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니까야모임

선택적 윤회

담마다사 이병욱 2023. 10. 11. 18:02

선택적 윤회
 
 
일터에 가다 본 것이 있다. 어느 아파트단지 앞에서 어떤 사람이 개의 똥을 치우고 있었다. 준비한 휴지로 똥을 담아 준비된 비닐에 넣는 것을 보았다. 이쯤 되면 개는 상팔자가 된다.
 

 
어느 스님은 개를 키운다. 그런데 이번에 개가 출산을 했다는 것이다. 임신한 줄 모르고 있었는데 출산 때가 온 것이다. 그런데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3년전에도 출산을 했었다.
 

 
스님은 출산한 개에 대하여 보살이라고 말한다. 보살 개가 출산하자 미역국을 끓여 주었다. 이쯤 되면 개는 상팔자가 된다.
 
스님은 아비 개도 있을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아비 개는 출산할 때가 되었어도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씨만 전달해 준 것이다.
 
절에서 사는 개는 새끼를 네 마리 낳았다. 어느 것이든지 새끼는 귀엽다. 스님은 페이스북에 “얘네들이 어디서 왔을까?”라며 써 놓았다.
 
절에서 키우는 개는 중성화 수술을 해야 할 것이다. 특히 암케를 기를 경우 대책 없이 새끼만 낳을 수 있다. 지난번에도 낳고 이번에도 낳은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대체 새끼 개들은 어디서 온 것일까?
 
개는 축생이다. 육도윤회에서 축생계에 태어난 것이다. 그런데 육도에서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인간과 축생뿐이라는 것이다. 지옥이나 아귀, 아수라, 천상의 존재는 볼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교인들은 윤회를 믿고 있다. 사람이 죽으면 개로도 태어날 수 있음을 말한다.
 
윤회와 관련된 경이 있다. 상윳따니까야 ‘시작을 알 수 없는 것의 모음’(S15)이 그것이다. 이 상윳따를 보면 윤회의 두려움을 알 수 있다. 사람이 축생으로 태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떤 이는 윤회를 부정한다. 윤회는 힌두교의 유산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고대인도에서 불교가 생겨나기 전에는 힌두교는 없었다. 힌두교는 브라만교가 환골탈태한 것이다. 불교에 밀린 브라만교가 민간신앙과 결합하여 성립된 것이 힌두교인 것이다.
 
불교 이전에 브라만교가 있었다. 브라만교에서는 윤회를 말한다. 네 가지 계급에 의한 윤회가 주된 것이다. 그런데 불교는 브라만교를 비판하면서 성립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윤회를 버린 것은 아니다. 사성계급을 버린 것이다.
 
니까야, 즉 초기경전을 보면 윤회에 대한 무수한 가르침이 있다. 부처님은 윤회를 말씀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은 초기경전을 읽어 보지 않았다는 것을 말한다.
 
유튜브에서 본 것이 있다. 어느 스님은 윤회를 인정하지 않았다. 부처님은 윤회를 말씀하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설령 말씀 하셨어도 연기적으로 말씀하셨다고 말했다. 한국불교에서 그렇게 배웠다는 것이다.
 
스님은 공개적으로 참회했다. 그 동안 유튜브 영상에서 “부처님은 윤회를 말씀하시지 않으셨다.”라고 수없이 말 했는데 이런 말이 잘못 되었다는 것이다. 결정적으로는 이띠붓따까의 ‘무명의 경’을 읽고 알게 되었다고 한다.
 
이띠붓따까의 ‘무명의 경’에는 어떤 내용이 있을까? 찾아 보니 “수행승들이여, 바로 그 무명의 장애에 덮여, 사람들은 오랜 세월 유전하고 윤회하는 것이다.”(It.8)라는 가르침이 있다.
 
무명은 윤회의 원인이 된다. 그래서 “무명의 장애에 덮여, 사람들은 오랜 세월 유전하고 윤회하는 것이다.”(It.8)라고 한 것이다. 그런데 이런 문구는 이띠붓따까에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상윳따니까야 15번 상윳따에서는 “수행승들이여, 이 윤회는 시작을 알 수 없다. 무명에 덮인 뭇삶들은 갈애에 속박되고 유전하고 윤회하므로 그 최초의 시작점을 알 수 없다.”(S15.1)라는 정형구가 수도 없이 나온다.
 
윤회와 관련된 경을 읽었다. 금요니까야모임에서 읽은 것이다. 9월 22일 두 번째 금요모임에서 ‘부유하고 행복한 사람을 보면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라는 경과 ‘윤회는 얼마나 깊고 참회의 깊이는 얼마만 해야 할까?’라는 경을 합송했다. 이는 상윳따니까야 ‘행복의 경’(S15.12)과 ‘삼십명의 경’(S15.13)에 대한 것이다. 9월 22일 모임에서는 본인을 비롯하여 안진현, 이태형, 김종선, 방기연, 홍광순, 김경예, 유경민, 정진영, 장계영 선생이 참석했다.
 
금요모임에서 전재성 선생은 ‘행복의 경’을 읽고 쇼크 받았다고 말했다. 왜 쇼크 받았을까? 이는 경에서 “수행승들이여, 행복하고 부유한 사람을 보면 그대들은 ‘이 오랜 세월을 지나면서 우리도 한 때 저러한 사람이었다.’라고 관찰해야 한다.” (S15.12)라는 가르침을 접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전재성 선생은 대학교 다닐 때 학생운동하다 투옥된 바 있다. 그때 당시 부자들이 미웠다고 한다. 그리고 가난한 자들을 동정했다고 한다. 이렇게 생각한 것은 무언가 크게 잘못되었기 때문이라고 본 것이다. 그런데 경전을 보고 나서 생각이 바뀌었다는 것이다. 결정적으로 “행복하고 부유한 사람을 보면 그대들은 ‘이 오랜 세월을 지나면서 우리도 한 때 저러한 사람이었다.’라고 관찰해야 한다.” (S15.12)라는 가르침을 접하고 충격 받았다고 한다.
 
전재성 선생에 따르면 이념에 편향되면 평생간다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전재성 선생은 “자기자신의 감옥에 갇히는 것과 같습니다.”라고 말했다.
 
부처님은 부자를 볼 때 “우리도 한 때 저러한 사람이었다.”라고 보라고 했다. 부처님은 왜 이렇게 말씀 하셨을까? 그것은 평정심 때문일 것이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 선생은 “평정심을 가져야 제대로 보입니다.”라고 말했다.
 
고대인도에서는 사성계급이 있었다. 그런데 브라만교에 따르면 부자는 가난한 자가 되고, 가난한 자는 부자가 된다고 가르쳤다는 것이다. 이런 것은 어느 정도 타당하다는 것이다. 장구한 세월로 보면 평등해지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런 것이 사회적 정의인지 모른다.
 
부처님은 윤회를 부정하지 않았다. 부처님은 윤회를 분명히 설했다. 이는 초기경전을 읽어 보면 알 수 있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인간이 축생도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근거가 되는 경이 있다는 것이다. 다음과 같은 가르침이다.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이 오랜 세월을 거쳐서 유전하고 윤회하면서 목이 잘려 흘리고 흘린 피가 훨씬 더 많아 사대양에 있는 물에 비할 바가 아니다.

1)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이 오랜 세월 동안 소로 태어나 소가 되어 목이 잘려 흘리고 흘린 피가 훨씬 더 많아 사대양에 있는 물에 비할 바가 아니다.

2)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이 오랜 세월 동안 물소로 태어나 물소가 되어 목이 잘려 흘리고 흘린 피가 훨씬 더 많아 사대양에 있는 물에 비할 바가 아니다.

3)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이 오랜 세월 동안 양으로 태어나 양이 되어 목이 잘려 흘리고 흘린 피가 훨씬 더 많아 사대양에 있는 물에 비할 바가 아니다.

4)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이 오랜 세월 동안 염소로 태어나 염소가 되 어 목이 잘려 흘리고 흘린 피가 훨씬 더 많아 사대양에 있는 물에 비할 바가 아니다.

5)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이 오랜 세월 동안 사슴으로 태어나 사슴이 되어 목이 잘려 흘리고 흘린 피가 훨씬 더 많아 사대양에 있는 물에 비할 바가 아니다.

6)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이 오랜 세월 동안 닭으로 태어나 닭이 되어 목이 잘려 흘리고 흘린 피가 훨씬 더 많아 사대양에 있는 물에 비 할 바가 아니다.

7)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이 오랜 세월 동안 돼지로 태어나 돼지가 되어 목이 잘려 흘리고 흘린 피가 훨씬 더 많아 사대양에 있는 물에 비할 바가 아니다.

 
8)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이 오랜 세월 동안 도둑으로 살면서 마을을 약탈하다 사로잡혀 목이 잘려 흘리고 흘린 피가 훨씬 더 많아 사대양에 있는 물에 비할 바가 아니다.

9)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이 오랜 세월 동안 도둑으로 살면서 길섶에서 약탈하다 사로잡혀 목이 잘려 흘리고 홀린 피가 훨씬 더 많아 사대양에 있는 물에 비할 바가 아니다.

10)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이 오랜 세월 동안 도둑으로 살면서 타인 의 아내를 겁탈하다가 사로잡혀 목이 잘려 흘리고 흘린 피가 훨씬 더 많아 사대양에 있는 물에 비할 바가 아니다.”(S15.13)

 
 
상윳따니까야 ‘삼십명의 경’에 실려 있는 가르침이다. 이 경을 보면 열 가지 사례가 있다. 인간이 축생으로 태어난 경우가 일곱 번 있고, 인간으로 태어났다가 하더라도 오계를 어겨 죽음을 맞이한 경우가 세 경우가 있다.
 
경을 보면 인간이 축생으로 태어날 수도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윤회를 부정하는 사람이 이 경을 본다면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경에서는 윤회의 비참함을 말하고 있다. 축생으로 태어났을 때 피를 흘리면서 죽는다고 했기 때문이다. 이는 사람의 먹이가 되어 피를 흘리는 경우도 있고 피의 제사에 희생되어 피를 흘리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경에서 여덟 번째에서 열 번째까지 세 개항을 보면 오계를 어긴 인간도 목이 잘려 피를 흘렸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인간이 오계를 지키지 않으면 축생과 다를 바 없음을 말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축생과 같은 삶을 살았기 때문에 축생으로 태어날 가능성이 높다고 볼 수 있다.
 
요즘 어떤 이들은 윤회를 부정한다. 특히 과학이 발달한 물질문명시대에 윤회를 부정하는 사람들이 많다. 윤회를 증명할 수 없다는 것이 큰 이유이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유물론적 사고방식을 가졌기 때문이다. 과학에 기반한 유물론이기 때문에 이를 ‘과학적 유물론’이라고 말할 수 있다.
 
어떤 수학자는 윤회를 부정한다. 불교계 신문에 실린 수학자의 글을 보면 “설령 윤회가 참이라고 할지라도 전생을 기억하지 못한다면 아무 쓸모 없는 것이다.”라는 취지로 써 놓았다.
 
사람들은 전생을 기억하지 못한다. 만약 전생을 기억한다면 살 수 없을 것이다. 끔찍한 죽음을 맞이했을 수도 있다. 차라리 전생을 기억하지 않고 사는 것이 더 나을지 모른다.
 
전생이 기억나지 않는다고 하여 전생을 부정한다면 사견(邪見)이 된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사악한 견해가 된다. 왜 사악한 견해인가? 원인과 결과를 부정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이는 업과 업의 과보를 부정하는 것이 된다.
 
대부분 사람들은 감각적으로 살아간다. 감각적 욕망의 살아가는 것이다. 이는 욕망의 세계에 살기 때문에 당연한 것인지 모른다. 또한 인간은 오취온적 존재이기 때문에 가능할 것이다. 그러다 보니 윤회에 대하여 크게 마음을 두는 것 같지 않다. 설령 윤회가 있다고 하더라도 전생을 기억하지 못하는 윤회라면 의미가 없는 것으로 보는 것 같다.
 
윤회를 부정하는 사람들은 막행막식하기 쉽다. 설령 윤회를 인정한다고 할지라도 전생을 기억하지 못하는 윤회라면 즐기는 삶을 살기 쉽다. 이런 막행막식은 오계를 어기는 삶이 되기 쉽다.
 
오계를 어기면 어떤 세계에 태어날까? 인간 이하 지옥, 축생, 아귀, 아수라에 태어나기 쉽다. 이 사악도 중에서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있는 세계는 오로지 축생이다. 오계를 어기면 개로도 태어날 수 있음을 말한다.
 
초기경전을 보면 인간이 죽어서 개로 태어난다는 문구를 아직까지 발견하지 못했다. 삼십명의 경에서는 소, 물소, 양, 염소, 사슴, 닭, 돼지로 태어나는 것까지는 나온다. 자타카에서도 개로 태어난다는 내용은 없다. 그렇다고 개로 태어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다. 경에서 예로 든 것은 여러 축생 중에서 몇 가지 나열한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죽을 때 자신이 죽는 줄조차 모르고 죽는다. 자신의 죽음을 분명히 보면서 죽는 사람들은 드물 것이다. 수행을 한 사람들은 자신의 임종순간을 알 것이다.
 
수행을 한 사람들을 보면 자신이 태어날 곳을 알고 있다. 선정수행한 사람들은 선정수행한 과보로 색계천상에 태어날 것이다. 또한 위빠사나 수행을 하여 성자의 흐름에 들어간 사람들은 사악처에는 태어나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윤회는 ‘선택적 윤회’가 될 수 있다.
 
윤회도 선택할 수 있을까? 초기경전을 보면 가능하다. 자타카를 보면 삼십삼천에 있는 천인이 인간으로 태어날 때 누구를 부모로 할 것인지 결정하는 장면이 나오기 때문이다. 제석천이 인간의 태에 들어 왕국을 다스린다는 이야기가 그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지계공덕, 보시공덕, 수행공덕이 있는 자들은 자신의 성장을 위해서 훌륭한 가문에 인간의 태에 들어감을 알 수 있다.
 
갓 태어난 강아지들은 귀엽다. 그러나 강아지가 아무리 귀여워도 다 자라면 축생의 본 모습을 보여 준다. 그것은 거친 것이다. 털이 있는 것이 거친 것의 대표이다.
 
인간에 비하면 축생은 거칠다. 색계 천상의 존재에 비하면 인간은 거친 것이다. 거친 존재일수록 천하고 비루해 보인다. 축생을 보면 거칠기 짝이 없다. 또한 지혜가 있을 수 없다. 오로지 본능만 있을 뿐이다. 이런 축생에게 애정을 가지는 사람들이 많다. 애완견과 함께 산책하는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개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개와 함께 살아간다. 그러나 문제가 있을 수 있다. 개의 이미지가 너무 강하면 임종시에 개의 동료로 태어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임종순간에 개의 이미지를 대상으로 하여 재새연결식이 일어날지 모르기 때문이다. 업이 어떻게 작용할지 모른다.
 
어떻게 해야 잘 사는 것일까? 그것은 윤회의 두려움을 아는 것이다. 인간으로 살아도 오계를 지키지 않으면 축생으로 태어날 수도 있음을 아는 것이다. 개나 고양이의 동료로도 태어날 수도 있는 것이다.
 
어떤 이는 한번 인간으로 태어나면 계속 인간으로 태어날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에 대한 경전적 근거는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으로 태어나기가 더 어렵다고 말한다.
 
한번 축생의 지위로 떨어졌다가 인간으로 태어나기가 어렵다고 말한다. 이는 경전적 근거가 있다. 맛지마니까야 129번 경에 따르면, ““수행승들이여, 그 눈먼 거북이가 백년 마다 한 번씩 떠올라서 그 구멍이 하나가 뚫린 멍에에 목을 끼워 넣는 것이 수행승들이여, 한 번 타락한 곳에 떨어진 어리석은 자가 사람의 지위를 획득하는 것보다 빠르다.”(M129)라는 가르침이 그것이다. 이 가르침은 맹구우목 비유의 원조가 된다.
 
사람들이 윤회에 대하여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아직까지 죽어서 내생이 있다고 말해 준 사람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과학이 발달된 시대에 과학적 유물론자들은 윤회 같은 것은 없다고 말한다. 있다면 부모로부터 자식에게 전달되는 생체유전자(DNA)가 있다고 말한다. 또한 사회에서 문화가 다음 세대로 전달되는 문화유전자(MEME)가 있다고 말한다. 즉문즉설로 유명한 스님도 이러한 취지로 말한다. 그러나 니까야를 보면 이런 주장은 무너진다.
 
불교인들 중에도 윤회 부정론자들이 많다. 설령 윤회가 참이라 해도 전생을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에 아무짝에도 쓸모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럴듯한 말이다. 그러나 경전적 근거를 제시하지 못한다면 사견(邪見)이 될 가능성이 높다.
 
전생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해서 윤회를 무시하는 삶을 살면 어떻게 될까? 개나 돼지처럼 살게 될 것이다. 감각적 욕망으로 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다름 아닌 막행막식이다.
 
사람이 막행막식하면 어떻게 될까?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축생으로서 풀을 먹고 사는 생물이 있는데, 그들은 신선한 풀이나 마른 풀을 이빨로 씹어 삼킨다. 수행승들이여, 축생으로서 풀을 먹고 사는 생물에는 어떠한 것이 있는가? 말, 소, 당나귀, 염소, 사슴과 다른 축생으로서 풀을 먹고 사는 생물이 있다. 수행승들이여, 이 세상에서 일찍이 맛을 탐하여 악한 행동을 한 어리석은 자는 몸이 파괴되어 죽은 뒤에 축생으로서 풀을 먹고 사는 생물 가운데 동료로 태어난다.”(M129)라고 말씀하셨다.
 
 
사람이 맛을 탐닉하면 축생으로 태어날 것이라고 했다. 전생을 기억하지 못할 것이라 하여 막행막식한다면 개나 고양이의 동료로 태어날 수 있다. 그러나 수행자들은 자신이 태어나고 싶은 곳에 태어난다.
 
선정수행을 한 사람은 선정수행의 과보로 색계나 무색계 천상에 태어난다. 보시공덕, 지계공덕이 많은 자는 욕계천상에 태어나기 쉽다. 그러나 가장 확실한 것은 성자의 흐름에 드는 것이다. 수다원이 되면 사악처에는 태어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무리 못잡아도 일곱 생 이내에는 완전한 열반에 들게 되어 있다. 바로 이런 것이 선택적 윤회 아닐까?
 
 
통찰을 성취함과 동시에,
개체가 있다는 견해
매사의 의심, 규범과 금계에 집착의 어떤 것이라도,
그 세 가지의 상태는 즉시 소멸되고,
네 가지의 악한 운명을 벗어나고,
또한 여섯 가지의 큰 죄악을 저지르지 않습니다.
참모임 안에야말로 이 훌륭한 보배가 있으니,
이러한 진실로 인해서 모두 행복하여 지이다.”(Stn.231)
 
 
2023-10-11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