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니까야모임

둘이서 같은 길로 가지 말라고 한 것은

담마다사 이병욱 2023. 2. 25. 10:31

둘이서 같은 길로 가지 말라고 한 것은

 

 

매달 둘째 주와 넷째 주 금요일은 니까야모임 가는 날이다. 어제 224일에는 2월 두 번째 니까야모임에 갔었다. 막힐 것을 예상해서 일찍 출발했다. 보통 4시에 출발하지만 15분 앞당겨 시동을 걸었다.

 

맥도날도 고양점에서

 

목적지는 삼송테크노밸리이다. 그러나 네비에는 맥도날도 고양점으로 잡혀 있다. 저녁을 먹기 위한 것이다. 네비에는 1시간 25분으로 찍혀 있다. 수도권외곽순환고속도로를 이용하여 차를 몬다. 고양 인터체인지에서 빠져 나가면 된다.

 

 

맥도날도 고양점은 스타필드 맞은 편에 있다. 그리고 바로 전방 오백미터 지점에는 거대한 삼송테크노밸리가 보인다. 고양점에 도착하니 550분이었다. 고속도로에서 서 있는 차가 세 대나 서있어서 흐름에 방해 받아 늦었다.

 

 

맥도날드에서 늘 주문해 먹는 것이 있다. 빅맥을 말한다. 그러나 자주 먹으니 식상하는 것 같다. 메뉴를 바꾸어 보기로 했다. 더블불고기거버로 선택했다. 감자튀김과 콜라를 세트로 하여 6천원이다.

 

매장에는 젊은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머리가 허연 늙은 사람은 나 혼자 뿐이다. 그럼에도 여유 있게 먹었다. 이렇게 자주 활용하다 보니 이제 습관이 된 것 같다.

 

드라이브스루(drive-through) 방식 아파트형공장

 

한국빠알리성전협회 사무실 겸 서고는 삼송테크노밸리 B3 348호에 있다. 차가 건물 내부로 들어갈 수 있다. 참으로 어마어마하게 큰 건물이다. 차가 각 층의 있는 복도로 진입할 수 있고 더구나 사무실 내부로도 들어갈 수 있다. 이런 건물구조를 무엇이라 불러야 할까?

 

맥도날도 고양점을 보면 드라이브스루(drive-throuhg)방식으로 있다. 매장에서 키오스크로 주문해서 먹기도 하지만 차를 탄 채 주문해서 가져 가기도 하는 것이다. 이런 방식은 미국에서 오래 전부터 통용되던 것이다. 맥도날도가 본격적으로 영업을 하기 시작하던 50년대부터 시작되었다.

 

 

삼송테크노밸리는 맥도날도처럼 드라이브스루방식으로 되어 있다다. 차가 바로 문 앞까지 갈 뿐만 아니라 사무실 내부로도 들어갈 수 있다. 그래서일까 사무실은 층고가 높다. 2층내지 3층 정도 높이로 되어 있다. 이렇게 본다면 삼송테크노밸리는 드라이브스루 방식 아파트형공장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능엄신주 번역

 

서고에는 620분에 도착했다. 두 번째로 일찍 왔다. 항상 일찍 오는 사람이 있다. 홍광순 선생이다. 일찍 와서 서고와 사무실 청소를 한다. 나도 일찍 와서 쓰레기를 버리는 등 청소하려 하나 먼저 다 해버려서 할 것이 없다.

 

서고에 도착하면 전재성 선생은 번역에 몰두하고 있다. 인기척을 내면 그제서야 하던 일을 멈추고 맞이해 준다. 나는 먼저 보이차를 준비한다. 올 사람들을 위해서 미리 준비하는 것이다. 주전자에 뜨거운 물을 담아 보이차 덩어리를 넣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차 담당이 되었다.

 

전재성 선생은 번역에 약간 지쳐 있는 것 같았다. 아마도 능엄신주 번역이 막바지에 이른 것 같다. 자타카가 완역되고 난 다음 가벼운 마음으로 번역에 임한 듯 했으나 만만치 않은 것 같다. 그것은 아마 자료가 많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이야기를 들어 보니 능엄신주에 대하여 제대로 번역해 놓은 것이 없다고 한다. 최초로 산스크리트 원본에 근거하여 번역하는 것이 된다.

 

능엄신주는 한국불교에서 애송되는 주문 중의 하나이다. 특히 선종에서 선수행과 함께 염불선으로 활용되고 있는 듯 하다. 그래서 성철스님도 강조한 주문이라고 했다. 이런 주문을 번역할 필요가 있을까?

 

현재 사부니까야는 완역되었다. 법구경과 수타니파타 등이 있는 쿳다까니꺄야는 아직 번역되지 않은 경전이 많다. 자타카가 끝나면 아귀사나 천궁사, 또는 밀린다왕문경 등과 같은 아직 번역되지 않은 경전을 번역할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도중에 능엄신주 번역이 치고 들어 온 것이다. 유나방송 진행자 스님이 집요하게 요청하게 되어서 어쩔수 없이 번역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갈 갈이 먼 것 같다. 아직도 번역해야 할 것이 많다. 그럼에도 스님이 자꾸 들이미는 식으로 했을 때 니까야번역은 점점 늦어진다. 그 기간에 쿳다까니까야 중에 한 경전이라도 번역됐을지 모른다.

 

 

 

2월 두번째 니까야 모임에서는 모두 13명이 참석했다. 도현스님, 이병욱, 장계영, 홍승봉, 홍광순, 방기연, 이혜림, 최영희, 안진현, 유경민, 김경예, 김민희, 정진영 선생이 참석했다. 특히 홍순봉 선생이 오랜만에 나왔다. 작년 니까야회향모임 때 찍은 사진을 참석한 수대로 액자로 만들었는데 마지막으로 전달했다.

 

이번 모임에서는 네 개의 경을 합송했다. 짤막짤막한 경이어서 진도가 빨리 나갔다. 나는 이미 본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7-8년 전에 상윳따니까야 1시와함께 상윳따 2년동안 번역비교를 해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글을 쓰면서 수없이 인용한 것이다. 그래서 경을 보면 매우 익숙하다.

 

둘이서 같은 길로 가지 말라고 한 것은

 

가장 먼저 합송한 것은 전도선언에 대한 경이다. 이는 상윳따니까야 네 번째 상윳따 악마의 모음에 실려 있는 악마의 올가미에 대한 경’(S4.5)이다. 핵심내용을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많은 사람들의 이익을 위하여, 많은 사람들의 안락을 위하여, 세상을 불쌍히 여겨 하늘사람과 인간의 이익과 안락을 위하여 길을 떠나라. 둘이서 같은 길로 가지 마라.”(S4.5)

 

 

부처님은 둘이서 같은 길로 가지 말라.”라고 말했다. 왜 이렇게 말했을까? 이에 대하여 전재성 선생은 많은 사람들을 구제하기 위해서라고 설명했다. 전도하는데 한사람이 아쉽다면 둘이서 같이 길을 떠날 수 없을 것이다.

 

둘이서 같이 가지 말라고 한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이에 대하여 일당백이나 일당천이 되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부처님이 전도선언할 당시에 예순 명의 제자는 모두 아라한이었기 때문이다.

 

아라한은 어떤 존재일까? 부처님도 아라한이기 때문에 제자들이 아라한이 되었다면 부처님과 동급이 된다. 그렇다고 동일한 위치는 되지는 않는다. 제자들이 일반아라한이라면 부처님은 대아라한이 될 것이다. 열가지 명칭이 붙은 대아라한을 말한다.

 

부처님과 깨달음에 있어서 같은 깨달음을 이룬 제자들은 모두 아라한들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잘 이해하고 가장 청정한 상태가 되어서 궁극의 경지인 열반에 이른 자들이다. 이런 아라한들이 둘이서 함께 길을 가기 보다는 혼자서 길을 가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일당백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뿐나의 목숨을 건 전도

 

초심자들이나 배우는 입장에 있는 사람들은 둘이서 함께 길을 갈지 모른다. 도반은 청정한 삶의 전부라는 말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번뇌 다한 아라한은 혼자서 모든 것을 해낼 수 있을 것이다. 아라한이 아니더라도 홀로 전도하는 케이스도 있다. 뿐나의 전도이야기가 그것이다.

 

상윳따니까야 여섯 가지 모음’(S35)에 보면 뿐나의 경’(S35.88)이 있다. 뿐나는 서북인도출신의 부처님 제자였다. 뿐나는 안거를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가 전도하고자 했다. 그런데 고향에는 아직 부처님 가르침이 전달되지 않아서 이교도 구역이었다.

 

뿐나는 홀로 떠나고자 했다. 이교도가 있는 지역에 홀로 들어가는 것은 위험했을 것이다. 이런 경우 둘이서 또는 셋이서 들어가면 더 나을 것이다. 그럼에도 뿐나는 혼자 떠나고자 했다.

 

부처님은 홀로 떠나는 뿐나가 걱정되었다. 그래서 비난하고 욕한다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물어 보았다. 이에 뿐나는 그들이 손으로 때리지 않으니 다행으로 알겠다고 말했다. 손으로 때린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에 대하여 뿐나는 흙덩이를 던지지 않는 것을 다행으로 알겠다고 말했다. 흙덩이를 던지면 몽둥이로 때리지 않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겠다고 말했다. 최후로 그들이 죽이겠다고 하면 어떻게 하겠는지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세존이시여, 만약에 쑤나빠란따까의 사람들이 저에게 날카로운 칼로 목숨을 빼앗으면, 그때 저는 이와 같이 '세존의 제자는 육체적 관점이나 생명적 관점에서 오히려 괴로워하고 참괴하고 혐오하여 칼을 들길 원한다. 나는 그것을 원하지 않고도 칼을 든다' 라고 말하겠습니다. 세상에 존경받는 분이시여, 그때는 이와 같이 말할 것입니다. 바른 길로 잘 가신 분이시여, 그때는 이와 같이 말할 것입니다.”(S35.88)

 

 

뿐나는 두려움이 없었다. 목숨을 건 전도를 생각한 것이다. 이와 같이 생각해서까 이교도로 가득한 고향마을에서 부처님 가르침을 전하고자 했다. 그것은 아마도 수행승들이여, 처음도 훌륭하고 중간도 훌륭하고 마지막도 훌륭한, 내용을 갖추고 형식이 완성된 가르침을 설하라. 지극히 원만하고 오로지 청정한 거룩한 삶을 실현하라.”(S4.5)라는 전도선언의 명령을 실천한 것으로 본다.

 

뿐나는 이교도의 지역에 들어가 교화했다. 그 결과 오백명의 재가신도를 교화했다. 그리고 그 기간 중에 세 가지 명지를 증득했다. 아라한이 된 것이다. 그러나 결국 그 기간 중에 완전한 열반에 들었다.

 

경에서는 뿐나가 맞아 죽었다는 말은 없다. 다만 경에서 간략한 가르침으로 교시했으나 그는 죽었습니다.” (S35.88)라고 어느 제자가 부처님에게 말한 것에서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다. 뿐나는 이교도 구역에서 몽둥이로 맞아 죽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길거리전도사를 보면

 

길거리에서 전도사를 볼 수 있다. 그들은 지나가는 사람을 아무나 붙잡고 이야기 한다. 청하지도 않았는데 말을 거는 것은 피곤한 일이다. 이런 전도는 오히려 역효과가 날 수 있다. 마치 피라미 몇 마리 잡자고 널판지로 물을 때리는 것과 같다. 물소리에 큰 물고기는 모두 달아나 버릴 것이다.

 

종종 여호와의 증인신도들이 전도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들은 반드시 21조로 다닌다. 둘이서 함께 다니면서 집이나 가게, 사무실에 들어간다. 홀로 다니면 용기가 나지 않겠지만 둘이서 다니면 용기가 백배될 것이다.

 

청정한 삶의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

 

부처님은 둘이서 함께 가지 말라고 했다. 잘 배운 부처님의 제자라면 능히 두 사람 이상의 몫을 할 것이다. 아라한정도 된다면 일당백이 될 것이다. 아니 그 이상이 될지 모른다.

 

전도한다고 하여 길거리에서 아무나 붙잡고 말할 수 없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전도방식은 전도선언에 잘 표현되어 있다. 그것은 지극히 원만하고 오로지 청정한 거룩한 삶을 실천하라.”(S4.5)라는 말로 알 수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청정한 삶의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 가장 훌륭한 전도가 됨을 말한다.

 

청정한 모습을 보고서 이끌려 찾아 오게 될지 모른다. 또한 행복한 모습을 보고서 이끌려 찾아 오게 될지 모른다. 그럴 때 처음도 훌륭하고 중간도 훌륭하고 끋도 훌륭하고, 의미와 표현이 일치하는 가르침”(S4.5)을 설하면 될 것이다.

 

 

2023-02-25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