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권 담마의 거울 2017 II, 무념스님의 반야심경의 진실에 대한 글을 보고서
지금 88번째 책 서문을 쓰고 있다. 이번에 만든 책은 담마에 대한 것이다. 경전을 읽고서 느낀 것을 적은 것이다. 이런 추세로 책을 만든다면 아마도 상반기 안으로 100권이 달성 될 것 같다.
목차는 이미 만들어 놓았다. 모두 30개 목차에 달한다. 시기별로 카테고리별로 모아 놓은 것이다. 담마에 대하여 2017년 4월 16일부터 6월 20일까지 3개월가량 쓴 것이다. 총 294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이다. 3일에 한번꼴로 거의 10페이지가량 썼다. 이를 ‘88권 담마의 거울 2017 II’이름 붙였다. 참고로 목차를 보면 다음과 같다.
목차
1. 몸은 병들어도 마음만은, 오온무아(五蘊無我)의 가르침
2. “지금 죽어도 좋아!”조용히 때를 기다리는 무욕의 성자
3. “노인들 건강은 건강이 아니야!”생활속의 진리
4. 기녀에서 장로니로, 테리가타 암바빨리 19연 게송
5. 불교에서 난사람, 든사람, 된사람이란?
6. 중도세미나를 듣고
7. 불교판 오이디푸스 강가띠리야존자
8. 담마는 담마를 따르는 자를 보호한다
9. 하늘이여, 비를 내리려거든 내려라
10. 불교는 발전하고 진화해 왔을까? 마하야나와 테라와다의 정체성
11. 신뢰할 만한 스승이 없을 때는 경전을 스승으로
12. “언제쯤이나 나는”마음의 노예에서 주인으로
13. 연예인들의 불행한 삶
14. 정법(正法)만나기 어려운 여덟 가지 이유
15. 발우에 떨어진 나병환자의 손가락
16. 세 가지 굽은 것으로부터 해방
17. 깨달음을 이루려면 먼저 가르침을 기억하는 것부터
18. 효력을 상실한 업
19. 왜 자신을 수호해야 하는가?
20. 예경지송의 무상관 경송
21. 출가해서는 안될 사람
22. 장로들의 원칙 테라와다불교
23. 성자를 유혹하는 기녀(妓女)
24. 사대축원문 아유 완노 수캉 발랑
25. 오늘이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26. 마음에 드는 것을 보시하면 마음에 드는 것을 얻는다
27. 경행공덕에 대하여
28. 파괴적으로 작용하는 분노
29. 초기경전에도 사섭법(四攝法)이 있었네!
30. 팔뚝의 힘과 이마의 땀으로, 불멸의 일곱 가지 재산
책 읽을 시간이 없으면 목차만 봐도 된다. 목차 중에서 끌리는 것 하나만 읽어도 된다. 과연 이런 글을 읽을 사람이 얼마나 될까?
아는 만큼 쓰고자 한다. 2017년에 쓴 것도 아는 만큼 쓴 것이다. 아는 것을 써서 공유하고자 한 것이다. 마침내 시절 인연이 되어서 pdf로 만들게 되었다. 인연 있는 사람들은 가져 갈 것이다. 그런데 최근 페이스북에서 글다운 글을 발견했다. 담마에 대한 글은 이렇게 써야 된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 같았다.
최근 페이스북에서 무념스님의 글을 읽었다. 무념스님의 반야심경 시리즈에 대한 글이다. 반야심경을 비판한 글이다. 처음에 스님은 반야심경을 초전법륜경으로 대체하자고 주장 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반야심경 비판 글이 올라왔다. 열 개 가까운 글을 다운 받아 놓고 다시 한번 읽어 보았다.
무념스님은 알고 있다. 2022년 대선을 앞두고 승려대회가 열렸다. 이를 비판하는 기자회견이 조계사 일주문 앞에서 열렸다. 그때 무념스님은 허정스님과 함께 참여했다. 기자회견이 끝나고 인사동에서 차한잔 마신 것이 인연의 전부이다.
무념스님은 공부를 많이 한 것 같다. 법구경을 책으로 내기도 했다. 인도여행기도 냈는데 2017년 인도성지순례 가기 전에 구입해서 읽어 본 바 있다. 또한 스님은 수행력도 있는 것 같다. 남방 테라와다불교 수행법을 잘 알고 있는 것 같다.
대부분 스님들과 불자들은 아마도 대승불교에서부터 시작했을 것이다. 대승에서 한계를 느꼈을 때 초기불교를 공부하게 되었을 것이다. 80년대와 90년대, 그리고 2000년대에 승속을 막론하고 매년 수천명씩 미얀마에 가서 위빠사나 수행을 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불교에 정식으로 입문한 것은 2004년의 일이다. 어느 불자와 마찬가지로 대승에서부터 시작했다. 그러나 보이지가 않았다. 명확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마하시사야도의 십이연기법문집을 접하고 초기불교의 길로 가게 되었다. 2008년 말의 일이다. 이후 니까야와 아비담마, 청정도론을 근거로 하여 글쓰기 하고 있다.
이번에 페이스북에서 무념스님의 반야심경 글을 접하자 상쾌한 느낌이 들었다. 어쩌면 통쾌했다고도 볼 수 있다. 내가 궁금했던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것도 있었다.
한국불자들은 법회의식 할 때 반야심경을 반드시 독송한다. 대승경전의 정수라하여 모든 법회의식마다 빠지지 않는다. 그런데 불자들은 뜻도 모르고 독송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반야중관 권위자 김성철 선생은 “<반야심경>을 봉독할 때, 뜻을 떠올리지 말고 그냥 입으로만 봉독하라고 권합니다.”라고 했다.
시중에는 수많은 반야심경 해설서가 있다. 여러 종류의 반야심경 해설서를 읽어 보았다. 심오한 공사상이 들어 있다는 식으로 설명해 놓았다. 그런데 김성철 선생은 뜻을 알 필요가 없다고 했다. 왜 그랬을까? 이에 대하여 “오래 수행을 하여 통찰지가 생긴 사람들을 위한 경전이 반야경입니다.”라고 했다. 한마디로 반야심경은 깨달은 사람에 대한 것이기 때문에 깨닫지 못한 사람이 뜻을 알려고 했을 때 공병이 생길 수 있음을 말한다.
한때 반야심경을 비판했다. 부처님 가르침을 무(無)자로 모조리 비판한 것이 마음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공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사성제, 팔정도, 십이연기와 같은 근본교설도 없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저 언덕으로 건너간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아직 이 언덕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부처님 가르침을 모독하는 경으로밖에 볼 수 없다는 것이다.
무념스님은 반야심경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비판했다. 특히 ‘무고집멸도’에 이르러서는 “붓다의 가르침의 핵심, 뼈대, 골격을 이루는 사성제를 부정한다.”라고 했다. 이는 반야중관으로 부정하는 것을 말한다.
용수는 대승불교에서 제2의 석가로 불리운다. 사실상 대승불교의 아버지와 같다. 그런데 용수는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을 부정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무념스님은 “반야중관은 초기불교를 부정하면서 생겨난 철학이다.”라고 했다.
새로운 종교가 생겨날 때 하나의 특징이 있다. 그것은 기존 종교를 비판하는 것이다. 그래야 차별화가 된다. 불교도 브라만교를 비판하며 성립되었다고 볼 수 있다. 브라만교의 아뜨만 사상을 비판하여 무아사상을 정립한 것이다. 그런데 대승불교의 아버지 용수는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을 무(無)자로 부정했다는 것이다. 물론 공의 입장에서 본 것이다.
새로운 학문이 설자리를 얻기 위해서는 기성 학문을 비판해야 한다. 자신의 견해를 세우기 위해서는 기존 학설이 잘못되었다고 공격해야 한다. 중도체계론으로 유명한 L교수가 아비담마를 맹폭하는 것은 자신의 견해를 정당화하기 위한 것으로 본다.
반야심경은 반야중관사상에 근거하여 성립된 경전이다. 공의 입장에서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을 모조리 부정했는데 가장 핵심인 사성제마져 부정한 것이다. 그런데 모순이 있다는 것이다. 어떤 모순인가? 반야심경에서는 사성제에 대하여 한번만 부정하고 재부정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반야심경 구조를 보면 초기불교교리를 부정한다. 그런데 부정한 것을 한번 더 부정한다. 이렇게 이중으로 부정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양극단을 배제하고 중도로 가기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오온에 대하여 부정과 재부정을 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십이처에 대한 것도 그렇다. 그런데 유독 사성제에 대해서만 ‘무고집멸도’라 하여 한번 부정한 것으로 끝난 것이다.
반야심경에서는 공의 입장에서 ‘무고집멸도’라 하여 사성제를 부정했다. 양극단을 배제하기 위해서는 ‘역무고집멸도진’이라는 말이 뒤따라야 한다. 왜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 의도적인 것은 아닐까? 고의성이 있는 것일까? 이에 대하여 무념스님은 “사성제를 무너뜨리기 위해 누군가가 의도를 가지고 저술한 것”이라고 했다. 용수는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을 부정하여 자신이 부처님이 되고자 한 것일까?
반야심경에서는 일관성이 결여 되어 있다. 오온, 십이처에 대해서는 공의 입장에서 부정과 재부정을 하여 중도로 설명하려 했으나 놀랍게도 사성제는 ‘무고집멸도’로 끝나 버린 것이다. 이는‘사성제는 없다’라고 한번만 부정한 것으로 끝나 버린 것이다.
반야심경 구조라면 ‘역무고집멸도진’이라는 말이 뒤따라야 한다. 이는 ‘사성제는 끝이 없다’가 된다. 사성제는 계속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무고집멸도’라 하여 ‘사성제는 없다’라고만 한 것은 의도가 있어 보인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무념스님은 “반야심경의 의도는 도를 깨닫는다고 출가해서 숲속에 들어가 가부좌를 틀고 명상하는 출가주의, 수행주의를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보았다.
무념스님 글은 충격적이다. 이제까지 한번도 들어 본적이 없는 말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반야심경이 출가주의를 비판한 것이라는 것도 처음 들어 본 것이다. 이에 대하여 무념스님은 반야심경을 신봉하는 자들이“세속에 살면서 얼마든지 도를 닦을 수 있다.”라든가, “깨달을 것도 얻을 것도 없는데 굳이 출가해서 숲속에서 홀로 도를 닦는가.”라든가, “출가해서 자기들끼리만 모여 수행하는 무리들은 소승이다.”라고 주장하기 위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불교에 처음 입문했을 때 반야심경을 외웠다. 뜻도 모르고 외웠다고 볼 수 있다. 뜻을 알고자 했으나 너무 심오했다. 해설서를 보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 무념스님의 반야심경의 진실에 대한 글을 보고서 이전에 가졌던 의문이 맞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매일매일 인터넷에 글을 쓰고 있다. 반야심경에 대한 비판 글도 다수 썼다. 반야심경 대신에 초전법륜경을 독송하자고 주장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을 공의 입장에서 모조리 부정한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에 무념스님의 글을 보니 반야심경은 모순투성이라는 것이다.
반야심경에서 십이연기를 부정하는 것도 있다. 이는 공의 입장에서 ‘무무명 역무무명진’이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런 부정과 재부정의 구조가 모순이라는 것이다. 왜 그런가? 이에 대하여 스님은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자, 이게 왜 말이 성립이 안 되는지 설명하겠다.
무명(밝음 없음)은 어리석음(moha)을 중국식으로 번역한 것이다.
무무명은 '어리석음이 없다'라는 뜻이고, 어리석음이 없으면 지혜가 일어난 것이다.
이건 열반에 도달했으므로 지혜가 일어난 것은 맞다.
그런데 그 다음에 역무무명진은 '또한 어리석음이 끝이 없다'라고 한다.
진리를 깨달아 무지의 어둠을 몰아내고 밝은 지혜가 일어났는데, '또한 무지의 어둠, 어리석음이 계속된다.'고 한다.
이게 말이 되는가?”(무념스님)
무명은 어리석음과 동의어이다. 무지에 무지를 더한 것이 무명이다. 중중무지가 무명인 것이다. 그런데 반야심경에서는 무명도 없다고 했다. 이를 공의 입장에서는 어리석음도 없다고 보아야 한다. 그런데 어리석음이 없다는 것은 지혜가 있다는 말과 동의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법구경에 놀라운 가르침이 있다. 그것은 “어리석은 자가 어리석음을 알면 그로써 현명한 자가 된다. (Yo bālo maññati bālyaṃ, paṇḍito vāpi tena so)”(Dhp.63)라는 가르침을 말한다. 이런 구조는 무무명과 유사하다. 무명이 없는 것은 어리석음이 없기 때문에 지혜가 있는 자라고 볼 수 있다.
어리석은 자가 어리석음을 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주석에 따르면 “어리석은 자가 ‘나는 어리석은 자이다.’라고 아는 것은 무지한 자가 자신이 무지한 것을 알지 못하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아주 무지한 자는 자신이 무지한 것조차 모른다.”(DhpA.II.30)라고 했다.
어리석은 자는 자신이 어리석은지 모른다. 그럼에도 자신을 현명한 자라고 여기면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그래서 63번 게송의 후송에서는“어리석은 자가 현명하다고 생각하면 참으로 어리석은 자라고 불린다.”(Dhp.63)라고 했다.
반야심경에서 ‘무무명’은 지혜가 된다. 그런데 부정-재부정 원칙에 따라 한번 더 부정하여 ‘역무무명진’이 되었다. 이 말은 ‘또한 어리석음이 다함이 없다’, 즉 ‘어리석음이 끝이 없다’가 되어 버린다. 이는 모순이다. 한번 깨달은 사람이 다시 어리석은 자가 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한번 지혜가 일어나면 그 지혜는 퇴전하지 않는다. 만일 퇴전했다면 그것은 지혜를 얻었다고 볼 수 없다. 한번 도와 과를 이루었으면 그것으로 더 이상 퇴전은 없다. 그럼에도 반야심경에서는 ‘무무명’이라고 하여 ‘어리석음이 없다’고 해 놓고서는, 다시한번 ‘역무무명진’이라 하여 재부정하여 ‘어리석음이 끝이 없다’라고 했다. 지혜 있는 자가 다시 어리석은 자가 되는 것과 같다.
매일 니까야를 읽고 있다. 머리맡에 있어서 수시로 열어 본다. 자주 나오는 정형구가 있다. 그것은 ‘아라한선언’에 대한 것이다. 어떤 것인가? 이는 초전법륜경에서 부처님이 “나는 흔들림 없는 마음에 의한 해탈을 이루었다. 이것이 최후의 태어남이며, 이제 다시 태어남은 없다.”라고 선언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아라한선언은 부처님뿐만 아니라 부처님 제자들도 선언했다. 부처님 가르침을 실천해서 모든 번뇌가 소멸되어 완전히 청정해졌을 때 아라한선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반야심경에서와 같이 ‘무무명 역무무명진’이 되면 어떻게 될까? 아라한이 된 자가 다시 범부중생으로 떨어지는 것과 같다. 그래서 반야심경에 대하여 초기불교를 파괴하고 부처님 근본가르침을 부정하는 것으로 본다.
무념스님의 반야심경 비판 글을 보면 모순투성이이다. 이런 모순이 어떻게 동아시아 불교 사상을 지배해 왔을까? 마치 뜻도 모르고 “나모라 다나다라”로 시작되는 신묘장구대다라니를 외는 것과 다름 없다. 이번에 스님의 반야심경 비판 글을 보고서 통쾌함을 느꼈다. 나만 그런 것일까?
2023-03-21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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