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緣起)와 연생(緣生)은 어떻게 다른가?
지금 시각은 6시 20분이다. 새벽에 집을 나왔다. 새벽 5시 45분에 출발하여 일터에 6시에 도착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미화원을 만났다. 이렇게 일찍 나오는 사람 있느냐고 물어 보았다. 미화원은 아직 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오늘 일터에 일찍 나온 이유가 있다. 그것은 금요니까야모임 후기를 작성하기 위해서이다. 마치 마감일에 쫓기는 사람 같다. 써도 그만 안써도 그만이지만 이제까지 만6년이상 해 오던 일을 중단할 수 없다.
5월 두 번째 니까야모임
5월 두 번째 니까야모임이 5월 26일 한국빠일리성전협회 서고에서 있었다. 이날 참석자는 이병욱, 장계영, 홍광순, 김경예, 방기연, 이성기, 안진현 선생이었다. 도현스님은 부처님오신날 행사가 다음날이어서 참석하지 못했다.
가능하면 많은 사람이 모임에 참석하기를 바란다. 그러나 거의 대부분 한두번으로 그치고 만다. 왜 그러는 것일까? 지난 7년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왕래 했지만 꾸준히 나오는 사람들은 손으로 꼽을 정도에 지나지 않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모임에 참여해 줄 것을 권유했다. 이런 요청에 한번쯤 참석한 사람들도 있다. 자주 나오던 사람들도 어느 시기가 되면 발길을 끊는 경우도 있다. 한번 빠지면 계속 빠지는 것이다. 이런 것도 관성의 법칙일 것이다.
니까야모임은 담마에 대하여 합송하고, 듣고, 토론하는 모임이다. 다른 것은 이야기 하지 않는다. 담마에 대한 것이 아닌 비담마에 대한 것은 토론의 주제가 되지 못한다. 또한 모임은 뒷풀이가 없다. 저녁 9시에 끝나기 때문에 집에 가기에 바쁘다. 아마도 이런 무미건조한 점이 사람들에게 흥미를 상실하게 하는 것인지 모른다.
담마는 들어도 들어도 새롭다. 그가 아무리 담마에 대하여 많이 안다고 해도 사부니까야를 포함하여 쿳다까니까야 대부분을 번역한 사람보다 더 알지 못할 것이다. 더구나 율장을 포함하여 청정도론과 같은 논서도 번역했다.
모임에서 받아 적기에 바쁘다. 모임에 처음 참석한 2016년 여름 이후 한결같다. 노트한 것은 버리지 않고 다 모아 두었다. 그리고 모임이 끝나면 반드시 후기를 작성했다. 보고 듣고 느낀 것에 대한 것뿐만 아니라 상황도 설명해 놓았다. 나중에 중요한 사료가 되지 않을까?
5월 첫번째 모임에서는 세 개의 경을 합송했다. 교재 ‘오늘 부처님께 묻는다면’에서 1) ‘연기를 보는 자는 어떻게 윤회의 주체에 관해 생각할까’, 2) ‘괴로움은 스스로 만든 것일까 남이 만든 것일까’, 3) ‘어떻게 생로병사의 세계를 소멸시킬 수 있을까’에 대한 것이다. 각각 1)조건의 경(S12.20), 2)우빠바나의 경(S12.26), 3)수행승들의 경(S12.28)에 대한 것이다.
여래가 출현하거나 여래가 출현하지 않거나
첫번째 경은 조건의 경이라 하여 연기와 연생으로 설명되어 있다. 경에서는 연기와 연생에 대하여 나누어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렇다면 연기는 무엇이고 연생은 무엇인가?
연기는 빠알리어 빠띳짜사뭅빠다(paṭiccasamuppāda)를 번역한 것이다. 우리말로 번역하면 조건하여 함께 발생하는 것이 된다. 이는 십이연기의 연결고리에서 단일 사건이 일어나는 것과는 다른 뉘앙스이다. 함께(sam) 발생한다는 것은 동시에 발생한다는 것과 의미가 유사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 선생은 “단일한 조건이 발생하지 않습니다. 이는 연기의 복잡성을 말합니다.”라고 말했다.
연기의 정형구가 있다. 이는 십이연기 정형구로 잘 표현되어 있다. 그런데 이 경에서는 각 연결고리마다 반복되는 구문이 있다.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과 죽음이 있다는 연결고리를 보면 다음과 같다.
“수행승들이여,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과 죽음이 생겨난다.’라고 여래가 출현하거나 여래가 출현하지 않거나 그 세계는 정해져 있으며 원리로서 확립되어 있으며 원리로서 결정되어 있으며 구체적인 것을 조건으로 하는 것이다. 여래는 그것을 올바로 깨닫고 꿰뚫었으며, 올바로 깨닫고 꿰뚫고 나서, 설명하고, 교시 하고, 시설하고, 확립하고, 개현하고, 분석하고, 명확하게 밝힌다. 그러므로 ‘그대들도 보라’고 말하는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태어 남을 조건으로 늙음과 죽음이 생겨나는 것과 같이 수행승들이여, 여기서 여실한 것, 허망하지 않은 것, 다른 것이 아닌 것, 구체적 인 것을 조건으로 하는 것, 수행승들이여, 이것을 연기라고 한다.”(S12.20)
부처님은 십이연기에서 강조한 것이 있다. 그것은 “여래가 출현하거나 여래가 출현하지 않거나 그 세계는 정해져 있으며 원리로서 확립되어 있다.”라는 것이다. 이뿐만 아니다, 결정되어 있고 구체적인 것을 조건으로 하는 것이라고 했다.
연기가 원리로서 확정되어 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 이에 대하여 전재성 선생은 연기의 객관성, 연기의 필연성, 연기의 불변성, 연기의 조건성으로 설명했다.
전재성 선생이 말한 연기의 객관성, 필연성, 불변성, 조건성에 대한 것이 자세하게 설명된 책이 있다. 이는 한국빠알리성전협회(KPTS)에서 발간된 ‘초기불교의 연기사상’을 말한다.
KPTS의 ‘초기불교연기사상’에서
초기불교연기사상은 1999년에 출간되었다. 아마 전재성 선생이 상윳따니까야를 번역할 당시 거의 동시에 쓴 책이라고 볼 수 있다. 전재성 선생의 박사학위 논문과도 중복 되는 것EH 있다. 서문을 보니 “초기불교 연기사상을 현대 철학과 현대물리학에서 정립되고 있는 새로운 인과론에 바탕을 두고 다시 연구한 것”이라고 했다.
초기불교연기사상을 보면 연기에 대하여 8가지로 설명했다. 차례로 나열하면 1)연기의 일반적 특성, 2)연기의 여실성, 3)연기의 필연성, 4)연기의 항상성, 5)연기의 조건성, 6)연기의 부전도성, 7)연기의 공성, 8)연기의 아비달마적 조건성과 수반성이다. 99페이지부터 144페이지까지 무려 45페이지에 걸쳐 상세하게 설명해 놓았다. 이 중에서 가장 마지막 번째인 연기의 아비달마적 조건성과 수반성에 대하여 무려 24페이지를 설명했는데 절반에 달한다.
연기를 이해하려면 초기불교연기사상을 보아야 한다. 경에서는 간략하게 정해진 것, 원리로 확립된 것, 결정된 것, 구체적인 것을 조건으로 하는 것, 이렇게 네 가지로 단어만 나열되어 있으나 초기불교연기사상에서는 이를 여덟 가지로 확장하여 현대철학과 현대물리학의 관점에서도 설명해 놓은 것이다.
초기불교연기사상을 다 읽어 보지 않았다. 필요한 부분만 읽어 보았다. 가장 난해 한 것은 여덟 번째 연기의 아비달마적 조건성과 수반성에 대한 것이다. 이 부분은 24가지 조건에 대한 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읽어 내기가 힘든 것 같다. 특히 이 부분에서 강조한 것은 수반이다.
연기에서 수반(Supervenience)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이는 의존적 관계를 말한다. 이는 다름아닌 조건적 관계이다. 이와 같은 수반은 1)함께 변함, 2)의존, 3)환원불가능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니까야모임에서 연기를 상세하게 설명하는 것은 한계가 있을 것이다. 연기에 대하여 더 알고자 하거든 초기불교연기사상을 읽어 보아야 할 것이다.
이것(iti)은 복합적 사건
전재성 선생이 말한 것을 노트했다. 연기의 복잡성에 대한 것이 마음에 와 닿았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십이연기 연결고리가 단순하게 단어로 연결되어 있지만 실제적으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십이연기를 설명할 때는 단순하게 이야기 하지만 이는 언어에 의해서 진리가 억압된 것입니다.”라고 설명했기 때문이다.
언어로 진리를 표현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 선생은 “이것”을 들었다. 이는 연기송에 나오는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에서 이것(iti)를 말한다. 전재성 선생은 이것에 대하여 복합적 사건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는 연기의 정형구에서 늙음에 대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연기의 정형구는 분별의 경에서 발견된다. 니까야에서는 여러 분별의 경이 있는데 연기상윳따에서도 ‘분별의 경(vibhaṅgasutta)’이 있는 것이다. 이를 ‘십이연기분석경(S12.2)’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다.
십이연기분석경을 빠알리어로 외운 바 있다. 모든 학문은 외우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듯이, 불교학도 중요한 경은 외워야 할 것이다. 그래서 교학과 관련하여 두 개의 비방가숫따를 외웠다. 팔정도분석경(S45.8)과 십이연기분석경(S12.2)을 말한다. 빠알리어로 외웠다.
십이연기분석경에서 늙음에 대한 표현은 다양하다. 늙음이라는 한가지 단어만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표현을 사용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Katamañca bhikkhave, jarāmaraṇaṃ? Yā tesaṃ tesaṃ sattānaṃ tamhi tamhi sattanikāye jarā jīraṇatā khaṇḍiccaṃ pāliccaṃ valittacatā āyuno saṃhāni indriyānaṃ paripāko, ayaṃ vuccati jarā
“수행승들이여, 늙음과 죽음이란 무엇인가? 낱낱의 뭇삶의 유형에 따라 낱낱의 뭇삶의 늙고 노쇠하고 쇠약해지고 백발이 되고 주름살이 지고 목숨이 줄어들고 감역이 노화되는데, 이것을 늙음이라고 한다.”(S12.2)
십이연기분석경을 보면 늙음에 대한 정의가 있다. 이는 “낱낱의 뭇삶의 늙고 노쇠하고 쇠약해지고 백발이 되고 주름살이 지고 목숨이 줄어들고 감역이 노화되는 것”을 말한다. 늙음이라 하여 자라(jarā)라는 말 하나로 표현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십이연기에서 이것은 하나의 단어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라는 의미는 복합적 사건의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늙음에 대하여 늙음(jarā)뿐만 아니라 노쇠(jīraṇatā), 쇠약(khaṇḍiccaṃ), 백발(pāliccaṃ), 주름살(valittaca), 목숨이 줄어드는 것 (āyuno saṃhāni), 감각기능이 노화되는 것 (indriyānaṃ paripāko) 등 복합적 의미를 지닌다는 것이다.
소멸에 초점을 둔 연생
연생이란 무엇일까? 이에 대하여 전재성 선생은 사라진다는 측면에서 연생을 설명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다음과 같은 연생의 정형구를 보면 알 수 있다.
“수행승들이여, 연생의 사실은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늙음과 죽음은 무상한 것이고 유위적인 것이고 조건적으로 발생된 것이고 부서지고야 마는 것이며 사라지고야 마는 것이며 소멸하고야 마는 것이다.”(S12.20)
연생은 빠띳짜사뭅빤나(paṭiccasamuppannā)를 번역한 말이다.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연기된 법[緣而生]’으로 번역했다. 연생과 같은 말이다. 이런 연생에 대하여 “무상한 것이고 유위적인 것이고 조 건적으로 발생된 것이고 부서지고야 마는 것이며 사라지고야 마는 것이며 소멸하고야 마는 것이다.”(S12.20)라는 정형구가 연기의 고리마다 붙는다. 그래서 전재성 선생은 ‘사라진다’는 측면에서 연생이라고 말한 것이다.
전재성 선생은 연생을 설명하면서 영원하다는 말에 속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연기된 것은 사라짐을 속성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연생에 대하여 1)무상한 것(aniccaṃ), 2)유위적인 것(saṅkhataṃ), 3)조건적으로 발생된 것 (paṭiccasamuppannaṃ), 4)부서지고야 마는 것(khayadhammaṃ), 5)사라지고야 마는 것(vayadhammaṃ), 싫어하여 떠나는 것(virāgadhammaṃ), 7)소멸하고야 마는 것 (nirodhadhammaṃ)으로 설명되어 있다.
나는 누구일까?
연기와 연생은 비숫비숫한 말이다. 그러나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비슷하면서도 다른 말이다, 연기는 발생에 초점을 두었지만, 연생은 소멸에 초점을 둔 것이다. 연기는 조건법이지만 연생은 소멸법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연기와 연생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수행승들이여, 고귀한 제자들은 이 연기와 연생의 사실을 있는 그대로 올바른 지혜로 잘 관찰하기 때문에 이와 같은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나는 전생에 있었는지, 나는 전생에 없었는지, 나는 전생에 무엇으로 있었는지, 나는 전생에 어떻게 있었는지, 나는 전생에 무엇으로 있다가 무엇이 되었는지 숙세로 거슬러 올 라가거나 ‘나는 내세에 있을지, 나는 내세에 없을지. 나는 내세에 무엇으로 있을지. 나는 내세에 어떻게 있을지. 나는 내세에 무엇으로 있다가 무엇이 될 것인지’내세로 달려가거나 ‘나는 현세에 있는지, 나는 현세에 없는지, 나는 현세에 무엇으로 있는지, 나는 현세에 어떻게 있는지, 나는 현세에 무엇으로 있다가 무엇이 되는지’ 현세에 의혹을 갖게 되거나 하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S12.20)
연기와 연생을 알면 삼세에 대한 의혹이 해소된다고 했다. 그것은 나에 대한 것이다. 나에 대하여 전생, 내생, 현생에 대한 의혹이 남아 있다면 이는 연기와 연생을 모르는 것과 같다.
나에 대한 삼세에 걸친 의혹은 왜 일어나는 것일까? 맛지마니까야 모든 번뇌의 경에 따르면, 정신활동을 기울이지 말아야 할 것에 정신활동을 기울이어서 나오는 번뇌에 대한 것이다.
나에 대하여 삼세에 걸쳐 의심하는 것은 번뇌만 일으킬 뿐이다. 왜 그런가?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나는 없기 때문이다. 오온이 내것이라고 여기는 그런 나는 없는 것이다. 본래 내가 없는 것임에도 ‘나는 누구일까?’라며 나를 찾는 수행을 한다면 번뇌만 증장될 뿐이라는 것이다.
십이연기가 삼세양중인과로 설명되면
부처님은 조건발생법칙인 연기와 소멸에 해당되는 연생을 모르면 번뇌가 생겨날 것이라고 했다. 그것은 이치에 맞지 않게 정신활동을 기울이는 것이다. 현상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면 연기와 연생에 대한 것인데, 이를 몰랐을 때 삼세에 걸쳐 16가지 의혹이 생겨남을 말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잘 관찰하는 것일까? 청정도론에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정신의 세계의 직후에
시각의식이 오는 것처럼,
오는 것은 아니지만
그 직후에 생겨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결생이 있을 때
마음의 상속이 일어나니,
앞의 전심이 파괴되고
그 다음의 후심이 생겨난다.
그것들에게 중간자는 없고,
그것들에게 중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여기서 어떠한 것도
오지 않지만, 결생이 생겨난다.”(Vism.19.23)
청정도론 19장에 있는 게송이다. 19장은 ‘의혹에 대한 극복의 청정(kaṅkhāvitaraṇa visuddhi)’으로 칠청정 중에서 네 번째 청정에 해당된다. 이 게송은 재생연결식에 대한 것이다.
불교에서는 사람이 태어나는 것을 재생(rebirth)이라고 한다. 티벳불교에서 말하는 환생(reincarnation)이 아니다. 환생은 자아가 있는 영혼개념을 말한다. 그러나 재생은 조건발생적 태어남이다.
재생연결식은 십이연기의 고리에서 식에 해당된다. 십이연기가 삼세양중인과로 설명되면 이때 식은 재생연결식이 된다. 그래서 청정도론 게송에서는 결생 (paṭisandhi)이라 하여 재생연결식으로 설명했다.
이 게송은 무엇을 말하는가? 그 어떤 것도 과거로부터 넘어 온 것은 없다는 것이다. 다만 조건발생할 뿐이다. 그래서 “과거의 업을 조건으로 존재의 다발 이 생겨났다면, 그것들은 모두 그곳에서 소멸한다. 그리고 과거의 업을 조건으로 이 생에서 다른 것들이 생겨나고, 과거의 생으로부터 이 생으로 온 것은 하나의 사실도 없다. 또한 그 생에서 업을 조건으로 생겨난 존재의 다발은 소멸할 것이고, 내생에서는 다른 것들이 생겨날 것이고 그 생에서 내생으로 하나의 사실도 가지 않을 것이다.”(Vism.19.21)라고 했다.
나는 본래 없다. 있다면 조건발생하는 나만 있을 뿐이다. 지금 이순간에도 명색은 조건발생하고 있다. 조건발생한 것은 소멸하기 마련이다. 이때 조건발생한 것은 연기를 말하고, 소멸하는 것은 연생을 말한다.
연생에 대하여 소멸이라고 말하는 것은 경에 따른다. 경에서는 연생에 대하여 각 연기의 고리마다 “무상한 것이고 유위적인 것이고 조건적으로 발생된 것이고 부서지고야 마는 것이며 사라지고야 마는 것이며 소멸하고야 마는 것이다.”(S12.20)라는 정형구가 붙어 있기 때문이다.
수다원선언이 있는데
불교에 깨달은 사람이 있다. 그런데 깨달음에도 단계가 있다는 것이다. 수다원에서부터 아라한까지 단계가 있는 것이다. 여기서 아라한의 깨달음은 깨달음의 완성이다. 그래서 아라한이 되면 ‘아라한선언’을 하게 되는데 이는 “나는 흔들림 없는 마음에 의한 해탈을 이루었다. 이것이 최후의 태어남이며, 이제 다시 태어남은 없다.”(S56.110라는 선언을 말한다.
아라한선언은 깨달음의 완성이다. 수행을 해서 모든 번뇌를 소멸 했을 때, 더 이상 오염원이 없을 때 자기자신이 자신을 잘 안다. 그래서 다시태어남이 없게 됨을 알기 때문에 스스로 선언하는 것이다.
아라한선언만 있는 것은 아니다. 수다원선언이라는 것도 있다. 이는 꼰당냐가 부처님의 설법을 들었을 때 “무엇이든 생겨난 것은 그 모두가 소멸하는 것이다.(yaṃ kiñci samudayadhammaṃ sabbantaṃ nirodhadhammanti)”(S56.11)라고 아는 것이 대표적이다. 성자의 흐름에 들어 가는 순간 이 선언을 하게 된다.
성자의 흐름에 들면, 즉 수다원이 되면 일곱생 이내로 완전한 열반의 길로 가게 되어있다. 그래서 자신에게 남아 있는 번뇌, 즉 오염원을 제거하기 위한 수행을 하게 된다. 그런데 니까야를 보면 생멸의 지혜를 아는 것은 큰 사건이라는 것이다. 이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완전히 이해 했음을 뜻한다.
사리뿟따 존자에게도 생멸의 지혜가
사리뿟따 존자가 경행하던 앗사지 존자에게 연기법송을 들었을 때도 생멸의 지혜가 생겨났다. 그래서 율장 대품을 보면 앗사지 존자가 “사실들은 원인으로 생겨나며 그 원인을 여래는 설합니다. 그것들이 소멸하는 것 또한 위대한 수행자께서 그대로 설합니다.”(Vin.I.40)라고 말해 주었다. 이에 사리뿟따 존자에게 순수하고 때묻지 않은 진리의 눈이 생겨나면서 “무엇이든 생겨난 것은 그 모두가 소멸하는 것이다.”(Vin.I.40)라고 알게 된 것이다.
사리뿟따 존자는 앗사지 존자가 말한 짧은 연기법송으로 수다원이 되었다. 성자의 흐름에 들어간 것이다. 이에 대하여 사리뿟따 존자는 “만약 오로지 이것만이라고 하여도 그대들은 이미 근심 없는 진리를 꿰뚫었으니, 지난 수천억 우주기중에도 볼 수 없는 것입니다.”(Vin.I.40)라고 앗사지 존자에게 말했다.
불교에서 생멸의 지혜를 아는 것은 성자의 흐름에 들어가는 것에 해당된다. 남은 생애는 오로지 자신에게 남아 있는 오염원을 제거하는 수행을 한다. 이른바 수행도의 삶을 사는 것이다. 그래서 수다원을 견도라고 하고, 사다함과 아나함을 수행도라 하고, 아라한을 무학도라고 한다.
연기와 연생의 법칙을 알면 삼세에 대한 의혹은 해소된다. 이는 내가 있다는 견해에서 자유로움을 말한다. 또한 삼보에 대한 의혹과 스승에 대한 의혹도 해소된다. 이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가? 가르침에 대한 의혹이 해소됨을 말한다. 연기법에 대하여 더 이상 의문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오로지 열반을 향해 정진하는 것이다.
사투하듯이 썼는데
현재시각 오전 9시 32분이다. 오전 6시 20분부터 쓰기 시작하여 사투하듯이 썼다. 책상에는 온갖 서적으로 가득하다. 니까야도 있고 논서도 있고 참고서적도 있다. 글을 쓸 때는 근거를 밝혀야 하기 때문이다.
내가 쓰는 글은 스님의 법문도 아니고 학자의 논문도 아니다. 단지 블로거의 잡문(雜文)일 뿐이다. 그날그날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아는 만큼만 쓴다. 그러나 글에는 책임이 따른다. 그래서 글을 마칠 때는 날자와 함께 서명을 한다. 글에 대한 무한책임을 지겠다는 의미이다.
이번에는 후기를 늦게 썼다. 오늘 6월 첫번째 모임을 앞두고 사투를 벌이다 시피 하여 썼다. 이런 글쓰기에 대하여 ‘목숨을 걸고 쓴다’라고 말한다. 이런 글을 남겨 놓으면 누군가에게는 도움이 될 것이다. 또한 금요니까야모임 기록이 되기도 한다. 연기와 연생에 대하여 써 보았다.
2023-06-09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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