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적 번역과 생물학적 번역 사이에서
지난 세월을 되돌아 본다. 나는 잘 살았는가? 그렇게 잘 살지 못한 것 같다. 시행착오의 연속이었다. 일반사람들의 삶의 과정을 답습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지난 시절을 되돌아 보면 나로서 살던 때는 별로 없었던 것 같다. 주체적인 삶이 아니다.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삶을 산 것이다. 그러나 불교를 만나고 나서 달라졌다.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삶을 살게 된 것이다.
불교를 만난 것은 일생에 있어서 커다란 행운이다. 이미 중학교 때 불교를 만났지만 그것은 인연에 불과했다.
소위 뺑뺑이로 들어간 학교는 불교학교였다. 중학교를 불교학교에 간 것이다. 지금은 이사 갔지만 그때 당시 종로구 연지동에 있었던 동대부중을 말한다.
동대부중에서 부처님의 일생을 배웠다. 중학교 1학년 학생은 마치 흰옷감에 물감이 들듯이 아무 저항 없이 빨려 들어갔다. 그리고 수십년이 흘렀다.
불교를 다시 만난 것은 2004년의 일이다. 세상을 살다 보니 뜻대로 되는 것이 없었다. 특히 사랑하지 않는 것과의 만남이 그것이다. 그것은 사람일 수도 있고 사건일 수도 있다.
그것이 알고 싶었다. 시간이 지나도 풀리지 않는 문제를 알고 싶었다. 불교에 해법이 있을 것 같았다. 중학교 시절을 떠올리며 불교교양대학 문을 열고 들어 갔다.
불교를 만난지 50년이 되었다. 불교를 다시 만난지 19년이 되었다. 나는 불교에 대하여 얼마나 알고 있을까? 그렇게 고민하던 인생의 문제는 풀렸는가? 어느 정도 감을 잡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초기불교를 접하고 나서부터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오늘도 불교공부를 하고 있다. 경전을 읽고, 경을 외우고, 외운 것을 암송하고, 경전을 근거로 글을 쓰는 행위를 말한다.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요즘은 매일 의무적으로 한시간 좌선을 하고 있다. 여기에다 니까야 공부모임에도 참여하고 있다.
내가 학교 다닐 때 이렇게 공부를 했더라면
니까야 공부모임은 7년 되었다. 전재성 선생의 금요니까야 모임을 말한다. 초기경전을 읽고 토론하는 모임이다.
모임에 참여하면 반드시 기록을 남긴다. 먼저 노트를 한다. 마치 강의 받는 학생처럼 전재성 선생이 말한 것을 받아 적는다. 후기를 쓰기 위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또한 도반들이 토론하는 것을 기록해 놓기도 한다.
학교 다닐 때 공부를 그다지 열심히 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이 들어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다. 특히 니까야 공부를 정열적으로 한다. 니까야모임에서 들은 것을 글로서 후기를 작성하는 것도 공부에 해당될 것이다.
공부를 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예습과 복습을 철저히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학교 다닐 때 이렇게 공부하지 않았다. 시험 때가 되어서 공부한 것이다.
니까야 모임에서 들은 것에 대하여 후기를 작성하는 것은 복습에 해당된다. 그런데 7년동안 후기를 작성하다 보니 엄청나게 공부가 되었다는 것이다.
니까야 모임 7년 동안 모두 네 권의 책을 만들었다. 올해가 끝나면 또 하나의 책이 나올 것이다. 책이 나오면 북콘서트를 할 예정이다.
일생을 살면서 요즘 같이 이렇게 공부를 해 본적이 없다. 복습은 물로 예습도 한다. 머리 맡에는 상윳따니까야 통합본이 있어서 잠 잘 때 읽어 본다. 니까야 모임 진도와는 무관하게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 나가는 것이다. 니까야 모임이 끝나면 후기를 작성하기 때문에 복습이 된다.
불교공부를 하면서 종종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내가 학교 다닐 때 이렇게 공부를 했더라면 각종 고시를 패스했을 것이다.”라고. 또한 학교 다닐 때 이렇게 공부를 했더라면 권위 있는 학자가 되었을 것이다.”라고.
수행승이 여인을 보자
12월 첫 번째 금요니까야 모임이 12월 10일 한국빠알리성전협회에서 열렸다. 홍광순 선생을 비롯하여 방기연, 유경민, 김종선, 김영인, 안진현, 도현스님, 장계영 선생이 참석했다.
모두 다섯 개의 경을 합송했다. 이를 나열하면, 1) ‘수행자가 여인을 방문할 때 몸가짐을 어떻게 취해야 할까’, 1) ‘나와 내것이라는 교만을 어떻게 없앨 수 있을까’, 3) ‘겉멋이 든 수행자를 부처님께서 어떻게 가르치셨나’, 4) ‘상냥한 말을 하려면 어떠한 것들을 극복해야 할까’, 5) ‘몸은 병들어도 어떻게 하면 마음은 병들지 않을까’가 된다.
부처님 당시 수행승은 매일 아침 탁발을 나갔다. 그런데 어느 날 수행승은 여인을 보았다. 여인을 보자 욕정이 생겨났다.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표현 되어 있다.
“세상에 어떤 수행승이 아침 일찍 옷을 입고 발우와 가사를 듣고 마을이나 거리로 탁발을 하러 가는데 몸을 가다듬지 않고 말을 조심하지 않고 마음을 수호하지 않고 새김을 확립하지 않고 감관을 제어하지 않고 간다. 그는 거기서 가볍게 옷을 걸치거나 야하게 옷을 걸친 여인들을 보게 된다. 그렇게 가볍게 옷을 걸치거나 야하게 옷을 걸친 여인들을 보게 되면, 탐욕이 그의 마음을 엄습한다. 탐욕이 그의 마음을 엄습하면, 그는 죽을 정도의 고통이나 괴로움을 겪게 될 것이다.”(S20.10)
수행승은 새내기인것처럼 보인다. 감관을 수호하지 않고 탁발에 나섰을 때 감각적 쾌락의 재난에 빠질 위험에 처할 수 있음을 말한다. 구체적으로 “가볍게 옷을 걸치거나 야하게 옷을 걸친 여인들을 보게 되면”(S20.10)이라고 표현되어 있다.
욕정에 지배 당했을 때
속이 비치는 야한 옷을 보면 욕정이 생기는 것일까? 수행승은 여인을 보고 나서 괴로워했다.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죽을 정도의 고통이나 괴로움”이라고 했다.
수행승이 욕정에 지배 당했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 이에 대하여 시인 수행승이라 불리우는 방기사 존자의 경우를 보면 해법이 있다.
상윳따니까야에 ‘방기사상윳따(S8)’가 있다. 수행승 이름으로 하여 별도의 상윳따가 있다는 것은 놀랍다. 그런데 방기사는 시인 수행승이라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테라가타에서 대미를 장식하는 21장 ‘대련시집’에서는 오로지 방기사 장로의 시로 구성되어 있다.
방기사가 새내기 수행승이었을 때의 일이다. 잘 차려 입고 꽃단장한 여인들이 사원에 왔다. 새내기 수행승은 여인들을 보자 마음이 흔들렸다.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바로 그 여인들을 보고 나서 존자 방기싸에게 좋지 않은 생각이 일어나 욕정이 그의 마음을 괴롭혔다.”(S8.1)라고 표현되어 있다. 방기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새내기 수행승에게 좋지 않은 생각이 일어났다. 이 생각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새내기는 아난다 존자를 찾아 갔다. 새내기는 “나는 감각적 탐욕에 불타고 있고, 내 마음은 그 불에 삼켜졌네, 자 고따마의 제자여, 연민을 베풀어 탐욕을 끄는 법을 말해 주소서.”(S8.1)라며 시로써 말했다.
아난다 존자는 새내기 수행승에게 어떻게 말해 주었을까? 아난다 존자는 다음과 같은 시로 해법을 제시했다.
"지각의 전도에 의해서
그대의 마음이 불에 삼켜지니.
감각적 탐욕을 자극하는
아름다운 인상을 피하라.
형성된 것들을 타자로 보고
괴로운 것으로 보고
자기로 보지 말라.
커다란 감각적 탐욕의 불을 꺼서
결코 다시는 타오르지 않도록 하라.
부정관을 닦고,
마음을 통일하고 잘 삼매에 들라.
몸에 대한 새김을 확립 하고
싫어하여 떠남에 전념하라.
인상을 여의는 명상을 닦고
망상의 경향을 버려라.
망상을 부수어 버리면
그대는 적멸에 든 자가 되리.”(S8.4)
아난다 존자는 여러 가지 방법을 알려 준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것이다. 먼저 지각의 전도에 대한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상락아정이 아닌 것을 상락아정으로 보는 것을 말한다.
지각의 전도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대표적으로 문둥병 환자의 지각의 전도를 들 수 있다. 일반 사람들은 불에 닿으면 고통스럽지만 문둥병 환자는 즐겁다는 지각의 전도가 일어난다. 이와 마찬가지로 괴롭고 무상하고 실체가 없는 것을 즐겁고 영원하고 실체가 있는 것으로 여기는 지각의 전도가 일어난다는 것이다.
아난다 존자는‘아름다운 인상(nimitta)’을 피하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한국빠알리성전협회 번역의 각주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즐겁고 영원하고 실체가 있는 것으로 보이는 인상은 선정의 준비단계에서 마음을 특정한 대상에 집중할 때의 그 대상이 되기도 한다. 시에서 아난다는 방기싸에게 호감이 가지 않고 바라지 않는 대상을 선택하길 기대했다. 왜냐하면 호감이 가고 원하는 대상은 욕정을 불러일으켜서 욕정으로 인해 사유가 불붙기 때문이다. 마지막 목표는 네 번째 시에서처럼 인상을 여의는 그 상태로 삼매에 들어가야 한다.”(1권, 1722번 각주)
여인을 표상으로 삼아서는 곤란하다. 이럴 때는 대상을 바꾸어야 한다. 마음은 한 순간에 두 가지 일을 못하기 때문에 마음의 대상을 바꾸어 주면 현재의 마음은 이전의 마음이 되어 버린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대상과 하나가 되는 선정 수행을 해야 한다.
아난다 존자는 새내기 수행승에게 형성된 것들을 타자로 보라고 했다. 형성된 것, 즉 오온을 자신의 것으로 보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몸과 마음을 자신의 것으로 여길 것이다.
오온을 자신의 것으로 보면 느낌도 자신의 것으로 여길 것이다. 여인에 대한 불타는 마음 또한 자신의 것으로 여길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괴로움을 야기한다. 그것도 죽을 정도로 고통스로운 것이다. 그래서 아난다 존자는 “형성된 것들을 타자로 보고 괴로운 것으로 보고 자기로 보지 말라.”(S8.4)라고 말한 것이다.
목갈라나 부정관 게송
아난다 존자는 새내기에게 부정관을 닦으라고 했다. 이는 사념처에서 서른 두 가지 몸관찰 하는 것으로 알 수 있다. 어느 정도로 닦아야 할까? 이는 테라가타에서 다음과 같이 목갈라나 장로가 읊은 게송으로 알 수 있다.
“해골로 이루어지고
살과 근육으로 얽혀진 오두막
끔찍하다! 악취가 가득 한 것!
타자의 지체를 자기의 소유로 삼는구나.”(Thag.1156)
“피부로 엮어진 분뇨의 자루,
가슴은 혹이 달린 악귀,
그대의 몸에는 아홉 구멍이 있어,
언제나 부정한 액체가 흐른다.”(Thag.1157)
“그대의 몸에는 아홉 구멍이 있는데,
악취를 풍기고 오물도 엮여져 있다.
실로 청정을 원하는 수행승이라면,
분뇨를 피하듯, 그것을 피해야 하리.”(Thag.1158)
세 개의 게송을 보면 여인 혐오증을 보는 것 같다. 그러나 이는 수행의 관점에서 본 것이다.
게송을 보면 이 몸은 악취가 나는 것이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입구와 출구가 있는 똥자루와 같음을 말한다.
똥은 조금만 묻어도 악취가 난다. 하물며 몸에 똥이 가득하다면 그 악취는 얼마나 심할까? 마치 여인을 똥 보듯 멀리 해야 한다는 게송이다.
여인을 대하는 네 가지 방법
니까야를 보면 수행승의 여인에 대한 곤혹스로운 심리를 엿볼 수 있다. 한창 혈기 왕성한 새내기 수행승일 때 특히 괴로움을 겪는 것 같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할까? 네 가지 방법이 있다.
첫째, 여인을 쳐다보지 않는 것이다. 이는 아난다가 부처님에게 “세존이시여, 저희들은 여인에 대하여 어떻게 대처해야 합니까?”(D16.112)라며 물어 본 것에서 알 수 있다. 이에 부처님은 “아난다여, 쳐다보지 않는 것이다.”(D16.112)라며 짧게 말했다.
부처님은 왜 쳐다 보지 말라고 했을까? 이는 탁발과 관련이 있다. 탁발할 때는 눈을 멍에의 길이만큼 아래로 보며 걷는 것이다. 그럼에도 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둘째, 여인과 말하지 않는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여인을 쳐 보았다면 그 다음 단계는 말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여인을 볼 때 “아난다여, 말하지 않는 것이다.”(D16.112)라며 짧게 말했다.
수행승이 여인과 말을 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주석에 따르면, “여성과 대화하면, 친교가 생겨나고 친교가 생기면, 정이 깊어지고, 번민하고, 계행을 파괴하고, 괴로운 곳을 채우는 자가 된다.”(Smv.582-583)라고 했다.
사람은 말하지 않고 살 수 없다. 꼭 필요한 말은 해야 하는 것이다. 여인과도 말할 때가 있을 것이다. 어떤 것인가? 주석에 따르면, “여인이 날자를 묻거나, 계행을 구하거나, 진리를 듣고자 하거나, 질문을 하고자 하거나, 이처럼 출가자로서 해야 할 일이 생기는 경우”(Smv.583)라고 했다.
셋째, 여인을 대할 때 새김을 확립하는 것이다. 여인을 보고 말을 할 때 새기며 말을 해야 함을 말한다. 새김이 없으면 감각기관을 단속하지 않는 것과 같다.
새김이라는 말은 사띠의 번역어이다. 사띠는 기억이라는 제1의 뜻이 있다. 또한 사띠는 문지기의 역할도 한다. 이는 수행으로서 새김을 말한다. 그런데 니까야를 보면 새김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기억하는 것도 해당된다는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기억하고 새기는 것도 사띠에 해당된다. 여인과 말을 할 때도 새기며 해야 한다. 어떻게 하는가? 이는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은 어머니 같은 여인에 대하여 어머니를 대하는 마음을 일으키고, 누이 같은 여인에 대하여 누이를 대하는 마음을 일으키고, 딸 같은 여인에 대하여 딸을 대하는 마음을 일으키라.”(S35.127)라는 부처님 가르침을 말한다.
수행승은 여인을 대할 때 가족 대하듯 해야 한다. 어머니 뻘 되는 여인에게는 어머니처럼 대하고, 누이 뻘 되는 여인에게는 누이로 대하고, 딸 뻘 되는 여인에게는 딸처럼 대하는 것이다. 이렇게 여인을 가족처럼 대했을 때 욕정의 마음이 일어날 수 있을까?
넷째, 마지막으로 여인을 대할 때 부정(不淨)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여인을 가족처럼 대해도 탐욕이 나는 경우가 이에 해당될 것이다. 왕처럼 사는 자가 이에 해당될 것이다.
왕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자이다. 이 세상은 왕의 것이나 다름 없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도 왕의 것이나 다름 없다. 모든 것을 가진 왕에게 여인도 자신의 것이나 다름 없다. 그래서 우데나 왕은 수행승에게 “바라드와자여, 마음이 동요하면 때때로 어머니 같은 여인에 대하여 탐욕을 일으키며, 자매 같은 여인에 대하여 탐욕을 일으키며 딸 같은 여인에 대하여 탐욕을 일으킵니다.”(S35.127)라고 말했다.
왕은 가족 같은 여인에게도 탐욕을 일으켰다. 이에 바라다와자는 “그대들은 이 몸은 발바닥부터 머리 가운데 아래 피부 끝까지 여러가지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을 개별적으로 이 몸에는 머리카락, 몸털,…관절액, 오줌이 있다고 이와 같이 깊이 관찰해야 한다.”(S35.127)라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왕에게 알려 주었다.
몸을 부정관으로 관찰해야 하는 이유가 있다. 이는 “부정물로 가득 찬 신체에 대한 관찰은 갈애에 수반되는 육체적 쾌락이나 성적 충동을 제어하고 소멸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부정관은 몸을 감각적으로 매력적인 것이라 인식하는 지각의 토대를 무너뜨림으로써 육체적 쾌락의 욕구를 소멸시킬 수 있다.”(수타니파타, 1313번 각주)라는 주석의 가르침으로도 알 수 있다. 여인을 대처할 때 최종 단계는 부정관 수행으로 볼 수 있다.
고양이와 생쥐의 비유
수행자에게 여인은 방해요인이 된다. 가능하면 여인을 보지 말아야 한다. 탁발할 때도 눈을 아래로 하여 걸어야 한다. 율장에 따르면 멍에의 길이만큼 앞을 보라고 했다.
여인을 보았거든 말 하지 말아야 한다. 친하게 지내면 친밀감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여인과 말을 하거든 새김을 확립해야 한다. 새김을 잃어 버리면 감각기관이 단속되지 않는 것과 같아서 죽을 정도로 고통을 맛볼 것이라고 했다. 또한 여인을 가족처럼 보아야 한다. 어머니 뻘 되면 어머니로, 누이 뻘 되면 누이로, 딸 뻘 되면 딸로 보아야 한다. 이것도 새김을 확립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여인은 부정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는 여인을 비하는 것이 아니다. 수행적 측면에서 말한 것이다. 서른 두 가지 신체 기관을 관찰하고 열 가지 부정상을 닦는 것이다.
어떤 수행승이 있었다. 새김이 없이 탁발 나갔다가 여인을 보자 욕정이 생겼다. 이에 수행승은 죽을 정도로 괴로워했다. 이를 경에서는 고양이와 생쥐의 비유를 들어서 설명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수행승들이여, 옛날에 한 고양이가 어린 쥐 한 마리를 좇아 골목이나 하수도나 쓰레기 더미 앞에 서서 ‘이 생쥐가 먹 를 구하러 나오면 그 때 내가 그를 잡아먹어야지’라고 생각했다. 수행승들이여, 그 때 그 생쥐가 먹이를 구하러 나왔다. 고양이는 곧바로 그를 잡아서 씹지 않고 삼켰다. 생쥐는 고양이의 내장을 갉아먹고 창자도 먹었다. 그래서 고양이는 죽음과 죽음의 극심한 고통과 괴로움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S20.10)
전재성 선생은 고양이와 생쥐의 비유에 대하여 신화적 설명이라고 했다. 생물학적 설명을 한다면 생쥐가 극심한 고통을 당해야 한다. 그러나 신화적 설명을 했기 때문에 고양이가 극심한 고통을 당하는 것으로 설명되어 있다.
이 경에 대하여 글을 쓴 바 있다. 상윳따니까야 ‘고양이의 경’(S20.10)을 보고서 두 번역서의 번역이 반대로 되어 있는 것을 보고서 쓴 것이다. 가능하면 신화적 번역이 맞을 것이라는 취지로 썼다.
고양이의 경에 대하여 두 개의 글을 썼다. 하나는 ‘정반대의 번역을 보고, 고양이의 경(S20.10)에서(2013-10-15)’라는 제목의 글과, 또 하나는 ‘쥐가 고양이를 먹었나? 고양이가 쥐를 먹었나? 논란의 고양이의 경(S20.10)(2013-10-19)’라는 제목의 글이다.
가문의 영광
이 시대는 인터넷 세상이다. 인터넷에 글을 올려 놓으면 공유된다. 고양이의 경에 대한 글을 썼더니 누군가 이를 보았던 것 같다. 이를 전재성 선생에게 알렸을 것이다.
어느 날 블로그에 댓글이 달렸다. 한국빠알리성전협회에서 출간된 통합본 상윳따니까야 머리말에 블로그 필명 진흙속의연꽃이 언급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이 말을 믿지 않았다. 그런데 경전을 열어 보니 정말 필명이 있었다. 이에 대하여 ‘가문의 영광인가? 통합본 상윳따니까야에 실린 ‘진흙속의연꽃’’(2015-03-13)라는 제목으로 글을 쓴 바 있다.
전재성 선생은 통합본 상윳따니까야에서 고양이의 경의 내용을 수정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Atha kho bhikkhave, mudumūsī gocarāya pakkami. Tamenaṃ biḷālo gahetvā sahasā asaṅkhāditvā ajjhohari. Tassa mudumūsi antampi khādi, antaguṇampi khādi. So tato nidānaṃ maraṇampi nigacchi, maraṇamattampi dukkhaṃ. : 이 문장에 관한 한, 종래의 역자의 번역은 논리적이나 문법적인 맥락을 고려하지 않은 오역이다. 그러나 번역은 종래의 전통적인 빠알리본은 생물학적 상식에 맞지 않는다는 선입관 때문이었다.” (통합본 상윳따니까야, 2914번 각주)
전재성 선생은 오역을 바로 잡았다. 기존 생물학적 번역을 폐기하고 신화적 번역을 채용한 것이다. 이는 누가 잡아 먹었는지에 대한 것이다.
고양이가 쥐를 잡아 먹었을까? 반대로 쥐가 고양이를 물어 뜯었을까? 생물학적으로 본다면 전자가 맞다. 그러나 경전에는 반대로 되어 있다. 신화적 설명으로 되어 있는 것이다.
수정된 경을 보면 고양이가 생쥐를 통째로 삼친 것으로 나온다. 그 결과 위 속에 들어간 생쥐는 고양이의 위벽을 갉아 먹기 시작했다. 그로 인하여 고양이는 죽을 정도로 고통을 겪게 되었다. 이것은 신화적 설명이다.
전재성 선생은 처음에는 생물학적 번역을 했다. 빠알리 원문과 정반대로 번역한 것이다. 그런데 누군가 내가 올린 글을 보고서 전재성 선생에게 알려 주었을 것이다. 그 결과 전재성 선생은 오류를 인정하고 빠알리 원문에 실려 있는 그대로 신화적 번역을 해서 바로 잡았다.
전재성 선생은 통합본 상윳따니까야 머리말에서 고양이의 경에 대한 이야기를 실었다. 머리말에는 진흙속의연꽃의 지적으로 오류를 바로 잡게 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이런 사실을 알았을 때 ‘가문의 영광’이라고 생각했다. 성전에 이름이 실린 것이다.
성전에 이름이 실린 것은 가문의 영광임에 틀림 없다. 이름을 실어준 전재성 선생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었다. 이에 홍제동 아파트에 사는 전재성 선생 댁을 찾아 갔다. 이에 대하여 ‘한국빠알리성전협회를 방문하고’ (2016-03-20)라는 제목으로 글을 남겼다.
오늘도 장문의 글을
오늘도 장문의 글을 썼다. 이런 날이 하루이틀이 아니다. 일이년도 아니다. 2006년 이후 거의 매일 글을 쓰고 있다. 이제 글이 갈수록 길어진다. 이는 경전을 근거로 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공부모임에서의 글은 더욱더 길어질 수밖에 없다.
오전이 다 지나간다. 아침 일찍 백권당에 나와 글쓰기를 시작했는데 점심시간이 다가 온다. 그럼에도 아직 다 쓰지 못했다. 니까야모임 두 시간 동안 들었던 것을 다 쓰려면 여러 편 써야 할 것이다.
좋은 인연이다. 모임에 빠지지 않고 나오는 도반들은 언제나 반갑다. 무엇보다 전재성 선생과의 인연이다. 블로그에 올린 글이 연결되어서 성전 서문에 필명이 실리기에 이르렀다. 이것을 인연으로 찾아 갔고 이후 니까야 모임에 참여 하게 되었다. 또한 교정 작업에도 참여하게 되었다. 가문의 영광이다.
2023-11-16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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