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니까야모임

지식인들의 사디스트적 가학에 대하여

담마다사 이병욱 2023. 3. 13. 10:06

지식인들의 사디스트적 가학에 대하여
 
 
나는 지금 분노하고 있다. 분노의 불길에 그 사람이 타버렸으면 좋겠다. 그러나 그 사람은 나의 분노와 무관한 것 같다. 분노의 불꽃에 내가 타들어가는 것 같다. 이 분노의 불길을 어찌할 것인가?
 
3월 첫 번째 금요니까야모임은 분노에 대한 경을 합송했다. 분노가 어떤 것인지, 어떻게 해야 분노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하여 경을 합송하고, 담마에 대해서 듣고, 담마에 대해서 토론했다.
 
3월 첫 번째 니까야모임이 3월 10일 한국빠알리성전협회 서고에서 열렸다. 이날 참석자는 전재성 선생을 비롯하여 홍광순, 이병욱, 장계영, 방기연, 안진현, 이성기, 김민희, 이혜림, 유경민, 정진영, 조규홍 선생이 참석했다. 모두 12명 참석했다.
 

 
멀리 원주에서도 참석한 분이 있다. 조규형 선생이다. 블로그 글을 보고서 참석했다고 한다. 블로그와 페이스북에 니까야모임 후기를 올려 놓고 있는데 영향을 준 것 같다.
 
니까야 모임은 누구나 언제든지 와서 들을 수 있고 토론할 수 있다. 그런데 모임이 오래 지속되다 보니 하나의 룰 아닌 룰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그것은 어쩌면 토론 규칙에 대한 것일지 모른다.
 
니까야 모임 토론의 규칙은 어떤 것인가? 주제를 벗어난 얘기를 하지 않는 것이다. 해당 경에 있는 가르침에 대해서만 얘기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그리고 질문 할 때는 간략하게 그리고 짧게 묻는다. 가능하면 일분 이내로 하는 것이 좋다.
 
질문에 질문을 하여 질문이 꼬리를 무는 것은 피해야 한다. 질문을 독점했을 때 개인적인 질문이 되어 버리고 만다. 참석자 모두가 골고루 질문할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한다. 그래서 질문할 때는 해당 경의 주제에 관하여 일분이내에 짧게 한번만 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3월 첫 번째 니까야모임에서는 네 개의 경을 합송했다. 교재 ‘오늘 부처님께 묻는다면’에서 14번경 ‘이 세계는 누가 만든 경인가’, 15번경 ‘깨달음을 이룬 뒤 말씀하시길 주저한 까닭은 무엇일까’, 16번경 ‘무엇을 없애면 편안히 잠자고 슬프지 않은가’, 17번경 ‘누가 그대를 비난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이렇게 네 개의 경을 합송했다.
 
교재는 짤막짤막한 경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럼에도 핵심 주제가 있다. 이런 주제는 어떤 니까야에서는 매우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여러 니까야에서 교차해서 설명되어 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주제임을 알 수 있다. 마치 법사가 했던 얘기를 반복하는 것과 같다. 분노에 관한 것도 그렇다.
 
불교는 탐, 진, 치의 소멸의 종교와도 같다. 부처님의 팔만사천법문을 보면 대부분 욕망과 분노와 어리석음의 소멸에 대한 가르침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욕망의 소멸에 대한 가르침이 가장 많지만 그것 못지 않게 분노의 제어에 대한 가르침도 많다. 다음과 같은 게송도 해당된다.
 
 
“분노를 없애면 편안히 잠자고
분노를 없애면 슬프지 않다.
참으로 바라문이여,
뿌리에는 독이 있지만 꼭지에 꿀이 있는
분노를 죽이는 것을 성자들은 찬양하니
그것을 없애면 슬프지 않다.”(S7.1)
 

 
이 게송은 분노의 가학성(加虐性)에 대한 것이다. 그것은 “뿌리에는 독이 있지만 꼭지에 꿀이 있는 분노(Kodhassa visamūlassa, madhuraggassa)”이라는 말로 알 수 있다. 분노라는 나무에는 열매가 있어서 달콤한 꿀과 같지만 동시에 뿌리에는 독이 있어서 자신을 죽일 수 있음을 말한다.
 
이 게송은 이번 경에서 한번만 나오는 것이 아니다. 상윳따니까야에서만 네 번 등장한다. 끊어서의 경(S1.71), 마가의 경(S2.3), 다난자니의 경(S7.1), 그리고 또 다시 끊어서의 경(S11.21)에 나온다. 이렇게 수차례 게송이 나오는 것은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일 것이다.
 
화가 났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떤 이는 화가 났을 때 화를 내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한다. 마치 배고프면 밥을 먹고 졸리면 자는 것처럼 감정이 일어나면 감정을 표출해서 해소해야 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은 다르다. 부처님은 이어지는 경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분노하는 자에게 다시 분노하는 자는
더욱 악한 자가 될 뿐,
분노하는 자에게 더 이상 화내지 않는 것이
이기기 어려운 싸움에 승리하는 것이네.”(S7.2)
 
 
분노에 대한 여러 표현이 있다. 도사(dosa)라는 말도 있고 뱌빠다(byāpāda)라는 말도 있다. 쓰임새는 각각 다르다. 도사는 흔히 탐, 진, 치라고 말할 때 사용된다. 미워하는 것 또는 증오(hatred)에 해당된다. 뱌빠다는 악의(ill-will)라고 보아야 한다. 악한 마음이 잠재되어 있는 것이다.
 
게송에서 분노에 대한 빠알리어는 코다(kodha)이다. 코다에 대한 빠알리사전을 찾아 보면 화(anger) 내는 것을 말한다. 분노가 밖으로 표출된 것이다. 이는 빠알리어 아가타(āghāta)라는 말과 유사한데 이는 타격을 가하는 것(striking)과 같고 심지어 죽이는 것(killing)과 같다.
 
코다는 단순한 분노가 아니다. 코다는 파괴적으로 작용하는 분노에 대한 것이다. 이런 분노에 대하여 ‘뿌리에 있는 독(visamūlassa)’과 같다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분노를 표출함으로 인하여 자신이 파괴되는 것을 말한다.
 
상대방에게 분노를 표출하면 상대방에게 타격을 가할 수 있다. 그런데 대면해서 말로서 타격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요즘은 에스엔에스(SNS) 시대이기 때문에 문자로도 타격을 가할 수 있다.
 
여러 개의 카톡방이 있다. 종종 불만을 표출하는 사람들이 있다. 넘어서는 안될 선을 넘었을 때 돌이킬 수 없다. 상대를 지정해서 타격했을 때 단절을 각오해야 한다.
 
타격을 가하는 순간 통쾌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 후유증은 만만치 않다. 상대방도 공격을 해 오기 때문이다. 이렇게 문자를 주고 받다 보면 개싸움이 되어 버린다. 보고 있는 사람도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도가 넘는 언어적 행위에 대하여 사과하지 않는다면 나중에 만났을 때 서로 쳐다보지도 않을 것이다.
 
요즘은 현실공간보다도 가상공간에서 만나는 경우가 많다. 실시간 소통이 가능한 페이스북이나 카톡방이 대표적이다. 견해가 서로 달랐을 때 논쟁이 벌어진다. 특히 이념에 대한 논쟁은 적대적이기까지 하다.
 
흔히 유유상종이라고 말한다. 끼리끼리 모여 노는 것을 말한다. 성향이 맞는 자들끼리 어울리는 것은 당연하다. 이념적 성향이든 정치적 성향이든 성향이 맞아야 다툼이 없다. 1번찍은 사람과 2번찍은 사람이 자신의 견해를 표출할 때 불화의 모임이 되기 쉽다.
 
모임은 화합의 모임이 되어야 한다. 싸우는 모임이 되어서는 안된다. 최상의 모임은 정진의 모임이 되어야 한다. 이는 다름 아닌 향상의 모임이다. 성장의 모임이기도 하다. 모임에는 누군가 본 받을 사람이 있어서 그 사람과 같이 되고자 할 때 정진의 모임이 될 수 있다.
 
자신과 견해가 다르다고 하여 상대방을 지목하여 타격을 가한다면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이는 게송에서 “뿌리에는 독이 있지만 꼭지에 꿀이 있는 분노(Kodhassa visamūlassa, madhuraggassa)”가 되기 쉽다. 이는 분노의 가학성에 대한 것이다.
 
분노에도 가학이 있다. 분노하면 일시적으로 쾌감을 느끼는데 이는 꿀과 같이 달콤한 것이다. 그런데 분노는 분노를 부른다는 것이다. 분노하면 할수록 더욱더 강한 쾌감을 느끼는 것이다. 이를 사디스트적 가학이라고 한다.
 
사디스트는 성적대상을 학대함으로써 성적인 만족을 얻는 이상 성욕을 가진 사람을 말한다. 이와 같은 사디스트적 성향을 가진 사람들을 주변에서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에스엔에스에서도 볼 수 있다. 자신과 정치적 견해를 달리 하는 사람들에게 사디스트적 가학을 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여기 야당 대표가 있다. 그는 대통령 후보까지 했었다. 그야말로 간발의 차이로 낙선되었다. 그러나 그는 요즘 정치적으로 큰 위기를 겪고 있다. 다음 번에 나온다면 유력한 후보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반대측 사람들은 싹을 자르려고 하고 있다. 이른바 선택적 수사와 선택적 기소라는 칼을 든 것이다.
 
털어서 먼지 나지 않는 사람 없다. 한번 사냥감이 되면 사냥이 끝날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여기에 정의는 없는 것이나 다름 없다. 오로지 권력의지만 작동되는 것이다. 여기에 언론도 한몫 한다.
 
언론 역시 선택적이다. 선택적 기사를 내보내는 것이다. 수많은 기사 중에서 기호에 맞는 것을 선택했을 때 선택적 수사와 선택적 기소와 다름 없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잠재적 정적을 제거했을 때 사냥은 끝날 것이다. 그런데 이런 사냥에 동조하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이다. 그것도 같은 이념을 지향하는 모임에도 있는 것이다.
 
이념은 이데올로기를 번역한 말이다. 그런데 모든 이념에는 폭력적 요소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배제로 나타난다. 자신과 견해가 맞지 않는 자를 축출하는 것이다. 설령 그 사람에게 잘못이 없다고 하더라도 대승적 결단을 요구한다. 그러나 내면을 들여다 보면 이해관계가 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자신이 속한 집단의 이익을 위해서 그 사람을 희생양으로 삼으려 하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 소위 지식인들이 있다. 많이 배운 사람들이다. 그들은 사회적 지위가 있기 때문에 오피니언 리더들이기도 하다. 이처럼 많이 배운 자들은 양비론자 또는 양시론자가 되기 쉽다.
 
지식인들이 양비론자 또는 양시론자가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자신과 자신이 속한 그룹에 이익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의 이익과 자신이 속한 집단에 피해가 가지 않는다면 누가 되든 상관하지 않는 양시론자가 되는 것이다.
 
지식인들은 정의로울까? 지식인이 양비론자나 양시론자가 되었을 때 정의와는 먼 것이 된다. 양비론이나 양시론은 이익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정의롭지 않은 것이 된다. 이렇게 본다면 지식인들은 비겁하다고 볼 수 있다.
 
지식인들에게 때로 사디스트적 경향도 본다. 그것은 욕 먹은 자를 욕하고, 맞은 자를 또 때리는 경우에 해당된다. 야당대표가 사냥감이 되었음에도 야당대표를 욕하고 때리는 지식인들을 보면 사디스트를 보는 것 같은데 나만 그런 것일까?
 
부처님은 욕먹은 자를 욕하고 맞은 자를 때리지 말라고 했다. 이를 “뿌리에는 독이 있지만 꼭지에 꿀이 있는 분노”라는 게송으로 표현했다. 이 말은 사디스트적 희생양을 만들지 말라는 말과 같다. 정치적으로 탄압을 받는 자나 사회적인 약자를 욕하고 때렸을 때 사디스트적 성향과 무엇이 다를까?
 
 
2023-03-13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