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어떻게 적극적 공리주의를 실천할 것인가

담마다사 이병욱 2024. 2. 14. 10:08

어떻게 적극적 공리주의를 실천할 것인가
 
 
엘리베이터에 쓰레기가 떨어져 있다. 누군가 양심을 버린 것 같다. 어제 밤에는 하나가 떨어져 있었는데 오늘 아침에는 두 개가 되었다.
 
사람들은 이상한 심리가 있다. 쓰레기가 떨어져 있으면 주우려 하기 보다는 그 자리에 또 다른 쓰레기를 버린다는 사실이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쓰레기봉투가 쌓여 있는 곳에 담배꽁초를 버리는 식이다.
 
누군가 쓰레기를 버리면 그 곳은 쓰레기장이 된다. 이는 사회학자들에 의해서 실험적으로 증명된 것이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슬금슬금 버리게 되어서 쓰레기 투기장이 된다.
 
깨진 유리창이 있다. 유리창을 깨진 채로 방치하면 어떻게 될까? 아마 쓰레기장이 될 것이다. 버려도 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별다른 생각 없이 담배꽁초 등을 투기한다.
 
지저분한 곳에서는 지저분한 것이 꼬인다. 아파트 엘리베이터 한쪽 구석에 작은 휴지조가리를 어제 밤에 보았다. 줍지 않았다. 손만 더럽게 할 것 같았다. 코 푼 것인지 모른다. 미화원이 있기 때문에 치울 줄 알았다. 그런데 오늘 아침 엘리베이터를 탔더니 하나 더 있는 것이었다. 쓰레기가 쓰레기를 부른 것이다.
 

 
누가 버린 것일까? 아파트 한동에 무려 50가구가 산다. 엘리베이터를 중심으로 양쪽에 25가구씩 50가구가 사는 것이다. 한 가구당 세 명만 잡아도 150명이 이 비좁은 공간에서 살아 간다.
 
눈에 익은 사람들이 있다. 주로 담배 피우러 가는 사람들이다. 나이가 든 노년 층 사람들이다. 경비실 뒷편이 흡연장소가 되었다. 흡연금지구역임에도 노인들은 아랑곳 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젊은 사람들도 그곳에서 담배를 피운다.
 
담배피는 노인들은 사오명 된다. 나이도 비슷한 것 같다. 담배를 인연으로 만난 사람들이다. 그래서인지 그들은 만날 때 서로 인사한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담배피는 사람을 만나면 담배연기가 역겹다.
 

 
이 아파트에 이사 온지 4년 되었다. 소형 아파트이기 때문에 다양한 사람들이 산다. 독거노인도 있는 것 같다. 신혼부부도 있다. 젊은 직장인 부부도 있다. 장년도 있고 중년도 있다. 형편에 맞추어 사는 사람들이라고 볼 수 있다.
 
사람들은 자신이 살고 있는 곳이 좋은 환경이기를 바란다. 공동주택에서 살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소음이 나면 동 전체에 퍼진다. 누군가 못이라도 하나 박으면 온 동 전체에 울림이 퍼진다. 놀랍게도 50가구 150명가량 사는 동이지만 마치 산중에 사는 것처럼 고요하다. 이는 사람들이 일종의 무언의 룰을 지키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모여 살다 보면 공공의 적이 없지 않을 수 없다. 특히 밀집되어서 사는 도시에서 그렇다.
 
아파트는 대로 바로 옆에 있다. 무려 왕복 10차선의 대로이다. 그러다 보니 차량소음에 시달린다. 유리가 이중으로 되어 있어서 창만 닫으면 그래도 견딜만하다. 그러나 견딜 수 없는 소음이 있다. 그것은 ‘차량 폭탄음’이다.
 
종종 폭탄음 차를 볼 수 있다. 대부분 고급승용차이다. 그것도 외제차이다. 젊은 층 사람들이 폭탄음을 내며 거리를 질주할 때 짜증을 불러 일으킨다. 승용차 폭탄음보다 더 심한 것은 오토바이 폭탄음이다.
 
오토바이 폭탄음은 주로 배달오토바이에서 볼 수 있다. 그들은 폭탄음을 연발하며 쏜 살같이 달려간다. 너무 빨라 확인할 방법도 없다. 고요한 아파트에 폭탄음으로 인하여 왕짜증을 유발한다. 이럴 때 “저렇게 못된 짓 하는 자는 틀림 없이 악처에 떨어질 것이다.”라는 저주의 말이 절로 나오게 된다.
 
대부분 사람들은 착하게 살아간다. 어떤 기준인가? 이는 “남에게 폐 끼치지 않고 삽니다.”라고 말하는 것으로 알 수 있다. 남에게 피해 주지 않고 사는 것에 대하여 착하게 산다고 보는 것 같다. 이는 ‘소극적 공리주의’라고 볼 수 있다.
 
공리주의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소극적 공리주의이고 또 하나는 적극적 공리주의이다. 남에게 폐 끼치지 않고 사는 것은 소극적 공리주의인 것은 당연하다. 그렇다면 적극적 공리주의는 어떤 것인가? 타인을 배려 하는 삶이라고 말할 수 있다.
 
불교에서는 자리이타(自利利他)를 말한다. 자신도 이롭게 하고 타인도 이롭게 하는 삶인 것이다. 또 다른 말로 풀이하면 자신을 이익 되게 실천하고 동시에 타인도 이익되게 실천하는 것이다. 한마다로 이 사회에 이 나라에 보탬이 되는 삶을 사는 것이 적극적 공리주의라고 말할 수 있다. 과연 나는 적극적 공리주의를 실천하고 있는가?
 
오늘 아침 일터로 가는 길에 엘리베이터에서 쓰레기를 보았다. 어제 그 쓰레기 옆에 하나가 더 있었다. 가래 뱉은 것인지 모른다. 더럽지만 손으로 잡았다. 그리고 바깥에 있는 분리수거 쓰레기장에 넣었다. 이런 행위는 어쩌면 적극적 공리주의에 해당될지 모른다.
 
첫 직장생활을 공장에서 시작했다. 도시 외곽에 커다란 전자단지가 있어서 통근버스를 타고 다녔다. 그런데 공장은 마치 공원처럼 잘 가꾸어져 있었다는 것이다.
 
회사는 어디를 가나 담배꽁초 하나 볼 수 없었다. 그러다 보니 누구 하나 담배꽁초 하나 버릴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래서일까 회사는 매년 수십프로 성장했다. 입사 했을 때 매출 2,500억원에 종업원이 2,500명이었는데 7년후 퇴사 했을 때는 매출 1조원에 종업원이 만명에 달했다.
 
어떤 회사는 쓰레기가 종종 눈에 띈다. 짓다 만 건물도 있다. 정리정돈이 되어 있지 않는 것이다. 이렇게 관리가 되어 있지 않으면 부도의 길로 가게 되어 있다. 엔트로피법칙이 작용한 것이다. 그래서 부도난 회사를 보면 집기 등이 내팽개쳐져 있어서 오물장처럼 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누군가 담배꽁초를 버리기 시작하면 그 곳은 쓰레기 장으로 된다. 쓰레기가 쓰레기를 부르는 것이다. 이는 경전에서도 알 수 있다.
 
부처님 당시에 수행승들은 걸식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수행승이 금품을 받으면 어떻게 될까? 부처님은 “만약 누군가 금과 은을 허용할 수 있다면 그는 다섯 가지 감각적 쾌락도 허용할 수 있습니다.”(S42.10)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쓰레기가 쓰레기를 부르는 것과 같다.
 
쓰레기는 보자 마자 주어야 한다. 그러나 대부분 그렇게 하지 않는다. 왜 그런가? 내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남이 할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도 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쓰레기는 자꾸 쌓인다.
 
쓰레기는 보이는 족족 주어야 한다. 특히 집에서 먼저 실천해야 한다. 쓰레기 버리는 사람 따로 있고 쓰레기 줍는 사람 따로 있어서는 안된다. 먼저 본 사람이 주어야 한다. 이는 "세존이시여, 저희들 가운데 가장 먼저 마을에서 탁발하여 돌아오는 자가 자리를 마련하고, 음료수와 세정수를 마련하고 남은 음식을 넣을 통을 마련합니다.”(Vin.I.352)라는 가르침으로도 확인 된다. 이런 원리를 집 바깥에서도 실천해야 한다. 아마 이것이 ‘플로깅 운동(Flogging Movement)’일 것이다.
 
플로깅무브먼트, 이 말을 처음 접한 것은 두 달 되었다. 불교환경연대 이해모 선생이 페이스북에 올린 웹포스터를 보고 알았다. 검색해 보니 이제 전세계적인 환경운동이 되었다. 취지는 먼저 본 사람이 먼저 줍는 것으로 본다.
 
플로깅은 운동은 이미 오래 전에 있었다. 단지 용어만 새로 생긴듯하다. 어떤 것인가? 이는 안양중앙시장 벽에 부착된 슬로건으로도 확인된다. 이는 “이왕에 할일이라면 최선을 다하자! 누가해도 할 일이라면 내가 먼저 하자! 언제해도 할 일이라면 오늘 하자!”라는 슬로건을 말한다.
 

 
이 세상에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 있다. 그것은 명상하는 사람이다. 두 눈을 감고 두 손을 모으고 좌선하는 모습은 아름답다. 한발 천천히 옮기며 마음을 발에 두는 행선하는 모습도 아름답다. 그런데 좌선하는 것 못지않게 아름다운 장면은 떨어져 있는 쓰레기를 줍는 모습이다.
 
쓰레기 줍는 사람들이 있다. 노인들이 집단으로 다니면서 쓰레기를 줍는다. 아마 노인 일자리 보장 차원에서 시행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또 하나는 성당에 다니는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쓰레기 줍는 장면도 포착된다. 이런 것은 자발적이 아닌 타율적 행위에 가깝다.
 
기도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한다고 했다. 수행 역시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한다. 너른 명상홀에서 수십명이 함께 명상 할 수 있지만 마치 골방에서 기도하듯이 자신만의 공간에서 좌선을 하고 행선을 하는 것은 아름답다. 설령 혼자 한다고 해도 보아주는 사람이 없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천신이 지켜 보고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살고 있는 아파트 단지는 비교적 깨끗한 편이다. 관리가 잘 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가로가 130미터에 세로가 70미터인 단지에 무려 300세대가 마치 닭장처럼 살고 있지만 혼란은 일어나지 않는다. 이는 각자가 남에게 폐 끼치지 않고 살겠다는 무언의 약속을 지키는 것과 같다. 그럼에도 가끔 티끌은 보인다. 엘리베이터 안에 버려진 쓰레기 같은 것이다.
 
플로깅라이프를 실천하고자 한다. 먼저 가정에서부터 실천해야 한다. 방이나 거실에 쓰레기가 떨어져 있으면 먼저 보는 사람이 주어야 한다. 물건이 흐트러져 있으면 정돈해 놓아야 한다. 신발도 바르게 놓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아직까지 신발정리는 잘 되지 않는다.
 
플로깅라이프의 성패는 집 바깥에서 결정된다. 엘리베이터를 나서자 마자 쓰레기를 접했을 때 주어야 한다. 그러나 쓰레기가 너무 많으면 어찌할 수 없다. 누군가 버린 쓰레기에 또 쓰레기를 버려서 처치 할 수 없을 때 나의 한계를 벗어난 것이다.
 
백권당에서도 플로깅라이프를 실천하고자 한다. 사무실 복도에 작은 휴지 조각이라도 떨어져 있으면 주우려 한다. 쓰레기는 분리수거 하고자 한다. 그러나 어떤 이들 개념이 없는 것 같다. 물건을 복도에 방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복도에 백칠판이 방치되어 있는지 일주일 된 것 같다. 미화원은 버린 사람이 수거비용 딱지를 붙여서 지정된 장소로 가져가라고 종이를 붙여 놓았다. 그러나 아직까지 주인은 나타나지 않는다.
 
백칠판을 어떻게 해야 할까? 미화원이 자신의 돈을 들여서 수거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런 경우 내가 해야 할 것 같다. 내 돈 들여서 수거장으로 보내는 것이다. 이런 것도 플로깅라이프의 실천일 것이다.

소극적 공리주의와 적극적 공리주의 구분은 무엇일까? 쓰레기로 설명할 수 있다. 엘레베이터에 쓰레기를 버리지 않는 것은 남에게 폐 끼치지 않는 행위이다. 소극적 공리주의의 실천이다. 더 나아가 남이 버린 쓰레기를 줍는다면 적극적인 공리주의의 실천이다. 복도에 버려진 백칠판에 폐기물 스티커를 부착하여 버리는 것도 적극적 공리주의의 실천에 해당될 것이다.

 
 
2024-02-14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