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색된 보리수 이파리를 보자, 소유로 인한 번뇌
추적추적 비 내리는 아침이다. 오늘도 아침 일찍 길을 나섰다. 오전 6시가 조금 넘자 일터로 향한 것이다. 이렇게 아침에 일찍 나가면 승리자가 되는 것 같다. 아직도 자는 사람들이 많고 이제 일어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도 걸어서 아지트를 향했다. 큰 우산을 쓰고 터벅터벅 사띠하며 걸었다. 바로 앞만 보고 걸은 것이다. 마치 탁발승이 멍에의 길이만큼 눈을 아래로 하고 걸어 가듯이 걸어 보았다.
안양천 징검다리가 넘쳤다. 밤새도록 비가 온 모양이다. 이럴 경우 돌아 가야 한다. 무지게 다리를 건너야 한다. 이렇게 비가 옴에도 운동하러 나온 사람들이 있었다.
고마운 비가 내렸다. 농사 짓는 사람들에게는 보배 같은 황금비가 될 것이다. 도시에 사는 사람들도 고맙기는 마찬가지이다. 요 며칠 무척 뜨거웠기 때문이다.
변색된 보리수 이파리를 보자
이제 본격적인 여름이 시작된 듯 하다. 그리고 장마철이 시작될 것이다. 뜨거운 여름에 보리수가 상했다. 일부로 햇볕이 잘 드는 창가에 놓아 두었는데 금, 토, 일 삼일동안의 폭염으로 인하여 잎이 변색되었다.
변색된 보리수 이파리를 보자 마음이 상했다. 어떻게 가져 온 보리수인데, 어떻게 아끼는 보리수인데 잎이 변색되다니! 너무나 속이 상했다. 그리고 자책했다. 보리수를 폭염의 창가에 두는 것이 아니었다.
누렇게 변색된 이파리를 만지자 툭 떨어졌다. 마음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마치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것처럼 아팠다. 이파리 하나는 가운데 변색이 되어서 시들해졌다. 다행히도 다른 이파리는 변색이 없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시들했다.
보리수를 창가에 탁자로 옮겼다. 어린 나무에 강렬한 햇볕은 도움이 되지 않는 것 같았다. 어린 싹이 염천에 타버릴 것 같았다. 시들해진 이파리에 생기를 넣어야 한다. 분무기를 이용하여 물을 분사해 주었다.
법정스님의 무소유
보리수를 소유하면서 근심도 생겨났다. 보리수가 잘 자라기를 바라는 마음이 근심과 걱정으로 전개된 것이다. 아마 이것도 소유에 따른 번뇌에 해당될 것이다. 법정스님의 난 이야기가 생각났다.
법정스님의 무소유가 있다. 작은 책자를 말한다. 거기에 난 이야기가 있다. 스님이 뜨거운 어느 날 외출을 했는데 난을 안으로 들여 넣지 않고 나온 것이다. 스님은 외출 중에 내내 난이 시들까 염려 했다. 소유로 인한 번뇌에 해당될 것이다.
법정스님은 난을 다른 사람에게 주어 버렸다. 소유하지 않게 되자 더 이상 번뇌도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소유하면 어떤 식으로든지 번뇌가 생겨나지 않을 수 없다는 말과 같다.
지금 이 수행자에게는 없네
부처님은 소유하지 않았다. 출가해서는 무소유로 살았다. 어느 바라문은 부처님을 보고서 다음과 같은 게송을 읊었다.
“이 수행자에게는 없으니
열네 마리의 황소가 없네.
오늘 엿새째 보이지 않으니
이 수행자는 행복하네.”(S7.10)
바라문은 많은 것을 소유한 자였다. 황소가 열네 마리이면 큰 재산가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황소가 사라졌다는 것이다. 재산이 사라졌으니 근심과 걱정이 생겨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무소유의 수행자는 걱정할 것이 없다. 아무것도 가지지 않았으니 근심과 걱정거리 자체가 없는 것이다.
바라문은 황소와 같은 재산만 소유한 것이 아니었다. 바라문은 자식들도 많았다. 이에 부처님을 보고서 다음과 같은 게송을 읊었다.
“지금 이 수행자에게는 없네.
한 아들이나 두 아들과
일곱 명의 딸을 거느린 과부가 없으니
이 수행자는 행복하네.”(S7.10)
부유한 바라문은 딸을 시집 보냈다. 그런데 과부가 되어서 돌아 온 것이다. 딸은 가난한 시댁보다 부유한 친정에 살기 원한 것이다. 그런데 딸의 자식들과 함께 온 것이다. 그래서 바라문이 식사를 하려 하면 아이들이 먼저 접시에 손을 넣어서 자신은 손을 대보지도 못한 것이다. 자신을 소유함으로 인한 번뇌에 해당될 것이다.
바라문은 빚도 있었던 것 같다. 항상 부유한 상태만은 아님을 말한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을 보면서 다음과 같이 게송을 읊었다.
“지금 이 수행자에게는 없네.
이른 아침에 빚쟁이들이
여기 달라 저기 달라 조르지 않으니
이 수행자는 행복하네.”(S7.10)
살다 보면 빚을 질 수도 있다. 세상에 빚 독촉만큼 가혹한 것이 없다고 한다. 빚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할 때 노예와 같은 삶을 살아야 한다. 빚을 갚지 못하면 경제적으로 사망한 것이나 다름 없다. 그러나 수행자에게는 가진 것이 없으니 빚도 없다. 당연히 빚이 없어서 빚으로 인한 번뇌도 있을 수 없다.
탁발을 해서 생계를 유지하면
소유하면 번뇌가 생겨날 수밖에 없다. 번뇌가 있는 한 깨달음에 이를 수 없다. 그래서 청정한 삶을 살려거든 소유하지 말아야 한다. 탁발을 해서 생계를 유지하면 청정한 삶을 살 수 있다. 테리가타 로히니의 경에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창고에도 항아리에도 바구니에도
자신의 소유를 저장하지 않고,
줄 준비된 것만을 구합니다.
그 때문에 저는 그들이 사랑스럽습니다.”(Thig.283)
“금화도 받지 않고
금도 은도 받지 않습니다.
생겨나는 것으로 생활합니다.
그 때문에 저는 그들이 사랑스럽습니다.”(Thig.283)
로히니 장로니가 소녀 시절이었을 때 출가수행승을 보고 찬탄한 게송 중의 일부이다. 출가수행승은 조리된 것 외 어떤 먹거리도 받지 않는다. 만일 날곡식을 받는 다면 어떻게 될까? 창고가 필요하고 조리해 먹을 공간이 필요할 것이다. 이렇게 해서는 청정한 삶을 살 수 없다. 소유하는 삶이 되기 때문이다.
소유하면 소유로 인한 번뇌가 생겨난다. 주식을 소유하면, 소유하는 그 순간부터 마음은 거기에 가 있게 된다. 주가등락에 따라 기분이 업되었다고 다운되는 등 롤로코스터를 타게 될 것이다. 투기용으로 구입한 주택이나 아파트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아내와 자식을 가져도 번뇌
아내와 자식을 가져도 번뇌가 된다. 아내와 자식을 갖는 것은 소유하는 것도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번뇌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래서 법구경에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쇠나 나무나 밥바자 풀로 만든 것을
현명한 님은 강한 족쇄라고 말하지 않는다.
보석이나 귀걸이에 대한 탐착,
자식과 아내에의 애착을 강한 족쇄라고 말한다.”(Dhp.345)
여기 죄수의 발에 걸려 있는 족쇄가 있다. 나무로 된 차꼬도 있고, 쇠붙이로 된 족쇄도 있다. 그러나 성자의 입장에서 볼 때 이런 족쇄는 강력한 것이 아니다. 언제든지 칼로 쳐서 끊어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진짜 끊을 수 없는 족쇄가 있다. 그것은 자식과 아내에 대한 집착이다.
가족 중에 아픈 사람이 있으면 근심과 걱정이 태산이 된다. 왜 그럴까? 그것은 자식과 아내를 자신의 것으로 보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자식과 아내를 소유개념으로 보았을 때 번뇌가 일어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자식과 아내는 칼로 끊을 수 없다. 이 세상 어느 족쇄보다 더 단단해서 도저히 끊을래야 끊을 수 없다. 그래서 “자식과 아내에의 애착을 강한 족쇄라고 말한다.”(Dhp.345)라고 했을 것이다.
주식을 소유함으로 인한 번뇌
김영삼정부 때의 일이다. 김영삼정부는 금융실명제를 앞두고 소유하는 것이 고통임을 보여 주겠다고 했다. 재산을 많이 가지는 것이 오히려 고통스러운 일이라는 것을 법으로 보여 주겠다고 천명한 것이다. 어쩌면 소유에 의한 괴로움, 소유에 의한 번뇌를 말했다고 볼 수 있다.
나는 얼마나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을까? 어느 정도 소유하고 있다. 그렇다고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지 않다. 특히 주식은 소유하고 있지 않다. 주식을 소유함으로 인하여 괴로움을 당했기 때문이다.
주식을 함으로 인하여 괴로운 나날을 보냈다. 지금으로부터 20년 전의 일이다. 그렇다고 전재산을 올인한 것은 아니다. 주식을 소유하고 있는 것 자체가 괴로움이었던 것이다. 결국 통장잔고가 바닥 났을 때 손을 털었다. 이런 일을 겪고 난 다음 주식자체를 손절했다. 이제 18년 되었다. 더 이상 주식을 소유함으로 인한 번뇌는 없다.
재가의 삶은 소유의 삶이나 다름 없다. 재산도 소유해야 하고 자식과 아내도 부양해야 한다. 이와 같은 소유로 인해서 번뇌가 일어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부처님은 “자식이 있는 이는 자식으로 인해 슬퍼하고, 소를 가진 이는 소 때문에 슬퍼합니다.”(Stn.34)라고 말했다.
재산과 가족이 있으면 슬퍼할 일이 많다. 그러나 출가수행자에게는 재산과 가족이 없으니 슬퍼할 일이 없다. 그래서 부처님은 “집착의 대상으로 인해 사람에게 슬픔이 있으니, 집착의 대상이 없는 사람에게는 슬픔이 없습니다.”(Stn.34)라고 했다.
최악의 소유는 빚지는 것
누구든지 소유하지 않을 수 없다. 재산과 자식과 아내를 소유하면 근심과 걱정, 슬픔이 따른다. 소유로 인한 번뇌가 되는 것이다. 최악은 빚을 진 것이다. 빚도 소유개념으로 본다면 최악의 번뇌가 된다.
빚이라 하여 반드시 금전적인 빚만을 말하지 않을 것이다. 은혜를 입었을 때 은혜를 갚아야 한다. 이때 빚진 자로 살게 된다. 그래서 부처님은 ‘빚 없는 행복’에 대하여 “장자여, 빚 없는 행복이란 무엇인가? 장자여, 세상에 고귀한 가문의 아들이 누구에게도 어떠한 것도 많건 적건 빚을 지고 있지 않다. 그는 이와 같이 ‘나는 누구에게도 어떠한 것도 많건 적건 빚을 지고 있지 않다.’라고 생각하며 행복을 얻고 기쁨을 얻는다. 장자여, 이것을 빚 없는 행복이라고 한다.”(A4.62)라고 말씀하셨다.
어떤 것도 소유하지 말아야 한다. 재산도 자식도 아내도 빚도 소유하지 말아야 한다. 소유하면 번뇌가 된다. 그렇다고 소유하지 않고 살 수 없다. 다만 소유가 집착이 되지 말아야 한다. 소유에 집착하는 순간 번뇌가 된다. 마치 주식을 사 놓는 순간 마음이 거기에 가 있는 것과 같다.
소유하더라도 집착하지 않으면
보리수 잎이 변색되어서 떨어졌다. 이파리 하나 떨어졌을 뿐인데도 마음이 아팠다. 마치 가족 중에 한사람이 아픈 것처럼 마음이 상했다. 걱정은 걱정을 부른다. “또 잎이 변색되어서 떨어지면 어떻게 될까?”라는 염려를 말한다. 어렵게 얻은 귀한 보리수를 죽일 수도 있다고 생각이 들자 몹시 우울해졌다.
오늘 아침 보리수를 확인 했다. 이제 매일 보리수 상태를 확인 하는 것이 일과가 될 것 같다. 다행히도 더 이상 변색은 없다. 자리를 옮기고 분무기로 뿌려 준 효과가 있어서일까 싱싱한 것 같다. 마음으로 염려한 것이 작용한 것 같기도 하다. 오늘 내린 비로 보리수도 싱싱해 보인다. 새로운 잎이 어제 보다 더 커진 것 같아 안심이 되었다. 이런 마음도 집착일 것이다.
소유하면 근심과 걱정, 번뇌가 일어난다. 소유하지 않으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소유하더라도 집착하지 않으면 번뇌가 일어나지 않는다. 이렇게 본다면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집착하지 않으면 번뇌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어떠한 것이든 만족하는 것이 행복이다.”(Dhp.331)라고 했을 것이다.
2023-06-21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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