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지겨울 때 여덟 가지 윤회의 고통을
“오! 자유! 정말로 나는 벗어났다.” 테리가타에서 뭇따 장로니가 읊은 게송이다. 장로니는 세 가지 굽은 것으로부터 벗어났다고 했다. 그 세 가지는 절구, 절구공이, 그리고 마음이 비뚤어진 남편을 말한다.
자유란 무엇일까? 여러 가지 개념이 있을 것이다. 이데올로기로서의 자유도 있고 시장경제로서의 자유도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속박으로부터 자유이다.
뭇따 장로니는 힘든 가사노동에서 벗어난 자유를 노래하고 있다. 그런데 게송에서는 비뚤어진 남편에서 벗어난 것이라고 했다. 여기서 비뚤어진 남편은 ‘곱사등이 남편’을 말한다. 장로니가 소녀 시절이었을 때 부모가 곱사등이 바라문에게 시집 보낸 것이다.
자유는 벗어남이다. 현재 나를 속박하고 있는 것에서 벗어나는 것이 자유이다. 여기서 벗어남의 다른 말은 해탈(mutta)이다. 이렇게 본다면 자유와 해탈은 동의어라고 볼 수 있다.
테리가타는 아라한이 된 여성 장로니의 해탈의 노래이다. 벗어남의 기쁨을 게송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렇다면 벗어났다고 해서 다 끝나는 것일까? 그런 것은 아니다. 완전히 벗어나야 한다. 나를 속박하고 있는 모든 것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 벗어남의 궁극은 열반이다.
해탈과 열반은 다른 것이다. 해탈이 있고 나서 열반이 있다. 물론 경전적 지식에 따른 것이다. 허리를 굽혀 힘든 일을 하고 비뚤어진 사람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자유라고 하지만 그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당장 힘든 것에서 벗어났지만 자신을 속박하고 있는 것에서는 아직 벗어나지 못했다.
나에게 가장 큰 속박은 무엇일까? 아마도 그것은 감각욕망의 갈애라 해야 할 것이다. 이는 잘 먹고 잘 살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바람은 나를 묶고 있는 밧줄이나 다름 없다.
대부분 사람들은 감각적 욕망으로 살아간다. 이는 다름 아닌 즐기며 사는 것을 말한다. 잠시도 가만 있지 않는다. 눈과 귀 등 다섯 가지 감각기관으로 즐긴다. 대부분 사람들은 오욕락으로 산다.
나를 속박하고 있는 것은 외부에만 있지 않다. 그 사람으로부터 벗어났을 때 “오! 자유! 정말로 나는 벗어났다.”라고 말하지만 그 때뿐이다. 또 다른 속박이 기다리고 있다. 내면에 있는 탐, 진, 치라는 번뇌의 뿌리를 제거하지 않는 한 여전히 갇혀 살게 된다.
어떻게 해야 현재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그것은 자신을 관찰하는 수밖에 없다. 자신을 객관화하여 지켜 보는 것이다. 그래서 “형성들로부터 벗어나기를 원한다면 다른 어떠한 것을 대상으로 할 필요없이 바로 그 형성들만을 무상, 고, 무아라고 아주 확실하게 알고 보아 평온하게 관찰할 수 있을 정도로 새기던 대로 끊임없이 새기기만 하면 된다.”(위빳사나 수행방법론 1권)라고 했다. 관찰함에 의해서 번뇌를 소멸하는 것이다.
매일 매일 경전을 읽고 있다. 새기고 싶은 내용이 너무 많다. 팔만사천이나 되는 방대한 가르침을 모두 다 외울 수 없다. 그때 그때 상황에 따라 새긴 것이 떠오른다면 훌륭한 것이다. 그 중에 하나가 버리는 것이다.
버려야 자유로워진다. 가지고 있으면 자유롭지 못하다. 그래서 버리고 또 버려야 한다. 마음의 짐도 버려야 한다. 이와 같은 버림은 부처님의 주요한 가르침 중의 하나이다. 일곱 가지 성스런 제자의 정신적 재물 중에 버림이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일곱 가지 정신적 재산이 있다. 그것은 믿음이라는 재산, 계라는 재산, 도덕적 부끄러움이라는 재산, 도덕적 두려움이라는 재산, 배움이라는 재산, 버림이라는 재산, 통찰지라는 재산을 말한다. 이 중에서 버림도 정신적 재산이 된다.
버림이라는 말은 빠알리어 짜가(cāga)를 번역한 말이다. 짜가는 ‘gift; abandoning; giving up; generosity’의 여러 가지 뜻이 있다. 선물, 포기, 관용의 뜻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버림을 뜻하는 짜가는 포기의 뜻이 더 강하다는 것이다.
버려야 벗어난다. 벗어나면 자유가 있다. 그런데 버림을 뜻하는 짜가는 십바라밀에서 출리(出離)와 같은 말이라는 것이다. 출리는 빠알리어로 네깜마(nekkhamma)를 말하는데 벗어남과 같은 말이다. 그래서 출리에 대하여“예를 들어 아내들, 아이들, 재물들과 같은 외적인 대상에 대한 집착을 자르고 출가하는 것이 일반적 초월의 길의 출리이고, 손이나 발등과 같은 신체에 대한 집착을 자르고 출가하는 것이 우월적 초월의 길의 출리이고, 목숨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출가하는 것이 승의적 초월의 길의 출리이다.”라고 설명되어 있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버리는 것은 바라밀행을 닦는 수행자에게 적극적으로 요청된다. 부처님도 보살로 살 때 버리는 삶을 살았다. 이는 다름 아닌 잘 먹고 잘 사는 것을 포기하는 삶울 말한다. 즉 감각적 욕망을 즐기는 삶을 포기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가져야 할 것도 많지만 포기해야 할 것도 많다. 선법은 가져야 하고 불선법은 포기해야 한다. 출리는 포기하는 삶이다. 진리를 위해서라면 자신이 가장 아끼는 목숨마저도 포기하는 것이다.
사람이 살다 보면 절망할 때가 있다. 절망에 이르면 포기하게 된다.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상태가 된다. 그런데 이런 상태가 되면 오히려 마음이 더 편하다는 것이다. 이를 포기에서 오는 마음의 평온이라고 해야 할까?
포기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포기 하는 삶은 현재 나를 속박하고 있는 것에서 벗어나는 삶이기도 한다. 현재 나를 옥죄고 있는 것에서 벗어났다고 해서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다. 마음이 여전히 잘 먹고 잘 살기를 바라고 있다면 속박되어 있는 것이다.
절망 속에 희망이 있다. 철저하게 무너져야 솟아날 구멍이 있다. 처절하게 고통 받아 보아야 바닥을 알 수 있다. 포기하고 또 포기해야 한다. 이는 버리고 또 버려야 한다는 말과 같다.
버리고 버렸을 때 어디까지 버려야 할까? 미니멀라이프를 실천하는 것처럼 집안에 있는 쓸모 없는 것을 다 버렸을 때처럼 마음은 후련해질 것이다. 그런데 버려야 할 것은 물건만 있는 것이 아니다. 마음의 찌든 때도 버려야 한다.
미니멀라이프는 버리기를 생활화하는 것이다. 버리는 김에 자신도 버릴 줄 알아야 안다. 이쯤 되면 극단적 미니멀라이프가 된다.
부처님은 버리라고 했다. 선종에서 말하는 방하착과 같은 것이다. 궁극적으로 나를 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초기경전을 보면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고, 이것은 내가 아니고,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오온이 나의 것이 아님을 말한다.
오온은 몸과 마음에 대한 것이다. 부처님은 몸과 마음이 나의 것이 아니라고 했다. 그럼에도 몸과 마음을 나의 것이라고 붙들고 있으면 이는 자신을 속박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 없다. 그래서 버리라고 했다. 이는 나를 포기하는 것과 같다.
나는 괴로움의 원천이다. 나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나를 붙들고 있으면 괴롭다. 남과 비교하는 것도 내가 있기 때문이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할까?
윤회하는 삶을 살고 있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그런데 윤회하는 삶은 고통이라는 것이다. 잠시 즐거움을 맛 볼 뿐이다. 애써 윤회의 고통을 잊어버리려 하는지 모른다. 이런 때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에서는 경각심의 대상이 되는 여덟 가지를 숙고해서 제거하라고 했다. 그 여덟 가지는 태어남, 늙음, 병듦, 죽음, 지옥의 고통, 과거 윤회로 인한 고통, 미래 윤회로 인한 고통, 현재 먹을 것을 구함과 관련된 고통을 말한다.
삶이 지겨울 때 여덟 가지 윤회의 고통을 생각해야 한다. 이 중에서도 과거 윤회로 인한 고통을 생각해야 한다. 경전에서는 “불행하고 가난한 사람을 보면 그대들은 ‘이 오랜 세월을 윤회하면서 우리도 한 때 저러한 사람이었다,’라고 관찰해야 한다.”(S15.11)라고 말했다.
버리고 나면 후련하다. 집착하고 있는 것을 포기 했을 때 마음이 편안하다. 비교하는 것을 포기 했을 때 평화롭다. 모든 것을 포기하면 “오! 자유! 정말로 나는 벗어났다!”(Thig.11)라고 말할 수 있다.
2024-02-20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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