얘네들은 어디서 왔을까?
"얘네들은 어디서 왔을까?" 어느 스님이 페이스북에 써 놓은 말이다. 개 밥그릇에는 미역국이 있다. 개가 새끼를 네 마리 낳은 것이다.
"불쌍한 중생들."이라고 댓글을 달았다. 3년 전에도 똑같은 글을 달았다. 그 어미개는 3년 전에도 출산을 했었다. 스님은 "인간도 불쌍하지요."라고 답글을 달았다.
개새끼나 아기나 불쌍한 중생임에 틀림없다. 개는 새끼 때는 귀여우나 점차 커가면 개다워진다. 나중에는 살았는지 죽었는지 관심도 없다. 사람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페이스북 사진을 보니 개새끼들은 막 태어난 것이다. 난지 하루도 되지 않은 것을 보여 주었다. 그런데 개의 형태는 갖추었다는 것이다.
눈도 뜨지 못한 개새끼들은 어미 품안에 있다. 과연 얼마나 오래 있을까? 젖을 뗄 때쯤 되면 분양될 것이다. 어린 새끼 때 헤어질 운명을 타고 난 것이다.
개새끼들은 아비도 없는 것이나 다름없다. 스님 글에 따르면 아비 개는 나타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어미 개가 출산 했다고 미역국밥을 해 올리 없다고 했다.
개새끼들의 운명은 정해져 있다. 개처럼 살다가 죽는 것이다. 부모 개는 새끼들을 끝까지 돌봐 주지 않는다. 아비 개는 아무런 책임이 없다. 단지 씨를 전달해준 것에 지나지 않는다.
출산은 어미 개 몫이다. 임신을 한 순간부터 암케의 운명은 시작된다. 이에 스님은 어미 개의 보호자를 자청했다. 마치 시집간 딸의 출산을 돕듯이 미역국을 끓여 주었기 때문이다.
스님은 어미 개의 출산을 알렸다. 그리고 하루가 지난 뒤에 새끼 난 사진을 올렸다. 그리고 "얘네들은 어디서 왔을까?"라는 글을 남겼다.
개새끼들은 어디서 왔을까? 어제까지만 해도 보이지 않던 것이 오늘 있게 된 것이다. 대체 얘네들은 어디서 온 것일까?
올해 7월 함평 고향에 갔었다. 사촌 누님 집에 고양이새끼들이 있었다. 기르지 않은 것이라 했다. 들고양이가 헛간에 새끼를 낳은 것이다. 새끼는 두 마리였다.
고양이새끼들은 귀여웠다. 동그란 두 눈이 초롱초롱했다. 그런데 마당에서 어미고양이가 새끼들에게 젖을 주는 것이었다. 아비고양이는 보이지 않았다. 대체 얘네들은 어디서 왔을까? 얘네들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오는 것이 있으면 가는 것도 있다. 사람이 죽으면 어디로 가는 것일까? 테리가타에 아들을 잃은 게송이 있다.
“오고 가는 것의
길을 그대는 알지도 못하니,
그 뭇삶이 어디서 왔는지,
그대는 ‘나의 아들’이라고 울부짖는다.”(Thig.127)
“오고 가는 것의
길을 그대가 알더라도,
그것을 슬퍼하지 말라.
뭇삶의 운명이 그러할 뿐이다.” (Thig.128)
“청하지도 않았는데 이곳에 와서
허락하지도 않았는데 이곳에서 떠났다.
도대체 어디에서 와서
며칠 동안 지내다가
여기서 다른 곳으로 가고
그곳에서 또 다른 곳으로 간다.” (Thig.129)
“죽어서 인간의 모습으로
그는 윤회하며 갈 것이리라.
오는 것처럼 갔으니,
거기에 어떠한 슬픔이 있겠는가?” (Thig.130)
존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일까? 없던 것이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서 존재감을 과시한다. 그러다가 어느 날 사라진다. 장소는 그대로인데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던 것이 된다. 대체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간 것일까?
사람이 죽으면 슬퍼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으면 더욱 슬퍼할 것이다. 아들이 죽었다면 더욱 더 슬퍼할 것이다. 그런 아들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간 것일까? 이에 대하여 테리가타에서는 “오는 것처럼 갔으니 거기에 어떤 슬픔이 있겠는가?”(Thig.130)라고 했다.
어떤 존재이든지 태어났으면 반드시 죽게 되어 있다. 짝짓기를 하여 태어난 새끼새는 어미가 부지런히 날라 준 먹이를 먹고 폭풍성장을 하지만 2주 후에는 떠난다. 이후 삶은 알 수 없다.
어떤 존재이든지 오는 것처럼 간다. 오는 것은 죽어야 오는 것이다. 죽어서 인간이나 축생 등으로 계속해서 태어나는 것을 오는 것이라고 말한다.
가는 것은 또 다른 존재로 태어남을 말한다. 이런 사실을 안다면 슬퍼할 것이 없다. 본래 오고 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고 가는 것의 이치를 아는 자는 슬퍼하지 않는다. 아들이 죽었다고 슬퍼하는 자는 오고 감의 이치를 모르는 자이다. 그래서 “뭇삶의 운명이 그러할 뿐이다.”(Thig.128)라는 사실을 안다면 슬퍼할 것이 없다는 것이다.
생명 있는 존재의 운명은 정해져 있다. 태어나면 반드시 죽는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존재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잘 모른다. 그래서 나의 것이라는 애착이 있다. 아들이 죽으면 “내 아들아 어디 갔느냐?”라며 슬피 우는 것이다.
아들은 내가 청해서 온 것이 아니다. 아들은 아무도 청하지도 않았는데 저 세상에서 이 세상으로 왔고, 또한 아들은 아무도 허락하지 않았는데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갔다. 그래서 “여기서 다른 곳으로 가고 그곳에서 또 다른 곳으로 간다.”(Thig.129)라고 말하는 것이다.
없던 것이 갑자기 출현했을 때 경이롭다. 어떻게 무(無)에서 유(有)가 될 수 있을까? 바위는 항상 그 자리에 있는 것에 반하여 생명은 없던 것에서 출현한다. 그리고 없던 곳으로 가버린다.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죽어서 인간의 모습으로 그는 윤회하며 갈 것이리라. 오는 것처럼 갔으니 거기에 어떠한 슬픔이 있겠는가?”(Thig.130)라고 했다.
생명이 없던 것에서 출현한다면 이는 저 세상에서 죽어서 이 세상에 온 것이다. 생명이 어느 날 나무토막처럼 생명력과 체열과 의식이 끊어진다면 이 세상에서 죽어서 저 세상에 태어난 것이다. 이런 사실을 아는 것에 대하여 오고 가는 것의 이치를 아는 것이라고 한다.
오고 감의 이치를 안다면 더 이상 슬퍼하지 않을 것이다. 오는 자에게도 가는 자에게도 모두가 낯설게 만나는 것과 같다. 그럼에도 아들이 죽었다고 하여 “내아들아, 어디 갔느냐?”며 슬피 운다면 어리석다는 것이다. 오고 가는 자에 대하여 ‘나의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근거가 없음을 말한다. 마치 낯선 자에게 ‘나의 아들’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존재는 청하지도 않았는데 와서 허락하지도 않았는데 가 버린다.
개새끼들이나 고양이새끼들을 보면 측은한 마음이 든다. 언젠가 한량없는 윤회에서 한 때 나도 저와 같은 때가 있었을지 모른다.
인간으로 태어나도 죽으면 어떤 존재로 태어날지 알 수 없다. 성자의 흐름에 들지 않는 한 어떤 세계에 태어날지 알 수 없다. 설령 그 사람이 보시를 하고 지계하는 등 아무리 공덕을 쌓았어도 어떤 존재로 태어날 지 알 수 없는 것이다. 다만 천상이나 인간에 태어날 가능성은 더 높을 것이다.
개새끼들이나 고양이새끼들을 보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한편 "얘네들은 어디서 왔을까?"라는 생각을 해 본다.
임종순간에 어떤 업이 작용할지 모른다. 결생할 때 감각적 대상에 끌렸다면 개의 태나 고양이의 태에 들지 모른다. 개나 고양이의 동료로 태어날지 모른다.
사람도 개나 고양이와 같은 똑같은 중생이다. 요행히 이번 생에 사람의 태에 들었으나 다음 생에도 사람의 태에 들라는 보장은 없다.
이번 생에 성자의 흐름에 들어야 한다. 성자의 흐름에 들면 인간 이하의 세계에 태어나지 않는다.
"아난다여, 고귀한 제자가 그것을 성취하여 그가 원한다면 스스로 자신을 이와같이 '지옥도 부서졌고, 축생도 부서졌고, 아귀도 부서졌고 괴로운 곳, 나쁜 곳, 비참한 곳도 부서졌고 나는 이제 흐름에 든 님이 되어 악도에 떨어지지 않고 삶의 길이 정초되어 올바른 깨달음으로 나아간다.'라고 예지할 수 있는 진리의 거울이라는 법문은 이러한 것이다."(D16.39)
2023-10-09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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