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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권 담마의 거울 2017 IV, 불교는 진보의 역사인가 아니면 퇴보의 역사인가?

담마다사 이병욱 2023. 4. 4. 09:59

90권 담마의 거울 2017 IV, 불교는 진보의 역사인가 아니면 퇴보의 역사인가?
 
 
사월의 봄바람이 부드럽다. 일년 중에 가장 축복받은 계절 중의 하나이다. 인생의 봄날이라고 할 때 아마도 사월과 오월을 말할 것이다. 그것은 꽃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꽃이 피면 열매를 맺는다는 사실이다. 도를 이루어 과를 얻는 것과 같다.
 
한송이 꽃을 피우기 위해서는 조건이 맞아야 한다. 적절한 토양과 적절한 수분이 있어야 한다. 또한 시절인연이 있어야 한다. 한송이 꽃은 조건발생적이다. 꽃은 필만해서 피는 것이다.
 
꽃은 피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꽃이 피면 반드시 열매를 맺는다. 모든 일이 그럴 것이다. 공부를 하면 성적이 오르고 원하는 대학에 가는 것도 꽃이 피면 열매를 맺는 것과 같다.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는 것도 꽃이 피면 열매를 맺는 것과 같다. 수행자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수행자에게는 삶의 결실이 있다. 꽃이 피면 열매를 맺는 것과 같다. 수행자에게 어떤 삶의 결실이 있을까? 먼저 눈에 보이는 삶의 결실이 있다. 가사를 입었을 때 존중받는 것을 말한다.
 
길거리에서 스님을 만났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 신심 있는 불자라면 멈추어 서서 합장하며 반배라도 올릴 것이다. 가사를 입은 자에 대한 존중의 표시이다. 그래서 아자따삿뚜 왕은 수행승의 눈에 보이는 삶의 결실에 대하여 “저는 그에게 인사하고 일어나 환영하고 자리를 권하고 의복, 음식, 처소, 필수약품을 마련해 초대할 것입니다.”(D2.35)라고 말했다.
 
수행승에게 눈에 보이는 삶의 결실만 있는 것은 아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도 있다. 그것은 수행의 성과일 것이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네 가지 선정을 성취하는 것(四禪), 통찰에 대한 앎과 봄(知見), 정신으로 이루어진 몸에 대한 앎(意所成身), 다양한 신통에 대한 앎(六神通), 하늘 귀에 대한 앎(天耳通), 타자의 마음에 대한 앎(他心通), 전생의 삶의 기억에 대한 앎(宿命通), 하늘눈에 대한 앎(天眼通), 번뇌의 부숨에 대한 궁극적인 앎(漏盡通)을 들었다. 도를 이루어 과를 맺는 것이 수행자의 진정한 삶의 결실임을 말한다. 그렇다면 재가자의 삶의 결실은 어떤 것일까?
 
재가자에게도 삶의 결실이 있다. 현재 하고 있는 일이 삶의 결실에 대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코끼를 타는 자, 말을 타는 자, 수레를 타는 자, 궁수, 기수, 사령관, 보급전사, 왕족출신의 고위관리, 돌격병, 큰 코끼리와 같은 영웅, 용사, 흉갑을 입은 병사, 노예병사, 요리사, 이발사, 목욕사, 제과사, 화만사, 염색공, 직공, 갈대세공인, 도공, 산술가, 경리”(D2.15)와 같은 사람들을 들었다.
 
재가자에들에게는 다영한 직업이 있다. 다양한 직업에 종사해서 생계를 유지하고 있는데 이를 삶의 결실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경에서는 “그들은 모두 현세에서 눈으로 볼 수 있는 기능의 결실로 생활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것으로 자신을 안락하게 하고 행복하게 합니다.”(D2.14)라고 했다. 글쓰기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글을 쓰면 남는다. 돈은 쓰고 나면 남는 것이 없지만 한번 써 놓은 글은 끝까지 남는다. 이런 것도 삶의 결실이라 말할 수 있다. 현실에서 눈으로 볼 수 있는 삶의 결실이다.
 
현실에서 눈으로 볼 수 있는 삶의 결실은 기쁨과 행복을 준다. 노동자가 일을 해서 급료를 받았을 때 기쁨과 행복을 누리는 것과 같다. 글을 써서 인터넷 블로그나 페이스북에 올려 놓았을 때 기쁨과 행복을 느낀다.
 
이제 또 하나의 눈에 보이는 삶의 결실을 이루고자 한다. 그것은 책으로 만드는 것이다. 써 놓은 글을 시기별로 또는 카테고리별로 묶어서 책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번에 만든 책은 2017년 4/4분기에 썼던 담마에 대한 글이다. 이를 ‘90권 담마의 거울 2017 IV’라고 이름 지었다. 생애통산 90번째 책으로 2017년 9월 28일부터 12월 27일까지 3개월 동안 담마에 대하여 쓴 글을 모아 놓은 것이다. 모두 27개의 글로 261페이지에 달한다. 참고로 목차를 보면 다음과 같다.
 
 
목차
 
1. 논장을 배격한 테라와다빅쿠
2. 나는 누구인가? Vs 어떻게 살 것인가?
3. 가르침의 맛(法味)과 가르침의 즐거움(法悅)
4. 갈애를 동반자로 했을 때
5. 오늘 해야 할 일이 있는데
6. 연기법은 업과 업의 과보에 대한 가르침
7. 무연중생(無緣衆生)우빠까(Upaka) 
8. 빠라마수카(parama sukha), 완전한 행복
9. 두 갈래 깨달음의 길에서
10. 불교는 진보의 역사인가 퇴보의 역사인가?
11. 동물은 번뇌가 없다고? 소처럼 개처럼 사는 자들
12. 행복멘토에서 힐링멘토로
13. 생각하느니 차라리 잠을
14. 왜 생각과 실제(實際)는 차이 날까?
15. 깨달음 사칭과 계금취견
16. 파스칼의 내기와 현자의 내기
17. 생각과 담마가 충돌했을 때
18. 마음 밭을 가는 수행자
19. 생체로보트처럼 살 순 없다
20. 처음처럼 초심(初心)으로
21. 남의 단점을 들추어 내는 자
22. 내려 놓았을 때 저절로, 진인사대천명
23. 안심(安心)법문과 생멸(生滅)의 지혜
24. 아는 만큼 능력껏 알려주기
25. 먼저 해야 할 일을 나중에 한다면
26. 나는 부처님께 안식처를 얻었네
27. 한가지 소원은 꼭 이루어 준다는데

90권 담마의 거울 2017 IV_230402.pdf
2.11MB

 

 
다양한 글이 있다. 그날 그날 느꼈던 것을 써 놓은 것이다. 담마에 대한 것이기 때문에 철저하게 경전, 즉 니까야에 근거하여 썼다. 지금 읽어 보아도 틀림이 없다. 글 쓸 당시에 검증을 거쳤기 때문이다.
 
사람의 생각은 나이를 먹음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나이가 듦에 따라 지혜가 생겨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젊었을 때 생각이 잘못일 수 있다. 그러나 진리는 변함이 없다.
 
부처님은 위없는 깨달음을 이루었다. 위없는 깨달음이란 더 이상 깨달을 것이 없는 무상(無上)의 깨달음을 말한다. 부처님이 출가해서 6년만에 깨달은 것이다. 이런 깨달음이 나이가 들어 감에 따라 위가 아닌 깨달음이 될 수 있을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부처님의 깨달음은 정각을 그날 밤이나 완전한 열반에 든 최후의 밤이나 변함이 없다. 그래서 디가니까야 ‘청정한 믿음의 경’(D29)에 따르면, ‘여래의 정의’에 대하여 “쭌다여, 여래가 위없는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을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밤과, 쭌다여, 여래가 집착없이 열반의 세계에 완전히 든 밤, 그 사이에 설하고 말하고 교시한 것, 그 모든 것은 바로 그러한 것이지 다른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여래라고 한다.”(D29.20)라고 했다.
 
부처님의 깨달음은 그것 자체로 완전한 것이다. 여기서 더할 것도 없고 뺄 것도 없다. 그래서 정각을 이룬 밤이나 열반에 든 밤이나 “그 사이에 설하고 말하고 교시한 것, 그 모든 것은 바로 그러한 것이지 다른 것은 아니다.”(D29.20)라고 했다. 그럼에도 후대로 갈수록 사람들은 부처님의 깨달음에 대하여 의심하기 시작했다.
 
부처님의 깨달음에 대하여 덜 깨들은 것이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었다. 또한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완성되지 않은 것이라고 말한 이들이 있었다. 그 결과 새로운 불교운동이 일어났다. 부처님과 버금가는 논사가 나타나서 새로운 이론을 제시했다. 그 결과 전혀 다른 새로운 불교가 출현하기에 이르렀다.
 
부처님의 깨달은 불완전한 것이고, 부처님의 가르침은 미완성된 것일까? 그러나 정반대라고 볼 수 있다. 부처님의 깨달음은 그것 자체로 완전한 것이고, 또한 부처님의 가르침은 그것 자체로 완성된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다만 후대로 내려갈수록 깨닫지도 못하고 가르침을 이해하지도 못하는 자들이 나타났을 때 깨달음과 가르침은 오염되었다.
 
깨달음과 가르침이 오염되었다는 것은 불교가 변질 되었음을 말한다. 그 결과 최초의 깨달음과 최초의 가르침과 차이를 보이게 되었다. 그런데 후대로 내려가면 갈수록 점점 더 오염되어서 전혀 다른 불교가 되었다는 것이다. 불교라고 말하지만 무늬만 불교인 것을 말하는 것이다. 부처님의 핵심 가르침, 근본가르침이 빠진 불교를 말한다. 결국 정법이 사라지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부처님 가르침은 부처님 당시가 가장 완전했다. 후대로 내려갈수록 변질되었다. 이렇게 본다면 불교의 역사는 퇴보의 역사라고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이에 대하여 쓴 것이 목차 10번에 있는 ‘불교는 진보의 역사인가 퇴보의 역사인가?’ (2017-11-01)라는 제목의 글이다.
 
10번 글에서 불교의 역사를 퇴보로 보았다. 이는 불교의 역사를 진보로 보는 것과 정반대의 시각이다. 왜 불교의 역사를 퇴보로 보았는가? 이에 대하여 “부처님 당시의 가르침은 오염되지 않았기 때문에 가장 순수 했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이 열반 후에 전승된 가르침은 조금씩 오염되어 나중에는 전혀 다른 불교가 되었습니다.”(2017-11-01)라고 써 놓았다.
 
부처님 가르침은 언젠가 사라지게 되어 있다. 정법이 오염되고 변질되어서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다음 부처가 출현할 때까지는 암흑의 시기가 된다. 이는 과거칠불에 대한 경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정법을 수호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에 대하여 “테라와다의 경우는 부처님 가르침에 충실 하는 것이 본질이고, 대승불교의 경우는 시대에 맞게 끊임 없이 변화를 추구하는 것이 본질입니다.”(2017-11-01)라고 써 놓았다.
 
각 불교전통에는 본질이 있다. 테라와다의 불교의 경우 부처님 가르침을 완성된 것으로 알아 변질되고 오염되는 것을 막고자 했다. 반면에 대승불교는 시대에 맞게 끊임 없이 발전되고 진화해야 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렇다면 불교는 진보의 역사인가 퇴보의 역사인가? 대체 어느 것이 맞는 것일까?
 
 
2023-04-04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