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니까야모임

이제 니까야 불사를 해야 할 때

담마다사 이병욱 2023. 1. 28. 09:52

이제 니까야 불사를 해야 할 때

일각이 여삼추인 자에게 하루 밤은 길다. 병고에 시달리는 자나 밤새도록 정진하는 자에게 하루 밤은 길다. 하루 밤이 긴 자가 또 있다. 오늘이 어제와 다르지 않아 식사가 대사인 어리석은 자에게도 하루밤은 길다.

법구경에서 “올바른 가르침을 모르는 어리석은 자에게 윤회는 아득하다.” (Dhp 60)라고 했다. 여기서 어리석은 자는 깨달음에 도움이 되는 원리를 모르는 자를 말한다. 그래서 “어리석은 자는 이 세상과 저 세상에 유익한 것을 모르고, 윤회의 수레바퀴를 종식시킬 수 없고, 윤회를 끝내는 서른일곱 가지의 깨달음에 도움이 되는 길을 모른다.”(DhpA.II.12)라고 했다.

갈 길 먼 나그네가 있다. 피곤에 지친 나그네는 실제 길이보다 두 배나 더 멀게 느껴진다. 잠못 이루는 자에게 밤이 긴 것과 같다. 가르침을 모르는 어리석은 자들은 윤회를 끝낼 생각이 없는 것과 같다. 일을 즐기는 출가자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출가자나 재가자나 이 세상 삶을 살아간다. 다만 목적이 다를 뿐이다. 공통점은 둘 다 나그네라는 것이다. 왜 나그네인가? 이는 “존재의 윤회의 길에 들어섰기 때문에 나그네라고 한다.”(DhpA.III.462)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그래서 “그러므로 나그네가 되지 말고 고통에서 빠지지 말아야 하리.”(Dhp.302)라고 했다. 윤회의 길을 걷는 나그네가 되지 말자는 것이다.

지금 시각은 5시 정각이다. 새벽에 스마트폰을 보니 4시였다. 이 시간에 무엇을 해야 할까? 더 잘 수도 있을 것이다. 더 자면 긴 밤이 될 것이다. 꿈 속에서 헤매다가 아침을 맞게 될 것이다.

새벽은 귀중한 시간이다. 새벽은 하루의 시작이다. 해가 뜨기 전에, 여명이 밝아 오기 전에 하루일과를 시작하면 승리자가 되는 것 같다. 또한 귀중한 시간이 확보되는 것 같다. 이런 이유로 새벽을 사랑한다.

새벽에는 정신이 맑다. 마치 흙탕물이 정화된 것처럼, 혼탁한 마음도 정화되어 있다. 새벽시간에는 어떤 것을 해도 집중이 잘된다. 보통 새벽에 행선을 한다. 오늘은 변화를 주기로 했다. 오늘 새벽에는 경전을 읽기로 한 것이다.

머리맡에는 경전이 있다. 머리맡에 있어서 틈만 나면 펼쳐 볼 수 있다. 지상에서 가장 편한 자세로 본다. 누운 자세에서 머리를 벽에 대고 보는 것이다. 어쩌면 불경스러운 자세일지 모른다. 경전보기를 생활화하기 위해서 머리맡에 두었기 때문에 이런 자세가 나오는 것이다.

스탠드에 불을 켠다. 돋보기 안경을 쓴다. 그리고 경전을 펼쳐 든다. 현재 디가니까야를 보고 있다. 오늘 새벽에는 18번경을 다 보았다. 총 33경에서 18경이니 반이 넘었다. 매일 꾸준히 틈 날 때마다 조금씩, 한두페이지라도 본다. 어느날 책의 가림줄을 보면 진도가 꽤 나갔음을 알게 된다.

경전을 볼 때는 새기면서 본다. 더구나 각주에 있는 내용까지 빠짐 없이 본다. 한구절 한구절 새기면서 보면 진도가 잘 나가지 않는다. 한번 열면 한두페이지가 고작이다. 새기고 싶은 내용이 있으면 숙고한다. 그리고 형광메모리펜 칠을 해 둔다.

형광메모리펜은 두 개 준비한다. 노랑색과 분홍색이다. 노랑색은 대체로 중요한 부위에 칠한다. 칠해 놓으면 한눈에 파악된다. 특별히 강조하고 싶으면 분홍색을 칠한다. 새기고 싶은 문장이나 구절, 단어가 이에 해당된다.

경전은 한번 읽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무협지 읽듯이 한번 읽고 깨끗이 잊어 버린다면 시간낭비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두 번째 읽을 때에는 칠한 부분만 읽으면 된다. 시간이 부족하면 분홍색 칠한 부분만 봐도 된다. 마치 고시공부하는 것 같다.

고시공부를 해본 적이 없다. 그러나 학교 다닐 때 공부는 했다. 시험 볼 때는 책을 통달할 정도가 되어야 한다. 읽고 또 읽어서 의미가 파악되어야 잘 쓸 수 있다. 경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경전보는 것도 공부하는 것이다. 그래서 경전공부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경전을 보는 사람은 많지 않다는 사실이다. 극히 소수의 사람들만이 경전공부를 한다.

대부분 사람들은 경전공부를 하지 않는다. 공부는 학교에서나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더구나 경전공부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왜 그럴까? 자신의 삶에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들은 이익이 되지 않는 일은 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경전공부도 그런 것 같다. 경전을 본다고 해서 돈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일자리가 생기는 것도 아닐 것이다. 오히려 시간낭비로 볼 수 있다.

대부분 사람들은 감각을 즐기는 삶을 산다. 이 세상에는 즐길 거리가 너무 많다. 유튜브가 대표적이다. 에스엔에스도 즐긴다. 보고 듣는 등 감각적 즐거움에 빠지다 보면 경전읽기는 남의 일이 된다. 먼나라 사람들이나 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경전보기를 생활화 하고자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매일 열어 보아야 한다. 머리맡에 있는 것이 가장 좋다. 진도는 신경쓰지 말아야 한다. 진리의 말씀은 새기면서 읽어야 한다. 이렇게 읽다 보니 몇 달 걸린다.

빠알리 니까야를 접한지 십년이 넘었다. 2010년 부터 보기 시작 했다. 처음 부터 다 갖추지 않았다. 형편이 되는 대로 한권, 두 권 사 모았다. 목돈이 생기면 전집을 구입했다. 이런 노력이 있어서일까 이삼년 지나지 않아 모두 갖추게 되었다. 진열해 놓으니 서가에 가득찼다.

현재 한국에는 두 종류의 번역서가 있다. 한국빠알리성전협회(KPTS) 번역서와 초기불전연구원(초불연) 번역서가 있다. 두 곳에서 번역된 번역서를 모두 다 갖추었다. 금액으로 따졌을 때 백만원이 넘는다.

절에 가면 불사를 한다. 전각불사도 있고 불탑불사도 있고 동종불사도 있다. 작게는 기와불사도 있다. 불사에 동참하는 것은 큰 공덕 짓는 것이다. 그런데 불사라 하여 반드시 건축불사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경전불사도 있다.

종종 화재 소식을 접한다. 절에 있는 전각이 붙타버렸다는 소식을 말한다. 현장을 보면 처참하다. 웅장한 모습의 전각은 온데간데 없다. 주저 앉은 자리에 남아 있는 것은 시커먼 숯덩이 뿐이다. 불사에 동참한 것이 물거품이 되는 순간이다.

생긴 것은 사라지기 마련이다. 천년만년 갈 것 같던 전각도 불이 나면 하루아침에 사라진다. 그러나 경전불사는 다르다. 닳아 없어지지 않는 한 남아 있다. 무엇보다 내용이다. 경전공부를 해서 새겨놓은 가르침은 불에 타서 없어지지도 않고 누가 훔쳐 갈 수도 없다.

경전불사를 십년전부터 하고 있다. 이제 번역된 빠알리 경전은 다 갖추었다. 상윳따니까야, 맛지마니까야, 앙굿따라니까야, 디가니까야와 같은 사부니까야는 KPTS본과 초불연본 모두 갖추어 놓았다. 이뿐만이 아니다. 쿳다까니까야에 속해 있는 담마빠다, 수타니파타, 테라가타, 테리가타, 우다나, 이띠붓따까를 갖추었다. 모두 KPTS에서 출간된 것이다.

올해 1월에 자타카가 출간되었다. 빠알리 원문과 주석을 번역한 것으로는 한국불교 1700년 역사에서 최초의 일이다. 재가불자가 읽기에 적합한 경전이다. 특히 가장 앞에 있는 수메다 존자의 서원에 대한 것을 보면 신심을 일으키기에 충분하다. 가장 마지막에 있는 베싼따라 자타카를 보면 보시바라밀의 진수를 보여 주는 것 같다. KPTS에서 출간되었다.

불자들이 경전불사해야 할 것으로 율장도 있다. KPTS에서 출간된 것이다. 이밖에도 논장도 있다. 초불연에서 담마상가니 등 논서가 번역되었다. 청정도론은 KPTS와 초불연에서 모두 출간되었다.

한국불자들은 이제 경전불사를 할  때가 되었다. 건축불사도 좋지만 자신을 위한 불사를 해야 한다. 부처님의 원음이라 불리우는 사부니까야와 법구경 등 쿳다까니까야를 갖추어 놓아야 한다. 그것도 한종류의 번역서만 고집해서는 안된다. 두 종류의 번역서를 갖추어 놓고 비교해 가며 읽어야 한다.

한국불자들은 행복하다. 전세계적으로 두 종류의 빠알리 번역서를 가진 나라는 없다. 먼저 자신의 취향에 맞는 번역서를  구입해야 한다. 이어서 또 한종류의 번역서를 구입해야 한다. 두 종류의 번역서는 장단점이 있다. 비교해서 읽으면 가르침의 의미가 더욱더 분명히 드러난다.

현재 번역된 두 종류의 빠알리 니까야 번역서를 모두 다 갖추었다. 책장에 가득 차 있다. 한수레는 될 것 같다. 경전불사를 한 것이다. 경전이 번역될 때마다 계속 추가된다. 이번에는 자타카가 추가 되었다. 그런데 경전은 장식용이 아니라는 것이다.

경전이 서가에 꼽힌 채로 있으면 장식용이 된다. 어쩌다 한번 열어 보거나 필요한 경만 열어 보는 것도 장식용이 된다. 진정으로 내것이 되기 위해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 보아야 한다. 그것도 새기면서 읽어야 한다.

이제까지 경전 대하는 태도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경전은 방대하기 때문에 필요할 때 필요한 경만 열어 보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 세월을 십년 보냈다. 그 결과 경전은 장식용이 되었다.

작년 초부터 발심을 했다. 경전을 더이상 장식용으로 두고 볼수 없었다. 맛지마니까야부터 읽기 시작했다. 머리맡에 놓고 새기며 읽은 것이다. 그 결과 6개월만에 완독했다. 지금은 디가니까야를 머리맡에 놓고 있다  반이상 읽었다. 앞으로 두 달 새기며 읽으면 다 읽을 것 같다. 나머지 경전도 읽어야 한다.

경전은 평생 읽어야 한다. 한번 읽었다고 덮어 두어서는 안된다. 두 번째 읽을 때는 형광메모리펜 칠을 해 둔 곳을 읽으면 된다. 그렇다면 나는 왜 경전을 읽는가? 경전을 읽으면 마음이 청정해지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삶이 정초된다.

오늘 새벽에 디가니까야 18번경 '자나바싸바의 경'을 읽었다. 새겨두고 싶은 내용이 있다. 이는 삼보에 대한 흔들림 없는 믿음과 계행을 지키면 "세 가지 결박은 완전히 부수고 악도에 떨어지지 않고 삶의 길이 정초되어 올바른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흐름에 든 님이 된다."(D18.20)라는 가르침이다.

성자의 흐름에 들면, 수다원이 되면 악처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했다. 아무리 보시를 많이 했어도 성자의 흐름에 들지 않는다면 어디로 떨어질지 알 수 없다. 천상이 보장되지 않음을 말한다. 조건은 두 가지이다. 삼보에 대한 흔들림 없는 믿음과 계행이다. 삼보를 피난처로 삼고 오계를 지키는 것이다.

지금 시각은 6시 54분이다. 글을 엄지로 친지 두 시간이 되었다. 이제 정리할 시간이 되었다. 곁론은 경전불사에 대한 것이다. 자신에게 불사하는 것도 된다. 그래야 밤이 길지 않다. 식사가 대사인 자에게, 가르침을 모르는 어리석은 자에게 윤회는 아득한 것이다.

2023-01-28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