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아와 세상은 왜 없지 않고 있을까?
“연기를 보는 자는 진리를 보고, 진리를 보는 자는 연기를 본다.”(M28) 이 말은 맛지마니까야 ‘코끼리 발자취에 비유한 경’에 실려 있는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이 구절은 매우 유명한 구절이긴 하지만 다른 경전에서는 찾아 보기 힘들다.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은 연기법이다. 부처님이 깨달은 것도 연기법이다. 과거 부처가 출현했을 때도 연기법을 깨달아 부처가 되었다. 그런 연기법에 대하여 진리라고 했다.
사람들은 연기법을 얼나마 알고 있을까? 아마 거의 모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연기법이라는 말을 들어 보지 못한 사람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그렇다면 불교인들은 어떠할까?
불교인들은 연기법을 알고 있을 것이다. 과연 얼마나 알고 있을까? 반야심경에서도 연기법이 나온다. 그러나 공의 입장에서 모조리 부정되었다. 불교인들은 연기법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까?
연기법을 알면 부처님을 알 수 있다. 연기법을 알면 진리를 알 수 있다. 연기법을 알면 불교를 알 수 있다. 그런 연기법은 대체 어떤 것일까?
4월 두 번째 니까야모임
4월 두 번째 니까야모임이 4월 28일 한국빠알리성전협회 서고에서 열렸다. 이날 참석자는 홍광순, 이병욱, 장계영, 방기연, 김경예, 유경민, 안진현, 정진영, 구혜정 선생이다. 도현스님은 부처님오신날 행사관련 일로 참석하지 못했다.
교재 ‘오늘 부처님께 묻는다면’에서 연기에 대한 경을 합송했다. 상윳따니까야 2권 인연의 모음에 대한 것이다.
모두 세 개의 경을 합송했다. 첫 번째 경은 ‘왜 존재를 뛰어 넘어서 원인을 물어야 할까’(S12.12)에 대한 것이고, 두 번째 경은 ‘올바른 수행자가 되려면 무엇을 두루 알아야 할까’(S12.13)에 대한 것이고, 세 번째 경은 ‘있다 없다는 생각은 왜 극단적인 생각일까’(S12.25)에 대한 것이다.
첫 번째 경은 존재론에 대한 것이다. 이는 몰리야 팍구나가 부처님에게 존재론적으로 질문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질문이 잘못 되었을 때
팍구나는 부처님에게 “누가 의식의 자양분을 섭취합니까?”라며 물었다. 누구나 이렇게 질문할 수 있다. 사람이 음식 등 자양분을 섭취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부처님은 이런 질문은 잘못 되었다고 했다.
흔히 그 사람을 알려거든 질문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고 말한다. 어떤 질문을 하는 것인지에 따라 그 사람의 의식 수준을 알 수 있음을 말한다.
많이 사유하고 많이 체험한 자의 질문과 일반사람의 질문은 차이가 있을 것이다. 또한 불교인들의 질문과 비불교인들의 질문에도 차이가 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자아를 상정해서 질문하다. 팍구나도 그랬다.
부처님은 팍구나의 질문이 잘못 되었음을 지적했다. 부처님은 “누가”라고 질문 해서는 안된다고 했다. 부처님은 “어떻게”라고 질문하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자아를 상정하는 질문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질문을 할 때는 연기법적으로 질문하라는 말이다. 그래서 “누가 자양분을 섭취합니까?”라고 물어서는 안되고, “무엇 때문에 자양분이 생겨납니까?”라고 질문해야 한다고 말했다.
질문은 그 사람의 의식 수준을 결정한다. 질문은 그 사람의 현재 상태를 알 수 있게 해준다. 질문을 잘 하는 사람은 공부도 잘한다. 학교 다닐 때도 선생님에게 질문 잘하는 학생이 공부도 잘 했다. 수행처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위빠사나 수행처에 가면 수행점검시간이 있다. 누구나 의무적으로 수행한 결과를 보고 해야 한다. 그런데 수행 인터뷰를 보면 질문자의 따라 수행의 정도를 알 수 있다. 깊고 심오한 체험을 한 자의 질문은 다른 사람과 차별화 된다.
어느 스님은 말했다. 간화선을 수행하는 스님이다. 스님은 끝없이 물어야 한다고 말했다. 자신에게 묻는 것이다. 묻고 또 물어서 궁극까지 이르러야 한다고 말했다.
묻는다는 것은 수행한다는 말과 같다. 자신에게 물을 수도 있고 타인에게 물을 수도 있다. 수행결과를 보고할 때 물을 수도 있다. 이럴 때 자아를 상정하는 ‘나, 여자, 남자, 중생’이라는 말을 써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물을 때는 연기법적으로 물어야 한다. 부처님은 “어떻게”라고 물으라고 했다.
“어떻게 무아인데 윤회할 수 있습니까?”라는 질문에 대하여
여러 가지 질문이 있다. 그 중에는 질문으로서 성립이 되지 않는 질문도 있다. 대표적으로 “어떻게 무아인데 윤회할 수 있습니까?”라는 질문이다. 왜 이런 질문이 질문같지 않은 질문인가? 이는 자아를 상정한 질문이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무아윤회를 말씀하셨다. 윤회에는 주체가 없다는 것이다. 이를 연기법으로 설명했다. 대표적으로 십이연기를 들 수 있다.
십이연기는 열두 가지 순환고리로 되어 있다. 무명에서부터 시작해서 노사에 이르기까지 조건발생적이다. 이와 같은 조건발생적 연기의 순환고리에서 주체는 없다. 자아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자아가 있다면 명칭으로만 있다. 자아는 단지 언어적으로만 존재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자아를 상정하여 “누가 접촉합니까?”라든가, “누가 윤회합니까?”라고 질문하면 어떻게 해야 할까?
자아를 상정한 질문에는 답이 있을 수 없다. 어떤 사람이 넌지시 “무아인데 어떻게 윤회할 수 있습니까?”라며 질문한 것은 자아를 상정한 것이기 때문에 여기에 답은 있을 수 없다.
자아를 상정한 질문은 잘못된 질문이다. 질문으로서 성립이 되지 않는 질문이다. 이런 질문에 답을 해야 할까? 만약 잘못된 질문에 답을 한다면 엉터리 답이 되고 말 것이다.
누군가“무아인데 어떻게 윤회합니까”라는 질문에는 답을 해서는 안된다. 만약답을 하게 된다면 말려 들어가게 된다. 질문자체가 성립되지 않는 질문에는 답이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아무리 그럴 듯한 답을 내놓아도 모두 어긋나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질문 같지 않은 질문, 질문으로서 성립이 되지 않는 질문에는 무기(無記)했다.
자아와 세상에 대한 질문을 보면
자아를 상정하면 질문같지 않은 질문이 된다. 질문같지 않는 질문에는 또 어떤 것이 있을까? 이는 맛지마니까야 2번 경에서 발견된다. 그것은 ‘나는 무엇인가?’라며 자아를 찾는 것에서 알 수 있다.
나는 누구일까? 사람들은 아주 오랜 옛날부터 이런 고민을 했다. 그런데 이런 고민에는 답이 없다는 사실이다. 답이 없기 때문에 의문을 하면 할수록 번뇌가 생겨난다. 이치에 맞지 않게 정신활동을 기울이기 때문이다.
어떤 질문이든지 자아를 상정하면 답이 없다. 또한 어떤 질문이든지 자아를 상정하면 번뇌에 가득 차게 된다. 이치에 맞지 않게 정신활동을 기울이면 번뇌만 있게 된다. “세상은 유한한가?”등으로 묻는 세속철학도 역시 답이 없다. 번뇌만 야기할 뿐이다.
부처님은 질문같지 않는 질문, 질문으로서 성립되지 않는 질문에는 답을 하지 않았다. 대표적으로 맛지마니까야 ‘모든 번뇌의 경’(M2)에서 볼 수 있다. 이는 “나는 과거세에 있었을까? 나는 과거세에 없었을까? 나는 과거세에 무엇이었을까? 나는 과거세에 어떻게 지냈을까? 나는 과거세에 무엇이었다가 무엇으로 변했을까? 나는 미래세에 있을까? 나는 미래세에 없을까? 나는 미래세에 무엇이 될까? 나는 미래세에 어떻게 지낼까? 나는 미래세에 무엇이 되어 무엇으로 변할까? 또는 현세에 이것에 대해 의심한다 - 나는 있는가? 나는 없는가? 나는 무엇인가? 나는 어떻게 있는가? 이 존재는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M2)라는 질문을 말한다. 이런 질문은 번뇌만 야기할 뿐이다. 이치에 맞지 않는 정신활동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질문같지 않은 질문으로서 세상에 대한 것도 있다. 이는 맛지마니까야 ‘말룽끼야뿟따의 작은 경’(M63)에서 발견된다. 이는 부처님이“말룽끼야뿟따여, 어떤 사람이 ‘나는 여래가 세상은 영원하다든가, 세상은 영원하지 않다든가, 세상은 유한하다든가, 세상은 유한하지 않다든가, 영혼은 육체와 같다든가, 영혼은 육체와 다르다든가, 여래는 사후에 존재한다든가,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지 않는다든가,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기도 하고 존재하지 않기도 한다든가,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든가.’에 대하여 설명하리라.’라고 말한 적이 없다. 그리고 그대가 나에게 ‘세존이시여, 저는 여래 밑에서 청정한 삶을 영위할 것입니다. 여래께서는 ‘세상은 영원하다든가, 세상은 영원하지 않다든가, 세상은 유한하다든가, 세상은 유한하지 않다든가, 영혼은 육체와 같다든가, 영혼은 육체와 다르다든가, 여래는 사후에 존재한다든가,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지 않는다든가,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기도 하고 존재하지 않기도 한다든가,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든가에 대하여 설명해야 비로소 여래 밑에서 청정한 삶을 영위할 것이다.’라고 말한다면, 그는 여래에게 대답을 못 들은 채 이러한 문제와 더불어 죽어갈 것이다.”(M63)라고 말한 것에서 알 수 있다. 부처님은 답이 없는 질문에 대하여 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독화살의 비유를 들어 세속철학적 질문의 무익함을 깨우쳐 주었다.
저 바위산의 산봉우리처럼
세상사람들은 견해에 빠져 있다. 대표적으로 영원주의와 허무주의를 들 수 있다. 이와 같은 견해는 사견이다. 연기법적으로 보았을 때 삿된 견해에 해당된다. 특히 사람들은 영원주의에 빠지기 쉽다.
세상사람들은 대부분 자아를 상정한다. 그래서 항상 “내가”라고 말한다. 부처님도 “내가”라고 말하지만 이는 세상의 관습에 따른 것이다. 세상사람들은 진짜 나가 있다고 믿기 때문에 “내가”라고 말하는 것이다.
나는 여기에 있다. 그런데 세상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런 세상은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있었을 것이다. 이런 세상은 내가 죽어서도 있을 것이다. 여기서 나는 자아에 대한 것이다. 아뜨만이나 영혼 같은 변치 않는 실체를 말한다.
내가 세상에 있다면 나와 세상은 영원한 것이 된다. 이는 다름아닌 영원주의이다. 그렇다면 나와 세상을 어떻게 영원하다고 보는 것일까? 이는 디가니까야 1번경 ‘브라흐마잘라경’에서 영원주의에 대한 견해를 보면 알 수 있다.
영원주의는 연기법적으로 사견이다. 그럼에도 영원주의자는 자아와 세상은 영원하다고 본다. 왜 이렇게 보는가? 이는 “자아와 세계는 새로운 것을 낳지 못하고, 산봉우리처럼 확립되어 있고, 기둥처럼 고정되어 있어, 뭇삶들은 유전하고 운회하며 죽어서 다시 태어나지만 영원히 존재한다.”(D1.31)라는 말로 알 수 있다.
부처님 당시 영원주의는 브라만교의 핵심사상이었다. 그래서 어떤 변치 않는 아뜨만이 있어서 몸이 죽어도 윤회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이른바 자아윤회를 말한다. 어떤 자가 넌지시 “무아인데 윤회합니까?”라며 물어 보았을 때 바로 이 아뜨만이 윤회함을 말하기 위해서 유도질문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영원주의에서는 항상 자아와 세상이 등장한다. 자아와 세상을 영원하다고 보는 것에 대하여 산봉우리와 기둥을 들었다. 이는 변치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아와 세상도 저 바위산의 산봉우리처럼 영원히 변치 않은 것으로 본 것이다.
새로운 것을 낳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는 시각
영원주의자에 따르면 “자아와 세계는 새로운 것을 낳지 못한다.” (D1.31)고 했다.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아마 이는 시각능력과 관련 있을 것이다.
사람은 오감으로 산다.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접촉하고 살아 간다. 이 다섯 가지 중에서 유일하게 시각만큼은 항상 그대로 있는 것처럼 보인다.
손가락튕기기를 하면 “딱”하고 소리가 난다. 불과 0.5초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없는 것에서 있는 것이 된다. 손가락을 튕겼기 때문에 소리가 났다. 여기서 소리는 조건발생한 것이다.
조건이 사라지면 즉각 소멸된다. 소리는 0.5초 후에 더 이상 나지 않는다. 다시 고요한 상태가 된다. 냄새는 좀더 오래 간다. 맛도 좀더 오래간다. 감촉도 좀더 오래 지속된다. 그러나 시각만큼은 예외이다.
눈이 있어서 형상을 본다. 형상을 보았을 때 삼사화합에 의해서 접촉이 발생된다. 그리고 시각의식이 생겨난다. 그런데 손가락 튕길 때 나는 소리와는 다르다는 것이다. 형상은 사라지지 않고 계속 그 자리에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경에서는 “새로운 것을 낳지 못한다.”라고 했을 것이다.
오감 중에서 시각을 제외하고 대상을 접하면 생겨났다가 사라진다. 무상한 것이다. 그러나 시각만큼은 사라지지 않는다. 형상을 볼 때 매순간 삼사화합촉이 일어나지만 연속해서 일어나기 때문에 언제까지나 그 자리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무상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왜 하필이면 손가락 튕기기 비유를
부처님은 무상의 가르침을 말했다. 기억할만한 무상의 가르침 중의 하나가 있다. 그것은 “단지 손가락 튕기는 순간이라도 무상에 대한 지각을 닦는다면, 그것이 더욱 커다란 과보를 가져올 것입니다.”(A9.20)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수행공덕이 보시공덕과 지계공덕이 훨씬 더 수승함을 말한다. 그렇다면 부처님은 왜 하필이면 손가락 튕기기 비유를 들어서 수행공덕을 말했을까?
소리만큼 무상을 통찰하게 해주는 것이 없는 것 같다. 종종 유튜브에서는 어떤 스님이 신도들 귀에 종을 치면서 “바로 이것입니다.”라고 말해 주는 것도 어쩌면 무상에 대한 통찰을 깨우쳐 주기 위함일 것이다. 종종 어느 재가법사는 책상을 탕탕 치면서 “바로 이것입니다. 이렇게 명확하게 드러나 있습니다.”라며 이것타령 한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니 무상에 대한 지각을 말해주고자 함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소리, 냄새, 맛, 감촉은 무상을 느끼게 해 주기에 충분하다. 조건에 따라 발생했다가 조건이 다하면 사라지기 때문이다. 없던 것에서 생겨나와서 다시 없던 것으로 되돌아 가는 것이다. 그러나 시각만큼은 예외이다. 경에서 부처님이 말씀했듯이 “새로운 것을 낳지 못하고” 또한 “산봉우리처럼 확립되어 있고, 기둥처럼 고정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자아와 세상은 영원하다는 영원주의가 생겼을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닌 존재론이기도 하다.
시각이 나를 속이고 있어서
서양철학은 존재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는 스티븐 배철러가 쓴 ‘어느 불교무신론자의 고백’을 읽고 어느 정도 알게 되었다.
스티븐 배철러는 송광사에서 수행했다. 구산스님이 지도하는 외국인 스님 중의 하나였던 것이다. 그런데 스티븐 배철러의 책을 보면 “도대체 왜 아무것도 없기 보다는 뭔가가 있는 것일까?”(81쪽)라는 말이 있다. 처음 이 말을 접했을 때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도대체 왜 아무것도 없기 보다는 있는 것일까? 어떻게 보면 너무나 당연한 말이다. 지금 눈 앞에 전개되는 세상을 한번도 의심해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나라는 존재에 대하여 한번도 의심해 보지 않았다.
오래 전부터 생각한 것이 있다. 그것은 세상이 있어서 내가 태어났고, 내가 죽어도 세상은 계속될 것이라고 보았다. 이는 자아와 세상을 상정한 것이다. 자아와 세상은 항상 있기 때문에 영원히 있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부처님의 연기법에 따르면 조건발생하는 것이다. 지금 시시각각 변하고 있음에도 항상 그 자리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시각이 나를 속이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어쩌면 속고 사는 것인지 모른다. 지금 눈에 보이는 세상이 있어서 항상 세상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허상이라는 것이다. 이런 허상은 청각으로 확인하면 금방 드러난다.ㅣ
손가락 튕기기 할 때 “딱”소리가 난다. 눈으로 보는 것도 한장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눈은 다른 감각기관과 다르게 연사한다. 마치 영화 필름이 돌아가는 것과 같다. 그래서 계속 그 자리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청각은 우리를 속이지 않는다. 소리는 조건발생했다가 금방 사라진다. 냄새도, 맛도, 감촉도 금방사라진다. 그러나 시각만큼은 우리를 속이고 있다. 그래서 부처님이 무상을 설명할 때 손가락 튕기기를 예로 들었을 것이다.
부처님은 무상을 설명할 때 시각을 예로 들지 않고 청각을 예로 들어 설명했다. 시각은 우리를 속이기 때문이다. 대상을 보면 항상 그 자리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자아와 세계는 새로운 것을 낳지 못하고, 산봉우리처럼 확립되어 있고, 기둥처럼 고정되어 있어, 뭇삶들은 유전하고 운회하며 죽어서 다시 태어나지만 영원히 존재한다.”(D1.31)라는 삿된 견해가 생겨났을 것이다.
자아와 세상은 허상인 것은
금요니까야 모임 시간에 토론이 있었다. 참석자 중에 B선생은 27살 때 연기법을 알고 전율했다고 한다. 연기법을 접하자 그동안 의문했던 것이 모두 풀렸다고 한다. 당연히 무아윤회도 알게 되었다고 한다. 또 다른 젊은 참석자는 연기법이 매우 신선했다고 말했다. 세상을 연기법적으로 보았을 때 세상이 달라 보였다는 것이다.
연기법에 대한 감흥이 있다. 아마 칠팔년 되었던 것 같다. 상윳따니까야 깟짜야나곳따의 경(S12.15)을 읽다가 연기법을 어렴풋이 이해하게 되었다. 여기에서 청정도론에서 설명도 결정적이다. 그것은 ‘발생을 관찰하면 비존재는 사라지고, 소멸을 관찰하면 존재는 사라진다.’라는 짤막한 문구 때문이다.
부처님은 연기를 알면 부처님을 아는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연기를 보는 자는 진리를 보고, 진리를 보는 자는 연기를 본다.”(M28)라고 했다. 세상을 연기법적으로 본다면 지금 눈 앞에 보이는 자아와 세상은 허상이 된다. 마치 손가락 튕기기 할 때 “딱”하며 소리가 나는 것처럼 자아와 세상을 인식할 수 있다. 이는 다름 아닌 강력한 무상의 통찰이다.
서양철학자들은 플라톤 이후 “도대체 왜 아무것도 없기보다는 뭔가가 있는 것일일까?”라며 의문했다. 이는 세상을 이분법적으로 나누어 본 것에 따른 존재론에 근거한 것이다.
존재론은 자아와 세상을 영원하다고 보기 때문에 영원주의의 근거가 된다. 그러나 이는 시각에 속고 있는 것이다. 지금 눈앞에 있는 대상도 소리를 듣는 것처럼 끊임없이 생멸함에도 계속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제까지 시각에 속고 살아 왔다. 지금 보이는 세상은 영원한 것이 아니다. 지금 보이는 세상은 영화필름이 계속 돌아 가는 것처럼, 눈에 의해서 계속 보이기 때문에 계속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손가락 튕기기처럼 눈앞에 보이는 대상을 찰라생찰라멸하는 것으로 본다면, 지금 눈앞에 보이는 대상은 허상이 된다. 자아와 세상은 본래 없는 것이지만 없지 않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2023-04-29
담마다사 이병욱
'금요니까야모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님으로부터 받은 카네이션 (0) | 2023.05.15 |
---|---|
정혜사에서 연등교체작업을 했는데 (0) | 2023.05.01 |
강자가 참아야 할까 약자가 참아야 할까? 정반대의 번역을 보고 (0) | 2023.04.19 |
담마의 향연 (0) | 2023.04.15 |
왜 인내하는 자가 승리할까? (0) | 2023.03.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