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평화불교연대

여름에는 땀을 흘려야, 우정과 건강과 수행의 검단지맥 종주

담마다사 이병욱 2023. 6. 19. 10:44

여름에는 땀을 흘려야, 우정과 건강과 수행의 검단지맥 종주
 
 
이제 완연한 여름이다. 오늘 이른 아침 일터에 가는 길에 더위를 감지했다. 아침이 이 정도이니 낮이 되면 얼마나 뜨거울까?
 
일터에 도착해서 어느 때와 마찬가지로 절구커피를 만들었다. 이번에는 변화를 주었다. 아카시아꿀 몇 방울을 떨어뜨린 것이다. 커피 특유의 쓴맛, 신맛, 단맛이 있는데 단맛이 강조되는 것 같았다. 커피점의 시럽과 비교할 바가 아닌 최상의 맛이다.
 
언제나 최상을 지향한다. 그렇다고 부와 명예와 권력을 지향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맛에 탐착하는 맛의 최상을 지향하는 것도 아니다. 정신적 최상을 지향한다. 부처님이 그랬던 것처럼 아눗따라삼마삼보디이다. 그러나 그 길은 멀고도 험하다. 시간을 필요로 하고 인내와 끈기를 필요로 한다. 단기간에 되지 않는다. 수많은 생을 필요로 할 것이다.
 
어제는 최상의 날이었다. 왜 최상인가? 그것은 우정의 산행, 건강의 산행, 수행의 산행이 되었기 때문이다. 검단지맥을 종주했다.
 
어제 2023년 6월 18일(일)은 정진산행 모임 날이었다. 정의평화불교연대(정평불)산행모임에서는 매달 세 번째 주 일요일에 산행을 한다. 이름하여 정진산행이다. 단지 즐기는 산행이 아니라 향상을 위한 산행이다.
 

 
지난달 산행은 부처님오신날 등의 행사로 인하여 쉬었다. 두 달 만에 열린 산행에는 다섯 명이 참석했다. 산행대장 최연 선생을 비롯하여, 김광수, 박태동, 정재호 선생이 참석했다. 목적지는 검단지맥이다. 검단산 남쪽에 위치하는 두리봉(569m), 용마산(595m), 희망봉(453m), 장작산(334m) 등 여러 봉우리를 말한다.
 
죽음의 산행이 될 것 같아서
 
산행이 시작되는 아침에 겁이 났다. 컨디션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주전부터 몸에 한기가 도는 등 몸 상태가 좋지 않았다. 감기도 아니고 코로나도 아니다. 어떤 날은 상태가 좋다가 또 어떤 날은 상태가 좋지 않았다. 산행 날자는 점점 다가 오는데 이런 상태라면 산행을 못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예감도 들었다.
 
당일 아침 비장한 각오를 했다. 죽더라도 산행하다 죽자는 심정으로 일어난 것이다. 잠도 충분히 자지 못했다. 산행하면 4-5시간 걸어야 한다. 엄청난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아침을 든든히 먹어야 한다. 먹기 싫어도 억지로라도 밥을 먹어야 한다. 밥심으로 산행을 할 수 있다.
 
안양에서 검단산까지 가야 한다. 지하철을 타면 빙 돌아 가야 한다. 검색해 보니 버스로 가는 것이 최상이다. 비산사거리에서 1650 직행버스를 타고 가천대에서 3000번 직행으로 갈아타면 된다. 황산사거리에서 30번 버스를 타면 동남쪽 검단산 입구 산곡초등학교에 이를 수 있다. 1시간 15분 가량 갈렸다.
 
산행은 11시부터 시작되었다. 검단산역에서 모여서 오는 사람들이 늦게 도착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 되지 않는다. 늦을 수도 있는 것이다. 오늘 산행을 의미 있게 보내면 된다. 우정과 건강과 수행의 산행이 되길 바랬다.
 
아침에 버스에서 뉴스를 들었다. 요즘 뉴스를 보지도 않고 듣지도 않는데 직행 시외버스에서 9시 뉴스를 들었다. 짤막하게 전하는 뉴스에서 날씨에 대한 것도 있었다. 오늘 낮의 날씨가 28-34도가 될 것이라고 했다. 폭염에 가능하면 외출을 자제하라는 멘트가 있었다.
 
어제부터 갑자기 더워진 것 같다. 아침부터 뜨거워진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낮의 날씨가 34도까지 올라간다면 뜨거워서 걸어 다닐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산행은 어떠할까?
 
무더위에서 산행하기 힘들다. 불꽃 같은 날씨에 땀을 뻘뻘 흘리며 산행하는 것은 자살하는 행위와 같을 것이다. 이번 산행도 어려운 산행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더구나 컨디션은 매우 불안했다. 이런 상태에서 산행을 하면 죽음의 산행이 될 것 같았다.
 
산행하다 죽을 수도 있을까? 죽을 수도 있을 것이다. 험한 산에 들어가서 나오지 못했을 때 산에서 최후를 맞이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검단지맥과 같은 여러 봉우리의 산행은 어떠할까? 죽음의 이를 정도로 괴로움을 겪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래서 죽음의 산행, 초죽음의 산행이 될 것으로 예견했다.
 
대장의 우정어린 충고
 
산행은 시작되었다. 산행대장은 인정사정 봐주지 않는 것 같다. 따라오거나 말거나 저만큼 앞서 간다. 뒤따라 가는 사람들은 따라가기에 바쁘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종주하기 힘들 것이다.
 
검단산은 높이가 658미터이다. 강에서 높이로 따지면 거의 액면의 높이가 된다. 산의 중간에서 올라가는 것과는 다르다. 그래서일까 멀리서 보는 검단산은 매우 높아 보인다. 대체로 평지에 돌출 되어 있는 산은 높아 보인다.
 
검단산은 정진산행 모임에서 두 번 가 보았다. 이번에는 검단산 남쪽에 있는 용마산이 목적지가 되었다. 이른바 검단지맥에 있는 두리봉, 희망봉 등 여러 봉우리를 종주하는 산행이 된 것이다. 거의 10키로에 달하는 긴 길이의 산맥을 따라 가는 것이다.
 
몸에 한기가 있는 등 컨디션이 좋지 않은 상태에서 산행이 시작되었다. 대장은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저만큼 멀리 가고 있다. 뒤처지면 안된다. 부지런히 따라 잡아야 한다. 뒤에 바싹 붙어서 가는 것이 가장 좋다. 그것도 급경사길로 올라갔다.
 
이번 산행은 죽음의 산행이 될 줄 알았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사람을 살리는 산행이 되었다. 곧 죽을 것처럼 몸 상태가 좋지 않는 자도 막상 산행이 시작되자 힘이 나기 시작한 것이다. 다리가 뻐근할 정도로 걷자 오한 같은 것은 사라졌다. 땀으로 범벅이 되었을 때 완전히 다른 몸 상태가 되었다.
 

 
산행을 하면 배울 것이 많다. 가장 먼저 우정의 산행이 된다. 왜 우정의 산행인가? 산에서 만난 사람들은 모두가 친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산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악인이 없는 것 같다.
 
대체로 악한 마음을 갖는 자들은 산에 오지 않는 것 같다. 애써 힘들게 산행하려 하지 않는 것이다. 그저 편하게 즐기며 살고자 하는 자들에게 산행은 미친짓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올라갔다가 내려 올 짓을 애써 하지 않는 것이다. 게으른 자들이나 감각을 즐기는 자들 역시 산을 좋아하지 않는 것 같다.
 
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모두가 친구가 된다. 산에 다니는 사람들은 모두 우호적인 것 같다. 산에서 적대적 행위를 하는 사람들을 만나기 힘들다. 애써 힘들게 성취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산을 찾는다. 산사람들 사이에는 우호적 감정이 있기 때문에 우정의 산행이 된다.
 

 
산행을 하면 건강해진다. 산행을 하면 4-5시간 걷기 때문에 매우 강한 유산소 운동이 된다. 온몸으로 산행을 했을 때 건강해지지 않을 수 없다. 땀을 흠뻑 쏟았을 때 몸의 노폐물도 쏟아 내 버릴 것이다. 동시에 마음에 남아 있는 찌꺼기도 쏟아 내 버릴 것이다.
 
산행을 시작한지 30분이 되었을 때 몸 상태가 완전히 바뀌었다. 이것이 몸으로 확인할 수 있는 산행의 효과일 것이다. 그 어떤 명약을 먹는 것보다도 이렇게 “빡세게” 걷는 것이 최고의 보약임을 알 수 있다. 죽음의 산행이 아니라 활인의 산행이 된 듯 했다.
 
산행을 하다 보면 동료들과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여러 사람과 돌아가며 이야기를 나눈다. 대장과 이야기 나눌 기회가 있었다. 급경사 길에 대장 뒤에 바싹 붙어 올라 갔는데 갑자기 대장이 “법회도 나오고 사람들과 친하게 지내세요.”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대장의 말은 충분히 예견된 것이었다. 최근 몇 달 동안 소원했었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을 간파한 대장이 둘이서 걷게 되자 기습적으로 던진 말이다. 이에 “그렇게 해야지요.”라고 답했다. 그러자 대장은 안심이 되었던 것 같다. 이어지는 말을 계속 했다.
 

 
어느 모임이나 단체에서든지 이견은 있을 수 있다. 그것은 틀린 것이 아니다. 서로 다른 견해라고 보아야 한다. 다양성을 인정해 주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것이야말로 진리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라고 말하면 입에 칼을 무는 것과 같다.
 
잘못이 있으면 사과해야 한다. 무례한 행위를 했다면 쿨하게 사과하면 그만이다. 그러나 진리는 양보할 수 없다. 무례한 행위를 한 것에 대해서는 열번이고 백번이고 사과할 수 있지만 진리는 양보와 타협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다양성이 존중되어야 한다.
 
상대방이 말한 것은 틀린 것이 아니다. 나와 견해가 다른 것일 뿐이다. 그럼에도 “이것이야말로 진리이다.”라고 말한다면, 이는 “다른 것은 거짓이다.”라는 말이 되어 버린다. 다툼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상대방의 말은 틀린 것이 아니라 나와 생각이 다른 것이다.
 
오로지 일보 앞만 보고 갔을 때
 
산행을 1시간 했을 때 몸 상태가 완전히 바뀌었다. 산행전에는 죽음의 산행이 될 것으로 예상했으나 정반대로 몸이 가벼워졌다.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이런 상태가 된 것은 온 몸으로 움직였기 때문이다. 다리의 힘과 심장의 박동으로 이동한 것이다.
 
산행을 하면 수행도 되는 것 같다. 구체적으로 위빠사나 수행을 말한다. 산행이 어떻게 위빠사나 수행이 될 수 있을까? 그것은 산행에 위빠사나 수행을 접목시켰을 때 확인할 수 있었다.
 
산행을 할 때 앞만 보고 간다. 고개를 들어 저 높은 산봉우리를 보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쉽게 지쳐 버릴 것이다. “저 높은 고지에 언제 올라 갈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일어 나는 순간 힘이 빠져 버린다. 피곤한 몸을 더 피곤하게 만드는 것이다.
 
산행을 할 때는 오로지 앞만 보고 가야 한다. 고개를 들지 않고 바로 일보 앞만 보고 가는 것이다. 한발한발 내딛는 것만 보고 가는 것이다. 이렇게 오르면 하나도 힘들지 않다.
 
산행하는 것도 요령이다. 산행은 기본적으로 힘든 것이기는 하지만 심리를 알면 전혀 힘들지 않는 산행이 된다. 먼 곳을 바라보면 힘든 산행에 더욱더 힘든 산행이 된다. 왜 그런가? 육체적으로도 힘이 드는데 거기에 정신적으로도 힘이 들기 때문이다.
 

 
오르막 산행에서는 오로지 일보 앞만 볼 수밖에 없다. 고개를 들고 올라갈 수 없다. 오로지 발을 옮기는 데에만 마음을 두어야 한다. 이때 잡생각을 하면 안된다. 생각을 하면 힘이 든다. 육체적으로도 힘이 드는데 정신적으로도 힘이 들면 괴로운 산행이 된다.
 
오르막에서는 몸과 마음을 분리해야 한다. 몸 따로 마음 따로 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었을 때 다리는 저절로 가는 것이 된다. 물론 의도에 따라 다리를 움직이는 것이다. 이렇게 몸과 마음을 분리하면, 다리는 힘이 들지만 마음은 힘들지 않게 된다.
 
다리는 뻐근하고 심장은 쿵쾅거린다. 몸이 힘든 것이다. 사띠를 하면 몸이 힘들다고 하여 마음까지 힘든 것은 아닌 상태가 된다. 이런 상태로 산행하면 몇 시간이고 걸을 수 있다.
 
일보 앞만 보면 된다. 아무리 몸이 녹초가 되어도 그것은 몸만 힘들 뿐이지 정신이 힘든 것은 아니다. 그래서일까 그 먼 거리를 걷는 것 같다. 몸과 마음을 분리했을 때 가능한 것이다. 바로 이런 것이 수행 아니고 무엇일까? 이는 다름 아닌 위빠사나 수행이다.
 

 
위빠사나 수행이라 하여 반드시 좌선이나 행선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산행을 하면서도 수행을 할 수 있다. 오르막 길에서는 의도와 행위를 본다. 이때 의도도 알아차리고 행위도 알아차리면 최상의 위빠사나 수행이 된다.
 
내리막길에서도 위빠사나 수행이 된다. 내리막 길은 오르막 길보다 더 위험하다. 발을 잘못 디디면 사고 날 수 있다. 오로지 한발 앞만 볼 수밖에 없다. 자연스럽게 사띠가 된다. 사띠는 바로 이전 것을 기억하는 것이다. 수행의 관점에서 그렇다. 이전 것 이외의 것을 생각하면 망상이 되어 버린다.
 
생각에도 무게가 있는 것 같다. 망상을 하면 피곤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리막에서는 생각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자신의 안전과 관련 되어 있기 때문에 바로 한발자국 앞만 바라보고 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오르막이든 내리막이든 오로지 한발자국 앞만 보고 간다. 바로 이것이 수행이다. 망상이 일어날 수 없다. 하늘을 쳐다 보거나 고지를 쳐다 보면 힘이 든다. 산행에 맥이 빠지는 것이다.
 
망상이 일어났을 때 힘든 산행이 된다. 이럴 때는 오로지 앞만 보고 가는 것이다. 마치 탁발승이 멍에 길이만큼만 앞만 보고 가는 것과 같다. 이렇게 해야 알아차림이 유지된다. 육체적으로는 피곤하지만 정신적으로는 피곤하지 않는 상태가 된다. 오히려 산행이 상쾌해진다. 어쩌면 육체의 나른함에서 오는 쾌감 같은 것이다.
 

 
 
산행은 산곡초등학교에서부터 시작하여 검단산 남단 검단지맥을 종주했다. 종주과정에서 두리봉, 용마산, 희망봉 등 크고 작은 수많은 봉우리를 걸쳤다. 이른바 능선산행이 된 것이다.
 
능선길을 걸으면 꽃 길을 걷는 것 같다. 다리는 풀려서 자동으로 걷는 것 같은 상태가 된다. 오로지 일보 앞만 보고 걷기 때문에 번뇌가 있을 수 없다. 더구나 울창한 산림에서 걷기 때문에 강렬한 햇볕도 차단된다. 날씨가 34도라고 해도 그늘에만 들어가면 서늘하기 때문에 능선길은 꽃 길, 비단길이 된다. 이보다 더한 행복이 어디 있을까?
 
고된 산행에 대한 보상으로 생맥주를
 
네 시간에 걸친 산행을 마쳤다. 그것도 염천에 산행한 것이다. 그러나 산에서 산행은 그다지 덥지 않았다. 울창한 산림으로 인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그늘길을 걸은 것이다.
 
산행이 끝나고 도로에 이르자 그때부터 뜨거움을 느꼈다. 견딜 수 없을 정도의 뜨거움이다. 이럴 때 시원한 생맥주 생각이 간절했다.
 

 
힘든 일을 하면 보상이 따라야 한다. 오후 3시에 산행을 마치자 다음 행선지를 찾아 갔다. 천호사거리 천호역에 있는 맥주집에 가고자 한 것이다. 힘든 산행에 대한 보상이다.
 

 
산행 도중에 마시는 물은 감로수와 같다. 땀을 흘리고 난 다음 마시는 물은 온 몸의 세포에 흡수되는 것 같다. 산행 후에 마시는 맥주는 힘든 산행에 대한 보상으로 따른 것이다. 마치 막장에서 일하는 광부가 신성한 노동의 대가로 삼겹살에 소주를 마시는 것과 같다.
 
천호역 사거리에서 산행 뒷풀이를 했다. 맥주 생각이 간절했으므로 생맥주를 주문 했다. 약간 빈속에 맥주가 들어가자 온 몸에 흡수되는 것 같다. 온 몸의 세포가 마치 스폰지처럼 빨아들이는 것 같았다. 500씨씨 생맥주를 연달아 두 번 마셨다. 1000씨씨를 마신 것이다.
 

 
고된 노동 후에 마시는 막걸리나 소주는 노동의 피로를 풀어주기에 충분하다. 염천에 고된 산행에 생맥주 역시 산행의 피로를 풀어주기에 충분했다. 산행 중에 마시는 물은 감로수가 되는데 산행 후에 마시는 맥주는 열반주가 되는 것 같다.
 
음주행위를 비난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불자가 불음주계를 어겼다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산행 후에 뒷풀이 좌석에서 마시는 음주행위는 어쩌면 용서가 될지 모른다.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자가 단지 감각을 즐기기 위해서 마시는 것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파한 계는 다음 법회 때 복원하면 된다.
 
우정의 산행, 건강의 산행, 수행의 산행
 
6월 정진산행이 끝났다. 이번 정진산행은 우정의 산행, 건강의 산행, 수행의 산행이 되었다. 대장으로부터 우정 어린 충고도 받았다. 애정이 아니라 우정이다. 불교는 우정의 종교이기 때문이다. 이는 부처님이 “세존을 좋은 벗으로 삼아”(S3.18)라는 가르침으로도 알 수 있다. 스승도 친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같은 길을 가는 도반은 모두 우정의 관계이다.
 

 
여름에는 땀을 흘려야 한다. 계절에 맞게 살아야 한다. 덥다고 하여 시원한 곳만 찾는다면 몸의 저항력이 약해질 것이다. 이번 산행에서는 몸 상태가 좋지 않아서 죽음의 산행이 되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정반대로 활인의 산행이 되었다. 여름에는 여름답게 살아야 한다. 이번 산행은 건강의 산행이 되었다.
 
이번 산행은 무엇보다 수행의 산행이 된 것이다. 오로지 한발 앞만 보고 걸었을 때 육체의 피로는 정신적 피로로 전이 되지 않은 것이다. 산행하면서 위빠사나 수행을 한 것이다. 정진산행이 문자 그대로 정진산행이 된 것이다.
 
 
2023-06-19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