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글을 쓰고 있는 한 나는 관심종자

담마다사 이병욱 2023. 3. 5. 15:27

글을 쓰고 있는 한 나는 관심종자


그 사람의 한면만 보고 판단할 수 없다. 그 사람과 살아 보지 않는 한 그 사람의 계행이 어떤지 알 수 없다. 그 사람과 대화해 보지 않는한 얼마나 정직한지 알 수 없다. 그 사람과 토론해 보지 않는한 얼마나 지혜로운지 알 수 없다. 그럼에도 한정적인 정보로 그 사람의 대강을 판단할 수밖에 없다.

에스엔에스에서 본 그 사람은 초지일관이다. 오로지 한 주제에 올인하는 것 같다. 오로지 굥을 까는데만 올인했을 때 이를 어떻게 봐야 할까? 하나의 이미지로 굳어질 수밖에 없다. 어떤 사람은 미국 정치에 대해서 주로 다룬다. 종종 개인사에 대한 것도 말하지만 관심사는 미국정치에 대한 것이다. 그 사람은 수신과 제가가 이루어진 사람일까?

 

그 사람은 오로지 가족이야기만 한다. 다른 것은 관심 없는 것 같다. 세상이 미쳐 돌아가도 자신과는 무관한 것으로 여기는 것 같다. 이럴 때 변화를 주면 신선한 충격이 될 것이다. 어떤 사람은 꼰대 같다. 늘 입바른 소리만 한다. 마치 밥상머리 교육하듯이, 마치 학생을 훈계하듯이 말한다. 그는 인격적으로 완성된 인간일까?

그 사람의 관심사는 먹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에스엔에스에는 늘 한상 푸짐하게 차린 사진이 올라 온다. 그 사람의 인생은 먹는 것이 낙인 것 같다. 먹기 위해서 사는 것 같다. 그 사람은 늘 과거 이야기만 한다. 과거 사진을 설명하는 식이다. 그러다 보니 과거에 사는 사람 같다. 현재가 불만족스러워 그런 것일까?

에스엔에스에는 갖가지 인생들이 있다. 한면만 보고서 판단할 수 없지만 자료가 그것 밖에 없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침묵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보아야 할까? 그들은 머리가 텅 비었기 때문에 묵언하는 것일까? 아니면 도인이기 때문에 언표하지 않는 것일까? 사람을 함부로 판단할 수 없는 이유에 해당된다.

 


인터넷에 매일 글을 올리고 있다. 요즘은 스마트폰 메모앱에 엄지치기 하여 올리고 있다. 하루라도 올리지 않으면 안절부절하지 못한다. 주로 자극 받은 것에 대해서 올린다. 이렇게 자주 올리는 것도 어쩌면 관종, 관심종자일 것이다.

나는 관종일까? 그럴지도 모른다. 누군가 내글을 읽어 줄지 모른다는 기대감으로 쓰기 때문이다. 본래 작가는 독자가 읽는 것을 전제로 쓰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독자의 격려의 글 한마디에 크게 힘을 받는다고 말한다. 이런 주장에 동의한다. 블로그 초창기에 격려의 댓글에 고무 되었기 때문이다.

내가 관심종자인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관심 받지 않는다면 애써 쓸 필요가 없을 것이다. 누군가 내 글을 봐 줄 것을 기대하며 쓴다. 더구나 존경하는 사람이 본다고 생각하면 더 잘 쓸 수밖에 없다. 나를 잘 아는 사람이 본다고 생각했을 때 함부로 쓸 수 없다.

다양한 주제로 글을 쓰고자 한다. 한주제만 쓰다 보면 이미지가 굳어 진다. 그날 보고 듣고 느꼈던 것을 다 쓸 수 없다. 가장 인상 깊었던 것 하나만 써야 한다. 그것도 심도 있게 파고 들어가야 한다. 읽고서 남는 것이 있어야 한다. 시간낭비하게 해서는 안된다.

이제까지 다양한 주제로 글을 썼다. 그러나 불교에서 벗어나고자 하지는 않았다. 어떻게 해서든지 불교와 관련된 글이 되고자 했다. 일상에 대한 글을 쓸 때도 사구게 하나라도 넣고자 했다. 그래서 불교블로거라는 이미지가 형성되고자 했다.

어제 능인37기 법회 모임이 있었다. 4년 만에 모인 모임에서 어느 도반이 박사라고 말했다. 글 쓴 것을 보고서 그렇게 말한 것이다. 불교 전반에 대해서 해박한 지식을 동원하여 썼기 때문에 박사라고 말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박사가 아니다. 학사일 뿐이다. 그것도 불교와 전혀 관련 없는 전자공학도 출신이다. 이에 블로거로 불러 달라고 했다. 지금도 블로그에 매일 글을 올리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할 수 있다.

이왕이면 불교블로거로 불리고 싶다. 불교를 주제로 글을 쓰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할 수 있다. 2006년부터 지금까지 17년 째 쓰고 있다. 불교계에서 누적조회수가 가장 많기 때문에 어쩌면 넘버원 블로그일 수 있다.

종종 주제를 벗어난 것을 쓸 때가 있다. 개인에 대한 것이나 가족, 모임에 대한 것이다. 이런 것을 쓸 때 불편함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다. 종종 태클을 걸기 때문이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묵빈대처가 가장 바람직하다. 대꾸하지 않는 것이다.

부처님 가르침에 '브라흐마단다'가 있다. 이를 한자어로 범벌(梵罰)’이라고 한다. 디가니까야 마하빠리닙바나경(D16)을 보면, 부처님은 찬나에게 범벌을 내렸다. 아무도 찬나에게 말을 걸지도 말라고 했다. 찬나가 말을 걸면 대꾸도 하지 말라고 했다.

찬나는 부처님의 마부출신 수행승이다. 찬나는 부처님의 유성출가를 도운 것을 크게 자랑삼았다. 자신이 도와 주지 않았다면 오늘날 부처님도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다 보니 아상이 하늘을 찔렀다. 성자의 흐름에도 들지 못한 자가 부처님의 상수제자인 사리뿟따와 목갈라나 존자도 깔보기 일쑤였다.

에스엔에스에서도 찬나와 같은 사람이 있다.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태클을 거는 것이다. 어떤 때는 취중에 에스엔에스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 무시하면 그뿐이다. 부처님이 찬나에게 말 걸지 말라고 한 것처럼 일체 상대하지 않는 것이다.

누구나 찬나가 될 수 있다. 나도 예외가 아니다. 누군가의 글을 보고서 마음에 들지 않았을 때 한마디 하는 것이 이를 말한다. 물론 상대방은 응답은 없다. 찬나를 대하듯 무시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메세지는 전달되었을 것이다.

나는 언제까지 글을 써야 할까? 이런 상태라면 아마 임종의 순간까지 쓸지 모른다. 어쩌면 인생의 큰 파란곡절을 겪었을 때 그만두게 될지 모른다. 어떤 계기가 있어서 더 이상 쓰는 것이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을 때 그만 둘지 모른다.

어쩌다가 글을 쓰게 되었다. 글을 쓰는 것이 허물임에도 멈출 수 없다. 유튜버가 자신의 사생활을 공개했을 때 안타까움을 느끼는데 내 글도 어떤 이에게는 그렇게 비추어질지 모르겠다.

글은 아무리 잘 쓴다고 해도 허물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멈출 수 없는 것은 인정욕구 때문일 것이다. 나 좀 봐달라는 관심의 표현일 수 있다. 글을 쓰는 한 나는 관심종자가 될 수밖에 없다.


2023-03-05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