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전암송

일생동안 내가 가장 잘한 것은

담마다사 이병욱 2023. 6. 15. 07:36

일생동안 내가 가장 잘한 것은

오늘 최후를 맞이 한다면 어떤 생각이 들어 갈까? 가장 먼저 후회 있는 삶인지 후회 없는 삶인지가 될 것 같다. "해야 할 것이 많은데"라고 생각한다면 후회 있는 삶이 될 것이다. 반면 미소짓는다면 후회없는 삶이 될 것이다.

미소짓고 죽을 수 있을까? 위빠사나 명상에서는 이를 최상의 죽음이라 본다. 다름아닌 아라한의 죽음이기 때문이다. 해야 할 일을 마친 아라한에게는 최후의 죽음이다. 다시는 태어날 일 없는 죽음이다. 물론 무아의 아라한에게는 죽음이라는 말조차 시설되지 않는다.

지금 눈을 감는다면 가장 보람스러운 일은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경이나 게송을 외운 것이 가장 큰 사건이 될 것 같다. 애써서 수많은 일을 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힘들었던 것은 빠알리어 경과 게송을 외운 것이다.

인생을 쉽게 살 수 있다. 아무런 일도 하지 않는 것이다. 먹고 마시고 배설하는 일이 가장 쉽다. 배고프면 먹고 졸리면 자는 일처럼 쉬운 일이 어디 있을까? 감각을 즐기는 일이야 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이다.

감각을 즐기는 일로 한평생 살았을 때 남는 것은 무엇일까? 최후의 순간에 맛집에서 먹는 것이 떠오를지 모른다. 그 먹는 행위를 대상으로 재생연결식이 일어난다면 그 행위에 적합한 세상에 태어날 것이다. 축생이기 쉬울 것 같다.

한평생 글만 쓰는 사람은 어떤 세상에 태어날까? 그 글에 대한 기억이 있어서, 그 글쓰는 행위가 원인이 되어서 다음 생에도 글 쓰는 사람으로 살아가기 쉬울 것이다.

한평생 수행만 하던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될까? 수행한 것이 원인이 되어 결생이 될 것이다. 선정상태에서의 무탐, 무진, 무치가 원인이 되어 지혜를 갖춘 자로 태어날 것이다. 그래서 이런 게송이 있다.

“계행을 확립하고 지혜를 갖춘 사람이
선정과 지혜를 닦네.
열심히 노력하고 슬기로운 수행승이라면,
이 매듭을 풀 수 있으리.”(S1.23)

상윳따니까야 '매듭의 경'에 실려 있는 게송이다. 동시에 청정도론 오프닝테마와 같은 게송이다. 계, 정, 혜 삼학에 대한 것으로 청정도론 전체를 관통하고 있다.

게송에서 주목하는 말이 있다. 윤회의 매듭을 풀려거든 먼저 지혜를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지혜인가? 생이지를 말한다. 학습해서 얻어진 지혜가 아니라 타고난 지혜이다. 그래서 '지혜를 갖춘 자(naro sapañña)'라고 했다.

지혜 있는 자는 지혜를 갖춘 자를 말한다. 그래서 빠알리어 사빤냐(sapañña)는 한역으로 유지혜자(有智慧者) 또는 구유지혜자(具有智慧者)라고 하는데, 이는 지혜를 구족했다는 뜻이다. 이는 다름 아닌 ‘생이지자(生而知者)’를 말한다.

타고날 때부터 지혜를 갖춘 자가 있다. 이런 자가 수행할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게송에서는 “지혜를 갖춘 사람이 선정과 지혜를 닦네.”(S1.23)라고 한 것이다.

청정도론에서는 위 게송을 주제로 하여 방대한 계, 정, 혜 삼학이론을 전개하고 있다. 현생에서 열반에 이르고자 하는 자는 지혜를 가지고 태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본문에서 “지혜를 갖춘 자는 세 가지 원인에 의한 업생적 결생의 지혜로 지혜를 갖춘 자이다.”(Vism.1.7)라고 했다.

지혜구족자는 세 가지 원인으로 태어난다고 했다. 이 말은 무슨 뜻일까? 주석에 따르면 세 가지 원인은 무탐, 무진, 무치를 말한다. 전생에 탐, 진, 치를 소멸하는 수행을 한 자가 그것을 원인으로 해서 이 생에 태어났음을 말한다.

나는 왜 이모양 이꼴로 생겼을까?  사람들은 왜 모두 모습이 다르고 성향이 다를까? 같은 배에서 태어난 형제도 왜 귀하거나 천한 성품을 타고 태어날까? 이러한 물음에 정답이 되는 게송이 있다.

"뭇삶은 행위의 소유자이고
행위의 상속자이고
행위를 모태로 삼는 자이고
행위를 친지로 하는 자이고
행위를 의지처로 하는 자로서
그가 지은 선하거나 악한 행위의 상속자이다.”(A10.216)

나는 업의 상속자이다. 내가 죽으면 업이 윤회한다. 그래서 업생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업이 자신의 주인임을 반조하는 것에 대하여 업자성정견 (kammassakata-sammādiṭṭhi)이라고 한다.

업자성정견은 부처님도 말씀하신 것이다. 부처님은 먼저 "나는 올바른 견해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말한다.”(M117)라고 말씀하셨다. 두 가지 정견이 있음을 말한다. 하나는 출세간적 정견이고 또 하나는 세간적 정견이다. 전자는 사성제를 말하고 후자는 업보를 말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수행승들이여, 나는 올바른 견해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말한다. 수행승들이여, 번뇌에 영향을 받기 때문에, 일정한 공덕이 있어도 집착의 결과가 따르는 올바른 견해가 있고, 수행승들이여, 번뇌에 영향을 받지 않기 때문에 세상을 뛰어넘고, 고귀한 길의 경지에 드는 올바른 견해가 있다.”(M117)

업자성정견은 세간적 정견이다. 이를 번뇌에 물든 정견이라고 한다. 윤회하는 삶속에서 발견되는 것이다. 선업이든 악업이든 업의 상속자가 되는 것이다. 업자성정견은 또한 중도이기도 하다.

업자성정견이 왜 중도일까? 경안각지에 대한 주석을 보면 "중도를 닦는 것: 자기와 타자에 대한 업의 자성(kammassakata)-업을 자기로 삼는 것-을 성찰하는 것이다."(Smv.793)라고 설명해 놓았다. 사각지에 대한 주석을 보면 "뭇삶에 대한 중도인 것: 자기와 타자에 대한 업의 자성(kammassakata)-업을 자기로 삼는 것-과 뭇삶의 비실체성의 성찰하는 것을 통해 이루어진다."(Smv.795-796)라고 설명해 놓았다.

중도란 무엇일까? 이제까지 중도에 대해서 목적론적으로 알고 있었다. 한국불교에서는 중도에 대하여 도달해야 할 목표로 설정해 놓았다. 마치 중도가 깨달음의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초기불교에서 중도는 초월의 길에 대한 것이다. 이쪽에서 저쪽으로 건너가는 것이 중도임을 말한다.

중도가 초월인 이유가 하나 더 있다. 그것은 업을 자신의 주인으로 보는 것이다. 이는 행위에 대한 과보가 자신의 것임을 반조하는 것이다. 이처럼 업을 자신의 주인으로 보면 괴로운 세상에서 마음이 편안해진다. 또한 타자의 업도 타자의 주인 것을 반조하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그래서 주석에서는 경안각지와 사각지에 대해서 업이 자신의 주인임을 반조하는 업자성정견으로 설명했을 것이다

나는 죽어서 어떻게 될까? 이런 생각을 하면 죽음이 두려워 질 것이다. 행위한 것에 대한 과보를 생각하기 때문이다. 임종의 순간에 업이나 업의 표상, 태어날 곳의 표상에 따라 재생연결식이 일어난다. 일생중에 가장 강한 대상이 되기 쉽다. 살인을 저지른 사람은 임종이 다가올수록 안절부절하기 쉽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가르침이 있다.

“또한 수행승들이여, 어리석은 자가 의자 위에 올라앉거나 침대위에 눕거나 땅바닥에서 쉬거나 할 때, 그가 과거에 저지른 악한 행위, 즉 신체적 악행, 언어적 악행, 정신적 악행이 있다면, 그것들이 그때마다 그에게 걸리고 매달리고 드리워진다.”(M129)

이 가르침은 원초적 죄의식을 말한 것이다. 다른 사람을 다 속여도 자신만큼은 속일 수 없음을 말한다. 자신이 저지른 악행은 문득문득 떠 오른다는 것이다. 이를 “그것들이 그때마다 그에게 걸리고 매달리고 드리워진다.”(M129)라고 표현했다.

죽음의 순간 마음의 그림자가 지면 어떻게 될까? 살인했던 것이 임종순간에 드리워진다면 그것을 대상으로 재생연결식이 일어날 것이다. 그가 가야할 곳은 악처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십악행을 하면 “몸이 파괴되고 죽은 뒤에 지옥이나 축생의 밧줄에 묶인다.”(A6.45)라고 했다.

다음 생은 임종순간에 마지막 죽음 의식에 따라 결정된다. 대개 일생중에 체험한 가장 강한 업이 되기 쉽다. 그 다음은 임종에 이르러 지은 업이다. 그 다음은 습관적인 업이 되기 쉽다. 어떤 것이든지 행위가 다음 생을 결정한다.

한평생 먹고 마시고 즐기는 삶을 산 사람이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사람이다. 축생과 같은 삶을 살았기 때문에 축생으로 태어나기 쉽다. 한평생 치열하게 산 사람은 자신의 업에 적합한 세상에 태어날 것이다. 한평생 수행자로 산 사람은 다음 생에도 수행자로 살아가기 쉽다.

애써 이루어 놓은 것은 다음 생을 위한 자산이 된다. 나는 어떠한가? 인생  후반에 글을 썼다. 글도 업이기 때문에 글과 관련된 존재로 태어나기 쉽다. 그러나 진리를 추구하는 자로 태어나고 싶다. 다음 생에도 불교를 공부하는 학인으로 살고 싶은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체험을 해야 한다.

아직까지 수행체험은 없다. 전생에 수행을 해 보지 않은 것 같다. 전생에 수행을 했다면, 선정에서의 무탐, 무진, 무치라는 세 가지 원인을 가지고 태어난 생이지자가 되었을 것이다. 어쩌면 7세 아라한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다만 노력 했다.

일생 중에 가장 잘한 일은 경이나 게송을 외운 것이다. 한역으로는 반야심경, 천수경, 법성게, 금강경을 외웠다. 빠알리어로는 라따나경(보석경), 자야망갈라가타(길상승리게), 멧따경(자애경), 망갈라경(축복경), 담마짝까왓타나경(초전법륜경), 팔정도분석경, 십이연기분석경, 죽음명상 다섯 게송, 법구경 1품과 2품과 3품,  빠다나경(정진의 경) 등을 외웠다.

경이나 게송을 외우기 쉽지 않다. 엄청난 에너지가 소모된다. 쓰기가 힘들다고 하지만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힘들고 어려운 작업이다. 그러나 다 외우고 났을 때의 희열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긴 길이의 경을 막힘 없이 모두 한번에 암송했을 때 깨달음을 이룬 것 같았다. 스스로 인간승리라고 선언했다. 아마 이런 것도 선정 체험에 해당될 것이다. 암송은 마음을 집중해야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일생동안 가장 잘한 일이 무엇인지 물어 보았을 때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현시점에서 경과 게송을 외운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오늘 최후의 순간을 맞아도 여한이 없다. 오늘 새벽에도 빠다나경을 암송했다.

2023-06-15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