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니까야모임

칸다, 다발인가 무더기인가?

담마다사 이병욱 2023. 11. 9. 11:22

칸다, 다발인가 무더기인가?
 
 
의무적으로 하는 것이 많다. 글쓰기도 의무적으로 하는 것이다. 요즘은 좌선도 의무적으로 한다. 하루 한시간 앉아 있는 것이다. 또한 책만들기도 의무적으로 하고 있다.
 
매일 글을 쓴다. 매일 글을 생산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마치 생산공장처럼 매일 글이 나오는 것이다.
 
매일 글을 쓰다보니 엄청나게 축적되었다. 매일 의무적으로 썼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이런 글은 버리지 않는다. 고스란히 블로그에 보관되어 있다.
 
블로그에 보관되어 있는 글은 7천개가 넘는다. 2006년 이후 계속 써 온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블로그는 글의 창고, 글저장소나 다름 없다.
 
최근 108번째 책을 만들었다. 블로그에 저장되어 있는 글을 시기별로 또는 카테고리별로 분류하여 책으로 만든 것이다.
 
글쓰기 17년과 책 만들기 5년이 되었다. 글을 쓰는 것도 의무적이고 책만들기도 의무적이다. 이렇게 오늘 쓴 글도 시절인연이 되면 책으로 나올 것이다.
 
오늘도 글을 쓴다. 금요니까야모임에서 들었던 것을 의무적으로 쓰는 것이다. 이렇게 쓰는 것은 개인적인 공부도 되지만 인터넷에 공유하면 모두의 것이 된다. 그러나 무엇보다 금요니까야모임의 역사가 된다는 것이다.
 
역사는 기록하는 자의 것이다. 기록이 없다면 역사를 알 수 없다. 금요니까야 공부모임도 기록을 해놓으면 역사가 될 것이다.
 
10월 첫 번째 금요니까야모임에서
 
10월 첫 번째 금요니까야모임이 2022년 10월 13일에 열렸다. 한국빠알리성전협회 서고에는 12명 모였다. 본인을 비롯하여 홍광순, 김은아, 고태순, 김종선, 김영인, 안진현, 유경민, 정홍준, 김경예, 도현스님, 장계영 선생이 왔다.
 
정홍준 선생이 오랜만에 왔다. 페이스북에서 인연맺은 도반이다. 페이스북에 올린 니까야모임관련 글에 자극 받아서 오게 되었다고 한다.
 
10월 첫번째 모임에서는 모두 네 개의 경이 합송되었다. 이는 1) 26번경‘논쟁을 위한 논쟁은 어떻게 무의미한 것일까’, 2) 27번경‘이득과 환대와 명성에 눈이 멀면 어떻게 될까’, 3) 28번경‘데바닷따가 교단을 분열시킨 이유는 무엇일까’, 4) 29번경‘존재의 다발은 어떠한 성격을 지녔을까’에 대한 것이다.
 
26번 경 ‘논쟁을 위한 논쟁은 어떻게 무의미한 것일까’는 상윳따니까야 ‘훈계의 경’(S16.6)을 말한다. 무의미한 논쟁을 하지말라는 가르침이다.
 
무익한 논쟁에 대하여
 
수행자는 담마이외에 대한 이야기를 해서는 안된다. 수행자는 잡담을 해서는 안된다. 또한 세속적 철학에 대한 담론을 해서도 안된다.
 
수행자는 오로지 가르침에 대해서만 이야기해야 한다. 그 외에는 침묵해야 한다. 이를 ‘고귀한 침묵’이라고 해야 한다.
 
명상주제를 잃지 않는 것이 고귀한 침묵이다. 언어적 사유를 떠난 것도 고귀한 침묵이다. 두 번째 선정에 드는 것을 고귀한 침묵으로 본다.
 
전재성 선생은 논쟁을 위한 논쟁을 하지 않는 것에 대하여 사성제를 기반으로 하는 것이라고 했다. 수행자가 사성제를 벗어나서 논쟁하는 것은 잘못된 것임을 말한다.
 
사성제는 부처님의 모든 가르침을 포괄한다. 마치 코끼리 발자국 안에 모든 동물의 발자국이 다 들어 가는 것과 같다.
 
가르침 아닌 것, 담마가 아닌 것에 대하여 논쟁하는 것은 무익한 것이다. 이런 무익한 논쟁에 어떤 것이 있을까? 경에서는 “누가 더 많은 말을 하는가, 누가 더 유창하게 말을 하는가, 누가 더 길게 말을 하는가”(S16.6)라고 했다.
 
부처님 가르침에 독화살 비유의 가르침이 있다. 이는 ‘세계는 무한한가, 세계는 무한한가’등의 세속적 담론에 대하여 사성제로 설명한 것을 말한다.
 
사람들은 지금 독화살을 맞은 상태이다. 그럼에도 ‘우주는 세계는 무한한가’라든가, ‘나는 누구인가’등으로 철학적 담론을 즐긴다면 결론을 얻기 전에 독이 퍼져 죽고 말 것이다.
 
독화살을 맞았다면 재빨리 독화살을 제거해야 한다. 바로 이것이 부처님의 사성제의 가르침이다. 지금 괴롭다면 괴로움을 소멸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나는 예나 지금이나 괴로움과 괴로움의 소멸에 대해 가르친다.”(M22)라고 했을 것이다.
 
참회를 하면 참회를 받아 주어야
 
수행승들은 무익한 논쟁에 대하여 참회했다. 어떻게 참회 했는가? 이는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잘못을 잘못으로 알고 참회하오니 우리들의 참회를 받아 주십시오.”(S16.6)라고 말한 것으로 알 수 있다.
 
참회를 하면 참회를 받아 주어야 한다. 그러나 조건이 있다. 진실된 참회이어야한다. 참회에 진정성이 있어야 한다. 이런 참회는 받아 주어야 한다. 그럼에도 받아 주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원한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진정으로 참회할 때 참회를 받지 않고 울화를 품고 분노가 무거운 자는 원한에 묶이네. 나는 원한을 즐겨하지 않기에 그대들의 참회를 받아 들이네.”(S1.35)라고 했다.
 
잘못을 했으면 잘못을 인정해야 한다.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참회하면 된다. 이에 부처님은 “그대들이 이제 잘못을 잘못으로 보고, 가르침에 따라 참회하니 우리는 그대들의 참회를 받아 들인다.”(S16.6)라고 했다.
 
부처님은 수행승들이 무익한 논쟁을 한 것에 대하여 지적했다. 이에 수행승들은 부처님에게 참회했다. 그리고 부처님은 참회를 받아 들였다. 이런 일련의 과정에 대하여 전재성 선생은 “잘못을 잘못으로 보고 참회하는 것은 가르침에 따라 고치는 것을 말하고 미래에 지켜 나가는 것을 말하고 계율 속에서 성장하는 것을 말합니다.”라고 했다.
 
부처님의 문답식 가르침을 보면
 
금요니까야모임은 두 시간 동안 열린다. 두 시간 동안 말한 것을 모두 다 쓸 수 없다. 인상적인 것 몇 가지만 쓸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이렇게 후기 쓰는 것도 공부라는 것이다. 마치 복습을 하는 것과 같다.
 
네 번째로 합송한 것은 29번경으로‘존재의 다발은 어떠한 성격을 지녔을까’에 대한 것이다. 이는 상윳따니까야 ‘시각을 비롯한 것의 경’(S18.11)을 말한다. 부처님과 라훌라와의 무상, 고, 무아에 대한 대화이다.
 
부처님은 라훌라에게 문답식으로 가르침을 설한다. 이는 “시각은 영원한가 무상한가?”라는 식으로 전개 된다. 이런 문답식 가르침은 정형화 되어서 있어서 니까야 도처에서 발견된다.
 
부처님 가르침은 무상, 고, 무아의 가르침이 핵심이다. 그 중에서도 핵심은 무아이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 선생은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고, 이것은 내가 아니고,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는 정형구가 무아의 가르침의 핵심이라고 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무아로 귀결된다. 무상을 말하는 것도 무아라는 결론을 이끌어 내기 위한 것으로 보여진다. 그런데 부처님이 말하는 무상은 일반사람들이 말하는 자연무상, 계절무상, 인생무상과 같은 무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부처님이 말한 무아는 오온에 대한 무상이다. 이는 문답식 가르침에서 물질, 느낌, 지각, 형성, 의식의 무상을 말하는 것으로 알 수 있다. 오온이 무상하기 때문에 무아인 것이다.
 
무아(無我)와 비아(非我)에 대하여
 
무아에 대하여 비아(非我)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전재성 선생에 따르면 중국이나 티벳 문헌 그 어디에도 비아라는 말은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무아는 빠알리어로 아낫따(anatta)를 말한다. 내가 있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런데 한자어 무아를 사용하면 내가 없다는 것이 되어 버린다.
 
어떤 이는 윤회를 부정한다. 이에 대하여 무아를 근거로 든다. 내가 없는데 어떻게 윤회하느냐는 것이다. 이는 한자어 무아를 곧이곧대로 받아 들이기 때문이다.
 
빠알리어 아낫따를 비아라는 말로 사용할 수 있다. 이런 경우 내가 없다는 허무를 벗어날 수 있다. 그러나 단점이 있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 선생은 “비아 번역은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비아라고 했을 때 어떤 영원한 실체가 있는 것처럼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했다.
 
용어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 특히 무아와 비아에 대한 것이 그렇다. 그래서일까 한국빠알리성전협회에서는 무아를 뜻하는 아낫따에 대하여 ‘실체가 없는 것’이라고 번역했다.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한자어 그대로 무아라고 번역했다.
 
무아를 한자어 그대로 받아 들이면 정말 내가 없는 것이 된다. 내가 없기 때문에 윤회하지 않는다고 볼 것이다. 그 결과 막행막식으로 이어질 것이다.
 
무아에 대하여 비아로 본다면 어떤 영원한 실체가 있는 것을 가정하는 것처럼 보여 진다. 그런데 무아에 대하여 실체가 없는 것으로 본다면 이는 연기법적으로 본 것이다.
 
조건 발생하는 연기법에서는 실체가 있을 수 없다. 이는 오온에서 알 수 있다. 지금 여기에서 순간순간 생멸을 관찰 했을 때 내가 있다는 영원주의와 내가 없다는 허무주의는 배격된다. 이는 ‘깟짜야나곳따의 경’(S12.15)에서도 확인된다.
 
조건 발생하는 것에서는 실체가 있을 수 없다. 행선할 때와 좌선할 때 분명하게 드러난다.
 
발을 들 때 드는 행위와 이를 새기는 것 외에 그 어떤 것도 있을 수 없다. 배의 부품을 관찰할 때 부품과 새김이라는 두 가지만 있게 된다. 오로지 정신적 물질적 작용만 있게 되는 것이다.
 
칸다, 존재의 다발인가 무더기인가?
 
연기법은 조건발생법이다. 이는 오온이 조건발생함을 말한다. 이와 같은 오온에 대하여 한국빠알리성전협회에서는 ‘다섯 가지 존재의 다발’이라고 번역했다.
 
빠알리어 칸다(蘊)에 대하여 두 가지 번역이 있다. 하나는 무더기이고 또 하나는 다발이다. 어느 것이 더 정확한 번역일까? 전재성 선생은 칸다에 대하여 “칸다는 쌓은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라고 말했다.
 
칸다에 대하여 한자어로 온(蘊)이라고 한다. 이 한자어는 ‘쌓다, 모으다’라는 뜻이다. 그래서 수온이라고 했을 때 ‘느낌의 무더기’라고 번역된다. 그러나 전재성 선생에 따르면, 칸다는 무더기로 번역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했다.
 
한국빠알리성전협회 번역서를 보면 해제에 용어설명이 있다. 칸다에 대하여 크게 두 가지 의미가 있다고 했다. 천연적 의미와 응용적 의미를 말한다.
 
칸다의 천연적 의미는 큰 것, 육중한 것, 거친 물체의 뜻이 있다. 응용적 의미로는 다발, 덩어리, 부분품 등의 뜻이 있다.
 
칸다를 문자 그대로 본다면 덩어리진 것이다. 마치 쌓여져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본다면 오온도 쌓여져 있는 것이 된다. 그런데 단순히 쌓여진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얼키고 설켜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재성 선생은 해제에서 칸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해 놓았다.
 
 
붓다고씨는 칸다를 ‘더미(rasi)’로 보았다. 그러나 칸다는 어깨의 근육처럼 다발로 뭉쳐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단순히 더미라는 말은 긴밀한 연기적인 의존관계를 반영하기에는 통일성이 없는 개별적 인 부품처럼 인식될 수가 있다. 역자는 그래서 다발이라는 말을 쓴 다. 물질은 물질의 다발이고 정신은 인식의 다발이다. 그들은 상호 연관적으로 작용한다. 정신 신체적 복합체를 표현하는 칸다에 대한 가장 적절한 표현은 ‘존재의 다발’일 것이다. 이 책에서는 칸다를 ‘존재의 다발’이라고 표현한다.”(각 니까야 해제, 칸다 용어설명)
 
 
칸다를 더미로 번역했을 때 문제점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연기적 관계로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더미는 하나의 부속품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그러나 칸다에 대하여 다발로 번역하면 이 두 가지 문제점이 극복되어서 정신-신제적 과정에 대한 상호연관성을 잘 설명할 수 있음을 말한다.
 
전재성 선생은 칸다에 대하여 노끈이론을 들었다. 비트겐슈타인의 섬유론에 따른다. 이는 “노끈의 강도는 처음에 끈으로 달리는 단 하나의 가닥에만 전적으로 의존하는 것이 아니다. 아무런 가닥도 노끈의 전부를 달리지 않으며 때때로 겹쳐지고 엇갈리는 섬유 사이의 관계에 의존한다.”라는 말이 바로 그것이다.
 
 
전재성 선생은 칸다에 대하여 근육의 비유로도 설명한다. 어깨에 여러 가지 근육이 뭉쳐 있듯이 칸다도 다발을 이루고 있음을 말한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초기불교에서 윤회는 바로 존재의 다발(五蘊)의 지속적 연결이고 그것은 바로 이 노끈의 연결과 유사하다. 거기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영원히 지속되는 한 가닥의 정신적 섬유로서의 자아(atta, sk. atman)는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즉 주이적(住異的)으로 무상 하지만 겹쳐지고 꼬이면서 상호의존하며 수반되는 섬유들로서의 오온에 의해 확증되는 지속성은 있다. 이것은 언제나 변화하면서 지속되는 불꽃의 비유와 같은 것이다. 윤회하는 것은 이러한 존재의 다발인 것이다.” (각 니까야 해제, 칸다 용어설명)
 
 
칸다에 대하여 노끈이 수없이 꼬여져 있는 것처럼 묘사했다. 근육이 다발을 이루고 있는 것과 같다. 이런 설명은 칸다에 대하여 단지 쌓여져 있는 것, 무더기를 이루고 있는 것으로 보는 설명과는 다른 것이다.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칸다에 대하여 무더기로 설명했다. 각묵스님은 초기불교이해에서 칸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초기불전에서는 이러한 보통명사가 색·수·상·행· 식의 다섯 가지를 뜻하는 전문술어로 채택이 되어서 이러한 다섯 가지들의 적집이나 무더기나 낟가리나 쌓임 등을 뜻하고 있다. 한편 빠알리 주석서들은 한 결같이 “더미라는 뜻에서 무더기라 한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중국에 서는 온(蘊)으로 정착이 되었다. 그리고 전문술어로 쓰이는 khandha는 서양에서 이미 영어 aggregate로 정착이 되었다. 그리고 위에서 봤듯이 『다뚜빠타』에는 이 단어를 √skand(to leap, to jump)에서 파생된 것으로 보지 않고 모으다(to collect)를 뜻하는 √ skandh에서 파생된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런 점들을 참조하여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이 어를 ‘무더기’로 통일해서 옮기고 있다.”(초기불교이해, 111-112쪽)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주석가들의 견해를 중시하고 있다. 또한 전승된 번역용어를 중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주석가들이 더미로 했기 때문에 사용함을 말한다. 더구나 한자어 온이 더미를 뜻하기 때문에 무더기로 쓰는 것이라고 했다. 영영에서 더미를 뜻하는 aggregate라는 용어로 쓰이기 때문에 쓰는 것이라고 했다. 빅쿠보디의 영역을 보면 aggregate로 되어 있다.
 
현재 한국에는 두 종류의 니까야 번역서가 있다. 한국빠알리성전협회 번역서와 초기불전연구원 번역서를 말한다. 한국인들이 두 번역서를 가지게 된 것은 행운이다. 그런데 두 번역서를 보면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용어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사띠, 새김인가 마음챙김인가?
 
한국빠알리성전협회에서는 번역용어가 새롭다. 기전 번역을 답습하는 것이 아니라 현시대에 맞게 새로운 용어로 번역한 것이다. 그리고 누구나 알 수 있는 말로 번역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반면 초기불전연구원 번역을 보면 기존 용어를 답습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떤 것이 있을까?
 
한국빠알리성전협회에서는 브라흐마를 ‘하느님’으로 번역했다. 반면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한역 ‘범천(梵天)’을 그대로 사용했다. 칸다에 대해서는 한국빠알리성전협회에서는 ‘존재의 다발’로 번역했고,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한역의 온과 영역의 aggregate를 근거로 하여 ‘무더기’로 번역했다.
 
작은 차이가 나중에 가면 큰 차이를 만들어 낸다. 가장 문제가 되는 번역용어는 아마 사띠(sati)일 것이다.
 
사띠에 대하여 한국빠알리성전협회에서는 ‘새김’으로 번역했다.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마음챙김’으로 번역했다.
 
사띠에 대한 각 번역자의 설명을 들어 보면 어떤 배경으로 했는지 알 수 있다. 전재성 선생에 따르면 새김에 대하여 “기억과 사유가 일치하는 지금 여기에서 분명한 앎”의 뜻으로 번역했다.
 
각묵스님은 마음챙김에 대하여 초기불교이해 ‘왜 마음챙김으로 옮겼나’항목에서 설명했다. 각묵스님은 안반수의경에서 사띠가 마음을 지키고 보호하는 기능에 주목하고서 “이처럼 이미 중국에 불교가 전래되던 최초기에 마음챙김은 보호로 이해 되어 왔다. 이런 것을 참조해서 사띠를 마음챙김으로 옮겼다.”(284-285쪽)라고 써 놓았다.
 
각묵스님의 사띠에 대한 번역어 마음챙김에 대하여 마음지킴에 큰 의미를 두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각주를 보면 더 근거가 되는 말이 있다. 이는 “한국에서 ‘sati(Sk. smrti, 念)’를 마음챙김으로 제일 먼저 정착시킨 분은 고요한 소리의 고문이신 활성 스님이시다. 활성 스님께서 이렇게 옮기자 저자를 비롯한 한국의 대부분의 후학들이 이를 채용해서 쓰고 있다.”(초기불교이해, 184번 각주)라는 글로 알 수 있다.
 
오늘날 사띠는 마음챙김이라는 말로 정착되어 가고 있는 듯 하다. 방송이나 유튜브에서도 일반사람들이 마음챙김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 그것은 존 카밧진이 개발한 MBSR 영향이 클 것이다.
 
사띠에 대하여 영어로 마인드풀니스(mindfulness)라고 번역된다. 이 영어를 우리말로 하면 ‘마음채움’이 될 것이다. 그런데 마음챙김이라는 말이 영어 마인드풀니스를 그대로 번역한 것이라는 설도 있다. 여기에 선불교에서 말하는 화두챙김과 결합되어서 마음챙김으로 정착되었다는 설도 있다.
 
오늘날 불교에 대하여 알만한 사람들은 사띠에 대하여 마음챙김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제따와나선원의 일묵스님은 기억이라고 말한다. 한국마하시선원의 일창스님은 새김이라고 말한다. 왜 그런가? 마음챙김이라는 용어가 사띠의 뜻을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띠의 본래의 의미는 기억이다. 수행에서는 계속 새기는 것이다. 그런데 사띠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새기는 것도 해당된다는 것이다. 이는 칠각지에서 사띠에 대한 용어설명을 보면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수행승이 멀리 떠나 그 가르침을 기억하고 사유하면, 그 때 새김의 깨달의 고리가 시작된다.”(S46.3)라고 되어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다.
 
사띠는 기억의 의미가 들어가지 않으면 제대로 의미를 알 수 없다. 수행에서 대상을 계속 새기는 것도 사띠이고, 가르침을 기억하는 것도 새기는 것이다. 그런데 마음챙김이라는 용어는 하나는 되지만 다른 하나는 되지 않는다. 이는 가르침을 기억하는 것에 있어서 마음챙김이라는 용어는 부적절하기 때문이다.
 
한국 불자들의 행운
 
매일 부처님 가르침을 접하고 있다. 번역서를 통해서 접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용어에서부터 어긋난다면 가르침을 이해하기 힘들다. 전승된 것, 한역에서 사용된 것, 영역에서 사용된 것을 그대로 사용했을 때 이해 하기 힘들 때가 있다.
 
가장 좋은 번역은 어떤 것일까? 그것은 이 시대의 언어로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말을 사용하는 것이다. 브라흐마에 대하여 ‘하느님’으로 번역한 것이나 사띠에 대하여 ‘새김’으로 번역한 것은 누구나 이해할 수 있고 누구나 알 수 있다. 이는 ‘범천’이나 ‘마음챙김’으로 번역한 것과 대조적이다.
 
칸다에 대하여 두 가지 번역이 있다. 하나는 존재의 다발이고 또 하나는 무더기이다. 전자는 현대 철학의 섬유론에서 영향 받은 것이고 후자는 기존 주석서나 번역서를 답습한 것이다.
 
우리나라에는 두 종류의 번역서가 있다. 독자들에게는 행운이라 아니할 수 없다. 각자 취향에 맞게 선택하면 된다. 더 좋은 것은 두 종류의 번역서를 모두 구입하여 비교하며 읽는 것이다. 여기에 빅쿠보디의 영역까지 곁들이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2023-11-09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