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어도 좋아!”라며 즐거운 느낌에 목숨을 거는 갈애
새로운 학기가 시작되었다. 금요니까야모임의 신학기가 8월 25일 시작되었다. 이번이 14번째 학기이다. 2017년 2월부터 시작되었으니 만 6년 7개월 되었다.
금요니까야모임이 방학을 끝내고 다시 시작되었다. 전재성 선생이 미국에 있는 가족과 함께 두 달 보냈기 때문에 방학이 된 것이다. 다시 귀국했으니 신학기가 시작되었다.
8월 넷째주 금요일 모임이 한국빠알리성전협회 사무실 겸 서고에서 열렸다. 이날 참석자는 본인을 비롯하여 장계영, 홍광순, 방기연, 김경예, 고태현, 이태형, 김종선, 박재현 정진영 선생이 참석했다.
이번 금요모임에서는 두 개의 경을 합송했다. 상윳따니까야 ‘성찰의 경’(S12.66)과 ‘유행자 쑤시마의 경’(S12.70)을 말한다.
성찰의 경의 빠알리어 명칭은 삼마사숫따(Sammasā Sutta)이다. 삼마사의 동사형은 삼마사띠(sammāsati)로서 ‘숙고하다, 명상하다’의 의미가 있다. 주석에서는 연기적 조건에 대한 내적인 관찰이라고 했다. 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수행승들이여, 여기 한 수행승이 숙고하면서 내적인 성찰을 한다. ‘세상에 늙음과 죽음을 일으키는 많은 종류의 괴로움, 이러한 괴로움은 도대체 무엇을 조건으로 하고 무엇을 원인으로 하고 무엇을 발생으로 하고 무엇을 바탕으로 하는가? 무엇이 있다면 늙음 과 죽음이 있고, 무엇이 없다면 늙음과 죽음이 없는가? 그는 숙고하여 이와 같이 안다. ‘세상에 늙음과 죽음을 일으키는 많은 종류의 괴로움, 이러한 괴로움이야말로 집착의 대상을 조건으로 하고 집착의 대상을 원인으로 하고 집착의 대상을 발생으로 하고 집착의 대상을 바탕으로 한다. 집착의 대상이 있다면 늙음과 죽음이 있고, 집착의 대상이 없다면 늙음과 죽음이 없다.’그는 이와 같이 늙음과 죽음을 알고 늙음과 죽음의 발생을 알고 늙음과 죽음의 소멸을 알고 늙음과 죽음의 소멸로 이끄는 길을 안다. 그는 이와 같이 실천하여 여법한 수행자가 된다. 수행승들이여, 그를 완전하고 올바른 괴로움의 소멸, 늙음과 죽음의 소멸을 실천하는 수행승이라고 한다.”(S12.66)
수행승이 내적인 성찰을 하는 것은 괴로움에 대한 것이다. 경에서는 생사에 대한 괴로움이 언급되어 있다. 생사의 괴로움이 일어나는 것에 대하여 조건, 원인, 발생, 바탕으로 설명하고 있다.
경전읽기를 하고 있다. 머리맡에 있어서 틈만 나면 읽어 본다. 현재 상윳따니까야 읽기를 하고 있다. 이 경은 이미 읽은 바 있다. 각주도 읽어 보았다. 그러나 누군가 설명해 주지 않으면 자세히 알 수 없다. 이번 니까야 모임에서 전재성 선생이 설명해 주어서 좀더 심도 있게 알게 되었다.
연기는 조건법이다. 그런데 연기는 조건뿐만 아니라 원인도 있고, 발생도 있고, 바탕도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네 가지가 나열되어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하여 전재성 선생은 “한가지 원인만 찾는다면 선입견이 작용할 수 있습니다.”라고 했다.
경에서 네 가지를 나열한 것은 선입견을 배제하기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비슷한 용어가 반복적으로 사용된 것은 의미를 더욱더 강화하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조건뿐만 아니라 원인, 발생, 토대라는 말을 사용한 것이다.
삶은 괴로움이라고 말할 수 있다. 생, 노, 병, 사가 괴로운 것이다. 경에서는 늙음과 죽음의 괴로움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늙음과 죽음의 조건, 원인, 발생, 토대가 되는 것으로 집착의 대상으로 보고 있다.
집착의 대상은 우빠디를 번역한 것이다.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재생의 근거’라고 번역했다. 그렇다면 우빠디의 정확한 뜻은 무엇일까?
우빠디에 대한 빠알리 사전을 찾아 보았다. 찾아 보니 문자적으로는 “something which one grasps, to which one clings, i.e. the 5 groups of existence”라고 설명되어 있다. 오온에 대하여 집착하여 무엇인가를 붙잡고 있는 것을 말한다.
우빠디는 ‘삶의 연료(fuel of life)’의 뜻도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윤회의 땔감이라는 말과도 같다. 집착을 하게 되면 윤회의 원인이 됨을 말한다. 오온에 대한 집착은 세세생생 윤회하게 함을 말한다.
윤회의 땔감으로서 우빠디에 대하여 한국빠알리성전협회에서는 ‘집착의 대상’이라고 번역했고,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재생의 근거’라고 번역했다. 이는 우빠디가 십이연기에서 집착과 동의어로 쓰이고 있음을 말한다.
십이연기에서 집착은 갈애가 더욱더 강화된 것이다. 갈애를 조건으로 집착이 생겨난다. 그래서 “집착의 대상은 갈애를 조건으로 하고 갈애를 원인으로 하고 갈애를 발생으로 하고 갈애를 바탕으로 한다. 갈애가 있다면 집착의 대상이 있고, 갈애가 없다면 집착의 대상이 없다.”(S12.66)라고 숙고할 수 있다는 것이다.
흔히 집착하지 말라고 한다. 그러나 근원적으로는 갈애를 일으키지 말아야 한다. 갈애가 더욱더 강화되어서 집착이 되면 뗄레야 뗄 수 없다. 대상에 달라 붙어서 떼어지지가 않는 것이다.
연기가 회전되지 않으려면 갈애를 일으키지 말아야 한다. 집착의 단계가 되면 이미 늦다. 그래서 경에서는 여섯 가지 감각영역에서 갈애에 대하여 성찰하라고 했다. 어떻게 성찰하는가? 시각을 예로 든다면 “시각이라는 것은 세상에서 사랑스럽고 즐거운 것이다. 갈애는 언제나 여기에서 생겨나고 여기로 들어간다.”(S12.66)라고 숙고해야 한다는 것이다.
갈애를 일으키면 루비콘 강을 건너는 것과 같고 위화도 회군하는 것과 같다. 대상에 대하여 갈애를 일으키면 돌이킬 수 없는 것이다. 오로지 대상으로만 돌진해서 가는 것이다. 그 대상은 어떤 것일까?
갈애를 일으키는 대상이 있다. 공통적으로 대상에 대하여 사랑스럽고, 즐거운 것이고, 영원한 것이고, 행복한 것이고, 자기라고 보고, 건강하다고 보고, 안온하다고 보는 것이다. 이런 대상은 마치 독극물 같은 것이다. 다음과 같은 비유가 잘 말해준다.
“아름답고 향기롭고 맛있는 음료가 담겨 있지만 독약이 섞여 있다. 그 때 더위에 시달리고 더위에 지쳐서 피곤하고 목마르고 갈증이 나는 어떤 사람이 왔다. 사람들이 그에게 이와 같이 ‘벗이여, 이 물그릇에는 빛깔이 아름답고 향기롭고 맛있는 음료가 담겨 있지만 독약이 섞여 있다. 원한다면 마셔라. 네가 마시면 아름다운 빛깔과 향기와 맛 때문에 입에 맞을 것이다. 그러나 그로 인해 죽음이나 죽음에 이르는 고통을 겪을 것이다.’라고 말했을 것이다. 그가 물리치지 않고 허겁지겁 그 음료를 마셔 버린다면, 그는 그 때문에 죽음이나 죽음에 이르는 고통을 겪을 것이다.”(S12.66)
갈애는 독극물 같은 것이다. 독버섯이 화려 하듯이, 독이 든 물도 사람을 유혹한다. 갈증이 있는 자에게 독이 든 물은 빛깔이 아름답고 향기롭고 맛있는 음료수와 같다.
갈애는 아무리 마셔도 채워지지 않는 갈증 같은 것이다. 한번 갈애의 늪에 빠지면 설령 그것이 독극물이라고 해도 마실 것이다. 겉 보기에 화려하고 향기가 나고 맛이 있기 때문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순간적인 즐거운 느낌에 목숨을 거는 것과 같다. 마치 “죽어도 좋아!”라며 즐거운 느낌에 탐닉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은 갈애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해 놓았다.
“ 음료를 담은 잔은 사랑스럽고 즐길만한 세속적인 대상을 말하고 더위에 지친 사람은 윤회에 결박된 범부를 말하고, 물을 제공하는 사람은 그에게 사랑스럽고 즐길만한 세속적인 대상 가운데 그 대상을 즐기라고 권유하는 사람들이다. 여기서 유혹과 위험을 경고하는 자는 스승이나 친교사이다. 그들은 다섯 가지 감각적 쾌락의 유혹과 위험을 설한다. 그러나 범부들은 스승이나 친교사의 충고를 무시하고 허겁지겁 그 음료를 마셔서 죽음이나 죽음에 이르는 고통을 겪는 자로서 그들은 수행을 포기하고 세속의 생활로 돌아가서 범죄를 저질러 왕에게 처벌을 받기도 하고 내생에 비참한 곳에 태어나 고통을 겪는다.”(Srp. II. 121)
독극물의 비유는 맛지마니까야에서도 발견된다. 이는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어, 청동의 잔에 색깔을 갖추고, 향기를 갖추고, 맛을 갖춘 음료수가 있는데, 독이 섞여있다고 하자. 그런데 오래 살길 바라고, 죽지 않길 바라고 즐거움을 바라고 괴로움을 싫어하는 사람이 왔다고 하자. 그에게 이와 같이 말했다고 하자. ‘이 사람아, 여기 청동의 잔에 색깔을 갖추고, 향기를 갖추고, 맛을 갖춘 음료수가 있는데, 독이 섞여있다. 원한다면 마시라. 그대가 그것을 마실 때에 그 색깔, 향기, 맛이 그대에게 즐거움을 줄 것이다. 그래도 마시면 그대는 죽음에 이르거나 죽음에 이르는 고통에 시달릴 것이다.’ 그러자 그는 생각하지 않고 그것을 마시고 물리치지 않았다고 하자. 그것을 마신 자에게 그 색깔, 향기, 맛이 즐거움을 주지만, 마신다면 죽음에 이르거나 죽음에 이르는 고통에 시달릴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나는 이와 같은 비유로서 현재에는 즐겁지만 미래에는 괴로운 결과를 초래하는 삶의 수용을 설한다.”(M46)라는 내용이다.
흔히 약은 쓰고 독은 달다고 말한다. 십선행을 하면 약이 되고, 십악행을 하면 독이 된다. 십악행을 하면 달콤한 독이 든 음료수를 마시는 것과 같고, 십선행을 하면 쓴 약이 들어 있는 음료수를 마시는 것과 같다. 대부분 사람들은 갈애로 살기 때문에 달콤한 독극물을 마신다.
갈애를 일으키면 독이 된다. 독은 결국 죽음에 이르게 하고 죽음에 이를 정도로 괴로움에 처하게 만든다. 그렇다면 어떤 삶을 사는 것이 바람직할까?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사랑스럽고 즐거운 것을 무상하다고 보고 불행하다고 보고 자기가 아니라고 보고 병든 것이라고 보고 위험하다고 본다면, 그들은 갈애를 버리는 것이다.” (S12.66)라고 했다.
갈증이 난다고 하여 허겁지겁 아무 것이나 마시면 괴로움을 겪을 수 있다. 특히 화려하거나 향기가 좋거나 맛이 있는 음료수를 마시면 독극물을 마시는 것과 같다. 이럴 때는 내적인 성찰을 해야 한다.
내적인 성찰은 어떻게 하는가? 이는 “나의 음료에 갈증은 찬물로 극복되거나 유장으로 극복되거나 소금기 있는 산죽으로 극복되거나 소금기 있는 곡식수프로 극복될 수 있다. 나는 나에게 오랫동안 피해와 고통을 주게 될 것을 마시지 않겠다.”(S12.66)라고 다짐하는 것으로 알 수 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세상의 흐름과는 반대이다. 세상사람들이 가는 길과는 반대로 가거나 흐름을 거슬러 가는 것이다.
세상사람들은 탐욕, 성냄, 어리석음으로 산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은 무탐, 무진, 무치로 산다. 세상 사람들이 상, 락, 아, 정으로 살 때, 부처님은 무상, 고, 무아, 부정으로 살라고 했다. 이렇게 부처님의 가르침은 세상의 흐름과는 반대로 가는, 세상을 흐름을 거슬러 가는 역류도의 가르침이라고 볼 수 있다.
2023-09-04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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