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공양청 참여를 요청받고

담마다사 이병욱 2023. 3. 23. 17:18

공양청 참여를 요청받고
 
 
공양청 참여를 요청 받았다. B도반이 전재성 선생을 공양청 하겠다고 했다. 이에 흔쾌히 동의했다. 자주 있는 일이 아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날자를 잡는 것이었다.
 
공양청은 평일 점심 때 하기로 했다. 점심시간을 활용하여 밥을 먹으면서 담마토크 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3월 29일(수)로 잡았다. 그러나 전재성 선생 일정과 겹쳤다.
 
전재성 선생은 3월 28일부터 4월 5일까지 독일 여행이 예정되어 있다. 페터 노이야르 선생을 만나러 가는 것이다. 날자가 어긋났다. 공양청을 언제 해야 할까? 귀국 후에 하는 것도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이왕이면 출발하기 전에 시행하기로 했다.
 
여행 가기 전에 공양청하기로 한 것은 충분한 명목이 되었다. 그래서 공양청 날자를 3월 23일(목)로 잡았다. 공양청 장소는 연희동에 있는 수빈한정식이다.
 
공양청 날자가 되었다. 오전 11시 30분까지 도착해야 한다. 그러나 시간을 잘못 계산해서 다급해졌다. 막연하게 1시간 이하로 갈 것으로 생각했다. 막상 네비를 켜보니 1시간 이상 걸렸다. 이를 어찌 해야 할까? 더구나 더구나 출발할 때 시계를 보니 10시 반이 넘었다. 이대로 가면 지각이다. 그것도 30분 지각이 될 것 같았다.
 
약속장소에 늦어 본적이 별로 없다. 항상 일찍 도착하여 여유를 갖는다. 그러나 이날 마무리 작업하는 것이 늦어짐에 따라 시간이 늘어졌다. 도저히 약속시간에 도착할 수 없었다. 30분 늦게 도착하겠다고 연락을 했다.
 
30분 늦으면 크게 늦는 것이다. 오분이나 십분 늦으면 그럭저럭 보아 줄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30분 지각하면 크게 실례가 된다. 어떻게 해야 할까? 최대한 밟는 수밖에 없다. 그런데 서부간선도로 지하도로가 살려 주었다. 무려 10키로에 달하는 유료 지하도로를 시속 80키로로 달리니 20분이 단축된 것이다.
 
약속시간에 10분 늦었다. 사람들은 모두 모여 있었다. 전재성 선생을 비롯하여 담마와나 선원의 C도반, B도반, L도반이 있었다. 나까지 합하여 모두 다섯 명 모였다.
 

 
공양청 주최자는 B도반이다. B도반은 떡갈비정식으로 주문했다. 점심을 들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했다. B도반을 제외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전재성 선생이 처음이다. 그러나 오늘 온 도반들은 모두 안면 있는 사람들이다.
 
C도반을 약속장소에서 본 것은 뜻 밖이었다. 누가 나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C도반을 보자 무척 반가웠다. C도반으로 인하여 법명 담마다사를 갖게 되었다. 그런데 약속장소에서 C도반을 본 것이다. C도반은 현재 담마와나선원의 신도회장으로서 스님의 공양도 관리하고 있다.
 
도반들은 공양을 하면 공덕이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이는 테라와다불교에서 늘 강조하는 사항이기 때문이다. 보시와 관련하여 니까야에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어떤 사람은 조금 가졌어도 베풀고
어떤 사람은 많이 가졌어도 베풀지 않는다.
조금 가졌어도 나누어주는 보시는
천 배의 보시와 동일한 가치가 있다.”(S1.32)
 
 
참으로 아름다운 게송이다. 절대 금액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부자의 큰 보시가 가난한 자의 작은 보시보다 공덕이 더 많은 것은 아니다. 한달에 일억을 버는 부자가 보시한 백만원 보다 한달에 백만을 버는 가난한 자가 십만원을 보시하는 것이 공덕이 더 크다. 왜 그런가? 비율로 따졌을 때 그렇다는 것이다.
 
일억을 버는 자가 백만원을 보시한다면 1% 보시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백만원 버는 자가 십만원을 보시하면 10%가 된다. 보시금액에 있어서 부자가 월등하게 많다. 그러나 비율로 보았을 때는 부자는 열배 아래이다. 이런 이유로 가난한자가 부자보다 열배 더 큰 공덕을 짓는 것이 된다.
 
보시 금액을 절대적 금액으로 평가해서는 안된다. 보시금액은 상대적으로 평가해야 한다. 아무리 작은 보시금액이라 하더라도 비율이 높다면 부자의 보시보다 열배, 백배, 천배 더 큰 공덕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조금 가졌어도 나누어주는 보시는 천 배의 보시와 동일한 가치가 있다.”(S1.32)라고 한 것이다.
 
보시를 즐겨하고 공양청하기를 즐겨하는 도반들이 있다. 그들은 부자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다. 이미 보시의 공덕, 보시의 즐거움을 아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함께 참여하기를 요청하는 것이다.
 
재가자에 대한 보시와 공양청은 출가자에 대한 것과 공덕의 과보에 있어서 다르지 않다. 중요한 것은 청정에 달려 있다. 재가자라고 하더라도 청정한 삶을 산다면 출가자 못지 않은 것이다. 출재가를 막론하고 공덕이 되는 보시는 청정에 달려 있다.
 
보시를 하는 자나 보시를 받는 자는 청정해야 가장 수승한 보시가 된다. 그래서 맛지마니까야 ‘보시에 대한 분석의 경’에서는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탐욕을 떠난 자가 탐욕을 떠난 자에게
행위의 과보가 크다는 믿음을 가지고
여법하게 얻어진 것을 흔쾌한 마음으로 보시하면
그 보시는 세간적 보시 가운데 최상이라고 나는 말한다.”(M142)
 
 
최상의 보시는 청정한 자가 청정한 자에게 보시하는 것이다. 그것도 여법하게 얻은 것을 보시하는 것이다. 부정하게 얻은 것으로 보시하는 것은 가치가 없다. 그래서 “그 보시는 눈물과 상처로 얼룩진 것이니 올바른 보시로서 가치가 없고, 천 사람이 바치는 재물조차도 바른 보시에 비해 십육분의 일의 가치도 없다네.”(S1.32)라고 했다.
 
공양청을 하는 것도 보시에 해당된다. 여행 경비를 챙겨 드리는 것도 보시에 해당된다. 이런 절호의 찬스를 놓칠 수 없다. 공양청 하자고 했을 때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B도반은 왜 공양청을 하고자 했을까? 추측해 본다. 그것은 아마도 전재성 선생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표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B도반은 금요니까야모임의 멤버이다. 동시에 한국빠알리성전협회 후원자이기도 하다.
 
B도반은 이번 자타카 출간을 앞두고 후원했다. 사실 나는 B도반이 후원하도록 권유했다. 이에 B도반은 기꺼이 능력껏 후원했다. 그런데 후원을 하면 감사의 글이 실린다는 사실이다. 그 결과 자타카 서문에 B도반의 이름이 실리게 되었다. 또한 자타카가 출간 되었을 때 택배로 받아 볼 수 있게 되었다. 아마도 이와 같은 감사의 마음에 공양청 했을지 모른다. 더구나 독일여행을 간다고 하니 더 명목이 생긴 것이다.
 
식사를 하면서 C도반이 주로 질문했다. C도반에 따르면 담마와나선원에서 청정도론 강연이 있는데 교재로서 한국빠알리성전협회본도 사용된다고 했다. 초기불전연구원본만 사용하지 않고 함께 사용한다는 것이다. 상당히 바람직한 현상이다.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두 종류의 번역서가 있다. 대부분 스님들은 사부니까야의 경우 초기불전연구원본을 사용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왜 그럴까? 어쩌면 편견일지 모른다. 초록은 동색이고 팔은 안으로 굽는다. 스님들은 스님들이 번역한 것을 더 선호하는 것인지 모른다. 그러나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담마와나선원에서는 니까야 보급운동을 펼치고 있다. 스님들에게 니까야를 구매해서 보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의 패턴이 있다는 것이다. 사부니까야의 경우 초기불전연구원본만을 구매해서 보시한다는 것이다. 초기불전연구원에 없는 번역서, 예를 들면 법구경, 수타니파타, 테라가타, 테리가타, 이띠붓따까, 우다나, 율장 등은 빠알리성전협회본을 보시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어느 스님들은 사부니까야의 경우 빠알리성전협회본만 찾는 다고 한다. 비교해 보면 드러나기 때문일 것이다.
 
식사가 끝나자 자리를 옮겼다. 수빈한정식 바로 옆에 카페로 갔다. 커피, 대추차등 각자 취향대로 마실 것을 시켰다. 이럴 때 어떤 이야기를 해야 할까?
 
시간은 한정되어 있다. 점심시간에 잠시 시간을 냈기 때문에 한시간가량 여유밖에 없다. 차를 마시면서 이야기하면 계속 리필이 되기 때문에 이야기가 무한정 길어진다. 그러나 커피나 대추차 등 음료수를 마시면 시간이 한정된다. 다 마시면 일어나야 하는 것이다.
 
B도반이 뇌과학자의 견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이는 뇌과학자로 유명한 B박사의 줌강연을 듣고 질문한 것이다.
 
뇌과학자에 따르면 의식은 뇌에서 나왔고 뇌를 자극하여 의식도 조작된다고 했다. 또한 뇌과학자는 두뇌만 발달시키면 되기 때문에 수행을 할 필요도 없다고 한다. 이런 견해를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할까?
 
뇌과학자는 유물론자이다. 뇌라는 물질을 연구하기 때문에 유물론자가 된 것이다. 실제로 그는 자신이 유물론자라고 했다. 이는 B도반이 줌강연 할 때 들은 것이라고 한다.
 
부처님당시에도 유물론자가 있었다. 아지따 께싸깜발린과 같은 외도의 스승이 대표적이다. 그런데 유물론자들은 모두 ‘없다(無)’고 말한다는 것이다. 이는 경에서 “보시도 없고, 제사도 없고, 헌공도 없고, 선악의 행위도 없고, 이 세상도 없고, 저 세상도 없고, 어머니도 없고, 아버지도 없고, 화생하는 뭇삶도 없다.”(S24.5)라고 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유물론은 단멸론과 동의어이다. 몸이 무너져 죽으면 정신도 따라서 죽기 때문에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는 견해를 말한다. 이와 같은 견해를 가지면 무자 행렬이 되기 쉽다. 무자로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을 모조리 부정해 버리는 것이다.
 
오늘날 뇌과학자는 현대판 유물론자나 다름 없다.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과학적 유물론자’가 될 것이다. 그것은 물질을 대상으로 한 것이기 때문이다.
 
유물론자들은 물질만 탐구할 뿐 정신은 탐구하지 않는다. 뇌과학자에 따르면 정신도 물질에서, 즉 뇌에서 나온다고 본다. 이렇게 본다면 오늘날 현대판 유물론자들 역시 “보시도 없고, 제사도 없고, 헌공도 없고, 선악의 행위도 없고, 이 세상도 없고, 저 세상도 없고, 어머니도 없고, 아버지도 없고, 화생하는 뭇삶도 없다.”(S24.5)라고 볼 것임에 틀림 없다.
 
C법우님은 자신이 명상 중에 체험한 것을 얘기 했다. 특히 호흡과 관련하여 깊게 얘기 했다. 이와 관련하여 전면호흡과 전신호흡에 대해서 말했다. 이는 빠리무카사띠(parimukha sati)와 관련이 있다.
 
전재성 선생은 대념처경(D22)에 나오는 빠리무카사띠에 대하여 반드시 코끝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무카가 반드시 코나 얼굴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호흡수행 할 때 코끝에 집중하라는 말이 있다. 그런데 전재성 선생은 코끝에 대한 다른 해석을 내 놓았다. 코끝은 코의 뿌리, 즉 두뇌 한가운데를 의미한다고 했다. 그곳을 기점으로 얼굴 둘레로 또는 머리둘레로 새김을 확립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렇게 본다면 빠리무카사띠는 머리둘레뿐만 아니라 몸둘레 전체로도 확대될 수 있다. 코끝이나 배의 움직임 등 어느 특정 부위를 사띠하는 것이 아니라 몸전체를 사띠하는 것이다.
 
사띠용어와 관련해서도 얘기를 나누었다. 사띠를 마음챙김으로 번역한 것은 영어 마인드풀니스를 우리말로 옮긴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사띠의 진정한 의미는 기억에 있다고 했다. 바로 이전 것을 기억하는 것이다. 이것이 되지 않으면 치매 환자와 같은 상태가 될 것이다.
 
전재성 선생에 따르면 사띠 용어는 독일어 번역을 참조 했다고 한다. 사띠에 대한 독일어 번역을 보면 기억이라는 말이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말로는 새김이라는 말이 최상이 된다고 했다. 왜 그런가 사띠는 기억과 지혜라는 말을 모두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띠를 새김으로 번역한 것은 경전적 근거가 있다. 이는 “최상의 기억과 분별을 갖추어 오래 전에 행한 일이나 오래 전에 행한 말도 기억하고 상기하며 새김을 확립한다.”(A8.30)라는 오력의 가르침으로 알 수 있다. 여기서 최상의 기억과 분별(paramena satinepakkena)이 핵심이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것은 모두 진리의 말씀이다. 진리의 말씀을 기억(sati)하고 분별(nepakka)하는 것이다. 여기서 분별은 지혜를 뜻한다. 주석에서는 분별을 뜻하는 네빡까에 대해서 “그것은 지혜와 결합되면 강력한 힘을 갖추지만 분리되면 그렇지 못하다.” (Srp.III.234)라고 했기 때문이다.
 
사띠 번역어는 마음챙김, 마음지킴, 알아차림, 새김 등 다양하다. 이 중에서 가장 적확한 번역어는 아마도 새김일 것이다. 이는 주석에서 사띠에 대하여 “오래 전에 이루어진 것을 기억하여 지속적으로 새기는 것”(Smv530.)이라고 정의 내렸기 때문이다.
 
사띠 번역 용어는 중요하다. 용어를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수행 방향이 달라진다. 그래서일까 최근 제따와나선원의 일묵스님은 마음챙김이라는 말 대신에 기억확립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한국마하시선원의 일창스님은 새김으로 쓰고 있다.
 
새김은 기억과 지혜가 결합된 말이다. 수행체험하는 것도 기억이고, 가르침을 새기는 것도 기억이다. 수행은 지혜에 대한 것이고 가르침 역시 지혜에 대한 것이다. 수행 체험을 기억하고 가르침을 기억하는 것은 모두 지혜의 영역에 해당된다. 이런 기억과 지혜는 새겨야 할 것이다. 그래서 주석에서 사띠에 대하여 “오래 전에 이루어진 것을 기억하여 지속적으로 새기는 것”(Smv530.)이라고 정의내렸을 것이다.
 

 
커피 타임이 끝났다. 카페에서 무한정 자리만 잡고 앉아 있을 수 없다. 다 마셨으면 일어나야 한다. 오후 1시 반이 되자 일어났다. 한정식 비용은 B도반이 지불했지만, 카페에서 커피 등 음료수 비용은 C도반이 지불했다.
 
전재성 선생은 페터 선생을 만나러 3월 28일 독일로 출발한다. 거의 20년만에 만날 것이라고 한다. 전재성 선생이 젊은 시절 독일 유학 했을 때 큰 도움을 준 성자와 같은 분이다. 이는 전재성 선생의 자전적 에세이 ‘거지성자’에서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B도반의 요청으로 공양청에 참석하게 되었다. 이런 기회는 자주 오지 않는다. 이런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더구나 페터 선생을 만나러 독일에 간다고 했다. 감사의 마음을 전하기 위해서 여비를 준비했다. 여행 잘 다녀 오시라고.
 
 
2023-03-23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