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니까야모임

흐름을 거슬러 가는 연어처럼, 오취온에서 집착 떼어놓기

담마다사 이병욱 2023. 11. 25. 13:22

흐름을 거슬러 가는 연어처럼, 오취온에서 집착 떼어놓기
 
 
오온과 오취온은 어떻게 다른가? 이에 대한 논란이 금요니까야모임에서 있었다. 전재성 선생은 같은 것이라고 했다. 초기경전에서는 아라한이 아닌 한 같은 의미로 쓰인다고 했다.
 
11월 두 번째 니꺄야모임
 
11월 두 번째 니꺄야모임이 11월 24일 한국빠알리성전협회에서 있었다. 이날 모임에는 도현스님을 비롯하여 본인, 그리고 장게영, 홍광순, 유경민, 방기연, 안진현, 김종선, 김경예, 정진영 선생이 참석했다.
 
모임에서는 모두 네 개의 경을 합송했다. 상윳따니까야 ‘존재의 다발 모아엮음’(S22)에 대한 것이다. 차례로 나열하면 1) ‘누가 묻는다면 부처님께서 무엇을 가르쳤다고 해야 할까’, 2) ‘시간의 악마성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무엇일까’, 3) ‘삶의 무거운 짐을 어떻게 내려 놓을 수 있을까’, 4) ‘버린다는 것(방하착)의 참뜻은 무엇일까’에 대한 것이다.
 
어제 합송한 네 개의 경의 제목을 찾아 보았다. 이는 차례로 1) 데다바하의 경(S22.2), 2) 과거 현재 미래의 경(S22.10), 3) 짐의 경(S22.22), 4) 그대의 것이 아님의 경(S22.33)에 대한 것이다.
 
합송한 네 개의 경은 공통적으로 오온에 대한 것이다. 그런데 오온은 오취온과 같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우리는 이미 오온에 집착된 존재로 태어났기 때문이다.
 
오온에 집착된 존재로 태어난 나는 욕망의 존재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욕망의 세계, 욕계의 중생으로 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욕망과 탐욕의 삶을 살아가는 것은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것인지 모른다.
 
오온과 오취온에 대한 토론이 있었다. 오온과 오취온은 같은 것인지 다른 것인지에 대한 토론을 말한다. 전재성 선생은 경전에서 언급되어 있는 오온은 오취온과 같은 것이라고 말했다. 아직 깨닫지 못한 존재, 아직 아라한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오온과 오취온을 같은 것으로 보는 것이다.
 
오취온의 존재, 오온의 존재는 욕망의 존재나 다름 없다. 이와 같은 욕망에 대하여 전재성 선생은 “탐욕은 영원성과 결합되어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모든 존재들에게는 본질적으로 욕망이 내재 되어 있음을 말한다.
 
카르페디엠
 
불교의 목적은 무엇일까? 부처님은 무엇을 가르쳐주고자 했을까? 이에 대하여 명확히 알 수 있는 경이 있다. 어제 합송한 네 개의 경중에서 세 번째 경 ‘시간의 악마성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무엇일까’을 말한다. 이는 ‘과거 현재 미래의 경’(S22.10)에 대한 것이다. 오온 중에서 느낌에 대한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수행승들이여, 과거와 미래의 느낌이 괴로운 것인데, 하물며 현재의 느낌은 말해서 무엇하겠는가? 수행승들이여, 잘 배운 고귀한 제자는 이와 같이 보아서 과거의 느낌에 마음을 두지 않고, 미래의 느낌을 추구하지 않고, 현재의 느낌에서 싫어하여 떠나고, 그것이 사라지고 소멸하도록 수행한다.”(S22.10)
 
 
부처님은 오온에 집착하지 말고 수행하라고 했다. 여기에 삼시가 등장한다. 과거, 미래는 물론 현재를 말한다. 그런데 경에 따르면 놀랍게도 현재에도 집착하지 말라고 했다.
 
카르페디엠, 어떤 이는 이 말을 즐겨 사용한다. 글 중간 중간에 ‘카르페디엠’이라고 말한다. 설명을 해주지 않으니 어떤 말인지 알 수 없다.
 
카르페디엠, 이 말을 공원에서도 보았다. 지난 가을 양평 황화꽃축제에 갔었는데 팻말에 ‘카르페디엠’이라고 써 놓은 것을 보았다.
 
카르페디엠, 어떤 말일까? 왜 이렇게 고상한 말을 쓰는 것일까? 사전을 찾아 보니 ‘현재를 잡아라’라는 뜻의 라틴어이다.
 
카르페디엠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 하나는 ‘현재를 즐겨라’라는 뜻이고, 또 하나는 ‘현재를 헛되이 보내지 말라’라는 뜻이다. 이렇게 본다면 전자는 쾌락적이고 후자는 철학적이다.
 
부처님은 과거와 미래는 현재에서도 떠나라고 했다. 바로 이런 점이 불교가 타종교나 타사상과 차별화된다. 바로 이런 점이 비교할 수 없는 부처님의 위대한 가르침이다.
 
사람들은 행복을 말한다. 지금 여기서 행복을 말한다. 그래서 행복론자들은 한결같이 과거는 지나갔고 미래는 오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 여기서 행복하게 살자고 말한다.
 
누구나 행복을 추구한다. 그래서 지금 행복한 자는 이 행복이 계속 지속되기를 바라고, 지금 괴로운 자는 이 괴로움에서 한시바삐 벗어나서 행복한 상태가 되기를 바란다. 그런데 부처님 가르침을 보면 이와 정반대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행복론자들이 말하는 것과 반대이다. 왜 그런가? 부처님은 지금 여기에서의 행복도 떠나라고 했기 때문이다. 이는 “현재의 느낌에서 싫어하여 떠나고, 그것이 사라지고 소멸하도록 수행한다.”(S22.10)라는 가르침에서도 알 수 있다.
 
불교에도 행복론자들이 있다. 스님들도 행복을 말한다. 즉문즉설로 유명한 스님은 행복전도사와도 같다. 스님은 지방을 순회하면서 행복특강을 했다. 안양에 왔을 때도 안양아트센터 큰 강당에서 행복에 대한 즉문즉설을 했다.
 
흐름을 거스르는 연어처럼
 
행복이란 무엇일까? 행복스펙트럼은 매우 넓다. 감각적 행복에서부터 열반의 행복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하다.
 
행복에는 세간적 행복도 있고 출세간적 행복도 있다. 그런데 초기경전을 보면 열반의 행복이 진정한 행복이라고 했다. 이는 아라한의 행복을 말한다.
 
아라한의 행복이 왜 최상의 행복일까? 이는 경전적 근거가 있다. 법구경에서  “열반이 최상의 행복이다.(nibbāna parama sukha)”(Dhp.204)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열반이 최상의 행복일까?
 
불교는 세상사람들의 상식을 뛰어 넘는다. 불교는 세상의 흐름과는 반대로 간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보면 세상의 흐름과는 반대로 가는 가르침을 펼치셨다.
 
세상 사람들은 욕망으로 살아간다. 욕망으로 세팅되어 태어난 오취온적 존재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부처님은 욕망을 거스리는 가르침을 펼치셨다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탐, 진, 치로 살아 갈 때 부처님은 무탐, 무진, 무치로 살아야 한다는 가르침을 펼치셨다.
 
세상을 흐름을 거슬러 살기가 쉽지 않다. 왜 그런가? 오취온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오온에 집착된 존재로 세팅되어 태어났기 때문에 욕망을 떼어 내어서 살아가기 힘들다.
 
모임에서 집착에 대한 토론이 있었다. 어떤 이는 ‘방하착’을 말했다. 이는 ‘내려 놓음’을 말한다. 그렇다면 오온에 대한 집착을 어떻게 내려 놓을 수 있을까?
 
오취온적 존재는 오온에 집착이 달라 붙어 있는 존재를 말한다. 그런데 집착은 들러 붙어 있어서 떼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억지로 떼어내면 어떻게 될까? 아마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고통을 겪을지 모른다.
 
아라한은 오온에서 집착이 떨어져 나간 존재를 말한다. 그래서 오온만 있는 것이 된다. 그러나 아라한이 아닌 자들은 여전히 오온에 집착되어 있다. 그런데 집착을 떼어내는 것이 살점 떨어져 나가는 것보다 더 고통스럽다는 것이다. 그래서 앙굿따라니까야에 이런 가르침이 있다.
 
 
수행승들이여,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는 사람이란 누구인가?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어떤 사람이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빠지지 않고, 악한 업을 저지르지 않고, 고통에도 불구하고, 얼굴에 눈물을 흘리면서도 완전한 청정한 삶을 실천한다면, 수행승들이여, 그를 두고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는 사람이라고 한다.”(A4.5)
 
 
세상사람들은 세상의 흐름대로 살아 간다. 세상의 흐름은 어떤 것일까? 이는 경에서 “어떤 사람이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빠져서 악한 업을 저지르면, 수행승들이여, 그를 두고 흐름을 따라 내려가는 사람이라고 한다.”(A4.5)라고 말한 것에서 알 수 있다.
 
부처님 제자들은 흐름을 거슬러 가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흐름을 거스르면 눈물로 뒤범벅이 되는 어려움이 따른다는 것이다. 이는 오취온에서 집착을 떼어내는 고통을 말한다.
 
오취온에서 오온이 되는 것은 살점을 떼는 것보다 더 힘들다. 그럼에도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는 사람들이 있다. 마치 연어가 흐름을 거슬러 가는 것과 같다.
 
연어는 산란을 하기 위해서 자신이 태어난 곳을 향해서 간다. 이는 흐름을 거슬러 가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난관을 만난다. 몸은 상처투성이가 된다. 아라한이 되는 것도 이와 다르지 않다.
 
모임에서 집착을 떼어내는 과정을 비유를 들어 설명했다. 집착을 ‘초강력본드’로 비유한 것이다.
 
초강력본드를 떼어 낼 때 잘 떼지지 않을 것이다. 오취온에서 집착도 그렇다는 것이다. 이렇게 초강력본드를 집착으로 비유해서 설명했더니 수긍하는 것 같았다.
 
아라한은 오취온에서 집착이 탈락된 존재를 말한다. 마치 연어가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듯이 세상의 흐름과 반대로 산 존재를 말한다. 그 과정에서 눈물로 범벅이 되었을 것이다. 마치 초강력본드를 떼어내듯이, 마치 살점이 떨어져나가는 듯한 고통을 겪은 것이다.
 
아라한이 되면 마치 흐름을 거슬러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과 같다.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수행승들이여, 커다란 넓은 물이라는 것은 네가지의 거센 물결 즉 감각적 쾌락에 대한 거센 흐름, 존재의 거센 흐름, 견해의 거센 흐름, 무명의 거센 흐름 을 말한다. 수행승들이여, 두렵고 위험한 이 언덕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개체를 말한다. 수행승들이여, 안온하고 평온한 저 언덕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열반을 말한다. 수행승들이여, 뗏목이라는 것은 바로 여덟가지의 고귀한 길이다. 그것은 올바른 견해, 올바른 사유, 올바른 언어, 올바른 행위, 올바른 생활, 올바른 정진, 올바른 새김, 올바른 집중이다. 수행승들이여, 두 손과  두 발로 노력한다는 것은 바로 정진과 노력을 말한다. 수행승들이여, ‘건너서 피안으로 가서 땅위에 서 있는 거룩한 님’이라는 것은 아라한을 말한다.”(S35.238)라고 했다.
 
 
반야심경에 주문이 있다. “가떼, 가떼, 빠라가떼, 빠라상가떼 보디 스와하(gate gate pāragate pārasagate bodhi svāhā)”라는 주문을 말한다. 이 주문에 대하여“가세, 가세, 피안으로 가세, 함께 피안으로 가세, 저 열반의 언덕으로”라고 해석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주문에 대한 근거가 되는 경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상윳따니까야 ‘독사뱀의 비유에 대한 경’(S35.238)이다.
 
경에서는 아라한에 대하여 ‘건너서 피안으로 가서 땅위에 서 있는 거룩한 님(tiṇṇo pāragato thale tiṭṭhati brāhmao)’이라고 했다. 바로 이 말이 반야심경에서“가떼, 가떼, 빠라가떼, 빠라상가떼 보디 스와하”라는 주문의 모티브가 되었을 것이다. 흐름을 거슬러 저 언덕에 우뚝 선 자가 아라한인 것이다!
 
최상의 행복이란?
 
세상 사람들은 세상의 흐름대로 살아간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은 세상의 흐름을 거슬러 간다. 이른바 역류도(逆流道)의 가르침이다. 그래서 세상에서 말하는 행복을 말하지 않는다. 욕망을 초월한 것을 행복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열반이 최상의 행복이다.(nibbāna parama sukha)”(Dhp.204)라고 말하는 것이다.
 
열반은 어떤 상태일까? 이는 지각할 수도 느낄 수도 없는 상태이다. 상온과 수온이 멸한 상태이기 때문에 지각할 수도 느낄 수도 없는 상태인 것이다. 당연히 행복도 지각할 수도 없고 느낄 수도 없다. 그런데 이렇게 지각할 수도 없고 느낄 수도 없는 상태가 최상의 행복이라는 것이다. 이는 경전적 근거가 있다.
 
사리뿟따 존자가 말했다. 사리뿟따 존자는 수행승들에게 “벗들이여, 이 열반은 행복입니다. 벗들이여, 이 열반은 행복입니다.”(A9.34)라고 말했다. 그러자 우다인은 “벗이여, 사리뿟따여, 그런데 어떻게 거기에 느낌이 없는데 행복이 있단 말입니까?”라며 물었다.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행복은 지금 여기에서 경험되어지는 행복감에 대한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닌 행복한 느낌에 대한 것이다. 이와 같은 행복한 느낌은 크게 두 가지가 있다. 감각적으로 느끼는 행복감이 있고 선정에서 느끼는 행복감이 있다.
 
세상사람들 대부분은 감각적으로 느끼는 즐거움에 대하여 행복이라고 말한다. 매혹적인 대상을 보았을 때 행복이라고 말하고, 아름다운 음악을 들었을 때 행복이라고 말한다. 한상 가득 차려진 음식을 먹었을 때도 행복이라고 말한다. 또 하나의 행복이 있다. 그것은 선정에서의 행복이다. 감각적 욕망을 멀리해서 얻어지는 행복이다. 이와 같은 선정의 행복은 감각적 행복과 비할 바가 아니다.
 
감각적 행복이 거친 행복이라면 선정의 행복은 미세한 것이다. 그런데 거친 행복은 오래가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아무리 아름다운 풍광도 십분이상 보기 힘들 것이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도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순간 끝난다. 보드라운 접촉도 불과 몇 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즐거운 느낌, 행복한 느낌에 목숨을 건다. 마치 “죽어도 좋아!”라며 지금 여기에서 경험되어지는 즐겁고 행복한 느낌에 목숨을 거는 것 같다.
 
감각적 느낌은 거칠고 일시적이다. 이에 반하여 감각적 느낌을 떠난 선정의 행복은 미세하고 꽤 오래 간다. 그러나 한계가 있다. 선정에 나오면 즐겁고 행복한 느낌은 사라지기 때문이다.
 
영원한 행복은 없을까? 영원한 즐거움은 없을까? 영원한 행복과 영원한 즐거움을 바라는 것은 욕망이다. 그런데 전재성 선생에 따르면 욕망은 영원성과 결합되어 있다고 했다. 이렇게 본다면 감각적 행복이든 선정의 행복이든 지금 여기에서 즐거움과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영원을 추구하는 욕망에 기반한다.
 
부처님은 최상의 행복을 말했다. 그것은 욕망을 여읜 행복을 말한다. 그런데 여기서 더 나아간다. 그것은 즐거운 느낌, 행복한 느낌을 지각하지 않는 행복을 말한다. 이는 다름 아닌 열반의 행복이다. 그래서 사리뿟따 존자는 “벗이여, 바로 거기에 느낌이 없는 것이 행복입니다.”(A9.34)라고 말했다.
 
최상의 행복은 느낌이 없는 것이 최상의 행복이다. 그것은 다름아닌 열반의 행복이다. 열반의 행복은 지각할 수도 없고 느낄 수도 없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최상의 행복인 것이다.
 
어느 순간 정지할 때가 있는데
 
행복한 삶을 살고자 한다. 이렇게 금요니까야모임 후기를 쓰기 위하여 자판을 치는 것도 행복이다. 절구질하여 ‘절구커피’를 만들어 마시는 것도 행복이다. 그러나 지금 나에게 있어서 행복은 명상하는 것이다.
 
백권당에 명상공간을 만들어 놓은지 3년 10개월 되었다. 그 동안 드문드문 활용했었다. 올해 테라와다 우안거 때부터 앉아 있는 습관을 들이고자 했다. 이제 사개월 되었다.
 
오늘 아침 방석에 앉았다. 어느 때와 마찬가지로 다짐 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배의 부품과 꺼짐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새기겠다.”라는 결심을 말한다. 이런 결심이 있어야 좌선을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다.
 
좌선을 하기 전에 먼저 행선을 한다. 백권당 사무실에 행선대를 만들어 놓았다. 한보에 30센티 간격으로 열 네 보의 행선대를 만들어 놓은 것이다. 검은 테이프를 붙여서 표시해 놓았다.
 

 
 
행선을 할 때는 눈을 감는다. 빤냐와로 스님에 따르면 행선할 때 눈을 반으로 뜨거나 눈을 감고 하는 것이 좋다고 말한다. 아마 집중력 때문일 것이다.
 
눈을 감고 육단계 행선을 했다. 발을 떼고, 들고, 밀고, 내리고, 딛고, 누르는 여섯 단계 동작을 말한다.
 
행선은 좌선을 하기 위한 예비수행이라고 볼 수 있다. 행선에 형성된 집중을 그대로 좌선에 가져 가면 효과적이다.
 
행선할 때는 좌선 할 때 보다 더 집중이 높은 것 같다. 발을 떼고, 들고, 밀고, 내리고, 딛고, 누르는 여섯 단계 동작을 모두 면밀히 새겼을 때 잡념은 일어나지 않는다. 반복하면 재미도 난다.
 
요즘 행선이나 좌선하면 생멸에 대하여 생각하게 된다. 마하시사야도의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에 따르면 생멸의 지혜는 생멸을 처음부터 끝까지 보는 것이라고 했다. 이렇게 본다며 육단계 행선은 생멸을 처음부터 끝까지 보기에는 최상이다.
 
좌선에서도 생멸을 보아야 한다. 그것은 배의 부품과 꺼짐을 새기는 것이다. 그런데 행선에서 육단계를 새기는 것보다 명확하지 않다. 생멸을 처음부터 끝까지 면밀하게 새기는데 있어서 육단계 행선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는 것 같다.
 
좌선은 한시간 한다. 알람을 한시간으로 설정해 놓고 앉는다. 앉을 때는 대단한 결심을 해야 한다. “배의 부품과 꺼짐을 한 개도 놓치지 않으리라!”라는 결심이다. 이렇게 결심하지 않으면 번뇌망상에 시달린다. 번뇌망상에 마음이 탙탈 털리는 것 같다. 무엇보다 다리에 통증이 와서 한시간 앉아 있는 것이 고행이 된다.
 
매일 한시간 앉아 있기로 했다. 지난 7월 31일 재가우안거 들어간 이래 계속 해 오고 있다. 매일 한시간 의무적으로 앉아 있는 것이다. 토요일과 일요일 주말도 예외가 없다. 가능하면 아침에 앉아 있고자 한다. 글 쓴 다음에 앉아 있으면 힘이 빠져서 힘들다. 오후에는 졸립기도 하고 혼침이 와서 어렵다.
 
어떻게 해야 한시간 좌선을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을까?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해야 한다. 아침을 적게 먹어야 한다. 자극적인 음식은 피한다. 아침에 뉴스를 보지 말아야 한다. 자극적인 뉴스를 접하면 명상에 방해가 된다. 바지는 추리닝으로 갈아 입는다.
 
자리에 앉았다. 평좌를 한 상태에서 배의 부품과 꺼짐을 새긴다. 처음에는 잘 잡히지 않는다. 행선할 때 육단계와 비교하면 집중이 덜 되는 것 같다. 그러나 인내를 가지고 새겨야 한다.
 
마음을 온통 배의 부품과 꺼짐에 둔다. 마음을 배의 움직임이라는 기둥에 새김의 밧줄로 묶어 두고자 하는 것이다. 이렇게 마음을 온통 배에 집중하다 보면 어느 순간 움직임 분명해진다.
 
한시간은 긴 시간이다. 한시간 잠을 자면 엄청나게 긴 꿈을 꿀 수 있다. 한시간 쉬지 않고 운전하면 100키로를 달릴 수 있다.
 
한시간 동안 꼼짝하지 않고 앉아 있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새김이 확립되면 한시간도 좋고 두 시간도 좋다.
 
한시간은 변화무쌍하다. 마치 흐렸다 개었다하는 날씨를 보는 것 같다. 어느 때 집중이 잘 되다가도 망상에 빠져 있는 것을 발견하기도 한다. 그런데 어느 순간 정지되는 듯 할 때가 있다는 것이다.
 
좌선이 고행이 되어서는 안된다. 명상은 즐겁고 행복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새김(사띠)이 확립되어야 한다. 일단 새김이 확립되면 잘 깨어지지 않는다. 그런데 어느 순간 멈출 때가 있다는 것이다. 마치 세상이 고요해진 것 같다. 그러나 길지 않다. 불과 일초도 되지 않는 것 같다.
 
사람들은 즐거운 느낌에 목숨을 건다. 감각적 즐거움을 추구하는 사람은 “지금 이대로 죽어도 좋아!”라며 감각적 느낌에 목숨을 건다. 좌선할 때 순간적으로 일시적으로 일초도 안되는 짧은 기간에 정지가 왔을 때 영원히 있고 싶어졌다. 이런 것도 욕망일 것이다.
 
정지의 순간, 멈춤의 순간이 올 때가 있다. 그 짧은 순간에 행복을 느낀다. 그렇다고 열반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일까 빤냐와로 스님은 고요함을 즐기지 말라고 한다. 빨리 주관찰대상으로 복귀하라고 말한다. 배의 부품과 꺼짐을 새기는 것이다. 정신과 물질을 구분하여 새기는 것이다.
 
아라한이 되기 전에는 행복이라는 말을 해서는 안된다
 
좌선을 하면 일시적으로 행복을 맛 볼 때가 있다. 그러나 열반의 행복과 비교하면 일시적인 행복한 느낌에 지나지 않는다.
 
진정한 행복은 느낌이 없는 것이다. 지각도 없고 느낌이 없는 행복, 열반의 행복이 진정한 행복이라는 것이다.
 
진정한 행복은 열반의 행복이다. 아라한만이 진정으로 행복한 자이다. 그래서 빤냐와로 스님은 “번뇌가 아직 소멸한 경지에 도달하지 않았으면, 자신이 행복하다고 상상조차 해서는 안 되고 생각해서도 안됩니다.”라고 했다.
 
아라한이 되기 전에는 행복이라는 말을 해서는 안된다. 그럼에도 행복전도사들은 지금 여기에서 행복을 말한다. 카르페디엠이라 하여 ‘지금 여기서 즐겨라’라든가, ‘지금 여기를 놓치지 말라’라고 말한다. 그러나 부처님은 “현재의 느낌에서 싫어하여 떠나고, 그것이 사라지고 소멸하도록 수행한다.”(S22.10)라 하여 지금 여기서 떠나라고 했다.
 
 
2023-11-25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