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나 눈물을 흘려야 윤회를 끝낼 수 있을까?
멀고먼 길이다. 시작하기 세 시간 반전에 출발한다. 일차 목적지는 맥도날도 햄버거집이다. 맥도날도 고양점을 말한다. 대략 5시 40분 정도에 도착한다. 30분가량 앉아 있다가 서고로 향한다. 빠알리성전협회 서고를 말한다.
9월 첫번째 니까야모임이 9월 8일 열렸다. 서고에 조금 일찍 도착했다. 6시 20분경에 도착한 것이다. 홍광순 선생이 가장 먼저 와 있다. 그러나 그 시간에 자리에 없다. 저녁식사하러 간 것이다.
오랜만에 전재성 선생과 자리를 함께 했다. 그 동안 궁금한 것을 물어 보았다. 능엄경 번역이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했다. 다 번역했다고 한다. 현재 교정작업중에 있다. 울산에 있는 석혜능 스님이 교정을 봐 주고 있다고 한다.
능엄경은 생각지 않았던 것이다. 자타카 번역이 끝나고 다른 경전 번역에 들어갔어야 했다. 천궁사나 아귀사 같은 것이다. 그런데 올해 초에 갑자기 능엄신주 번역이 들어 온 것이다.
능엄신주 번역은 J스님이 맡긴 것이다. 거절을 해도 계속 번역해 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그런데 능엄신주를 번역하다 보니 능엄경을 번역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 결과 올해 상반기는 대승경전 번역에 매진하게 되었다.
능엄경은 대승불교에서 핵심경전이다. 승가대학에서도 배우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번에 한국빠알리성전협회에서 산스크리트어본 능엄경이 우리말로 번역되어 나오면 승가대학 교재로 채택될까?
능엄경 번역을 마쳤으니 그 다음 번역이 궁금했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 선생은 밀린다왕문경을 번역할 것이라고 했다. 이는 어느 스님이 요청해서 하기로 한 것이라고 했다.
밀린다왕문경은 쿳다까니까야 경전에 속한다. 그렇다고 어느 테라와다불교 국가이든지 모두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태국과 스리랑카에서는 포함되지 않는다. 미얀마에서는 포함되어 있다. 참고로 쿳다까니까야(소부)에 실려 있는 경전은 다음과 같다.
1. 쿳다까빠타(소송경)
2. 담마빠다(법구경)
3. 우다나(자설경)
4. 이띠붓따까(여시어경)
5. 수타니파타(경집)
6. 비마나밧투(천궁사)
7. 뻬따밧투(아귀사)
8. 테라가타(장로게)
9. 테리가타(장로니게)
10. 자타카(본생경)
11. 닛데사(의석)
12. 빠띠삼비다막가(무애해도)
13. 아빠다나(비유경)
14. 붓다밤사(불종성경)
15. 짜리야삐따까(소행장)
16. 넷티빠까라나(지도론)
17. 뻬따꼬빠데사(장석론)
18. 밀린다판하(밀린다왕문경)
모두 18개의 경전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중에서 16번과 18번은 장외(藏外)라고 한다. 쿳다까니까야에 포함되기도 하고 장외에 포함되기도 하는 논서를 말한다.
16번 넷티빠까라나(지도론)와 17번 뻬따꼬빠데사(장석론)의 경우 태국에서는 소부경전에 포함되지 않는다. 그러나 스리랑카와 미얀마에서는 포함된다. 18번 밀린다판하(밀린다왕문경)는 태국과 스리랑카에서는 포함되지 않지만 미얀마에서는 포함된다.
18개의 소부경전은 다 번역되어 있지 않다. 현재 한국빠알리성전협회에서 번역된 것은 2번 담마빠다(법구경), 3번 우다나(자설경), 4번 이띠붓따까(여시어경), 5번수타니파타(경집), 8번 테라가타(장로게), 9번 테리가타(장로니게), 10번 자타카(본생경)로 모두 7개의 경전이 번역되어 있다.
한국에서 사부니까야는 모두 번역되어 있다. 상윳따니까야, 맛지마니까야, 앙굿따라니까야, 디가니까야를 말한다. 이는 한국빠알리성전협회에서 번역된 순으로 말한다. 그리고 율장 5권이 모두 번역되어 있다. 청정도론도 번역되어 있다. 그런데 쿳다까니까야 18개 경전만큼은 다 번역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현재 한국빠알리성전협회에서는 7개 경전이 번역되어 있기 때문에 11개 경전이 번역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이번에 밀린다왕문경이 번역된다면 8번째 번역이 될 것이다.
한국빠알리성전협회에서는 합본화 작업을 하고 있다. 여러권의 경전을 하나의 경전으로 묶는 작업을 말한다. 상윳따니까야의 경우 7권인데 이를 한권으로 통합해 놓았다. 2단 칼럼에 작은 폰트 사이즈, 그리고 얇은 종이로 수천페이지에 달한다. 마치 바이블처럼 한손에 쏙 들어오게 만들었다.
합본화 작업은 계속 추진되고 있다. 앙굿따라니까야는 10권을 한권으로 만들었다. 율장 5권도 한권으로 만들었다. 2단 칼럼에 폰트 사이즈를 작게 하고 얇은 종이를 쓰니 가능한 것이다.
어떤 이는 합본이 불편하다고 말한다. 종이가 얇고 무엇보다 폰트 사이즈가 작다고 한다. 그러나 돋보기를 쓰면 문제 없다. 물론 돋보기를 쓰지 않고서도 볼 수 있다. 상윳따니까야 합본은 각주 폰트 사이즈가 너무 작다. 이는 다음 개정판에서 보완할 것이라고 한다.
집에서 상윳따니까야를 보고 있다. 머리맡에 놓고 보고 있다. 그런데 한손에 쏙 들어 온다는 것이다. 가장 편한 자세로 보았을 때 무리가 없다. 돋보기 안경을 쓰고 본다. 어떻게 7권짜리 방대한 상윳따니까야가 하나도 남김없이 한권에 내용이 다 들어갔는지 기적 같은 일이다.
한국빠알리성전협회에서는 또 하나의 통합본을 준비하고자 한다. 이번에는 맛지마니까야와 디가니까야를 통합하는 것이다. 사이즈는 앙굿따라니까야 정도 될 것이라고 한다. 아마 2,800여페이지 예상한다.
맛지마니까야와 디가니까야는 성격이 비슷하다. 상윳따니까야의 경우 주제별로 구성되어 있어서 독특하다. 앙굿따라니까야의 경우 법수별로 되어 있어서 역시 독특하다. 그러나 맛지마니까야와 디가니까야는 단지 중간길이인지 긴길이인지로 판명된다. 내용은 비슷하다. 맛지마니까야는 수행과 관련된 심오한 내용이 많고, 디가니까야의 경우 부처님의 가르침을 널리 선양하기 위한 것이 많다. 그럼에도 성격이 비슷해서 통합해도 무리가 없을 것 같다.
맛지마니까야와 디가니까야를 교정 보았다. 누가 시켜서 한 것이 아니다. 스스로 한 것이다. 2년전부터 통합할 것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이에 관심을 보였더니 전재성 선생이 최신 개정판을 주었다.
맛지마니까야는 6개월 보았다. 디가니까야는 8개월 보았다. 본문은 물론 각주까지 꼼꼼히 읽어 보았다. 니까야를 본지 10년이 넘었지만 이렇게 처음부터 끝까지 다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교정을 목적으로 보기도 했고 공부를 목적으로 보기도 했다. 두 니까야를 다 보았을 때 교정할 부위에 포스트잇을 붙였다. 디가니까야의 경우 백군데가 넘는 것 같다. 경전 두께가 늘어나 변형될 정도였다.
현재 맛지마니까야와 디가니까야는 편집 작업 중에 있다. 전재성 선생은 디가니까야 교정 본 것에 대하여 상세히 본 것 같다고 말해 주었다. 디가니까야의 경우 각주 부분이 교정이 덜 된 상태로 발행되어서인지 오자, 탈자를 비롯하여 오류로 의심되는 부분이 많았다.
책은 개정판이 거듭될수록 점점 완성도가 높아져 간다. 경전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방대한 경전에서 오자나 탈자 등 오류를 발견하기가 쉽지 않다. 누군가 알려 주어야 수정에 들어간다. 이번에 맛지마니까야와 디가니까야도 그런 케이스에 해당된다.
아마 올해 말이나 내년 초에 맛지마니까야와 디가니까야 합본이 나올 것이다. 미력하게나마 도움을 주었다는 것에 잔잔한 충만감을 느꼈다. 나도 한국불교의 발전에 어느 정도 기여하고 있다고 생각하자 즐거운 느낌이 꽤 오래 지속되었다.
금요니까야모임은 계속 된다. 이번 학기 모임에서는 새로운 사람들이 많다. 글을 읽고 찾아 온 사람도 있고 소개로 찾아 온 사람도 있다. 모두 귀중한 인연이다. 9월 8일 모임에서는 본인을 비롯하여 홍광순, 김경예, 방기연, 김종선, 이태형, 김재현, 정진영, 유경민 선생이 참석했다.
이번 모임에서는 모두 6개 경을 합송했다. 짤막짤막한 경이기 때문에 진도가 빠르게 나간 것이다. 이 6개의 경중에서 인상 깊은 경이 있다. 그것은 ‘눈물의 경’(S15.3)이다.
눈물의 경은 ‘시작을 알 수 없는 것의 모음’(S15)에 실려 있다. 왜 시작을 알 수 없다고 했을까? 이는 각 경에서 “수행승들이여, 이 윤회는 시작을 알 수 없다. 무명에 덮인 뭇삶들은 갈애에 속박되어 유전하고 윤회하므로 그 최초의 시작을 알 수 없다.”라고 되어 있는 정형구에서 알 수 있다.
전재성 선생에 따르면, 15번 상윳따는 대승불교 경전에서 볼 수 없는 것이라고 했다. 한역 아함경에는 나와 있지 않은 상윳따임을 말한다. 오로지 상윳따니까야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상윳따라는 것이다.
우리는 윤회하는 삶을 살고 있다. 언제부터 윤회했을까? 이는 알 수 없는 것이다. 업과 과보는 알 수 없다는 말과 일맥상통하는 말이다. 윤회하는 세계는 시작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논리라면 윤회의 끝도 알 수 없다. 그래서 ‘알 수 없는 것 의 모음(Anamatagga Samyutta)’이라 했을 것이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최초의 시작점을 설정하는 종교도 있다는 것이다. 유일신 종교가 그렇다. 그래서일까 끝이 있다. 창조가 있으므로 종말도 있는 것이다.
과연 최초의 시작점을 설정하는 것이 가능할까? 이에 대하여 전재성 선생은 무한소급의 오류로 설명한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지금부터 시작하여 위로 무한 소급하다 보면 창조주와 만나게 된다는 것이다. 창조주가 시작점이 되는 것이다.
창조주가 시작점이라면 창조주의 원인은 무엇인지 의문이 든다. 이에 대하여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른바 부동(不動)의 동(動者)와 같은 절대자를 상정한다. 그러나 이런 동자는 논리적으로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
전재성 선생은 창조론에 대하여“알지 못하는 것을 아는 것으로 설명하려는 것은 논리적 모순입니다.”라고 했다. 그리고 “윤회의 세계는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리입니다.”라고 말했다.
15번 상윳따는 감동적이다. 어느 경을 읽어 보아도 구구절절 공감할 수 있는 것이다. 어느 참석자는 이 상윳따를 읽고서 감동하여 지인들에게 소개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눈물의 경은 어떤 내용일까?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눈물의 경)
1. 한 때 세존께서 싸밧티 시에 계셨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이 윤회는 시작을 알 수 없다. 무명에 덮인 삶들은 갈애에 속박되어 유전하고 윤회하므로 그 최초의 시작을 알 수 없다.
2. 수행승들이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대들이 오랜 세월 유전하고 윤회하는 동안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만나고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 지면서, 비탄해하고 울부짖으며 흘린 눈물의 양과 사대양에 있는 물의 양과 어느 쪽이 더 많겠는가?"
3. [수행승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 설하신 가르침으로 미루어 보 건대 세존이시여, 저희들이 오랜 세월 유전하고 윤회하는 동안 사랑 하지 않는 사람과 만나고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면서, 비탄해하고 울부짖으며 흘린 눈물이 훨씬 더 많아 사대양의 물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4. [세존] "수행승들이여, 훌륭하다. 수행승들이여, 훌륭하다. 그대 들은 내가 설한 가르침을 제대로 잘 알고 있다.
5.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이 오랜 세월 유전하고 윤회하는 동안 사랑 하지 않는 사람과 만나고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면서, 비탄해하고 울부짖으며 흘린 눈물이 훨씬 더 많아 사대양의 물에 비할 바가 아니다.
6.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은 오랜 세월 동안 수없는 어머니의 죽음을 경험했다. 그대들이 어머니의 죽음을 경험하면서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의 만남과 사랑하는 사람과의 헤어짐 때문에, 비탄해하고 울부짖으며 흘린 눈물이 훨씬 더 많아 사대양의 물에 비할 바가 아니다.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은 오랜 세월 동안 수없는 아버지의 죽음을 경험했다. 그대들이 아버지의 죽음을 경험하면서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의 만남과 사랑하는 사람과의 헤어짐 때문에, 비탄해하고 울부짖으며 흘린 눈물이 훨씬 더 많아 사대양의 물에 비할 바가 아니다.
8.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은 오랜 세월 동안 수없는 형제의 죽음을 경 험했다. 그대들이 형제의 죽음을 경험하면서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의 만남과 사랑하는 사람과의 헤어짐 때문에, 비탄해하고 울부짖으며 흘린 눈물이 훨씬 더 많아 사대양의 물에 비할 바가 아니다.
9.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은 오랜 세월 동안 수없는 자매의 죽음을 경 험했다. 그대들이 자매의 죽음을 경험하면서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의 만남과 사랑하는 사람과의 헤어짐 때문에, 비탄해하고 울부짖으며 흘린 눈물이 훨씬 더 많아 사대양의 물에 비할 바가 아니다.
10.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은 오랜 세월 동안 수없는 아들의 죽음을 경험했다. 그대들이 아들의 죽음을 경험하면서 사랑하지 않는 사람 과의 만남과 사랑하는 사람과의 헤어짐 때문에, 비탄해하고 울부짖으며 흘린 눈물이 훨씬 더 많아 사대양의 물에 비할 바가 아니다.
11.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은 오랜 세월 동안 수 없는 딸의 죽음을 경 험했다. 그대들이 딸의 죽음을 경험하면서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의 만남과 사랑하는 사람과의 헤어짐 때문에, 비탄해하고 울부짖으며 흘린 눈물이 훨씬 더 많아 사대양의 물에 비할 바가 아니다.
12.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은 오랜 세월 동안 수 없는 친지의 죽음을 경험했다. 그대들이 친지의 죽음을 경험하면서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의 만남과 사랑하는 사람과의 헤어짐 때문에, 비탄해하고 울부짖으며 흘린 눈물이 훨씬 더 많아 사대양의 물에 비할 바가 아니다.
13.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은 오랜 세월 동안 수없는 재산의 상실을 경험했다. 그대들이 재산의 상실을 경험하면서 사랑하지 않는 사람 과의 만남과 사랑하는 사람과의 헤어짐 때문에, 비탄해하고 울부짖으며 흘린 눈물이 훨씬 더 많아 사대양의 물에 비할 바가 아니다.
14.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은 오랜 세월 동안 수 없는 질병의 비참을 경험했다. 그대들이 질병의 비참을 경험하면서 사랑하지 않는 사람 과의 만남과 사랑하는 사람과의 헤어짐 때문에, 비탄해하고 울부짖으며 흘린 눈물이 훨씬 더 많아 사대양의 물에 비할 바가 아니다.
15.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수행승들이여, 이 윤회는 시작을 알 수 없다. 무명에 덮인 삶들은 갈애에 속박되어 유전하고 윤회하므로 그 최초의 시작을 알 수 없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참으로 오랜 세월 동안 그대들은 고통을 경험하고 고뇌를 경험하고 재난을 경험 하고 무덤을 증대시켰다.
16. 수행승들이여, 그러나 이제 그대들은 모든 형성된 것에서 싫어하여 떠나기에 충분하고, 사라지기에 충분하고, 해탈하기에 충 분하다."
(눈물의 경, S15.3)
눈물의 경을 읽어 보면 눈물 없이는 읽을 수 없을 것 같다. 시작을 알 수 없는 윤회에서 우리는 수없는 죽음을 목격하여 왔기 때문이다. 가장 가까운 사람들과의 죽음의 그것이다. 그런데 또 한가지가 있다. 그것은 사랑하지 않는 것과의 만남에 대한 것이다.
경을 보면 생노병사의 괴로움에 대한 것이다. 여기에 두 가지가 더 추가되어 있다. 이는 경에서 “사랑 하지 않는 사람과 만나고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짐”에 대한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팔고에서 애별리고와 원증회고에 대한 것이다.
눈물의 경을 보면 주로 애별리고에 대한 것이 많다. 사랑하는 사람, 즉 어머니의 죽음, 아버지의 죽음 등 가족에 대한 것이다. 그런데 원증회고에 대한 것도 있다는 것이다. 이는 재산의 상실과 질병의 비참함에 대한 것이다.
눈물의 경은 애별리고와 원증회고 위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중에서 애별리고에 대한 것이 더 많다. 그런데 사랑하지 않는 것과의 만남으로 인한 괴로움도 사랑하는 것과 헤어짐으로 인한 괴로움 못지 않게 크다는 것이다.
사람은 어떤 때 눈물을 흘릴까? 아마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할 때 눈물을 흘릴 것이다. 그러나 사랑하지 않는 것과의 만남에 대한 것도 있다. 그것은 사람이 될 수도 있고 사물이 될 수도 있다.
세상을 살면서 이별을 한다. 사랑하는 가족일 수도 있고 가까운 친지일 수도 있고 친구일수도 있고 지인일 수도 있다. 이럴 때 눈물을 흘린다. 그런데 이런 것 못지 않게 사랑하지 않는 것, 즉 사람이나 사건을 만났을 때도 눈물을 뿌린다는 것이다. 부도가 나서 눈물을 뿌릴 수 있고, 재수 없게 사고가 나서 눈물을 뿌릴 수 있고, 사람을 잘못 만나서 눈물을 뿌릴 수 있다.
눈물을 흘려야 하는 이유는 많다. 눈물을 흘려야 하는 이유는 차고도 넘친다. 잘못된 만남으로 인한 눈물은 없을까? 사람을 잘못 만나서 눈물을 흘리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진짜 눈물일 수 있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 보냈을 때 흘리는 눈물과 비교 되지 않는 것이다.
얼마나 눈물을 흘려야 할까? 얼마나 눈물을 흘려야 윤회를 끝낼 수 있을까? 부처님의 가르침을 모르는 자는 시작도 끝도 알 수 없는 윤회의 바다에서 눈물을 흘린다. 그 눈물의 양은 사대양보다 더 많을 것이라고 했다. 여기서 말하는 사대양은 수미산을 둘러싸고 있는 사대양을 말한다. 지구의 사대양과는 비할 바가 아니다. 그래서 전재성 선생은 윤회의 바다에 대하여 “우리 자신의 눈물로 만들어졌습니다.”라고 말했다.
윤회의 바다에서 흘려야 하는 것은 눈물만 있는 것일까? 15번 상윳따를 보면 젖의 경이 있다. 이는 “그대들이 오랜 세월을 거쳐서 유전하고 윤회하면서 마신 어머니의 젖과 사대양의 물 가운데 어느 쪽이 더 많겠는가?”(S15.4)라며 물어 보는 것으로 알 수 있다.
윤회하면서 흘린 것은 눈물만이 아니다. 어머니의 젖도 사대양 물보다 많이 마셨다. 윤회하면서 흘린 피도 사대양보다 더 많다. 유골의 양은 어떨까?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일 겁의 세월만 윤회하더라도
한 사람이 남겨놓은 유골의 양은
그 더미가 큰 산과 같이 되리라고
위대한 선인께서는 말씀하셨네.”(S15.10)
사람이 죽으면 뼈를 남긴다. 요즘에는 화장을 해서 뼈가루만 남는다. 설령 뼈가루만 남는다고 하더라도 일겁이 지나면 어떻게 될까?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베뿔라 산만큼이나 클 것이다.”(S15.10)라고 했다. 베뿔라 산은 라자가하 오악중의 하나이다.
상윳따니까야 시작을 알 수 없는 것의 모음은 감동 그 자체이다. 이런 상윳따가 왜 대승경전에는 없는지 의문이다. 한역 아함경에 실려 있지 않은 것이다. 오로지 니까야에서만 볼 수 있다. 그것도 상윳따니까야에서만 발견된다. 참석자들 모두 감동 받은 듯 했다.
2023-09-12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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