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권 담마의 거울 2020 I, 커피 드립용 도자기가 깨졌는데
도자기가 깨졌다. 커피 드립용 도자기를 말한다. 종이필터용 드립용 도자기이다. 십년 된 것 같다. 커피를 만들기 위해서 작업하던 중에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 난 것이다.
도자기는 언젠가 깨질 운명에 있었다. 사람의 목숨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래서 “이를 테면, 옹기장이가 빚어낸 질그릇이 마침내 모두 깨어지고 말 듯, 사람의 목숨도 또한 그렇습니다.”(Stn.577)라는 가르침으로도 알 수 있다.
도자기는 언젠가 깨질 운명
도자기는 언제 깨질지 모른다. 오늘 깨질 수도 있고 십 년 후에 깨질 수도 있다. 사람의 목숨도 이와 다르지 않다. 그래서 “세상에서 결국 죽어야만 하는 사람의 목숨은 정해져 있지 않아 알 수 없고, 애처럽고 짧아 고통으로 엉켜있습니다.”(Stn.574)라고 했다.
사람은 죽어야 할 운명이다. 모든 생명체가 다 그렇다. 다만 날자는 정해져 있지 않다. 그러나 죽는다는 사실은 확실하다. 그래서 ‘죽음의 명상’에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나의 삶은 견고하지 않지만
나의 죽음은 견고하고
나의 죽음은 피할 수 없으니
나의 삶은 죽음을 끝으로 하고
나의 삶은 불확실하지만
나의 죽음은 확실하다.”(예경지송, 723쪽)
나의 삶은 견고하지 않다. 언제든지 무너질 수 있다. 나의 삶은 확실하지 않다. 언제 죽을지 모른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하나 있다. 그것은 나의 죽음이다. 생명체가 있는 것들은 누구나 죽는다는 사실 그것 하나만큼은 확실하다.
죽음은 세상이 무너지는 것이다. 그렇다고 산천초목 삼라만상의 물리적 세계가 무너지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여섯 가지 감역에서 세계가 무너지는 것이다. 오온이 부서지는 것이다. 그래서 “이 세계는 불안정하여 사라진다.”(M82)라고 했다.
죽음은 자신의 몸이 무너져서 오게 되는 것이다. 신체기관이 하나 둘 망가져 갈 때 죽음도 머지 않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이 젊음과 건강이 천년만년 갈 것처럼 희희낙락하며 감각을 즐기면서 살아간다.
결국 요양원에 누워 있게 되어 있다. 결국 중환자실에 누워 있게 되어 있다. 누구나 죽음의 침상에 누워 있게 되어 있다. 그때 어떤 생각이 들까?
세상에 미련이 남아 있어서는 안된다. 연소된 삶을 살아야 한다. 하루하루를 불태워 버리는 삶을 살았을 때 여한이 없을 것이다. 미소 지으며 죽지 않을까?
118 담마의 거울 2020 I
매일매일 하는 일이 있다. 이를 일상이라고 한다. 밥 먹는 것 자는 것이 이에 해당된다. 그런데 밥 먹듯이 하는 일도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글쓰기, 명상하기, 빠알리어공부하기, 그리고 경전과 논서 읽기이다. 여한을 남기지 않는 일이다.
일상은 아니지만 의무적으로 하는 일이 있다. 그것은 책 만드는 일이다. 드문드문 만든다. 일주일에 한권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지만 여의치 않다.
지금까지 2019년까지 쓴 글에 대한 책을 만들었다. 2020년 이후에 쓴 것도 만들어야 한다. 2023년 것까지 만들어야 안심이다. 지금은 그 과정에 있다.
이번에 만든 책은 ‘118 담마의 거울 2020 I’이라는 제목의 책이다. 여기서 118은 118번째 책을 의미한다. 2020년 1월부터 4월까지 4개월 동안 담마에 대하여 쓴 것이다. 모두 37개의 글로 308페이지에 달한다. 참고로 목차를 보면 다음과 같다.
(목차)
1. 대자유인이 된다는 것은
2. 허무주의가 판치는 세상에서
3. 이 고뇌의 강을 건너고자
4. 지혜의 칼로 단번에
5. 바람은 불고 강물은 흐른다
6. 한번 저장되면 지울 수 없는
7. 오늘 점심은 군고구마 두 개로
8. 지구온난화시대에 세 가지 자제하는 삶
9. 불교인이라면 아비담마와 청정도론을
10. 눈 먼 자의 뒤를 따르는 것처럼
11. 액면 그대로 비추는 담마다사(法鏡)
12. 첨탑은 자꾸 높아지고 광신자들은 자꾸 생겨나고
13. 가르침에 기뻐하라
14. 파랑새를 찾는 사람들 무지개를 쫓는 사람들
15. 인생의 해법은 니까야에
16. 오! 자유! 대자유인이 된다는 것은
17. 과거 이미지떄문에
18. 두려움과 죄의식을 극복하려면
19. 모략전도와 방편설법, 어디까지 진실인가
20. 법화경 방편품을 읽고
21. 언제까지 슬퍼할 것인가
22. 선거철에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려면
23. 책상은 괴로워하지 않는다
24. 훔쳐보는 것도 죄가 될까?
25. 선우(善友)가 왜 청정한 삶의 전부일까?
26. 재가자는 출가자를 넘어설 수 없다
27. 가사는 아라한의 깃발
28. 내가 괴로운 이유
29. 무착(無着)의 안온
30. 포기의 미학
31. 반야심경은 아라한찬가
32. 어떻게 해야 세상의 끝장을 볼 수 있을까?
33. 오래 살아야 하는 이유
34. 부채없이 음식을 즐기려면
35. 눈 있는 자들은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36. 개처럼 살 것인가 사자처럼 살 것인가?
37. 오취온(五取溫) 이해하기
글은 담마에 대한 것이다. 경전을 근거로 한 글이다. 경전을 읽고서 느낌에 대한 글도 있고 일상에서 보고 듣고 느낀 것에 대하여 담마를 근거로 쓴 것도 있다. 모두 진리에 대한 글이다.
내가 경전에 크게 의지하는 것은?
경전을 보면 가슴이 뛴다. 어느 것 하나 버릴 것이 없다. 어떻게 옛날 사람들이 이런 생각을 했는지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이런 진리를 모르고 지나쳤다면 억울 할 것 같다.
진리의 말씀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함없다. 과학문명이 고도로 발달한 에이아이(A.I)시대라고 하지만 오온에서 일어나는 현상이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고, 실체가 없다는 사실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다름 없다.
문명에는 물질문명과 정신문명이 있다. 지금은 물질문명의 시대에 살고 있다. 비행기가 하늘을 날아다니고 손안에는 작은 컴퓨터가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렇다고 하여 고대에 살았던 사람들의 정신수준은 낮은 것일까?
매일 경전을 읽는다. 공학을 전공한 사람이고 과학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이지만 경전에 크게 의지한다. 왜 그런가? 그것은 정신과 물질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제아무리 과학기술이 발달해도 그것은 물질을 탐구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미시적인 양자역학에서 거시적인 우주학에 이르기까지 결국 물질을 탐구하는 것이다. 아무리 과학문명이 발달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물질에 대한 것이다.
물질에 대하여 탐구하면 유물론자가 된다. 부처님 당시에도 유물론자가 있었다. 그런데 유물론자가 되면 정신도 물질로 본다는 것이다.
유물론자는 모든 것을 물질로 본다. 정신도 물질에서 파생된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래서 “이 세상도 없고 저 세상도 없다.”(S24.5)라고 하는 단멸론적 견해를 갖게 된다.
오늘날 과학이 발달된 에이아이시대에 살고 있다. 그래서일까 사람들은 모든 것을 합리적으로 사고한다. 눈으로 보지 않는 것은 믿지 않는다.
즉문즉설로 유명한 스님도 윤회에 대하여 부정한다. 이는 과학적 합리주의에 의한 것이다.
불교에도 과학적 합리주의가 도입되면 내생과 윤회는 부정되기에 이른다. 그러다 보니 오로지 현세에 대한 것만 이야기한다. 지금 여기에서 행복만을 말하는 것이다.
물질문명 시대에 오로지 물질만을 강조하면 이를 유물론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다만 과학적이기 때문에 ‘과학적 유물론’이라고 칭할 수 있다.
오늘날 대부분 사람들은 과학적 유물론자와 같다. 과학적 합리에 바탕을 두기 때문에 자신의 눈으로 보지 않는 것은 믿지 않는다. 당연히 내생, 전생, 윤회와 같은 정신적 영역은 믿지 않는다. 더 나아가 부정한다. 즉문즉설로 유명한 스님도 윤회를 부정한다.
경전을 읽다 보면 놀라움으로 가득하다. 인식의 지평을 넓혀 주기에 충분하다. 이천오백년전에 이런 생각을 했다는 것이 놀랍다. 그런데 이런 가르침은 시대를 초월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과학문명이 발달한 에이아이 시대라고 하지만 부처님 가르침은 여전히 유효하다. 왜 그럴까? 그것은 정신적 영역이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정신적 영역을 설했다. 지금 입장에서 본다면 미개한 시대 때 설한 것이다. 단지 물질적은 영역으로 본다면 부처님 당시는 원시시대나 다름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정신영역은 물질영역과 다르다.
부처님 가르침을 접하면 정신영역의 진수를 맛본다. 경전과 논서를 읽어 보면 정신문명의 극한을 보는 것 같다. 이미 이천오백년 전에 정신문명은 다 이루어진 것이다.
부처님은 깨달은 사람이다. 그런데 부처님의 깨달음에 대하여 “아눗따라 삼보디라”고 한다. 이는 무상정각을 말한다. 더 이상 위가 없는 깨달음을 말한다. 더 이상 깨달을 것이 없는 지극히 원만하고 올바른 깨달음을 말한다.
부처님의 깨달음을 매일 접하고 있다. 이는 진리의 말씀이다. 그런데 진리의 말씀은 늘 새롭다는 것이다. 아직 깨달음의 경지에 올라가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나의 삶도 축복이고 죽음도 축복
오늘 아침 커피를 만들다가 도자기를 깨먹었다. 언젠가는 일어날 일이었다. 마침 그날이 오늘인 것이다. 사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지금 살아 있어도 내년에도 살아 있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내일 살아 있으리라는 보장도 없다. 몸은 시시각각 무너져 가고 어떤 사고가 일어날지 모른다. 이럴 때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야 할까?
대부분 사람들은 즐기며 살아간다. 하루하루 감각을 즐기는 삶을 사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어떤 이는 눈과 귀 등 감각기관이 있는 것은 감각을 즐기기 위해서 있다고 말한다.
감각을 즐기는 삶을 사는 자에게 반갑지 않은 것이 있다. 병이 들면 감각을 즐길 수 없어서 절망할 것이다. 그래서 사는 재미를 느끼지 못할 것이다. 대부분 죽으면 끝이라는 단멸론적 사고 방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극단적 선택을 하기도 한다.
부처님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은 내생과 윤회를 믿는다. 이는 업과 업의 과보를 믿는 것과 같다. 이는 죽으면 끝이라는 유물론자가 아닌 것과 같다.
진리를 따르는 자들은 정신적 재산을 중요하게 여긴다. 이는 공덕 쌓는 것으로 나타난다. 내생을 위한 공덕쌓기를 말한다. 그래서 보시공덕, 지계공덕, 수행공덕을 쌓는다.
공덕은 정신적 재물에 대한 것이다. 그런데 공덕을 쌓아 놓으면 내생에 든든한 의지처가 된다는 것이다. 이는 “이러한 공덕은 저 세상에서 뭇삶들에게 의지처가 되리.”(S1.32)라는 가르침으로도 알 수 있다. 죽음의 침상에 누웠을 때도 미소 지으며 죽을 것이다.
가장 이상적은 죽음은 다시 태어나지 않는 것이다. 청정한 삶을 살아 탐, 진, 치로 대표되는 모든 오염원을 제거했을 때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다하게 된다. 그래서 “태어남은 부서졌고, 청정한 삶은 이루어졌고, 해야 할 일을 다해 마쳤으니,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라고 아라한 선언을 하게 된다.
아라한은 불사(不死)가 된 자를 말한다. 불사가 되었을 때 “나의 삶도 축복이고 죽음도 축복이다.”(Ud.45)라고 말할 것이다. 더 이상 태어날 일이 없을 때 죽음이 축복이 되는 것은 자명한 것이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이다. 어제와 오늘은 다르지 않다. 작년과 올해도 다르지 않다. 십년전과 올해도 다르지 않다. 그것은 부처님 가르침과 함께 사는 것이다.
경전을 읽다가 좋은 문구가 발견되면 공유하고 싶어 진다. 그래서 글로 남긴다. 이런 글이 쌓이고 쌓여서 수천개가 되었다. 마침내 한권의 책으로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블로그에 들어가면 누구나 다운 받을 수 있다.
2024-01-09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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