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망한 인생이 아니라 마치는 인생이 되어야

담마다사 이병욱 2023. 3. 28. 07:58

망한 인생이 아니라 마치는 인생이 되어야
 

새벽이다. 6시에 가까운 새벽이다. 6시가 넘으면 아침이라 해야할 것이다. 하루 일과의 시작이다. 오늘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은 삶의 축복이다.

월말이다. 매달 27일이 되면 월말 결산을 해야 한다. 마감내역서를 작성하는 것이다. 25일까지 납품된 것에 대한 내역서이다. 오늘은 전자명세표를 작성해야 한다.

L사에 대한 매출마감내역서는 성적표와 같다. 월수입이 얼마가 될지 대략 짐작할 수 있다. 매출에서 매입을 빼면 수입이 된다. 만족스럽지 않다. 간신히 유지할 정도이다. 주거래통장의 마이너스는 언제나 해소될까?

반기가 되면 반기성적표를 받는다. 부가가치세 신고날은 6개월 성적표 받는 날이다. 신고된 매출과 매입이 드러나기 때문에 얼마나 벌었는지 알 수 있다. 여전히 만족스럽지 않다.

사업을 하고 있다. 개인사업이다. 홀로 하고 있기 때문에 일인사업자이다. 원맨컴퍼니라고 말할 수 있다. 혼자 북치고 장구치고 다한다. 수주를 받고 설계를 하고 제작해서 납품하는 것이다. 물론 직접 제작하는 것은 아니다. 제작의뢰한다. 이때는 갑이 된다. 그러나 갑질 할 정도는 아니다. 잘 만들어 달라고 부탁해야 한다.

원맨컴퍼니의 사장은 모든 것을 다해야 한다. 경리 일도 할줄 알아야 한다. 그렇다고 부기를 하는 것은 아니다. 규모가 된다면 사람을 고용할 것이다. 그럴 형편이 되지 않는다. 회계사무소에 부기를 맡길 처지도 되지 않는다. 매년 5월에 내는 종합소득세 신고 때는 회계사무소를 활용한다. 일년에 딱 한번 십만원 주고 이용한다.

나홀로사업 17년째이다. 수주에서 납품까지, 세금업무까지, 커피를 타마시는 일까지, 쓰레기통을 비우는 일까지 홀로 다한다. 수입은 들쑥날쑥이다. 해가 가면 갈수록 수입은 줄어드는 것 같다. 주거래 고객 L사가 지탱해 주고 있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기 마련이다. 이런 상태로 천년만년 갈 수 없다. L사가 버린다면 어떻게 될까? L사가 버팀목이다. L사 이외 다른 고객사는 없는 것이나 다름없다. 언젠가는 끝날 날이 있을 것이다. 그때가 사업을 접는 날이 될 것이다.

사업을 해서 돈을 벌지 못했다. 버텨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주거래통장은 늘 마이너스 상태이다. 17년 사업에서 빚을 지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으로 생각한다. 홀로 일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일감이 있으면 있는대로 살고 일감이 없으면 없는대로 사는 것이다.

사업을 해서 남은 것이 없다. 돈을 말한다. 그러나 남은 것도 있다. 그것은 사업의 흔적이다. 매출과 매입에 대한 세금계산서철이 남은 것이다. 사업17년 국세청 신고자료만 남았다. 그동안 번 돈은 온데간데 없지만 마치 사업의 흔적처럼 서류만 남아 있는 것이다.

사업을 하기전에는 월급생활자로 20년 살았다. 20년 세월동안 남은 것은 무엇일까? 당연히 돈은 남아 있지 않다. 이력만 남아 있다. 국민연금 수령을 위한 내역서를 보았더니 그동안 다녔던 회사 명단이 눈에 띄였다. 크고 작은 회사가 열군데가 넘는다. 기록만 남은 것이다.

지난 세월을 돌아 본다. 사십년 가까운 사회생활에서 빛나던 시절은 언제였을까? 아마 신입사원시절이었을 것이다. 자만심에 우쭐하던 때였다. 그러나 그 후 월급생활자의 삶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여러 회사를 전전하다 결국 퇴출로 끝났다.

월급생활자로서의 삶은 나의 삶이 아니다. 시간을 저당 잡힌 삶이다. 내 시간이 아니다. 어쩌면 노예의 시간이라고도 볼 수 있다. 생계를 위해서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보냈다. 세월이 참 빨리 흘러 갔다. 아침인가 싶으면 저녁이고, 월요일인가 싶으면 주말이고, 연초인가 싶으면 연말이었다. 그렇게 20년 흘렀을 때 남는 것이 없었다.

직장생활 20년 동안 남는 것이 없는 것은 아니다. 흘러가는 세월을 붙잡아 두기라도 하듯이 기록을 남겼다. 업무노트를 남긴 것이다. 입사는 1985년에 했지만 1987년부터 기록을 남겼다. 일본 고문의 기록하는 습관에 감명받았다. 업무노트에 기록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써 놓았다. 회의내용은 물론 아이디어, 심지어 낙서까지 해 놓았다. 세월은 갔지만 다이어리는 남아 있다.

 


직장생활 20년 동안 남은 것이 또 하나 있다. 그것은 개발한 제품이다. 셋톱박스를 개발할 때마다 기념으로 집에 가져다 놓았다. 다 가져온 것은 아니다. 모아 놓으니 수십대가 된다. 이것도 삶의 흔적일 것이다.

삶의 흔적을 남기고자 한다. 직장 다닐 때는 시간에 얽매여 있어서 업무노트와 개발제품만 남겼다. 개인사업자로 살면서부터는 시간이 자유로워서 글을 썼다. 일하는 시간보다 노는 시간이 더 많아서 글을 쓴 것이다. 그러다 보니 글이 남았다.



“일 겁의 세월만 윤회하더라도
한 사람이 남겨놓는 유골의 양은
그 더미가 큰 산과 같이 되리라고
위대한 선인께서는 말씀하셨네.”(S15.10)



상윳따니까야에 실려 있는 게송이다. 무명에 덮이고 갈애에 속박된 한량없는 윤회에서 일겁만 살아도 그 뼈무더기가 산을 이룰 것이라고 한다.

개인사업자로 17년 살면서 쓴 글이 산이 된 것 같다. 블로그에 7천개가량 글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도 장문이다. 이제 가시화 할 때가 되었다. 책으로 만드는 것이다. 현재 89권 만들었다. 아직도 5년 분량을 더 만들어야 한다. 이것도 삶의 결실이라 해야 할 것이다.

수행자에게는 결실이 있어야 한다. 수행자의 삶의 결실은 무엇일까? 그것은 도와 과를 이루는 것이다. 재가자의 삶의 결실은 무엇일까? 자손과 돈을 삶의 결실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음생을 준비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삶의 결실 아닐까?
 
생을 마칠 때 여러 표현이 있다. 대게 죽었다고 말한다. 좀더 높여서 사망했다고 말한다. 가장 좋은 말은 열반일 것이다. 다시는 태어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쉽지 않다. 발심을 하고 나서 얼마나 많은 생을 살아야 할지 모른다. 다행히 삶의 정초(定礎)가 되어 있다면 몇 생 이내에 끝날지 모른다.
 
삶은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다음생이 이어진다. 이번 생으로 끝난다고 생각한다면 단멸론이 될 것이다.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고 보는 허무주의자가 된다. 그결과 막행막식하는 삶이 될 것이다. 망하는 삶이 되기 쉽다.
 
생을 마칠 때 졸(卒)이라는 표현도 쓴다. 신분에 따라 쓰는 표현은 다르다. 왕이 죽으면 붕(崩)자를 쓴다. 태산이 무너진다는 뜻이다. 군주이하 귀족에게는 졸자를 쓴다고 한다. 관직을 마칠 때도 졸자를 쓴다. 수행자에게는 어떤 말이 적합할까?
 
수행자의 사망은 새로운 삶의 시작이다. 이 세상을 마치고 저 세상으로 가는 것이다. 이때 이 세상은 마치는 것이 된다. 그래서 한자어 종()자가 적합할 것 같다. 그것도 착하고 건전하게 마쳐야 한다. 이런 의미로 본다면 선종(善終)은 대단히 훌륭한 말이다.
 
죽음이 사(死)나 망(亡)이나 졸(卒)이 되어서는 안된다. 인생이 망한 죽음이 되어서는 안된다. 한번뿐인 인생이긴 하지만 이번 생을 마치면 다음 생이 이어진다. 인생이 마치는 죽음이 되어야 한다. 이렇게 본다면 이번 생은 잘 마쳐야 한다. 다음생을 위한 발판이라도 마련해 놓아야 한다. 망한 인생이 아니라 마치는 인생이 되어야 한다.

매월 월말이 되면 월말결산을 한다. 월말성적표가 나오는 것이다. 나의 인생 성적표는 어떻게 나올까? 월급생활자로 산 시절과 사업자로 산 시절로 구분할 수 있다. 전자는 나의 삶이 아니었다. 후자는 나의 삶이었다. 사업자로 살면서부터 나의 인생을 산 것이다.

하루일과가 시작되었다. 오늘 해야 할 일이 있다. 매출 전자명세표도 작성하고 글도 써야 한다. 순례기도 써야 하고 책도 만들어야 한다. 무엇보다 갈 데가 있다는 것이다. 사십대 때 퇴출 되어서 정말 다행으로 생각한다.

2023-03-28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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