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면에서 죽음의 벽이 옥죄어 올 때
어제 문상을 다녀 왔다. 작은 법회모임 법우님 시아버지상이다. 나이가 무려 101세이다. 1923년생이라고 한다. 백년을 산 것이다. 일세기를 산 사람이어서 그럴까 슬픈 느낌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축복받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일세기를 산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올해 들어 두 번째 금요니까야모임이 열렸다. 2023년 2월 10일 금요일 한국빠알리성전협회(KPTS) 서고에서 열린 것이다. 새로운 교재 ‘오늘 부처님께 묻는다면’ 를 사용하여 두 번째 시간이다. 여러 경을 합송했는데 그 중에서 죽음명상에 대한 것도 있었다. 어떻게 하면 잘 살다 죽는 것인지에 대한 것이다.
두 번째 모임에서는 첫 번째 모임보다는 사람들이 많이 왔다. 모두 14명 참석했다. 디귿(ㄷ)자형 자리가 부족할 정도로 꽉 찼다. 홍광순, 이병욱, 안진현, 이혜림, 방기연, 이성기, 장계영, 도현스님, 김경예, 김근중, 정진영, 방명수, 노점선, 유남영 선생이 참석했다.
죽음명상 게송
새로운 교재 ‘오늘 부처님께 묻는다면’은 상윳따니까야 엔솔로지이다. 특히 1권 사가타상윳따는 짤막한 게송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다 보니 진도가 빨리 나간다. 그런데 짤막한 게송을 보면 기억하고 싶은 것이 많다는 것이다. 마치 법구경 게송처럼 외워도 좋은 게송으로 가득한 것이다. 그 중에 죽음명상에 대한 게송을 보면 다음과 같다.
“하늘을 찌를 듯한
커다란 바위산이
사방에서 짓이기며 완전히 둘러싸듯
늙음과 죽음은 뭇삶들을 덮친다.
왕족과 바라문과 평민과
노예와 천민과 청소부
누구도 예외로 하지 않고
모든 것을 쳐부숴버린다.
코끼리 부대도 전차 부대도
보병 부대도 어쩔 수 없다.
또한 전략으로 싸우더라도
재력으로 싸우더라도 승산이 없다.
지혜롭고 현명한 사람은
스스로를 위한 일을 살핀다.
슬기로운 님으로 부처님과 가르침과
참모임에 믿음을 세운다.
신체와 언어와 정신으로
여법한 삶을 살면,
이 세상에서 사람들은 그를 칭찬하며
나중에 하늘나라에서 기쁨을 누린다.”(S3.25)
이 게송은 꼬살라상윳따 ‘산에 대한 비유의 경(Pabbatūpamasutta)’(S3.25)에 실려 있다. 이 게송에 대하여 전재성 선생은 죽음의 명상에 대한 게송과 같다고 했다.
죽음명상에 대한 게송은 예경지송에서 발견된다. 예경지송 추모경송품을 보면 ‘죽음에 대한 새김의 이치를 송출하오니’라 하여 모두 다섯 개의 게송이 소개 되어 있다. 이를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나의 삶은 견고하지 않지만
나의 죽음은 견고하고
나의 죽음은 피할 수 없으니
나의 삶은 죽음을 끝으로 하고
나의 삶은 불확실하지만
나의 죽음은 확실하다.”
“뭇삶은 행위의 소유자이고
행위의 상속자이고
행위를 모태로 삼는 자이고
행위를 친지로 하는 자이고
행위를 의지처로 하는 자로서
그가 지은 선하거나 악한 행위의 상속자이다.”(A10.216)
“선행을 하면, 두 곳에서 즐거워하니
이 세상에서도 즐거워하고
저 세상에서도 즐거워하나니
‘내가 선을 지었다’라고 환호하고
좋은 곳으로 가서 한층 더 환희한다.”(Dhp.18)
“아! 머지않아 이 몸은
아! 쓸모없는 나무조각처럼
의식 없이 버려진 채
실로 땅 위에 눕혀질 것이다.”(Dhp.41)
“형성된 것들은 실로 무상하여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들이니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들의
지멸이야말로 참으로 지복이다.”(S1.11)
이것이 예경지송에 실려 있는 죽음명상 다섯 게송이다. 이 다섯 게송을 빠알리로 모두 외웠다. 좌선이나 행선하기 전에 예비수행으로 하기 위한 것이다. 마음을 집중하기 위해서 사마타 수행을 예비수행으로 하는데 자애관, 죽음명상, 부정관 등이 해당된다.
죽음명상 게송이라 하여 위 다섯 게송만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전재성 선생은 이번 모임에서 합송한 ‘산에 대한 비유의 경’의 다섯 게송도 훌륭한 죽음명상 게송이라고 했다.
위빠사나 수행을 한다고 하여 반드시 들숨날숨 관찰수행하는 것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전재성 선생에 따르면 니까야에 실려 있는 게송을 기억하여 사유하는 것도 위빠사나 명상에 해당된다고 말했다.
부처님은 진리를 비유로서 설명했다. 본래 진리는 말로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비유를 들어 설명한 것이다. 죽음명상 게송을 연상케 하는 ‘산에 대한 비유의 경’의 다섯 게송 역시 비유로서 설명했다. 마치 사방에서 커다란 산이 나를 향해 몰려 오는 것 같은 느낌에 대하여 죽음이 몰려 온 것처럼 사유하라는 것이다.
은폐되어 있는 죽음
사람들은 죽음에 대하여 생각하기 싫어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이렇게 시퍼렇게 살아 있는데, 이렇게 건강하게 살아 있는데 마치 칙칙한 폐가에 들어가는 것 같은 죽음을 생각하기 싫어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밝고 화려한 세계를 즐긴다. 그럼에도 죽음명상을 해야 하는 것에 대하여 전재성 선생은 백신주사 맞는 것과 같다고 했다.
모르면 답답하다. 모르면 두렵고 무섭다. 죽음도 그러할 것이다. 그러나 죽음이 무엇인지 안다면 두렵거나 무섭지 않을 것이다. 마치 죽음이라는 예방주사를 맞는 것과 같다. 정말 죽음이 덮쳤을 때 두렵거나 무서운 마음이 들지 않을지 모른다.
전재성 선생에 따르면 현대인의 죽음은 은폐되어 있다고 했다. 이를 ‘더러운 아름다움’이라고 했다. 장례식장에 가도 시체를 볼 수 없는 것이 좋은 예라는 것이다. 설령 사체를 본다고 해도 방부제 처리 되어 있고 꽃으로 장엄되어 있다면 이는 진정한 죽음의 모습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체는 내버려 두면 썩는다. 상온에서 삼일이 지나면 구더기가 생긴다고 한다. 이런 사체를 보았을 때 밥맛이 달아날 것이다. 그런데 죽음은 방부제와 꽃으로 은폐되어 있기 때문에 문상 가서 밥을 맛있게 먹는 것인지도 모른다.
실제로 죽음을 알 수 없지만 명상을 통해서
죽음의 명상을 어떻게 해야 할까? 부정관이 대표적이다. 사체를 보고 명상하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대념처경에서는 아홉 가지 부정관을 제시하고 있다. 어떻게 관찰하는가? 이는 “묘지에 던져져, 하루나 이틀이나 사흘이 지나 부풀어 오르고 푸르게 멍들고 고름이 흘러나오는 시체를 보듯”(D22.9)이라고 관하는 것이다.
청정도론에서는 팽창상 등 열 가지 부정상을 소개하고 있다. 이렇게 부정상 명상을 하는 것은 자신이 죽는 것처럼 관찰하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대념처경에서는 “이 몸도 이와 같은 성질을 가지고 있고 이와 같은 존재가 되고 이와 같은 운명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D22.9)라며 관찰하라고 했다.
전재성 선생에 따르면, 부정관은 비주얼하게 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렇게 부정관을 하면 지혜가 열릴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전재성 선생은 “명상을 통해서만 죽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실제로는 죽음을 알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자신의 죽음은 자신이 알 수 없다고 한다. 이는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 모른다. 의식이 끊어 졌을 때 기억을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죽음과 비슷한 체험은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명상으로 가능하다. 상수멸이 바로 그런 상태일 것이다.
상수멸은 거의 열반과 동의로서 쓰인다. 완전한 열반은 의식이 끊어진 것이고 상수멸은 의식이 끊어지지 않은 채 있는 것이다. 그래서 맛지마니까야 교리문답의 큰 경에서는 이 두 가지 차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벗이여, 죽어서 목숨이 다한 자에게는 신체적인 형성이 소멸하여 고요해지고, 언어적인 형성이 소멸하여 고요해지고, 정신적인 형성이 소멸하여 고요해지고, 생명력이 다하고, 체열이 소모되고, 감관들이 완전히 파괴됩니다. 지각과 느낌의 소멸을 성취한 수행승에게도 신체적인 형성이 소멸하여 고요해지고, 언어적인 형성이 소멸하여 고요해지고, 정신적인 형성이 소멸하여 고요해지지만, 생명력이 다하지 않고, 체열이 다 소모되지 않고, 감관들은 아주 청정해집니다. 벗이여, 죽어서 목숨이 다한 자와 지각과 느낌의 소멸을 성취한 수행승이 있는데, 이들 사이에 이러한 차이가 있습니다.”(M43)
사리뿟따 존자가 꽃띠따 존자에게 말한 것이다. 이는 상수멸과 죽음의 차이에 대해서 설명한 것이다. 상수멸은 의식은 끊어지지 않고 다만 명색만 끊어짐을 말한다. 이는 선정에서도 확인된다.
선정에서는 언어적 형성과 신체적 형성과 정신적 형성이 차례로 끊어진다. 이는 경전적 근거가 있다. 상윳따니까야 ‘까마부경’에 따르면 “장자여, 지각과 느낌의 소멸을 성취한 수행승에게는 언어적 형성이 먼저 소멸하고 그 다음에 신체적 형성이 소멸하고 그 다음에 정신적 형성이 소멸합니다.”(S41.6)라고 되어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다.
언어적 형성이 끊어진다는 것은 무엇을 말할까? 이는 사유와 숙고에 대한 것으로 2선정에서 끊어짐을 말한다. 신체적 형성은 호흡에 대한 것으로 4선정에서 끊어지고, 정신적 형성은 지각과 느낌의 소멸에 대한 것으로 9선정에서 끊어진다.
명상에서는 명색만 끊어진다. 의식은 끊어지지 않는다. 의식이 끊어진다면 모든 것이 끊어지기 때문에 죽음이다. 그런데 범부의 죽음은 오취온의 죽음이기 때문에 재생된다. 그러나 아라한의 죽음은 오취온을 벗어난 죽음이기 때문에 죽음이라는 말이 시설(施設)되지 않는다. 불사(不死)가 되는 것이다.
도현스님의 임사체험 이야기를 듣고
우리는 의식이 끊어지는 죽음을 결코 알 수 없다. 어느 누구도 죽어서 살아 돌아온 자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식이 끊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임사체험은 가능하다.
이번 금요모임에서 도현스님이 임사체험한 이야기를 들었다. 스님은 30대 때 임사체험을 경험했다고 한다. 자신이 죽은 모습을 본 것이다. 유체이탈을 한 것이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 있었던 것이다.
스님은 다시 몸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사람들은 이미 죽은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다시 몸으로 들어간 것이다. 이런 기억이 있는 것은 의식이 끊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의식이 끊어졌다면 당연히 기억할 수 없다. 죽은 자는 말이 없는 것과 같다.
자신은 자신의 죽음을 알 수 없다. 의식이 끊어졌을 때 죽은 상태가 되기 때문에 자신은 결코 자신의 죽음을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타인의 죽음을 통해서 죽음이 무엇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일종의 간접체험인 것이다.
자신의 태어남도 알 수 없다. 왜 그런가? 아직 자아의식이 형성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의식이 형성되어야 기억할 수 있는데 의식을 할 수 없는 아기라면 자신의 태어남을 모르는 것은 당연하다.
생, 노, 병, 사 이렇게 네 가지 중에서 우리가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노와 병뿐이다. 생도 모르고 사도 모른다. 의식이 있을 때 삶을 살다가 자신이 죽는 줄도 모르고 죽는 것이다. 또한 의식이 있을 때 삶을 살지만 자신이 태어난 것도 모르고 사는 것이다.
우리는 태어남도 기억할 수 없고 죽음도 기억할 수 없다. 그렇다고 우연히 생겨났다고 말할 수 없다. 또한 죽으면 끝이라고 말할 수 없다. 우리가 비록 태어남과 죽음을 기억하지 못하지만 타인의 태어남이나 타인의 죽음을 봄으로써 나에게도 태어남이 있었고 죽음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지금 마땅히 해야 할 일은
경에서 빠세나디왕은 해야 할 일이 많았다. 왕으로서 해야 할 일에 대하여 “권력의 도취에 몰두하고,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전념하고, 나라에서 안정된 지배를 확보하고, 광대한 영토를 정복하여 통치하는 왕족 출신의 왕에게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S3.25)라고 말한 것에서 알 수 있다.
빠세나디 왕은 왕으로서 해야 할 일에 몰두하고자 했다. 그러나 부처님은 그런 일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이 아니라고 했다. 그것 보다 더 시급한 일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죽음에 대한 대책이다. 동쪽에서 구름과 같은 큰 산이 모든 뭇삶들을 부수면서 이곳으로 다가 오고 있다고 했다. 이에 현명한 왕은 다음과 같이 답했다.
“세존이시여, 그와 같은 커다란 위협이 일어나서 모든 사람에게 죽음의 공포가 다가오고 사람이 살아남기조차 어렵다면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오로지 법대로 살고 올바로 살고 착한 일을 하고 공덕을 쌓는 것 이외에 다른 무엇이 있겠습니까?”(S3.25)
왕에게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이 있다. 권력을 유지하는 것도 해야 할 이고 감각적 쾌락을 즐기는 것도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죽음 앞에서는 아무런 소용없는 것이다. 더구나 그것이 악덕이라면 다음 생은 악처에 떨어질 것이다. 이럴 때 왕은 무엇을 해야 할까? 죽음이 사방에서 마치 벽이 좁혀 오듯이 옥죄어 올 때 무엇을 해야 할까? 그럼에도 감각에 도취되는 삶을 살아야 할까?
의식이 끊어지면 다른 세계에 태어날 수밖에 없다. 즐기는 삶을 살았다면 선처에 나기 힘들다. 설령 재생해서 전생을 기억할 수 없다고 할지라도 악처에 있게 된다면 마음은 편하지 않을 것이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할까? 빠세나디 왕의 말처럼 “오로지 법대로 살고 올바로 살고 착한 일을 하고 공덕을 쌓는 것 이외에 다른 무엇이 있겠습니까?(kimassa karaṇīyaṃ aññatra dhammacariyāya samacariyāya kusalakiriyāya puññakiriyāyā)”(S3.25)라는 말이 답이 될 것이다.
아유 반노 수캉 발랑
어제 백세를 산 사람의 장례식장에 다녀 왔다. 일세기를 산 사람은 장수의 행복을 누렸다고 볼 수 있다. 장수는 누구나 바라는 것이다. 그러나 단지 감각을 즐기는 삶만 살았다면 결코 잘 살았다고 볼 수 없다. 짧게 살았다고 하더라도 도를 이루었다면 굵게 산 것이다.
법구경에 “아유 반노 수캉 발랑(āyu vaṇṇo sukhaṃ balaṃ)”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장로가 보시하는 재가불자에게 해주는 축원의 말이다. 이는 “장수하고 아름답고 행복하고 건강하게 살기를!”(Dhp.109)라고 바라는 사대축원을 말한다. 이 세상에 이것처럼 아름다운 축원은 없을 것이다.
장로는 왜 사대축원을 해 주었을까? 이를 잘못 해석하면 “지금부터는 여생을 즐기며 사십시오.”라는 말이 된다. 남은 인생을 즐기며 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인생을 즐기며 살라고 했을 때 사실상 ‘저주의 축원’이 되기 쉽다는 것이다.
감각을 즐기며 오래살라고 말하는 것이 왜 저주의 축원인가? 이는 공덕을 짓는 삶이 아니기 때문이다. 공덕을 까먹는 삶이 된다. 더구나 오래오래 살면 악덕도 많아질 것이다.
감각을 즐기는 삶을 살다 보면 악덕이 되기 쉽다. 더 이상 공덕을 짓지 않고 남은 공덕 마저 소모하는 삶을 살았을 때 비참한 운명이 될지 모른다. 그래서 장수사며 남은 여생을 즐기며 살라고 말하는 것은 저주의 축원과도 같다고 말하는 것이다.
장로가 장수 등 사대축원한 목적은 분명하다. 오래오래 살면서 공덕을 쌓으라는 것이다. 오래오래 살며 공덕을 쌓으면 공덕의 총량도 늘어날 것이다. 백세까지 산다면 공덕은 엄청나게 축적될 것이다.
공덕이라 하여 반드시 보시공덕만을 말하지 않는다. 삼대공덕이 있다. 그것은 보시공덕, 지계공덕, 수행공덕을 말한다. 오래오래 장수하며 이 세가지 공덕을 쌓았을 때 잘 사는 것이다. 죽음의 벽이 사방에서 좁혀 올 때 공덕만이 탈출구가 된다. 장로가 “아유 반노 수캉 발랑”하며 축원하는 것은 오래오래 살아서 공덕을 쌓는 삶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2023-02-13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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