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니까야모임

강자가 참아야 할까 약자가 참아야 할까? 정반대의 번역을 보고

담마다사 이병욱 2023. 4. 19. 10:00

강자가 참아야 할까 약자가 참아야 할까? 정반대의 번역을 보고
 
 
최근 전두환의 손자가 사과를 해서 화제가 되고 있다. 전두환의 과거 행위에 대해서 본인도 아니고 아들도 아니고 손자가 사과한 것에 대하여 과연 정당한 것인 것,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한 논의를 말한다.
 
1980년대는 오공시절이었다. 그때 당시 갑자기 튀어 나온 한 사람으로 인하여 폭력의 시대가 되었다. 구호는 ‘정의사회구현’이었지만 폭력의 리더십이 작동했다. 전두환의 리더십을 아수라의 리더십이라 해도 무방할까?
 
신들의 전쟁이 있었는데
 
4월 첫번째 금요니까야 모임에서는 네 개의 경을 합송했다. 그 중에 신들의 전쟁에 대한 경이 있다. 그것은 교재 ‘오늘 부처님께 묻는다면’에서 ‘약자를 폭력으로 다스리는 정치는 옳은 것일까’에 대한 것이다. 이 경은 제석천상윳따에서 ‘잘 읊어진 시에 의한 승리의 경(Subhāsitajayasutta)’(S11.5)에 해당된다.
 
 
아주 오랜 옛날 하늘나라에서 신들의 전쟁이 있었다. 상윳따니까야 ‘제석천상윳따’(S11)에서는 이에 대하여 “수행승들이여, 옛날 아수라들이 하늘사람들을 공격했다.”(S11.1)라고 표현되어 있다. 신들의 전쟁과 관련된 주석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마가다 국에 마가(Magha)라는 이름을 지닌 보살이 경건한 바라문으로 서른 명의 자신과 비슷한 동료들에 둘러싸여 살다가 그 자신의 공덕으로 동료들과 함께 메루 산의 하늘에 사는 제석천인 싹까로 태어났다. 그런데 이전에 거기에 살던 존재들이 그들을 술에 취하게 만들어 해치려고 했다. 그러나 싹까의 충고로 동료들은 모두 술에 취한 척 했다. 예전의 하늘사람들은 술에 취해 메루 산의 도리천에 떨어졌다. 그 후 그들은 아수라가 되었고 그들은 싹까와 추종자들은 서른셋 하늘나라의 신들[三十三天: tāvatisadeva]란 이름을 갖게 되었다.”(Srp.I.388)
 
 
신화를 보면 아수라들이 먼저 자리를 잡고 있었다. 나중에 온 자들은 싹까와 그 동료들이었다. 먼저 자리 잡은 자들은 나중에 온 자들을 쫓아 내고자 했으나 술로 인하여 자리를 내주게 되었다.
 
아수라들은 제석천을 상대로 끊임없이 전쟁을 벌인다. 그것은 어쩌면 잃어 버린 영토를 회복하기 위한 것인지 모른다. 제석천상윳따에서는 끊임없이 싸움을 거는 아수라에 대한 이야기가 많다. 이렇게 본다면 아수라는 싸움을 좋아하는 폭력적 집단임을 알 수 있다.
 
자타카에도 제석천과 아수라의 영토분쟁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그런데 주석과는 정반대로 되어 있다. 이는 “신들의 제왕 제석천은 ‘우리가 함께 세계를 다스린다면, 어찌 될 것인가?’라고 생각하고, 아수라들에게 술을 마시게 하고 취했을 때, 다리를 붙잡아서 수메루 산에서 떨어뜨렸다.”(Jat.31)라고 되어 있기 때문이다.
 
수메르 산에서 떨어진 아수라들은 영토를 되찾기 위해서 전쟁을 했다. 그런데 제석천은 전쟁에서 패했다. 이에 대하여 자타카에서는 “그들에게 패하여 백오십 요자나 길이의 베자얀따의 수레를 타고 남해의 끝까지 도망쳐야 했다.”(Jat.31)라고 기록되어 있다. 제석천이 도망간 것이다.
 
제석천 상윳따를 보면 아수라와 제석천이 전쟁을 하면 한번 이기면 또 한번은 지는 식이다. 이렇게 끊임없이 전쟁을 한다. 그런데 수바시따자야경(S11.5)에서는 시로서 승부를 가리고자 한다.
 
아수라의 리더십과 제석천의 리더십
 
제석천상윳따에서 제석천은 선신이고, 아수라는 악신이다. 제석천이 선신인 것은 부처님 가르침을 받아 들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아수라는 부처님 가르침을 받아 들이지 않는다.
 
가르침을 받아 들이는 자와 받아들이지 않는 자의 태도는 시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어리석은 중생을 다스리는데 있어서 상반된 모습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먼저 아수라의 대왕 베빠찟띠는 다음과 같은 게송을 읊었다.
 
 
제어하는 자가 아무도 없으면,
어리석은 자들은 전보다 더욱 화를 내네.
그러므로 강력한 처벌로
현자는 어리석은 자를 눌러야 하리.”(S11.5)
 
 
이 게송을 보면 5공 시절 전두환이 연상된다. 그때 당시 정의사회구현이라 하여 정의라는 기치를 내세웠다. 그러나 구호만 정의였을 뿐 실제로 불의의 철권통치였다. 그것은 저항하는 세력에게 강력한 처벌을 내리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처럼 무자비한 철권으로 억압하는 것에 대하여 ‘아수라의 리더십’이라고 말할 수 있다.
 
제석천은 어리석은 자, 중생들을 어떻게 다스렸을까?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제석천은 여법하게, 법답게, 정의롭게 통치하고자 했을 것이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시를 읊었다.
 
 
나를 두려워하여 그것을 참는다고
제 맘대로 생각하든 말든
참사람이 최상의 이익을 성취하려면,
인내보다 더 좋은 것은 없네.”(S11.5)
 
 
제석천은 인내를 강조했다. 이는 강자의 인내를 말한다. 인내는 강자가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참으로 힘 있는 사람이 있다면, 힘 없는 자에게 인내하네. 그것을 최상의 인내라 부르네. 힘 있는 자는 항상 참아내네.”(S11.5)라고 했다. 이처럼 강자가 인내하는 것에 대하여 ‘제석천의 리더십’이라고 볼 수 있다.
 
정반대의 번역을 보고
 
아수라와 제석천은 정반대의 리더십을 가지고 있다. 이는 약자를 대하는 태도에서 볼 수 있다. 약자가 권리를 주장했을 때 아수라는 힘으로 억압하는 반면에 제석천은 인내로서 수용하려 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초기불전연구원의 번역을 보면 제석천의 리더십에 대하여 정반대로 번역되어 있다.
 
 
금요니까야 모임이 끝나고 도반으로부터 카톡을 받았다. 도반은 빠알리 원문을 근거로 하여 힘 있는 자가 인내하는 것에 대하여 의문을 표했다. 빠알리 원문대로 한다면 힘 없는 자가 인내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빠알리 원문을 보면 도반이 의문하는 것이 당연하다. 이는 “nicca khamati dubbalo”라는 문구 때문이다. 이 문구에 대하여 한국빠알리성접협회에서는 “힘 있는 자는 항상 참아내네.”라고 번역했다. 그런데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정반대로 “힘없는 자는 항상 인욕해야 하도다.”라고 번역했다. 왜 이렇게 반대로 번역했을까? 빠알리 원문과 두 번역, 그리고 빅쿠보디의 영역을 비교해 보면 다음과 같다.
 
 
“Yo have balavā santo
dubbalassa titikkhati,
Tam
āhu parama khanti
nicca khamati dubbalo.”(빠알리원문, S11.5)
 
 
참으로 힘 있는 사람이 있다면,
힘 없는 자에게 인내하네.
그것을 최상의 인내라 부르네.
힘 있는 자는 항상 참아내네.”(한국빠알리성전협회 번역, S11.5)
 
 
힘 있는 자가 힘없는 자에 대하여
감내하고 참는 것
그것이 최상의 인욕이라 말하나니
힘없는 자는 항상 인욕해야 하도다.”(초기불전연구원 번역, S11.5)
 
“When a person endowed with strength
Patiently endures a weakling,
They call that the supreme patience;
The weakling must be patient always.”(빅쿠보디 번역, S11.5)
 
 

 
 
인내는 강자가 해야 할까? 인내는 약자가 해야 할까? 경을 보면 문맥상 강자가 인내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왜 그런가? 힘 있는 자는 힘이 있기 때문에 관용을 베풀 수 있다. 그런데 힘 없는 자는 힘이 없기 때문에 항상 인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힘 없는 자에게 인내를 강요하는 것은 가혹한 것이다. 힘 없는 자는 항상 인내할 수밖에 없고 참고 견딜 수밖에 없다. 고용이 되어서 월급을 받는 자가 고용주에게 인내할 수밖에 없는 것과 같다. 그럼에도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힘없는 자는 항상 인욕해야 하도다.”라고 번역했다. 대체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왜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정반대로 번역했을까?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힘 없는 자가 인내해야 한다고 번역했다. 이는 충분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초기불전연구원 번역서 각주를 보면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힘없는 자는 항상 인욕해야 하도다.’는 nicca khamati dubbalo를 직역한 것이다. 냐나몰리 1962의 지적처럼 이 게송은 이해하기 쉽지 않다. 힘 있는 자가 힘없는 자를 감내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인욕이지만 힘없는 자는 당연히 힘 있는 자에 대해서 감내하고 견뎌내고 참아내고 인욕하는 것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아닌가 여겨진다.”(각묵스님, 초불연상윳따1권 937번 각주)
 
 
각묵스님은 게송에서 “nicca khamati dubbalo”를 직역했다. 이 문구를 직역하면 “힘없는 자는 항상 인욕해야 하도다.”가 된다. 그러나 이런 번역은 경의 문맥과 맞지 않는다. 제석천은 처음부터 끝까지 인내의 리더십을 보여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힘 없는 자가 인내해야 한다고 번역한 것은 어떤 이유일까? 이는 빅쿠보디 번역을 보면 드러난다.
 
빅쿠보디는 “nicca khamati dubbalo”에 대하여 “The weakling must be patient always.”라고 번역했다. 이 번역은 각묵스님이 “힘없는 자는 항상 인욕해야 하도다.”라고 번역한 것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빅쿠보디는 왜 약자가 인내해야 한다고 번역했을까? 이는 빅쿠보디의 영문번역서 각주를 보면 파악된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C.Rh.D takes nicca khamati dubbalo to mean that a weak person must always be tolerated (see KS 1:285), but dubbalo, as nominative, is clearly the subject of khamati, not its object. My translation conforms to ñāamoli's (in Minor Readings and Illustrator, p. 162), but was made'independently.
 
ñāamoli' s note speaks for my interpretation as well: "The rendering here ... seeks to bring out that patience is a necessity rather than a virtue in the weak, but appears as a virtue in the forbearance of the strong. The verse is a difficult one." (CDB Vol1, 617번 각주, 빅쿠보디)
 
 
빅쿠보디의 번역서 ‘CDB Vol1’ 617번 각주에 있는 것을 옮겨 왔다. 빅쿠보디는 냐나몰리의 견해를 존종하여 약자의 인내로 번역했음을 밝히고 있다. 또 ‘C.Rh.D’는 ‘약자는 반드시 인내하는 것(a weak person must always be tolerated)’이라 하며 ‘KS 1:285’를 보라고 했다. 여기서 ‘C.Rh.D’와 KS 는 무슨 뜻일까? 찾아 보니 ‘C.A.F. Rhys Davids’이고, KS는 ‘Kinderd Sayings(상윳따니까야 영역, Rhys Davids, Woodward)’라 되어 있다. 리스 데이비스의 영역에 약자가 인내하는 것으로 번역되어 있음을 말한다.
 
영역을 보면 공통적으로 약자의 인내를 말하고 있다. 냐나몰리도 약자의 인내를 말하고, 빅쿠보디도 약자의 인내를 말한다. 빅쿠보디는 왜 이렇게 번역했을까? 빅쿠보디는 명백히 오역임에도 왜 약자의 인내로 번역했을까?
 
오늘날 빅쿠보디의 영역 니까야가 세계적으로 널리 읽히고 있다. 그런데 빅쿠보디의 은사는 냐마몰리라는 사실이다. 제자는 스승의 해석을 무시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스승의 견해를 존중하여 경의 문맥과는 정반대로 번역한 것이라고 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는 명백한 오역이다.
 
초기불전연구원에서도 약자가 인내해야 하는 것으로 번역했다. 이는 각묵스님이 각주에서 “냐나몰리 1962의 지적처럼”라고 말한 것에서 답을 찾을 수 있다. 문맥상으로는 분명히 강자가 인내해야 한다. 그럼에도 문맥과 정반대로 약자가 인내해야 한다고 번역한 것은 빅쿠보디와 냐나몰리의 번역을 그대로 따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또 한편으로 빠알리 원문“nicca khamati dubbalo”을 직역했기 때문으로 본다.
 
 
전두환 정권은 아수라의 리더십
 
힘 없는 자가 인내한다면 이는 아수라의 리더십에 복종하는 것과 같다. 아수라는 힘에 의한 통치를 하기 때문이다. 5공 시절 전두환이 철권으로 통치하는 것과 같다.
 
전두환 정권시절 학생들과 재야단체에서는 저항했다. 학생들이 데모하면 경찰을 동원하여 가혹하게 진압했다. 데모하다 걸리면 감옥에 집어 놓기 일쑤였다. 또한 재야단체에서 민주화 투쟁을 하면 가혹하게 탄압했다.
 
전두환 정권은 광주민중항쟁을 가혹하게 진압했다. 군을 투입하여 총칼로 억압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이런 행위는 역사의 심판을 받았다. 반면 독재에 불의에 항거한 것은 민주화 운동이 되었다.
 
전두환 정권은 아수라의 리더십을 보여 주었다. 이는 경에서 아수라 대왕이“강력한 처벌로 현자는 어리석은 자를 눌러야 하네.”(S11.5)라는 구절로 알 수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힘 없는 자에게 인내를 강요하는 것과 같다.
 
시형론과 운율학을 몰라서
 
힘 없는 자는 인내할 수밖에 없다. 힘이 없기 때문에 참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인내는 힘 있는 자가 해야 한다. 그래서 제석천은 “힘 없는 자에게 인내하네”라고 했다. 그런데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정반대로 “힘없는 자는 항상 인욕해야 하도다”라고 번역했다. 이처럼 정반대로 번역한 것은 빠알리 원문 “nicca khamati dubbalo”를 어떻게 번역하느냐에 따라 달려 있다.
 
빠알리 원문 “nicca khamati dubbalo”를 직역하면 초기불전연구원 번역대로 “힘없는 자는 항상 인욕해야 하도다”라고 번역하는 것이 많다. 그러나 경에서 전반적으로 흐르는 문맥을 보면 한국빠알리성전협회 번역에서처럼 “힘 없는 자에게 인내하네”라고 번역하는 것이 맞다. 이는 둡발로(dubbalo)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달려 있다.
 
2016년도의 일이다. 그때 당시 니까야모임은 전재성 선생 홍제동 아파트 거실에서 열렸다. 그때 당시 상윳따니까야 1권 ‘시와 함께 모음’ 번역비교를 하고 있었다. 그때 정반대의 번역을 접하자 당황했다.
 
어떻게 정반대의 번역이 나올 수 있을까? 이에 대하여 전재성 선생에게 문의해 보았다. 이에 전재성 선생은 다음과 같은 문자를 보내 주었다.
 
 
“모든 학자들이 저와는 반대로 번역했군요. 그런데 nicca khamati dubbalo는 싯구인데, 시형론적으로 운율에 맞게 조정된 것입니다. 모든 학자들이 그것을 미쳐 생각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여기서 운율을 맞추기 위해 a가 생략된 것입니다. 시형론에서 부정의 접두사 a가 생략되는 것은 간혹 있는 일입니다. 따라서 adubbalo는 ‘힘없는 자가 아닌 자’가 되어 ‘힘있는 자’라고 번역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항을 알기 위해서는 매우 복잡한 운율학에 어는 정도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전재성님, 강자의 인내와 약자의 인내, 정반대의 번역을 보고 (tistory.com), 2016-05-29)
 
 
이 글은 2016년에 쓴 ‘강자의 인내와 약자의 인내, 정반대의 번역을 보고 (tistory.com)’(2016-05-29)에 실려 있다. 글을 보면 모두 반대로 번역했음을 개탄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 선생은 시형론과 운율학을 모르기 때문이라고 했다.
 
게송은 매우 압축되어 있어서 대체로 심오하다. 또한 운율을 맞추기 글자를 생략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문제의 구절 “nicca khamati dubbalo”도 이에 해당된다.
 
정반대의 번역을 초래하게 한 “nicca khamati dubbalo”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dubbalo’이다. 여기서 ‘dubbalo’는 ‘힘 없는 자(Weak)’라는 뜻이다. 그래서 직역하면 “힘 없는 자가 항상 인내한다.”가 된다. 냐나몰리도 이렇게 번역했다. 빅쿠보디도 은사를 따라 이렇게 번역했다. 각묵스님도 냐마몰리와 빅쿠보디를 따라 이렇게 번역했다. 그러나 전재성 선생의 시형론과 운율학에 따르면 다르다.
 
시형론에 따르면 dubbalo는 adubbalo에서 a가 탈락되어서 dubbalo가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전재성 선생은 “adubbalo는 ‘힘없는 자가 아닌 자’가 되어 ‘힘있는 자’라고 번역해야 하는 것입니다.”라고 했다. 이런 번역에 대하여 “매우 복잡한 운율학에 어는 정도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라고 했다.
 
인내는 누가 하는 것일까? 인내는 강자가 하는 것일까? 인내는 약자가 하는 것일 까? 정반대의 번역을 보고 당황스러웠다. 의문을 제기한 도반은 과거의 글을 보더니 “아~그렇군요. 감사합니다~!!”라고 글을 남겼다.
 
전두환 정권은 아수라의 리더십
 
힘 없는 자가 인내한다면 이는 아수라의 리더십에 복종하는 것과 같다. 아수라는 힘에 의한 통치를 하기 때문이다. 5공 시절 전두환이 철권으로 통치하는 것과 같다.
 
전두환 정권시절 학생들과 재야단체에서는 저항했다. 학생들이 데모하면 경찰을 동원하여 가혹하게 진압했다. 데모하다 걸리면 감옥에 집어 놓기 일쑤였다. 또한 재야단체에서 민주화 투쟁을 하면 가혹하게 탄압했다.
 
전두환 정권은 광주민중항쟁을 가혹하게 진압했다. 군을 투입하여 총칼로 억압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이런 행위는 역사의 심판을 받았다. 반면 독재에 불의에 항거한 것은 민주화 운동이 되었다.
 
전두환 정권은 아수라의 리더십을 보여 주었다. 이는 경에서 아수라 대왕이“강력한 처벌로 현자는 어리석은 자를 눌러야 하네.”(S11.5)라는 구절로 알 수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힘 없는 자에게 인내를 강요하는 것과 같다.
 
인내는 강자가 하는 것이 맞다. 왜 그런가? 약자는 항상 인내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힘을 가진 자가 인내해야 한다. 그럼에도 힘을 가진 자가 힘으로 누르려 한다면 조폭이나 다름 없다.
 
조폭은 항상 힘을 행사한다. 조폭은 힘이 곧 정의이다. 조폭은 법보다 주먹이 더 가깝다. 이런 조폭 앞에 약자들은 인내할 수밖에 없다. 조폭 영화나 마피아 영화를 보면 알 수 있다. 장사하는 사람에게 자리세라는 명목으로 돈을 빼앗아가기 때문이다.
 
아수라는 조폭과도 같다. 아수라에게도 힘이 곧 정의이다. 약자를 다스리는데 있어서 힘으로 제어한다. 그런데 아수라와도 같은 정권이 있었다는 것이다. 5공 시절 전두환을 말한다.
 
전두환은 5공시대를 열 때 정의사회구현을 천명했다. 그러나 전두환에게 정의는 힘이었다. 힘이 곧 정의였던 것이다. 힘이 곧 정의라면 이는 조폭과 다름 없다. 그리고 약자를 힘으로 제압하려는 아수라의 리더십과 다름없다.
 
강자가 자비를 베풀어야
 
강자가 인내해야 한다. 강자는 힘이 있기 때문에 언제든지 인내할 수 있다. 강자가 인내한다는 것인 강자가 자비를 베푼다는 말과 같다. 이는 약자가 강자에게 자비를 베풀 수 없는 것과 같다.
 
인내는 힘 있는 자가 하는 것이다. 힘 없는 자는 인내를 강요하는 것은 가혹한 것이다. 아수라의 리더십에서나 가능하다. 그런데 강자가 인내하면 적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게송이 있다.
 
 
어리석은 자의 힘은
힘없는 자의 힘이라네.
진리를 수호하는 힘 있는 자에게
대적할 사람은 없다네.”(S11.5)
 
 
이 게송은 자비무적(慈悲無敵)을 말하는 것 같다. 자비로운 자에게 적이 없음을 말한다. 누구든지 인내하면 그 사람이 강자일 것이다.
 
인내하지 못하고 억압하는 자는 알고 보면 힘이 없는 자이다. 도덕적인 힘이 없는 것과 같다. 5공시절 정통성이 결여된 집단이 범죄행위를 저지른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대표적으로 광주민중항쟁을 억압한 것을 들 수 있다.
 
강자가 참아야 할까 약자가 참아야 할까?
 
번역비교를 하다 보면 오류를 발견하게 된다. 오자나 탈자는 작은 것이다. 그러나 정반대의 번역이 되었을 때 어느 번역이 올바른 것인지 고민하게 된다. 더구나 오역되었을 때 부처님 가르침이 왜곡 될 수가 있다.
 
과연 강자가 참아야 할까 약자가 참아야 할까? 누가 참는 것이 오른 것일까? 정반대의 번역을 보고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2023-04-19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