면, 건너서 저 언덕으로 가서 거룩한 이로서 땅 위에 섰을 것이다.” (S35.238)


가르침을 뗏목을 만들면 저 언덕으로 안전하게 건널 수 있다고 했다. 수영을 해서 건너려 한다면 물에 빠져 죽거나 휩쓸려 떠내려가서 죽게 될 것이다. 그래서 “내가 머무를 때에는 가라앉으며 내가 애쓸 때에는 휘말려 들었습니다.”(S1.1)라고 한 것이다.

부처님 가르침에 의지하면, 부처님의 가르침의 뗏목에 의지하면 쉽게 저 언덕에 건널 수 있고 안전하게 건널 수 있다. 여기서 가르침의 뗏목은 정신적 뗏목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저 언덕에 건너가는 것은 초월하는 것이 된다.

중도는 초월하는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어쩌면 초월의 가르침인지 모른다. 왜 그런가? 부처님이 저 언덕으로 건너가라고 했을 때 수영을 해서 건너 갈 수도 없고 배를 타고 건너 갈 수도 없다. 저 언덕은 정신적 영역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저 언덕으로 가고자 한다면 걸어서 세상 끝까지 이르고자 하는 것과 같다.

걸어서 세상 끝까지 갈 수 있을까? 존재의 근원을 찾아서 세상의 끝에 이르고자 하지만 결코 세상의 끝에 도달할 수 없다. 왜 그런가? 물질을 탐구해서는 세상에 끝에 도달할 수 없음을 말한다. 마치 우주선을 타고 우주 끝에 이루고자 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부처님은 “벗이여, 지각하고 사유하는 육척단신의 몸 안에 세계와 세계의 발생과 세계의 소멸과 세계의 소멸로 이끄는 길이 있음을 나는 가르칩니다.”(S2.26)라고 했다.

저 언덕에 이르고자 한다면, 세계의 끝에 이르고자 한다면 자신의 몸과 마음을 관찰해야 한다. 세계의 끝인 저 언덕은 결코 걸어서도 이를 수도 없고 광속보다 더 빠른 우주선으로도 이를 수 없다. 자신의 몸과 마음을 관찰하여 정신을 계발하면 이 언덕을 초월하여 저 언덕에 이를 수 있다. 저 언덕은 세계의 끝인 열반의 세계이다.

저 언덕에 이르고자 한다면 건너야 한다. 건너는 것은 다름 아닌 초월이다. 부처님이 유무중도, 고락중도, 단상중도 등 갖가지 중도를 말씀하셨는데 이때 중도의 의미는 다름 아닌 초월로 본다. 그래서 “중도는 초월이다.”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

초월하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다. ‘초전법륜경’(S56.11)의 고락중도에서는 ‘팔정도’로 초월하라고 했다. ‘깟짜야나곳따의 경’(S12.15)의 유무중도에서는 ‘십이연기’로 초월하라고 했다. ‘로히땃싸의 경’(S2.26)에서는 ‘사성제’로 초월하라고 했다. 상윳따니까야 1번경 ‘거센 물결을 건넘의 경’(S1.1)에서는 “머물지도 애쓰지도 않으면서”초월하라고 했다. 자타카에서는 부처님이 보살로 살 때 십바라밀로 초월했다.

빠라가따, 저 언덕으로 초월한 자

초월의 길로 가면 저 언덕으로 건너 걸 수 있다. 저 언덕으로 초월한 자에 대하여 ‘빠라가따(pāragata)’라고 한다. 이를 “피안에 도달하여 대지 위에 선 고귀한 님(tiṇṇo pāragato thale tiṭṭhati brāhmao)”(S35.238)이라고 한다. 여기서 고귀한 님(brāhmao)은 아라한을 뜻한다.

중도에 대하여 여러 가지 해석이 있다. 결국 저 언덕으로 건너 거는 것이기 때문에, 저 언덕으로 뛰어 넘는 것이기 때문에 “중도는 초월이다.”라고 정의해 보았다. 지나친 해석일까? 하늘사람은 부처님에게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찬탄했다.


머물지도 않고 애쓰지도 않으면서
세상의 집착을 뛰어 넘어
참 열반을 성취한 거룩한 님을
참으로 오랜만에 친견하네.”(S1.1)


2023-01-30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