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니까야모임

유업보이무작자론과 의혹의 극복에 대한 청정

담마다사 이병욱 2023. 5. 24. 11:33

유업보이무작자론과 의혹의 극복에 대한 청정
 
 
흔히 내탓 남탓을 말한다. 내가 잘못 했으면 “내 탓이오!”라고 말하고, 남이 잘못했으면 “네 탓이야!”라고 말한다. 이런 말은 타당할까? 세간에서는 타당할지 모르지만 출세간에서는 타당하지 않다. 나나 너라고 할만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5월 첫번째 금요니까야모임이 5월 12일(금) 한국빠알리성전협회에서 열렸다. 이날 참석자는 도현스님을 비롯하여, 장계영, 홍광순, 이병욱, 방기연, 안현진, 유경민, 정진영, 이정대 선생이 모였다.
 
두 개의 경을 합송했다. 첫번째 경은 ‘행위하는 자와 경험하는 자는 동일인인가’라는 제목의 경이고, 두번째 경은 ‘불교적 인과원리인 연기의 일반법칙이란 어떤 것일까’에 대한 것이다. 각각 상윳따니까야 ‘아쩰라 깟싸빠의 경’(S12.17)과 ‘열 가지 힘의 경1’(S12.21)에 대한 것이다.
 
역류도(逆流道)
 
나형외도 아쩰라 깟싸빠가 부처님에게 물었다. 괴로움은 자신이 만든 것인지 남이 만든 것인지에 대해서 물은 것이다. 이에 부처님은 “깟싸빠여, 그렇지 않습니다.”(S12.17)라고 하여 모두 부정했다. 그렇다면 현재 당면하고 있는 괴로움은 누가 만든 것일까?
 
부처님은 삶에서 발생되는 괴로움에 대한 해법을 제시했다. 그런데 그 방법은 세상에서 말하는 것과 다르다. 달라도 아주 다르다. 너무 달라서 파격적이다. 세상의 흐름과는 반대로 말하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정각을 이루었을 때 세상 사람들이 깨달음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왜 그런가? 세상의 흐름과는 반대로 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흐름을 거슬러가는 심오하고, 보기 어렵고, 미묘한 진리”(S6.1)라고 했다. 여기서 ‘흐름을 거슬러간다’는 말이 있다. 이는 빠띠소따가미(paisotagāmī)를 말한다. 한자어로 역류도(逆流道)라고 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역류도이다. 왜 역류도인가? 세상사람들이 욕망으로 살 때 부처님은 욕망을 내려 놓는 삶을 살라고 했다. 바로 이런 것이 흐름을 거슬러 가는 역류도인 것이다.
 
역류도는 파격이다. 세상사람들이 탐욕, 성냄, 어리석음으로 살 때 반대로 무탐, 무진, 무치로 살라고 했기 때문이다. 세상 사람들이 내탓이라거나 남탓을 이야기할 때 역류도에서는 성립되지 않는다.
 
천주교에 “내 탓이오!”운동이 있는데
 
천주교에 “내 탓이오!”운동이 있다. 남 탓이 아니라 자신의 탓으로 돌리는 것은 아름다운 사고발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불교적 입장에서 보았을 때,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있을 수 없다.
 
연기법적으로 보았을 때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 있다면 사건과 사건만 있을 뿐이다. 연속해서 일어나는 사건이다. 조건발생하는 사건을 말한다. 이것을 연기법이라고 한다.
 
연기법에 따르면 나라는 말은 성립되지 않는다. 조건발생하는 사건과 사건의 흐름에 있어서 나라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 그래서 무아라고 한다. 나라고 할만한 것이 없으니 너라고 할만한 것도 없다. 중생이라는 말도 없고, 남자나 여자라는 말도 없다. 있다면 명칭으로만 존재하는 말만 있을 뿐이다.
 
괴로움은 누가 만든 것일까?
 
나형외도가 괴로움에 대해서 물었을 때 내가 만든 것도 남이 만든 것도 아니라고 했다. 그렇다면 괴로움은 누가 만든 것일까? 그런데 이런 질문은 잘못 되었다는 사실이다. 연기법에서는 ‘누가’라는 말은 성립되지 않는다. 사건과 사건의 연기법적 흐름에서는 연기의 주체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누가 괴로움을 만들었습니까?”라고 물어 보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현재 당면하고 있는 괴로움이 있다. 이 괴로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범부들은 자신이 만들었다거나 상대방 탓으로 돌린다. 그러나 연기법적으로 보았을 때 누구도 괴로움을 만들지 않았다. 괴로움이 일어날 만 해서 일어난 것이다. 괴로움은 조건발생한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깟싸빠여, ‘행위하는 자와 경험하는 자가 동일하다.’고 한다면, 그것은 처음부터 괴로움이 있는 것과 관련하여 ‘괴로움 은 자신이 만든 것이다.’라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게 주장한다면, 그 것은 영원주의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깟싸빠여, ‘행위하는 자와 경험하는 자가 다르다.’고 한다면, 괴로움을 당한 것과 관련하여 ‘괴로움은 다른 사람이 만든 것이다.’라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게 주장 한다면, 그것은 허무주의에 해당하는 것입니다.”(S12.7)
 
 
부처님은 내탓으로 보면 영원주의적 관점이라고 했고, 남탓으로 보면 허무주의적 관점으로 보았다. 이는 행위자와 경험하는 자의 차이에 대한 것이다.
 
행위를 하면 과보를 받는다. 부처님은 업과 업보의 가르침을 펼쳤다. 행위를 한다고 하여 즉각적으로 과보를 받는 것은 아니다. 시간을 두고 받는다. 이에 대하여 ‘업이 익는다’라고 말한다.
 
업이 익는 것을 깜마위빠까(kammavipāka)라고 한다. 업이숙(業異熟)이라고 한다. 업이 시간을 두고 달리 익는 것을 말한다.
 
업과 업이숙이 있다. 이는 행위와 행위의 과보에 대한 것이다. 그렇다면 행위자와 향수자, 즉 행위에 대한 과보를 경험하는 자는 같은 자일까 다른 자일까? 부처님의 연기법에 따르면 당연히 행위자도 없고 향수자도 없다. 왜 그런가? 조건발생하는 연기법에서 자아라고 할만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괴로움은 누가 만든 것이 아니다.
 
행위자도 없고 향수자도 없고
 
연기법은 조건발생해서 소멸한다.다만 과보가 또다른 조건이 되어서 또 다른 과보가 된다. 이렇게 조건발생하여 상속되는 것이 연기법이다. 이렇게 본다면 행위자도 있을 수 없고 향수자도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청정도론에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행위의 행위자는 없고, 또한
이숙의 향수자도 없다.
단지 사실만이 일어난다.
그것만이 올바른 봄이다.”(Vism.19.20)
 
 
행위자(karaka)도 없고 향수자(vedaka)도 없다고 했다. 단지 사실(dhamma)만이 일어날 뿐이라고 했다. 업과 업이숙만 조건발생할 뿐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보는 것이 올바르게 보는 것(sammadassana)이라고 했다.
 
행위자와 향수자가 동일하다면 어떤 변치 않는 자아가 상정된다. 영혼이나 아뜨만도 이에 해당된다. 그래서 자아가 행위하고 자아가 받는다고 말한다. 천주교에서 말하는“내 탓이오!”라는 운동의 근거가 된다. 이는 영원주의적 관점이다.
 
행위자와 향수자가 동일하지 않다면 단멸론적으로 보는 것이다. 왜 그런가? 인과를 부정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허무주의자들은 “보시도 없고, 제사도 없고, 헌공도 없고, 선악의 행위에 대한 과보도 없고, 이 세상도 없고, 저 세상도 없고, 어머니도 없고, 아버지도 없고, 화생하는 뭇삶도 없다.”(S24.5)라고 말한다.
 
부처님은 영원주의와 허무주의를 비판했다. 영원주의와 허무주의는 연기법적으로 성립될 수 없는 것이다. 이는 ‘깟짜야나곳따의 경’(S12.15)에서 유무중도로 설명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소멸을 관찰하면 영원주의는 성립되지 않고, 생성을 관찰하면 허무주의가 성립되지 않는다고 했기 때문이다.
 
양극단을 떠나서 중도로 가르침을
 
부처님은 나체외도 깟싸빠에게 행위자도 없고 향수자도 없다고 말했다. 행위자와 향수자가 있어서 둘이 동일하다고 보면 영원주의적 견해에 빠지고, 둘이 동일하지 않다고 보면 허무주의적 견해에 빠진다고 했다. 영원주의와 허무주의는 양극단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연기법적으로 설명했다.



깟싸빠여, 여래는 이러한 양극단을 떠나서 중도로 가르침을 설 합니다. 무명을 조건으로 형성이 생겨나고, 형성을 조건으로 의식이 생겨나고, 의식을 조건으로 명색이 생겨나고, 명색을 조건으로 여섯 가지 감역이 생겨나고, 여섯 가지 감역을 조건으로 접촉이 생겨나고, 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생겨나고,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가 생 겨나고 갈애를 조건으로 집착이 생겨나고, 집착을 조건으로 존재가 생겨나고,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남이 생겨나고,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과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 생겨납니다. 이 모든 괴로움의 다발들은 이와 같이 해서 생겨납니다. 그러나 무명이 남김 없이 사라져 소멸하면 형성이 소멸하고, 형성이 소멸하면 의식이 소 멸하며, 의식이 소멸하면 명색이 소멸하고, 명색이 소멸하면 여섯 가지 감역이 소멸하며, 여섯 가지 감역이 소멸하면 접촉이 소멸하고, 접촉이 소멸하면 느낌이 소멸하며, 느낌이 소멸하면 갈애가 소멸하고, 갈애가 소멸하면 집착이 소멸하며, 집착이 소멸하면 존재가 소멸하고, 존재가 소멸하면 태어남이 소멸하며, 태어남이 소멸하면 늙음과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 소멸합니다. 이 모든 괴로움의 다발들은 이와 같이 해서 소멸합니다.”(S12.17)
 
 

 
부처님은 양극단을 부정했다. 절대유와 절대무를 부정한 것이다. 그 대신 연기법적으로 설명했다. 이렇게 본다면 부처님이 말씀하신 중도는 연기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연기법은 조건발생법이다. 인연과로 이루어진 연기법은 사건에 대한 것이다. 사건과 사건이 일어날 뿐이다. 여기에 나라든가, 너라든가 중생, 여자, 남자와 같은 개념은 있을 수 없다. 사건이 어떻게 나가 되고 너가 되고 중생이 되고 여자가 되고 남자가 될 수 있을까?
 
나라는 존재는 사건의 연속이다. 이를 청정도론 게송에서는 “단지 사실만이 일어난다.(suddhadhamma pavattanti)”(Vism19.20)라고 했다. 순수한 법 (suddhadhamma)만 일어난다는 것이다. 순수한 법은 부처님이 말씀 하신 십이연기가 대표적이다.
 
열여섯 가지 나에 대한 의문이 있는데
 
나는 누구인가? 이런 물음은 오래 전부터 있어 왔다. 그러나 이런 물음에 답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사는 것이다. 그런데 부처님은 이에 대하여 명확히 말씀하셨다. 그런 나는 없다는 것이다.
 
나는 없다. 그럼에도 나를 찾을 때 나를 찾을 수 있을까? 아마 평생 가도 나를 찾지 못할 것이다. 이런 경우 부처님 가르침을 따라야 한다. 부처님 가르침에 답이 있는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라고 의문했을 때 그런 나는 없다. 다만 관습적으로 부르는 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출세간적으로 보았을 때는 나라고 할만한 것이 없다. 있다면 연기의 흐름만 있을 뿐이다. 사건과 사건의 흐름을 말한다. 사건을 나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사람들은 흔히“나는 누구인가?”라며 나를 찾는다. 이를 과거와 미래에 걸쳐 의문을 갖는다. 그래서 청정도론에 따르면,“나는 과거에 있었을까? 나는 과거세에 없었을까? 나는 과거에 무엇이었을까? 나는 과거세에 어떻게 지냈을까? 나는 과거세에 무엇이었다가 무엇으로 변했을까?”(Vism.19.6)라고 과거에 대하여 다섯 가지로 의문을 갖는다.
 
나에 대한 과거 의문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나는 미래세에 있을까? 나는 미래세에 없을까? 나는 미래세에 무엇이 될까? 나는 미래세에 어떻게 지낼까? 나는 미래세에 무엇이 되어 무엇으로 변할까?”(Vism.19.6)라며 다섯 가지로 의문을 갖는다.
 
나에 대하여 현세에서도 의문을 갖는다. 그래서“나는 있는가? 나는 없는 가? 나는 무엇인가? 나는 어떻게 있는가? 이 존재는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Vism.19.6)라며 여섯 가지 의문을 갖는다.
 
나에 대한 과거, 미래, 현세에 걸친 의문이 있다. 모두 합하면 16가지 의문이 있다. 과연 이런 나는 있기나 한 것일까?
 
나를 찾으면 번뇌만 야기된다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나는 없다. 과거, 미래, 현세에 걸쳐서 16가지로 의문해 보지만 잘 관찰해 보면 그런 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나를 찾는 다면 어떻게 될까? 이에 대하여 맛지마니까야 ‘모든 번뇌의 경’(M2)에서는 ‘이치에 맞지 않게 정신활동을 기울이는 것(ayonisomanasikāra)’이라고 했다. 그 결과 번뇌만 야기하고 말 것이다.
 
나를 찾으면 왜 번뇌만 일어나는 것일까? 내가 찾는 그런 나는 없기 때문이다. 없는 것을 찾으려 할 때 번뇌가 일어나는 것은 자명한 것이다. 이는 “나의 이 자이는 말하고 느끼고 여기저기서 선악의 행위에 대한 과보를 체험하는데, 그 나의 자이는 항상하고 항주하고 항존하는 것으로 변화하지 않고 영원 히 존재할 것이다.”(M2.9)라는 영원주의적 견해가 생겨났기 때문이다.
 
나를 찾는 것은 영원주의적 견해에 따른 것이다. 그런 영원주의적 견해는 연기법에 따르면 성립될 수 없다. 조건발생하는 사건과 사건의 흐름에서 사건을 나라고 볼 수 있을까? 그런 것은 성립하지 않는다.
 
연기의 동시성
 
부처님은 행위 하는 자와 경험하는 자를 부정했다. 둘이 같으면 영원주의에 떨어지고 둘이 다르면 허무주의에 떨어진다고 했다. 부처님은 이와 같은 영원주의와 허무주의를 양극단으로 보고 중도를 설한다고 했다. 그 중도는 다름아닌 연기법이다.
 
부처님은 중도를 설한다고 말했을 때 항상 연기법을 설했다. 조건발생하는 연기법만이 이 세상 돌아 가는 이치를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나라는 존재에 대하여 설명할 수 있다. 그런데 어떤 변치 않는 존재로서 나는 있을 수 없다고 했다. 있다면 오온의 흐름만 있을 뿐이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 선생은 연기의 동시성으로 설명했다.
 
부처님은 중도로서 연기를 설명할 때 연기의 순관과 역관을 설했다. 그런데 십이연기에서 연기의 고리는 동시성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 선생은 찰나생찰나멸로 설명했다. 십이연기 사건의 흐름의 고리가 동시발생이라는 것이다.
 
동시발생하면 동시소멸된다. 오온에서 일어나는 현상은 동시에 발생하여 동시에 소멸한다. 한번 발생한 것은 소멸한 것으로 끝난다. 다만 다음 발생의 조건이 될 뿐이지 이어지지 않는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행위자와 향수자가 다름을 말한다.
 
유업보이무작자(有業報而無作者)
 
행위를 하면 반드시 과보를 만든다. 시간이 걸려서 달리 익기 때문에 이숙과보가 된다. 그때 당시 행위자와 이런 과보를 경험하는 향수자는 같은 자가 아니다. 업은 행위자가 아니라 행위이기 때문에 행위자와 향수자가 있을 수 없다.
 
행위를 나라고 할 수 없다. 행위는 사건일 뿐이다. 행위가 시간을 두고 달리 익었을 때 경험하게 된다. 이때 경험하는 자, 즉 향수자는 없다. 업보를 나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행위와 행위의 과보는 있지만 작자는 없다는 말이 있다. 이를 한자어로 유업보이무작자(有業報而無作者)라고 한다. 대승경전 잡아함경에 제일의공경(第一義空經, 잡아함 13권 335경)에 나오는 말이다. 이 말은 “죄를 미워해도 사람을 미워해서 안된다.”라는 말과 같다.
 
죄를 지으면 과보를 받는다. 지은 죄로 지금 죄의 과보를 받고 있다면 괴로운 곳이다. 그렇다면 과거에 죄를 지은 자와 현재의 나는 같은 사람일까?
 
유업보이무작자론에 따르면 범죄행위를 한자도 없고, 이를 받는 자도 없다. 다만 죄와 죄의 과보만 있을 뿐이다. 그래서 영화 ‘쇼생크의 탈출’에서 흑인 죄수는 젊은 시절 어떤 자가 범죄를 저지른 것에 대하여 제 3자처럼 말한다.
 
지금 당면하고 있는 괴로움이 있다. 과거 행위에 대한 과보를 받고 있는 것이다. 그런 나는 과거의 내가 아니다. 당연히 미래의 나도 아니다. 물론 현재의 나도 아니다.
 
행위하는 자도 없고 향수하는 자도 없기 때문에 내가 없는 것이다. 여기서 그치면 단멸론이 된다. 제일공경에서도 ‘유업보이무작자’로 그친다면 단멸론이 된다. 그래서 부처님은 반드시 십이연기의 순관과 역관을 설했다.
 
의혹에 대한 극복의 청정
 
청정도론에서는 행위자도 없고 향수자도 없는 것에 대하여 “인과의 연속으로 명색만이 나타난다.”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오온을 연기법적으로 보았을 때 내가 있다는 견해가 부서짐을 말한다. 또한 ‘나는 누구인가?’라고 하여 과거, 미래, 현세에 걸친 16가지 의문이 해소됨을 말한다. 이는 칠청정에서 세 번째 청정인 ‘견해의 청정(diṭṭhi visuddhi)’과 네 번째 청정인 ‘의혹에 대한 극복의 청정(kakhāvitaraa visuddhi)’에 해당된다. 그래서 청정도론에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행위의 행위자는 없고, 또한
이숙의 향수자도 없다.
단지 사실만이 일어난다.
그것만이 올바른 봄이다.
 
이와 같이 행위와 이숙이
원인과 함께 일어나므로

종자와 나무 등에서처럼
전제는 알려지지 않는다.

미래에서의 윤회에서도

일어나지 않는 것은 없다.
그 의미를 알지 못해
이교도들은 자유롭지 못하다.

영원주의와 허무주의에 빠져

뭇삶이라는 지각을 붙잡고
서로 어긋나는
예순두 가지 견해를 고집한다.

 
그리하여 견해에 묶이고
갈애의 흐름에 휩쓸려가니,
갈애의 흐름에 휩쓸리며
괴로움에서 벗어나지 못하리.

 
부처님의 제자인 수행승은
이와 같이 그것을 알아서
심오하고 미묘하고 텅 빈 것(空) 곧,
연기의 원리를 꿰뚫어 본다.
 
행위는 이숙 가운데 없고,
이숙은 행위 가운데 없다.
상호 양자는 텅 빈 것이지만,
행위 없이는 과보가 없다.

 
마치 태양에도 불이 없고,
보주에도 쇠똥에도 없고
그들 이외에 불도 없지만,
연료에서 불이 생기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행위 가운데
이숙을 얻을 수 없고,
행위 이외에서도 얻을 수 없으니,
행위는 그 가운데 있지 않다.
 
그 행위는 결과가 텅 비었고
결과는 행위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행위를 취해서
그것에서 과보가 생겨난다.
 
그 가운데 윤회의 행위자인
신들이나 하느님은 없다.

원인이자 연료이자 조건인
순수한 사실들만 일어난다.”(Vism.19.19)
 
 
2023-05-24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