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평화불교연대

문수스님의 승의적 초월의 길

담마다사 이병욱 2023. 6. 1. 07:04

문수스님의 승의적 초월의 길


인생을 고해의 바다라고 한다. 인생은 고통뿐이라는 것이다. 희로애락이 있지만 큰 의미에서는 고통과 괴로움임뿐임을 말한다. 결국 죽어야 하는 운명이기 때문이다.

인생을 전쟁터에 비유하기도 한다. 왜 인생이 전쟁터인가? 그것은 언제 죽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총알이 빗발치는 전쟁터에서는 목숨이 보장되어 있지 않다. 살아 있어도 산목숨이 아니다. 한시간 후에 살아 있으리라는 법이 없다. 오로지 지금 이순간만 있을 뿐이다. 인생은 오늘밤이 지나면 내일이 올지 내생이 시작될지 아무도 모른다.

인생은 불가항력적이다. 죽어야 할 운명을 거역할 수 없다. 오로지 사랑만이 운명을 거역할 수 없다. 불교에서는 자비, 자애와 연민만이 운명을 거역할 수 있다. 내뜻대로 되지 않는 운명에서 사랑과 자비만이 내뜻대로 할 수 있다.

불가항력적인 운명에 거역한 사람들이 있다. 사랑과 자비를 실천한 사람들이다. 십자가를 짊어진 사람과 보살행을 실천한 사람이다. 가지 않은 길을 간 사람들이다. 문수스님도 그런 사람중의 하나이다.

 


문수스님 추모제가 약사암에서 있었다. 문수스님 소신공양을 기리기 위해서 2023 5 31일 오후 3시에 재가불교단체 회원들이 성북동 약사암에 모였다.  

 


다섯 단체가 모였다. 정의평화불교연대, 불교환경연대, 불력회, 교단자정센터, 신대승네트워크 사람들이 왔다. 참석자는 노광희, 최연, 이도흠, 박경준, 이지범, 이석만, 서현욱, 윤덕만, 손상훈, 최원녕, 연화생, 조현덕, 박재현, 이원이, 박종린, 유정길, 이희선, 이석만, 서현욱, 일휴스님, 이병욱(무순), 이렇게 21명이다.

문수스님 추모제는 약사암에서만 열린 것은 아니다. 전국적으로 세 군데서 열렸다.

서울 개운사에서는 중앙승가대 동문회 주최 다례제가 10시에 열렸다. 이 다례제는 조계종 총무원에서도 후원했다.

 


문수스님이 소신한 곳서도 추모제가 열렸다. 오전 11시에 경북 군위군 위천의 지보사와 문수스님 부도탑앞에서 열린 것이다. 대구환경운동연합 회원들이 추모행사를 가졌다.

 


문수스님 추모제는 승가와 재가에서 동시에 열렸다. 더구나 총무원에서도 후원했다. 재가불교단체와 환경단체에서도 주최했다. 문수스님은 출재가를 막론하고 추모의 대상이 된 것이다. 대체 어떤 점이 이렇게 출가와 재가의 관심을 끄는 요인이 되었을까?

 


문수스님은 2010 5 31일 군위에 있는 낙동강의 지천인 위천 뚝방에서 소신(燒身)했다. 소신목적은 남긴 글에서 알 수 있다. 그것은 사대강 반대, 약자에 대한 배려, 부정부패 척결에 대한 것이다. 환경문제뿐만 아니라 경제문제, 정치문제 등 사회전반에 대하여 총체적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문수스님이 소신 했던 때는 이명박 정권시절이었다. 그때 당시 말도 되지 않는 사대강 사업을 강행하던 때이었다. 그때 대다수 사람들은 반대했다. 그럼에도 정권을 잡은 자들은 밀어부쳤다. 그 결과는 어땠을까?

오늘날 사대강 사업은 실패로 결론 났다. 막대한 예산만 낭비했을 뿐만 아니라 환경도 오염되었다. 자연은 가만 놔두는 것이 가장 좋다. 물은 자연스럽게 흘러야 한다. 그럼에도 탐욕에 눈 먼 자들이 국토를 공사판으로 만들었다. 오늘날 흉물처럼 남아 있는 댐이 그 증거일 것이다.

 


환경의 중요성은 이루 말할 수 없다. 환경론자들은 위기를 말한다. 이대로 가다가는 오래 지나지 않아 파국을 맞이할 것이라고 한다. 이에 대해서 기후문제를 들고 있다.

쓰레시홀드(threshold), 문턱치라는 말이다. 문지방이라는 말도 된다. 기후위기가 문턱치를 넘어서기 일보직전이라고 말한다. 문턱치를 넘어서는 순간 비가역적이라고 한다. 결코 옛날로 되돌아갈 수 없다는 것이다. 환경론자들은 임계점이 멀지 않았다고 말한다. 빠르면 십년 이내에도 올 수 있다고 한다.

사람들은 환경의 중요성을 실감하지 못한다. 환경론자들이 아무리 떠들어도 자신에게 닥친 일이 아니기 때문에 관심 두지 않는것 같다. 정말 환경론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위기는 오는 것일까?

환경론자들을 보면 로까뷰하를 보는 것 같다. 로까뷰하는 무엇을 말하는가? 청정도론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다음)

로까뷰하(Lokabyūha, 世莊嚴)라고 이름하는 욕계의 신들이 백천년이 지난 뒤 겁의 종말이 시작될 것임을 알고서 관모를 풀고, 산발한 머리털과 비참한 얼굴로, 눈물을 손으로 닦으면서 물들인 옷을 입고 아주 보기 흉한 모습으로 사람들이 다니는 길에 다니면서 이와같이 알릴 것이다.

여러분, 여러분, 지금부터 백천년이 지난뒤에 겁의 종말이 시작될 것입니다. 이 세상은 멸망할 것이고, 대해도 마를 것입니다. 이 대지와 산의 왕인 수미산도 불타고, 멸할 것입니다. 세상의 멸망은 범천의 세계까지 이를 것입니다.

여러분, 자애를 닦으십시오. 연민과 더불어 기뻐함과 평온을 닦으십시오. 어머니를 봉양하고 아버지를 봉양하고 집안의 어른을 공경하십시오.”
(청정도론, 13장 초월지)

로까뷰하는 어쩌면 미래에서 온 사람들일지 모른다. 로까뷰하는 선지자들일지도 모른다. 어느날 머리를 산발하고 비참한 모습을 한 사람들이 나타나서 세상의 종말을 말하고 다닌다. 그리고 자애를 닦으라고 말한다.

청정도론에 따르면 종말의 전조가 있다. 그것은 가뭄 드는 것부터 시작된다. 세상이 뜨거워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를 겁화(劫火)로 설명했다. 탐욕이 치성했을 때 겁화가 일어남을 말한다.

겁화가 일어나면 세상이 타버린다. 세상이 지옥에서부터 차례로 파괴되어 색계초선천까지 이르게 된다. 자애를 닦아 색계 초선천 이상의 천상에 태어나야 겁화를 면할 수 있다. 그래서 로까뷰하는 자애를 포함한 사무량심을 닦으라고 눈물로 호소하는 것이다.

오늘날 환경론자들은 로까뷰하의 후예들 같다. 세상의 종말을 알리는데 있어서 그렇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수스님은 소신으로서 알렸다는 것이다. 이제까지 이런 경우는 없었다. 환경을 위해서 몸을 태운 것은 아마 문수스님이 처음인 것 같다.

욕심으로 살면 욕심으로 망하게 되어 있다. 주식도 탐욕으로 하면 망한다. 그런데 욕망으로 이루어진 존재는 욕망으로 망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는 사실이다.

탐욕이 치성하면 겁화가 일어난다고 했다. 겁화가 일어나면 세상을 태워버린다. 경에 따르면 괴겁기가 되었을 때결코 재나 검댕이를 남기지 않는다.”(A7.66)고 했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 자애의 마음을 내는 것 밖에 답이 없다.

문수스님의 메세지는 환경만 말한 것이 아니었다. 가난한 자, 소외된 자 등 사회적 약자를 배려해야 할 것을 말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사랑과 자애의 마음을 가지라는 것과 같다. 마치 로까뷰하가 출현하여 여러분, 자애를 닦으십시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5 31일 세 군데서 문수스님 추모제가 열렸다. 다례재라는 형식으로 열렸다. 승가에서도 열리고 재가에서도 열렸다. 이런 케이스는 보기 드물다.

재가불교단체에서는 왜 문수스님 추모제를 매년 개최하는가? 그것은 스님이 던진 메세지가 너무 컸기 때문이다. 환경문제뿐만 아니라 사회문제도 제기했다. 이를 소신으로 보여 주었다.

소신은 자발적 죽음이다. 그러나 단순한 자살과 다르다. 청정한 마음 상태에서 자발적 죽음은 보살행이라 말할 수 있다. 중생을 위해서 자신의 한몸을 던진 것이다.

 


최근 한국빠알리성전협회(KPTS)에서 자타카가 완역되었다. 자타카를 보면 부처님이 보살로 살 때 행적이 기록되어 있다. 부처가 되기를 서원하고서 사아승지하고도 십만겁동안 보살행을 한 것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보살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서원을 했기 때문에 죽는 것이 두렵지 않은 것이다. 왜 그런가? 죽고나면 어떤 존재로든지 다시 태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태어나면 또다시 보살행을 한다. 목숨까지 바치는 보살행을 한다. 이를 십바라밀에서는 승의적 초월의 길(dasaparamatthapāramī)’이라고 말한다.

승의적 초월의 길을 가는 사람은 목숨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보시를 해도 가장 아끼는 것이나 신체의 일부를 보시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목숨까지 내놓는 것이다.

종종 뉴스를 보다 보면 자신의 목숨을 희생해서 남을 구하는 사람을 볼 수 있다. 어쩌면 이런 것이 승의적 초월의 길인지 모른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보살정신으로 밖에 설명되지 않는다.

 


보살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부처가 되기로 서원했기 때문이다. 언젠가 성불할 것이기 때문에 삶에 애착하거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다시 태어나도 또다시 보살행을 할 것이다. 승의적 초월의 길을 가는 사람이다. 문수스님은 어쩌면 그런 사람인지 모른다.


2023-06-01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