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절망의 나날에서 희망을

담마다사 이병욱 2024. 2. 11. 09:42

절망의 나날에서 희망을
 
 
오늘 아침 햇살이 찬란하다. 작은 백권당 창에 비친 햇살이 식물에 비친다. 북동향이라서 겨울에는 잠깐 들어 오고 만다. 그럼에도 오늘 아침 희망을 보았다.
 
새로울 것 없는 일상이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이다. 그렇다고 식사가 대사가 되는 일상은 아니다. TV나 유튜브를 시청하는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일상이 되어서는 안된다.
 
무언가 움직이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일상이 되어야 한다. 글쓰기만한 것이 없다. 이렇게 아침 일찍 백권당에서 자판을 두들기고 있는 것은 오래된 일상이다.
 
사람은 날씨에 따라 기분이 달라진다. 날씨가 맑으면 기분이 좋아지고 날씨가 흐려지면 기분이 쳐진다. 주식거래 하는 사람들은 주가에 따라 기분이 달라질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주변 상황에 따라 즐거움과 괴로움이 발생하는 것을 뜻한다.
 
사람들은 늘 행복하기를 바란다. 지금 행복한 자는 이 행복이 오래 지속되기를 바란다. 지금 괴로운 자는 한시바삐 이 괴로움에서 벗어나 행복한 상태로 되기를 바란다. 그러나 희망사항일 뿐이다. 바란다고 되는 것은 아니다. 근본적인 대책을 세워야 한다.
 
괴로움을 넘어서 ‘절망’에 빠질 때가 있다. 자신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을 때를 말한다. 이럴 때 십이연기에 언급되어 있는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과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 생겨난다. 이 모든 괴로움의 다발들은 이와 같이 생겨난다.”(S12.2)라는 문구를 떠올린다.
 
모든 것은 태어남에 원인이 있다. 태어나지 않았더라도 괴로움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괴로움에도 종류가 있다는 것이다. 이는 태어남, 늙음, 병듦, 죽음이라는 근본적인 괴로움을 말한다. 이를 사고(四苦)라고 말한다.
 
사고는 인식되는 것도 있고 인식되지 않는 것도 있다. 사고에서 괴로움으로 인식되는 것은 늙음과 병듦이다. 둘 중에서도 병드는 것이 진짜 괴로움이라고 볼 수 있다. 누구나 알고 누구나 겪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늙음도 괴로움일까? 부처님에 따르면 늙어가는 것도 괴로움이라고 했다. 이는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 모른다. 이 젊음과 이 건강이 계속 유지되면 좋으련만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늙어가기 때문이다. 이른바 괴고성, 즉 변화에 따른 괴로움이라고 볼 수 있다.
 
태어남도 괴로움이고 죽음도 괴로움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런 두 가지 괴로움은 잘 느껴지지 않는다. 왜 그런가? 직접 체험이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왜 그런가? 태어날 때 그 때를 기억하지 못한다. 자의식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죽을 때 그 때를 기억하지 못한다. 죽은 다음에 돌아오지 않기 때문이다.
 
사고에서 현실적으로 경험되는 것은 늙음과 병듦으로 인한 괴로움이다. 그런데 부처님은 사고에 삼고를 더해서 말씀하셨다. 그것은 “사랑하지 않는 것과 만나는 것도 괴로움이고 사랑하는 것과 헤어지는 것도 괴로움이고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도 괴로움이다.”(S56.11)라는 가르침이다. 이를 한자어로 애별리고, 원증회고, 구부득고라고 한다.
 
부처님은 사고와 팔고를 말씀하셨다. 그런데 상식적으로는 사고에 삼고를 더한 칠고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사고에서 생과 사를 빼버리면 오고가 된다.
 
사람들은 일생에서 오고(五苦)로 살아간다. 이는 자신을 기준으로 한 것이다. 타인을 기준으로 한다면 팔고가 되어야 한다. 태어남과 죽음은 타인에게서 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과연 태어남을 괴로움의 범주로 넣을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부처님은 태어남도 괴로움이라고 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정반대로 태어남을 축복이라고 보고 있다. 자식이 태어나거나 손자가 태어나면 축복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태어남은 명백하게 괴로움으로 나타난다.
 
태어남이 왜 괴로움일까? 가문이 좋은 부자집에 태어난 것은 축복일 것이다. 훌륭한 부모를 만나서 좋은 환경에서 일평생 살아 간다면 최상의 삶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왕권과 같은 삶을 살아도 천상만 못할 것이다.
 
인간의 백년은 천상에서 하루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의 부귀영화는 천상에 비하면 먼지에 지나지 않다. 그래서일까 천상에 태어나고자 한다. 천상에 태어나서 수명대로 복대로 살고자 한다.
 
누구든지 오래 살고자 한다. 그것도 행복하게 살고자 한다. 그래서 옛날에는 회갑잔치 할 때 수와 복을 말했다. 천상에서의 삶은 수와 복이 보장되는 세계이다.
 
인간은 수명이 보장되어 있지 않다. 이 말은 언제 죽을지 알 수 없음을 말한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인간은 업대로 사는 것을 말한다. 과거 전생에 지은 업이 언제 어떻게 작용할지 모른다. 그래서 인간은 언제 어떻게 죽을지 알 수 없다. 인간의 수명은 보장되어 있지 않는 것이다. 이에 반하여 천상의 수명은 보장되어 있다. 이는 불교적 세계관에서 세계도표를 보면 알 수 있다. 여러 종류의 천상이 있는데 모두 수명이 보장되어 있는 것이다.
 
수명이 보장되어 있는 것은 큰 축복이다. 기대수명이 있기는 하지만 나에게도 적용되리라는 보장은 없다. 당장 한시간 후의 운명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수명이 보장되어 있다는 것은 큰 축복이다. 마치 임기가 보장되어 있는 사람과도 같은 것이다.
 
직장인들은 불안하다. 언제 어떻게 해고될지 모른다. 사업이 잘 되지 않으면 정리해고 될 수도 있다. 그래서 정년이 보장되지 않는다. 이에 반하여 공무원은 정년이 보장되어 있다. 더구나 신분도 보장되어 있고 연금도 보장되어 있다. 이런 삶은 천상의 삶이나 다름 없다.
 
인간의 삶은 늘 불안하다. 늘 죽음의 공포에 떨어야 한다. 이는 수명이 보장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인간은 늘 굶주림에 떨어야 한다. 일을 하지 않으면 굶어야 할 것이다. 마치 축생 같은 삶이다. 이에 반하여 천상의 삶은 복과 수명이 보장되어 있다.
 
천상도표를 보면 수많은 천상이 있다. 욕계에는 육천이 있다. 자세히 보면 수명이 다르다. 수명이 다른 만큼 복도 다를 것이다. 가장 높은 천상일수록 수명도 길고 복도 많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바라는 것이다. 마치 현실에서 공무원의 삶을 보는 것 같다.
 
 
사람들은 행복하게 살고자 한다. 이 말은 불행하게 사는 것을 원하지 않음을 말한다. 그러나 아무리 천상과 같은 삶을 살아도 끝은 있기 마련이다. 이는 태어남이 있기 때문이다. 한번 태어난 존재는 언젠가는 죽기 마련이다. 지금 왕족과 같은 풍요와 천상과 같은 행복을 누리고 있는 자라도 죽음 앞에서는 속수무책이다. 그 전 단계로서 노화와 질병이 있다. 이때 괴로움을 맛본다. 어떤 괴로움인가? 경전에서는 이를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라는 다섯 글자로 표현했다.
 
괴로움에도 종류가 있다. 크게 육체적 것과 정신적인 것이 있다. 그런데 경전에서는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라 하여 다섯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이는 마치 오온을 색, 수, 상, 행, 식으로 구분하여 설명하듯이, 괴로움도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 이렇게 다섯 가지로 구분하여 설명하는 것과 같다.
 
초기경전을 보면서 느낀 것이 있다. 그것은 매우 구체적이라는 것이다. 이는 한역경전과 비교된다. 소리글자와 뜻글자의 차이라고 본다. 한역에서는 고라는 한글자로 나타내는 경우가 많지만 니까야에서는 슬픔(soka), 비탄(parideva), 고통(dukkha), 근심(domanassa), 절망(upāyāsa)이라 하여 구체적으로 표현해 놓았다.
 
괴로움을 나타내는 복합어는 ‘소까빠리데와둑카도마나수빠야사 (sokaparidevadukkhadomanassūpāyāsā)’이다. 이는 슬픔(soka), 비탄(parideva), 고통(dukkha), 근심(domanassa), 절망(upāyāsa)라는 다섯 가지 단어가 한단어로 표현된 것이다. 그런데 이런 복합어는 십이연기 등을 포함하여 니까야에 수도 없이 등장한다는 사실이다.
 
지금 행복하다고 하여 이 행복이 오래 가지 않는다. 언제 어느 때 돌아설지 모른다. 그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 중에 하나에 처해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 중에서도 가장 괴로운 것은 아마도 우빠사야(upāyāsa), 즉 절망일 것이다.
 
사람은 왜 절망하는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지만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이는 어쩌면 운명적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태어남이 있으면 죽음이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은 절망적이다. 이런 사실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부처님은 “이것이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이다.”라 하여 고성제를 설했다. 괴로움도 진리라고 할 수 있을까? 더구나 거룩한 진리라고 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사고를 보면 알 수 있다.
 
 
부처님은 생, 노, 병, 사가 괴로움이라고 했다. 이 말을 들은 사람은 반신반의할 것이다. 노와 병은 괴로움이라는 것을 알겠는데 생과 사는 잘 와 닿지 않는 것이다. 이럴 때 애별리고와 원증회고외 구부득고를 설하면 어떻게 될까? 어느 정도 귀기울일지 모른다. 왜 그런가? 자신의 삶에서 겪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부처님은 결론적으로 “줄여서 말하지면 다섯가지 존재의 집착다발이 모두 괴로움이다. (sakhittena pañcupādānakkhandhā dukkhā)”(S56.11)라고 했다. 오온에 대하여 집착하는 것이 괴로움의 근본이라는 것이다.
 
부처님이 고성제를 설했을 때 어떤 반응을 보일까? 잘 들어 보면 자신에 대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결정적으로 오온에 대한 집착이 모든 괴로움의 근본이라고 했을 때 이를 진리로써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법의 수레바퀴게 오늘날까지 줄기차게 굴러 왔다고 본다.
 
 
 
한번 형성된 것은 사라지기 마련이다. 이것은 진리이다. 꼰당냐가 부처님의 사성제 설법을 듣고 “무엇이든 생겨난 것은 그 모두가 소멸하는 것이다. (ya kiñci samudayadhamma sabbanta nirodhadhammanti)”라며 진리의 눈이 생겨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이는 다름 아닌 희망의 메시지이다.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라는 괴로움도 사라지게 할 수 있다.
 
때로 절망을 느낀다. 괴로움중에서 최상이다. 절망(upāyāsa)이라는 괴로움은 슬픔(soka), 비탄(parideva), 고통(dukkha), 근심(domanassa)보다 더 센 것이다. 마치 죽을 것 같은 괴로움이다.
 
절망은 죽음보다 더욱더 괴로운 것이다. 그런데 절망할 때 모든 것을 포기한다는 것이다. 모든 것을 포기할 때 오히려 마음이 차분해진다. 이는 집착을 내려 놓았기 때문이다. 오온에 대한 집착을 내려 놓은 것이다.
 
오늘 아침 희망을 보았다. 그것은 새로운 태어남이다. 마치 아침 햇살을 맞이하는 것 같다. 포기에 따른 새로운 희망이다. 그것은 보리수에서 나타났다.
 

 
백권당에 보리수가 있다. 페이스북친구 박영빈 선생이 선물로 준 것이다. 잘 키우겠다고 말하면서 정성을 다해서 보살폈다. 그러나 기대와는 반대로 팔개월이 넘은 현시점에서 보리수 잎은 모두 다 지고 말았다.
 
이를 어찌해야 할까? 준 사람에게 미안하기 그지가 없게 되었다. 그러나 한가닥 희망을 가졌다. 보리수 잎이 져도 다시 싹이 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보리수 잎이 다 져버리고 말았다. 한가닥 희망을 갖고 분갈이를 하기로 했다. 가지만 앙상하게 남은 보리수를 수경으로 재배했다. 물에 영양성분을 첨가하기로 했다.
 

 

 
보리수를 살려야 한다. 흙을 새로 사왔다. 이제는 단골이 된 명학꽃집에서 한포대에 삼천원하는 영양이 풍부한 흙을 구입했다. 그리고 아끼는 큰 도자기 화분에 분갈이를 했다.
 
보리수는 살 수 있을까? 페이스북에 김영란 선생이 보리수 키우는 이야기를 올렸다. 사진을 보니 보리수가 잘 자라고 있다. 이에 분갈이한 것을 알리며 “새로 피는 기적이 일어날 수 있을까요?”라며 글을 남겼다.
 

 
김영란 선생은 격려해 주었다. 반드시 잎이 필 것이라고 써 놓았다. 이에 막연히 희망을 가졌다. 싹이 나지 않으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포기하니 마음이 편했다.
 
오늘 아침 햇살이 찬란했다. 혹시나 해서 앙상한 가지를 살펴 보았다. 무엇인가 삐죽 튀어 나온 것이 보였다. 눈을 더 가까이 대었다. 놀랍게도 싹이 올라오고 있었던 것이다!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살다보면 절망할 때가 있다. 아무런 희망을 가지지 못할 때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다. 포기의 상태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포기상태가 되면 마음이 편하다는 것이다. 오온을 내려 놓은 상태가 된다. 오온에 집착하지 않은 상태가 된다. 절망 속에서 희망을 보았다. 오늘 아침 보리수에서 잎이 나왔다. 나에게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절망의 나날에서 희망을 본 것이다.
 
 
2024-02-11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