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로 사람을 베어도 죄가 되지 않는 사조가 유행한 것은
사람을 칼로 베어도 죄악이 아니라고 한다. 세상에 어떻게 이런 것이 가능할까? 분명한 사실은 부처님 당시에 이런 사조가 있었다는 것이다.
금요니까야 모임이 12월 8일 한국빠알리성전협회에서 열렸다. 올해 마지막 모임이다. 이번 모임으로 공부모임은 긴 방학에 들어간다. 내년 2월 넷째주 금요일(23일)에 다시 열린다.
무엇이든지 마지막 열리는 모임은 감회가 새롭다. 일년 동안 활동을 마무리하는 모임이다. 이에 다과를 준비했다. 도현스님이 떡과 빵과 과일을 준비한 것이다.
오랜만에 방명숙 선생이 왔다. 방선생에 따르면 한 모임이 있는데 날자가 겹쳐서 못 나왔다고 말한다. 올해 마지막 모임에는 사람들 얼굴을 보고자 나온 것이다. 인연의 끈을 놓지 않는 모습이 아름답다.
언제나 그렇듯이 고정적으로 나오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이 있기에 이제까지 모임이 유지될 수 있다고 본다. 여기에 새로운 사람들도 왔다.
모임은 강제성이 있는 것은 아니다. 누구나 시간 되는 사람은 와서 들을 수 있다. 그리고 토론 할 수 있다. 또한 모임은 회비가 없다. 각자 알아서 능력껏 후원하면 된다. 본인을 비롯하여 도현스님, 장계영, 홍광순, 방기연, 김종선, 윤해성, 방명숙, 김경예, 유경민 선생이 왔다.
세 개의 경을 합송하고
12월 모임에서는 세 개의 경을 합송했다. 이는 1)‘끝없는 추론과 헤아림은 어디서 올까’, 2) ‘어떻게 궁극적으로 환락을 소멸시킬 수 있는가’, 3) ‘우리는 인간의 삶에서 과연 인과를 믿어야 하는가’라는 주제를 가진 경을 말한다. 각각 ‘수행승의 경’(S22.36), ‘환락의 소멸에 대한 경’(S22.51), ‘마할리의 경’(S22.60)과 배대 된다.
모임의 교재는 ‘한권으로 읽는 쌍윳따니까야’이다. 방대한 상윳따니까야에서 한권으로 정선한 것이다. 정식 명칭은 ‘오늘 부처님께 묻는다면’이라는 제목이 책이다. 교재로 삼기에 좋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상윳따니까야 7권을 전부 읽어 보아야 한다.
머리맡에 통합본 상윳따니까야가 있다. 머리맡에 있어서 수시로 열어 본다. 잠자기 전에도 열어 보고, 잠에서 깼을 때도 열어 본다. 진도는 거의 중간까지 나갔다. 이제 ‘견해상윳따’(S24)도 지났다.
현재 모임에서는 ‘오온상윳따’(S22)를 보고 있다. 이미 본 것이다. 그것도 처음부터 끝까지 각주까지 보았다. 이렇게 본다면 모임에 앞서 예습한 것이나 다름 없다.
보고 싶은 것만 보았을 때
경전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어떤 이는 필요한 경만 볼 것이다. 방대한 오부니까야를 모두 다 읽어 볼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런 방식이 크게 잘못 된 것이라는 사실을 나중에 알았다. 부분적으로 밖에 알지 못하는 것이다. 수박 겉핱기식이나 다름 없다. 마치 눈먼 장님이 코끼리 만지기 식이다.
니까야를 접한 지 십년도 넘었다. 오랜 세월 필요한 경만 보았다. 필요한 경을 십년 본다면 거의 다 보게 될 것이다. 그래서일까 사부니까야를 보면 노랑형광메모리칠이 가득 칠해져 있다. 또한 포스트잇이 빼곡이 꼽혀 있다. 그러나 이는 다 본 것이 아니다. 보고 싶은 것만 본 것이다.
사람들은 보고 싶은 것만 본다. 유튜브에서도 보고 싶은 것만 본다. 경전에서 보고 싶은 것만 볼 수 있다. 시간이 바쁜 사람은 검색해서 필요한 부분만 볼 것이다. 학자들도 그렇게 할지 모른다. 그러나 최근에 안 사실이지만 이런 행위는 경전을 대하는 올바른 태도가 아니다.
경전은 처음부터 끝까지 보아야 한다. 그것도 각주에 실려 있는 주석도 꼼꼼히 살펴 보아야 한다. 이렇게 보면 매우 유익하다. 왜 그런가? 각주에서는 참고가 되는 경을 알려 주기도 하기 때문이다. 따라가다 보면 서로 연결되어 있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니까야가 매우 체계적이라는 사실이다.
전승되어 온 가르침은 어느 것 하나 버릴 것이 없다. 설령 후대에 편집된 것이라고 할지라도 본래 가르침과 어긋나지 않으면 정견으로 본다.
니까야는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야 읽는 맛이 난다. 이런 이유로 이제까지 맛지마니까야와 디가니까야를 처음부터 끝까지 완독했다. 거의 1년 반 걸렸다.
이번에 한국빠알리성전협회에서 맛지마니까야와 디가니까야를 통합했다. 두 개의 니까야를 합하여 하나의 경전으로 만든 것이다. 2단 칼럼에 폰트사이즈를 작게 하고 얇은 종이를 사용하여 2천 페이지가 넘는다. 이 통합본에 도움을 주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 본 결과 수정해야 할 사항을 발견했는데 알려 준 것이다.
지금은 상윳따니까야 완독을 목표로 매일 읽고 있다. 이 니까야가 끝나면 또 다른 경전을 처음부터 끝까지 완독할 것이다. 언제까지 계속될 지 알 수 없다. 목숨이 붙어 있는 그날까지 계속 될 것이다.
인과를 부정하는 외도사상
이번 모임에서 세 개의 경을 합송했다. 이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경은 세 번째 ‘마할리의 경’(S22.60)이다. 왜 그런가? 이는 다름아닌 외도 사상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외도사상은 오늘날 잣대로 판단하면 말도 안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인과를 믿는다. 대부분 사람들은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있다고 믿는 것이다. 이는 지극히 당연하고 또한 합리적이다. 왜 그런가? 과학의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과학은 철저하게 인과를 바탕으로 한다.
과학의 시대에 인과는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 당시에는 인과를 부정하는 사람들도 있다는 사실이다. 오늘날 말도 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부처님 당시에 새로운 사조로 유행했었다.
마할리의 경은 말도 안되는 외도사상에 대한 것이다. 어느 정도인가? 이는 릿치비의 마할리가 부처님에게 “세존이시여, 뿌라나 깟싸빠는 이와 같이 ‘뭇삶들이 오 염되는 데는 원인도 조건도 없다. 원인도 조건도 없이 뭇삶들은 오염된다. 못삶들이 청정해지는 데는 원인도 조건도 없다. 원인도 조건도 없이 못삶들은 청정해진다.’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에 대하여 세존께서는 어떻게 말씀하시겠습니까?”(S22.60)라며 질문하는 것으로 알 수 있다.
외도 스승 중의 하나인 뿌라나 깟싸빠는 무인무연론을 주장했다. 원인과 조건과 결과에서 원인과 조건을 부정한 것이다. 다만 결과까지 부정한 것은 아니다.
뿌라나 깟싸빠는 모든 중생들은 모두 청정해질 것이라고 했다. 이는 결과에 대한 것이다. 그런데 청정해지는데 있어서 원인도 조건도 필요 없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어떻게 말씀하셨을까?
세상사람들은 인과를 말한다. 특히 과학의 시대에서 인과는 매우 강조된다. 원인없이 결과는 있을 수 없음을 말한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하나가 더 있다. 그것은 조건(paccaya)이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원인(hetu)과 조건(paccayā)과 결과(phala)를 말한다. 이를 하나의 단어로 ‘인연과(因緣果)’라고도 말한다.
부처님은 마할리의 질문에 대답했다. 부처님은 뭇삶이 청정해지는 데는 “원인도 있고 조건도 있고 결과도 있다.”(S22.60)라고 답했다. 부처님은 인과, 즉 원인과 조건과 결과를 인정한 것이다.
니까야를 보면 수 많은 외도의 견해를 접할 수 있다. 이 니까야 저 니까야 도처에서 볼 수 있다. 그 중에 하나가 뿌라나 깟싸빠의 무인론이다. 여기서 무인론은 무인무연론과 같다.
뿌라나 깟싸빠의 무인론은 원인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다양한 원인에 의하여 결과가 일어나는 것을 말한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 선생의 역저 ‘초기불교의 연기사상’에 따르면 “원인과 결과가 사건들을 초래하는 방식에 법칙성이 없다.”(34쪽)라는 까루나라뜨네의 말을 인용해서 설명했다.
무작론과 작론자
뿌라나 깟싸빠의 이론에 대한 설명은 다양하다. 일반적으로 무인론이라고 말해지지만 비결정론, 숙명론, 우연론, 도덕부정론 등 다양하게 불리워진다. 이런 명칭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그것은 다름아닌 무작론(無作論: akiriya)에 기초한다.
무작론이란 무엇인가? 이는 앙굿따라니까야 ‘이교도의 경’(A3.61)에 설명되어 있다. 세 가지 종류의 외도에 대한 것이다. 이는 숙명론, 신의론, 우연론을 말한다. 행위에 대한 과보를 부정한 외도 사상에 대한 것이다.
부처님은 삼종 외도사상을 부정했다. 그래서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은 세 가지의 이교도의 관점이 있는데, 그것들은 현자에 의해 조사되고, 탐구되고, 철저하게 연구되고, 단지 전승 때문에 그것들을 추구한다고 하더라도 무작설로 드러난다.”(A3.61)라고 했다.
무작론은 인간의 도덕적인 삶을 부정한다. 이와 같은 무작론은 결정론, 숙명론, 신의론, 우연론도 무작론의 범주에 들어간다.
부처님은 작론(作論)을 말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원인과 조건과 결과, 즉연기법을 말한 것이다. 달리 말하면 업과 업의 과보에 대한 가르침이다.
부처님은 무작론자를 비판했다. 어느 정도일까? 앙굿따라니까야 ‘머리털로 만든 옷의 경’을 보면 알 수 있다. 경에 따르면, “수행승들이여, 현세의 거룩한 님,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인 나도 업을 설하고 있고 정진을 설하고 있다. 그러나 수행승들이여, 어리석은 자, 막칼리는 업도 없고 업의 과보도 없고 정진도 없다고 그것을 거부한다.”(A3.135) 라고 했다.
과거에 출현했던 모든 부처님들은 작론자들이다. 이는 “과거세의 거룩한 님,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인 나도 업을 설하고 있고”(A3.135) 라는 말로 알 수 있다. 이 뿐만이 아니다. 이는 “미래세의 거룩한 님,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인 나도 업을 설하고 있고”(A3.135) 라는 말로 알 수 있다.
삼세의 부처님들은 업을 설했다. 이는 업과 업의 과보에 대한 가르침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나도 업을 설하고 있다.”라고 하여 자신에 대하여 ‘작론자(作論者: kiriyavādin)’라고 했다.
뿌라나 깟싸빠는 사람이 청정해지는 데는 원인도 조건도 필요 없다고 했다. 이런 말은 무인무연론이다. 원인도 조건도 없이 청정해진다면 굳이 청정한 삶을 살지 않아도 될 것이다. 누군가 죄악을 저질러도 궁극적으로는 청정해져서 해탈할 수 다는 말과 같다. 이는 다름아닌 도덕부정론이다.
뿌라나 깟싸빠의 도덕부정론을 보면
모임에서 어떤 이가 질문했다. 오늘날 관점으로 보았을 때 말도 안되는 사상이 생겨났는지에 대한 질문이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 선생은 “부처님 당시에 그런 사상에 환호하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했다.
시대마다 사조가 있다. 어느 시대에서 유행했던 사조가 다른 시대 때는 사라진다. 정신병의 기준도 시대마다 다르다.
유튜브에서 ‘5분 뚝딱 철학’을 즐겨 본다. 최근에 본 것 중에 ‘정상과 비정상 사이의 회색지대’가 있다. 이 영상에 따르면 수많은 정신질환을 소개 하고 있다. 그런데 정신병은 시대에 따라 다르다는 것이다.
동성애를 한때 정신질환으로 보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요즘은 정신질환으로 보지 않는다. 이런 예는 많이 있다. 그렇다면 오늘날 대표적인 정신질환은 무엇일까? 그것은 다름아닌 돈이다.
오늘날 신자유주의 이념이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 화폐와 자본이 지배하는 시대에 사는 사람들은 정신질환자들과 같다. 모든 사람들은 자본에 종속되어 있고 화폐의 노예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은 전에 없던 것이다.
부처님 당시에는 갖가지 사상이 난무했다. 그 결과 말도 안되는 터무니 없어 보이는 사상도 등장했다. 어떤 것인가? 니까야 도처에 볼 수 있는 뿌라나 깟싸빠의 도덕부정론을 보면 다음과 같다.
“대왕이여, 업을 짓거나 업을 짓게 만들어도, 도륙하거나 도륙하게 만들어도, 학대하거나 학대하게 만들어도, 슬픔을 주거나 슬픔을 주게 만들어도, 억압하거나 억압하도록 해도 협박하거나 협박하도록 해도, 생명을 해치고, 주지 않은 것을 빼앗고, 남의 집에 침입하고, 재산을 약탈하고, 강도질하고, 노상에서 강도질하고, 타인의 아내를 농락하고, 거짓말을 해도 악을 짓는 것이 아닙니다. 비록 이 땅의 생명체들을 면도날 데로 만든 수레바퀴로 조각내어 부수고, 한 덩어리로 만든다고 해도, 그것을 조건으로 생겨나는 악은 없으며, 악에서 오는 과보도 없습니다.”(D2)
뿌라나 깟싸빠는 행위의 과보를 부정했다. 오계를 어겨도 죄악이 되지 않음을 말한다. 심지어 생명체들을 면도날 데로 만든 수레바퀴로 조각내어 죽여도 죄악이 아니라고 했다. 더구나 과보도 없다고 말했다.
부처님 당시에 백가쟁명식의 논쟁이 있었다. 뿌라나 깟싸빠와 같은 도덕부정론자도 출현했다. 이런 현상에 대하여 전재성 선생은 “그런 메시지에 환호하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라고 말했다.
어느 시대나 마찬가지이지만 전쟁이 끝이지 않았다. 고대인도에서 전쟁은 늘 있는 것이었다. 특히 전국시대와 같은 시기에서 전쟁은 사람들의 마음을 갈라 놓게 하기에 충분했다.
전쟁에서 피치 못하게 사람을 죽인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이들 중에는 자신이 지은 죄악에 대하여 위로 받고 싶은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이런 때 그에 맞는 사상가들이 나타났다. 그래서 뿌라나 깟싸빠와 같은 사상가는 “생명체들을 면도날 데로 만든 수레바퀴로 조각내어 부수고, 한 덩어리로 만든다고 해도, 그것을 조건으로 생겨나는 악은 없으며, 악에서 오는 과보도 없습니다.”(D2)라고 말했다. 이런 말에 환희하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전사자 (戰死者) 의 천상
전쟁에서 사람을 죽였을 때 과보를 받지 않아도 되는 것일까? 부처님 당시에 “전사는 전쟁터에서 전력을 다해서 싸워야 하는데 전력을 다해서 싸우면서 적들에 의해 살해되어 죽임을 당하면, 그는 몸이 파괴되어 죽은 뒤에 전사자의 하늘에 태어난다.”(S42.3)라는 견해가 있었다. 이런 견해는 타당할까?
증오심 없이는 전쟁할 수 없다. 옆에서 전우가 죽어 갈 때 자연적으로 상대방에 대한 극도의 적개심과 증오심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또한 전쟁광들은 적개심과 증오심을 부추긴다.
전쟁하다 죽으면 ‘전사자(戰死者)의 천상(parājita deva)’이 있다고 한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단호하게 부정했다. 부처님은 오히려“촌장이여, 전사가 전쟁터에서 전력을 다해서 싸운다면 그의 마음은 이와 같이 ‘이 사람들을 구타하거나 결박하거나 절단하거나 박멸하거나 없애 버려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이미 저열해졌고 불우해졌고 사악해졌습니다. 그 전력을 다해서 싸우는 자를 적들이 살해하여 죽인다면, 그는 몸이 파괴되어 죽은 뒤에 전사자의 지옥이 있는데 그곳에서 태어납니다.”(S42.3)라고 했다.
전자사의 천상이 있다는 것은 사견이다. 부처님은 냉혹하게 말했다. 전쟁하다 죽으면 지옥과 같은 악처에 태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왜 그런가? 그것은 죽을 때의 마음에 지배되기 때문이다. 두려움과 공포에 사로잡혀 죽었을 때 그것을 대상으로 하여 재생연결식이 일어날 수 있음을 말한다.
오온을 괴로운 것으로 보아야
행위에 대한 과보가 없다면 굳이 계를 지키지 않아도 될 것이다. 언젠가 한량 없는 세월이 지난 다음에 해탈할 것이라면 지금 여기서 청정한 삶을 살지 않아도 된다. 지금 여기서 행복하게 즐기는 삶을 살면 되는 것이다.
부처님은 즐거움의 진리에 대하여 설하지 않았다. 부처님은 괴로움의 진리에 대하여 설했다. 사람들이 즐거움만 추구했을 때 해탈하지 못하는 것으로 본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뿌라나 깟싸빠의 견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반박했다.
“마할리여, 만약 여기 이 물질이 괴로움에 영향받고 괴로움은 드러내지만 즐거움은 드러내지 않는 오로지 괴로운 것이라면, 뭇삶들은 물질에 매혹되지 않을 것이다. 마할리여, 그러나 실로 이 물질이 즐거움에 영향받고 즐거움은 드러내지만 괴로움은 드러내지 않는 즐거운 것일 수 있는 까닭에 뭇삶들은 물질에 매혹되고, 매혹되므로 속박되고 속박되므로 오염된다. 마할리여, 뭇삶들이 오염되는 데는 이것이 원인이고 이것이 조건이다.”(S22.60)
오온 중에서 물질에 대한 것이다. 사람들이 물질, 느낌, 지각, 형성, 의식에 매혹 될 때 즐거움이 생겨나는데 이를 마음이 오염되는 것으로 본 것이다. 탐욕에 지배받은 것이다.
불교는 탐, 진, 치의 소멸을 목적으로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오온을 괴로운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럼에도 오온에서 감각적 즐거움을 찾고자 한다면 마음이 오염되어서 세세생생 윤회할 것이다. 그에 따라 청정한 삶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청정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이 세상을 괴롭다고 보아야 한다. 눈과 귀 등 여섯 감역에서 발생되는 세상에 대하여 괴로운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렇게 괴로운 것으로 보아야 염오가 생겨서 수행할 수 있게 된다.
부처님은 청정해지는 데는 원인도 없고 조건도 필요없다는 뿌라나 깟싸빠의 견해를 부정했다. 부처님은 뿌라나 깟싸빠의 견해와는 반대로 뭇삶(중생)이 청정해지는 데는 원인이 있고 조건이 있다고 말했다. 부처님은 연기법적으로 설명한 것이다.
바람은 불지 않고 강물은 흐르지 않고
부처님 당시에 칼로 사람을 베어도 죄가 되지 않는다는 견해가 있었다. 이런 견해에 대하여 “누군가 날카로운 칼로 다른 사람의 목을 벤다고 해도 그 목숨은 빼앗을 수 없고 그 칼은 단지 일곱 요소 사이의 공간을 통과한 것뿐입니다.”(D2)라고 했다.
외도는 사람을 칼로 베어도 목숨을 빼앗은 것은 아니라고 했다. 단지 일곱 요소 사이의 공간을 통과한 것뿐이라고 했다. 이와 유사한 견해가 있다. 다음과 같은 견해를 말한다.
“바람은 불지 않고 강물은 흐르지 않고 임산부는 출산하지 않고 해와 달은 뜨고 지지 않고 모든 것이 기둥처럼 고정되어 있다.”(S24.1)
바람은 불지만 불지 않는다고 말한다. 어떻게 이런 견해를 가질 수 있을까? 이는 주석에서 “나뭇가지 등을 부러뜨리고 바람이 불지만 실제로 부는 것은 바람이 아니고 소위 바람의 원자이다. 실제로 바람은 기둥이나 산처럼 고정되어 있다.”(Srp.II.337)라는 견해를 말한다.
바람이 불지만 바람이 불지 않는 것은 바람의 원자의 이동으로 보는 것이다. 임산부가 출산하지만 출산하지 않는 것도 그렇고 해와 달이 뜨고 지지만 해와 달이 뜨고 지지 않는 것도 원자의 이동으로 보는 것이다. 이런 견해라면 칼로 사람의 목을 벤다고 해도 벤 것이 아니다. 단지 칼의 원자가 목을 통과했을 뿐이다.
삼세제불이 설한 업과 업보의 가르침
부처님 당시에 말도 안되는 사조가 있었다. 이런 사조는 시대가 요청한 것이다. 전쟁의 시대에 사람들은 위로 받고 싶었던 것이다. 사람을 죽여서 죄책감이 있는 자에게 사람을 칼로 베었어도 칼로 벤 것이 아니라 단지 칼의 원자가 목을 통과했을 뿐이라고 했다. 살인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말에 위로를 받고 더 나아가 환호하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시대마다 새로운 사조가 계속 생겨나고 있다. 오늘날도 예외가 아니다. 도덕적으로 금하는 것을 어겼을 때 이를 용인하는 사상이 출현 했을 때 이를 수용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과 같다. 그러나 변함 없는 것은 업과 과보에 대한 가르침이다.
업과 업보의 가르침은 정견이다. 과거 출현한 부처님도 설했고 현세 부처님도 설했고 미래 출현할 부처님도 설할 것이다. 바로 그것은 원인과 조건과 결과에 대한 가르침이다. 이를 조건법이라고도 한다. 이를 빠알리어 ‘빠띳짜사뭅빠다’라고 하는데 이를 연기법이라고 한다. 이이 정견이고 작론이다.
2023-12-10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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