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니까야모임

이 공부의 끝은 어디일까?

담마다사 이병욱 2024. 3. 11. 11:04

이 공부의 끝은 어디일까?
 
 
이 공부는 언제 끝날까? 어제도 공부했고 오늘도 공부한다. 내일도 다름 없다. 아마 늙어 죽을 때까지 계속될 것 같다. 아라한이 되기 전까지 계속될 것 같다. 그러나 아라한은 요원하다.
 
공부의 끝은 있을 것이다. 그것은 더 이상 배울 것도 없고 더 이상 닦을 것도 없는 경지에 이르는 것이다. 바로 그것은 아라한의 경지이다.
 
아라한이 되려면 단계를 거쳐야 한다. 이른바 사향사과와 열반을 말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열반이다.
 
위빠사나 스승들의 견해에 따르면 사향사과는 열반에 들어야 가능한 것이다. 열반 없는 사향사과는 있을 수 없음을 말한다. 사부니까야 주석서이자 동시에 수행지침서라고 볼 수 있는 청정도론에서도 열반에 들어야 사향사과가 될 수 있다고 했다.
 
아라한이 되려면 먼저 성자의 흐름에 들어야 한다. 수다원의 도와 과를 증득하는 것을 말한다. 이런 것은 자신만이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사실을 하는 또 다른 사람이 있다. 그것은 자신보다 정신적인 경지가 높은 사람이다.
 
깨달은 자는 깨달은 자를 알아 본다고 말한다. 이 말은 반대로 깨닫지 못한 범부는 깨달은 자를 알아 볼 수 없음을 말한다. 왜 그런가? 정신적 경지가 다르기 때문이다.
 
사다함은 수다원을 알아 본다. 아나함은 사다함을 알아본다. 아라한은 아나함을 알아본다. 이처럼 정신적 경지가 높은 사람은 자신보다 경지가 낮은 사람을 알아 본다. 이미 다 경험했기 때문에 아는 것이다.
 
초기경전을 보면 성자의 흐름에 들것을 강조하는 것 같다. 성자의 흐름에 들어야 자신을 등불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다른 것에 의지하지 않고 자신에게 의지하는 것과 같다.
 
의존적 인간에 대하여
 
사람들은 외롭다고 말한다. 특히 나이 들어 노인이 된 사람들이 외롭다고 말한다. 배우자가 먼저 사망했을 때도 외롭다고 말한다. 이는 의지하고 싶은 사람을 찾는 것과 다름 없다.
 
유튜브에 들은 것이 있다. 삼프로tv에서 들은 것이다. 어느 이혼전문변호사는 이혼당하기 쉬운 유형에 대하여 말했다. 그 중에 하나는 타인에게 의존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타인에게 의존한다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그것은 경제적 능력과도 관계가 있다. 남자가 돈을 벌지 못했을 때 여자가 돈을 벌 것이다. 이런 것이 타인에게 의지하는 대표적인 예이다.
 
의존적 인간에 대하여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갑자기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타인에게 의존하는 인간은 다름 아닌 무능력자라는 것이다.
 
이혼전문변호사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여러 가지 이혼사유가 있다. 그 중에서 의존적인 인간이 있는데 이는 경제적인 것과 관련 있다고 했다. 이는 경제적 무능력에 대한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변호사가 “무능력자가 이혼당합니다.”라는 말은 “의존적 인간이 이혼당합니다.”라고 바꾸어 말한 것 같다.
 
외롭다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니는 사람이 있다. 이런 사람은 의존적 인간이다. 달리 말하면 무능력자라고 볼 수 있다. 스스로 노력을 하지 않는 사람이다. 더 나아가 공부를 하지 않는 사람이다.
 
열반은 아득한데
 
이 공부는 끝이 없다. 가장 가까운 목표인 성자의 흐름에 들기 전까지는 멈출 수가 없다. 그러나 성자의 흐름에 들기 위해서는 열반을 체험해야 한다. 그런데 단계가 있다는 것이다. 위빠사나 16단계 지혜를 말한다.
 
나는 어느 단계에 있는가? 아직 1단계도 벗어나지 못한 것 같다. 물질과 정신을 구분하는 단계를 말한다. 그런데 1단계는 엄청나게 높은 산과 같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자아개념을 부수어야 하기 때문이다.
 
위빠사나 1단계와 2단계만 알아도 공부가 어느 정도 된 것이다. 정신과 물질을 구별하여 파악하고 조건을 파악하는 단계에만 이르러도 성공적인 삶을 사는 것과 다름 없다.
 
1단계와 2단계만 증득 해도 악처에 떨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성자의 흐름에 들지 않았기 때문에 단 한차례에 그친다. 이 단계를 ‘준수다원’이라고 한다.
 
열반을 체험하지 못하면 성자의 흐름에 들어갈 수 없다. 이렇게 본다면 열반은 아득한 것이다. 어느 세월이 위빠사나 16단계 지혜에 이를 수 있을까? 오늘도 내일도 앞을 향해 나아갈 뿐이다.
 
지적질을 당했을 때
 
금요니까야모임이 3월 8일에 열렸다. 8학년 1학기가 시작된 이래 두 번째 모임이다. 모임을 앞두고 문자를 보냈다. 올만한 사람들에게 참석을 권유한 것이다.
 
종종 충고의 말을 듣는다. 이주 전에도 그랬다. 그 분은 글에 대하여 문제를 제기했다. 글에서 자주 쓰는 표현이 불편하다고 했다. 이런 지적을 받으면 마음이 언짢다.
 
그 사람에게 지적 받은 것은 한두 번이 아니다. 무언가 일을 도모 했을 때 제동을 거는 것이다. 마치 선생이 학생에게 야단치듯 하는 것이다. 이는 아마도 그 사람이 교직에 오래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상담 전문가이기 때문에 충고하기 위한 것인지 모른다.
 
자주 지적 받으면 위축된다. 모든 것에 있어서 소극적이 된다. 이런 때 부처님 가르침을 실천해야 한다. 심념처의 한 구절이 떠 올랐다. 그것은 “괴로운 느낌을 경험하면, ‘나는 괴로운 느낌을 경험한다.’라고 분명히 안다.”(D22.18)라는 가르침을 말한다.
 
마음이 위축 되었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 이는 “위축된 느낌을 경험하면, ‘나는 위축된 느낌을 경험한다.’라고 분명히 안다.”라고 하면 될 것이다. 이는 이중으로 아는 것이 된다. 처음에는 위축된 마음을 아는 것이고 다음에는 위축된 마음에서 벗어난 마음을 아는 것이다.
 
심념처는 마음을 이중으로 아는 것이다. 이를 노팅(noting)하는 것을 왓칭(watching)한다고 말한다. 이는 마우스를 더블 클릭 하는 것으로 설명된다. 뒤의 마음이 앞의 마음을 아는 것이다. 이렇게 알게 되면 위축되는 마음은 사라질 것이다.
 
처음에는 그 사람의 지적질에 대하여 방어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내 그만 두었다. 서로 공방을 하다 보면 상처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 사람은 자존심이 센 것 같다. 자존심 센 사람에게 자존심을 상하게 하면 심하게 상처받을 것이다. 차라리 내가 참고 만다. 이럴 때  “눈 있는 자는 오히려 눈먼 자와 같고, 귀 있는 자는 오히려 귀먹은 자와 같아야 한다. 지혜가 있는 자는 오히려 바보와 같고 힘센 자는 오히려 허약한 자와 같아야 한다.” (Thag.501)라는 테라가타 게송을 떠올려 본다.
 
90년대 생 두 사람의 참여로 인하여
 
문자를 보낸 효과는 있었다. 대부분 흔쾌히 참석하겠다고 했다. 그래서 도현스님을 비롯하여 장계영, 홍광순, 김종선, 김영인, 김원숙, 정진영, 유경민 선생이 왔다.
 
모임에 참석한 사람들의 나이는 많다. 젊은 사람들 두 명을 빼면 평균연령은 60대 전반은 되는 것 같다. 그런데 90년대 생 젊은 사람 두 사람이 참석함으로 인하여 평균연령은 대폭 낮아졌다.
 
배움에 있어서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나이가 젊은 사람이나 나이가 많은 사람이나 정신연령은 차이가 없는 것 같다. 90년대 생 두 사람이 이야기하는 것을 보면 공부가 상당히 된 듯 하다.
 
3월 첫번째 니까야모임에서는 세 개의 경을 합송했다. 꽤 긴 길이의 경이다. 오온에 대한 것으로 반복구문이 많다. 읽는 것만해도 한참 걸렸다.
 
아누라다의 경’(S22.86)에 대해서 토론했다. 이 경은 사구분별에 대한 것이다.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는지 존재하지 않는지 등에 대한 것이다.
 

 
답이 없는 네 가지 명제
 
부처님의 제자 아누라다는 이교도의 사구분별에 대한 질문을 받았다. 이런 질문에 대답하면 곤혹스러워진다. 왜 그런가? 답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누라다는 부처님에게 배운 대로 “네 가지 명제로 시설하지 못합니다.”(S22.86)라고 말했다.
 
시설(施設)이라는 말은 설명이라는 말과 같다. 설명되지 않는 것은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부처님 당시 외도들은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설명하고자 했다. 이는 절대로 있다거나 절대로 없다는 등의 존재론적인 것이다.
 
먼저 공부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도움이 된다. 전재성 선생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확실히 인식의 지평의 차이를 느낀다.
 
전재성 선생은 사구에서 ‘존재하기도 하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라는 명제에 대하여 자이나교 교리와 비슷한 것이라고 했다. 왜 그런가? 부분적으로는 맞고 부분적으로 틀린 것을 말한다.
 
진리는 진실된 것이어야 한다. 어느 때는 진실이고 어느 때는 허위라면 진리가 아니다. 자이나교 교리가 그렇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 선생은 봉사가 코끼리 만지는 격이라고 설명했다.
 
선천적으로 눈 먼 사람이 있다. 이런 봉사들이 코끼리를 만졌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까?
 
어떤 봉사는 다리를 만지면서 기둥같다고 말한다. 어떤 봉사는 몸통을 만지면서 창고와 같다고 말한다.
 
자신이 만진 것은 진실일 것이다. 그러나 정상적인 눈을 가진 자의 입장에서 보면 틀린 것이다.
 
요즘 선거철이다. 유튜브를 자주 보고 있다. 보고 싶은 것만 본다. 그런데 종종 저쪽 진영 사람들의 유튜브도 본다. 정반대로 이야기를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럴 때 선천적으로 장님인 자가 코끼리를 만지는 것과 같은 것으로 본다.
 
장님들은 싸웠다. 각자 자신이 본 것이 진실이라고 했다. 심지어 그들은 주먹을 쥐고 싸웠다. 이를 지켜 본 사람은 어떤 마음이 들었을까? 우다나에 따르면 “그런데 그 왕은 즐겼다.”(Ud.66)라고 했다.
 
장님들은 한쪽 면만 본 것이다. 이는 외도들이 한쪽 면만 보고 진리라고 우기는 것과 같다. 그래서 입에 칼을 물고 싸우는 것이다. 이런 장면은 눈 있는 자가 지켜 보았을 때 코미디 같은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말했다.
 
 
어떤 수행자나 성직자들은
실로 견해들에 집착한다.
사람들이 한쪽 관점만 본다면,
서로 말다툼을 벌이고 논쟁한다.”(Ud.66)
 
 
사람들이 싸우는 것은 한쪽 관점만 보기 때문이다. 여래가 사후에 존재한다고 본다면 이는 ‘절대유’에 대한 것으로 영원주의적 관점이다. 반대로 사후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본다면 이는 ‘절대무’에 대한 것으로 허무주의적 관점에서 본 것이다.
 
사구분별은 형이상학적 논제에 대한 것이다. 그런데 형이상학적 논제는 답이 없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실재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 선생은 토끼뿔과 같은 것이라고 했다.
 
토끼뿔은 실재하지 않는 것이다. 개념적으로만 존재하는 것이다. 언어적으로 형성된 것임을 말한다. 이런 토끼뿔에 대하여 “토끼뿔은 있는가, 토끼뿔은 없는가”라며 논쟁하면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일반사람이 보아도 코미디 보는 것처럼 즐길 것이다.
 
사구분별 중에서도 매우 그럴싸한 논제가 있다. 그것은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라는 논제를 말한다. 이런 논제는 산자야 벨라뿟따가 주장한 것과 같다. 부처님의 상수제자 사리뿟따와 목갈라나도 처음에는 산자야의 제자였다.
 
전재성 선생에 따르면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라는 논제에 대하여 ‘불가지론’이라고 했다. 그런데 이런 논제는 현대 서양철학에서도 발견된다는 것이다. 이는 다름아닌 ‘현상학’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전재성 선생에 따르면 ‘판단중지’라고 했다.
 
부처님은 사구분별에 대하여 부정했다. 부분적으로는 진리일지 모르지만 전체적으로는 진리가 아님을 말한다. 마치 선천적으로 눈 먼 자가 말하는 것과 같다는 의미이다.
 
갠지스 강 모래알의 비유
 
사구분별에 대한 이야기는 니까야 도처에서 발견된다. 그 중에서 쌍윳따니까까야에 ‘시설되지 않은 것의 모음’(S44)이 가장 돋보인다. 이는 사구분별에 대하여 비유를 들어 논파했기 때문이다.
 
시설되지 않은 것의 모음에 ‘케마의 경’(S44.1)이 있다. 케마는 부처님의 80대제자 중의 한사람이다. 비구니로서 ‘위대한 지혜를 지닌 님 가운데 제일(mahā paññāna)’이라는 칭호가 있다. 사리뿟따가 비구 중에서 지혜제일이라면 케마는 비구니 중에서 지혜제일이라고 말할 수 있다.
 
빠쎄나디 왕은 케마에게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는지 등 사구분별로 물어 보았다. 이에 부처님 제자는 어떻게 답해야 할까? 케마는 “세존께서는 시설하지 않았습니다.”(S44.1)라고 말했다.
 
답이 없는 것에는 답을 할 수 없다. 질문 같지 않은 질문에는 답을 할 수 없다. 그 대신에 비유로서 알려 줄 수는 있다. 케마는 다음과 같이 비유로서 역질문했다.
 
 
대왕이여, 어떠한 경리나 회계사나 수학자가 갠지스 강의 모래알을 두고 모래가 얼마만큼의 수이고 모래가 얼마만큼의 백 수 이고 모래가 얼마만큼의 백천 수인지 계산할 수가 있습니까?”(S44.1)
 
 
이 대목을 보면 금강경에 실려 있는 항하사가 떠오른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것임을 말한다. 무주상 보시공덕의 과보에 대하여 계산 할 수 없듯이 존재의 유무에 대하여 계산할 수 없음을 말한다.
 
니까야에서 종종 금강경 문구를 발견한다. 금강경은 후대에 성립되었기 때문에 니까야가 원조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번에 니까야를 읽다가 항하사를 발견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비유가 다르다. 금강경에서는 복덕의 과보로 비유했으나 니까야에서는 외도의 견해를 논파하기 위해서 비유했다는 것이다.
 
케마는 존재론에 대하여 갠지스 강의 모래의 비유를 들어 설명했다. 이는 존재론은 설명될 수 없음을 말한다. 갠지스 강의 모래를 세는 것만큼 어려운 일임을 말한다.
 
갠지스 강의 모래알을 언제 다 셀 수 있을까? 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존재론에 대하여 있다 또는 없다 등의 사구에 대하여 답하는 것도 불가능한 것이다.
 
답하기 불가능한 것에 대하여 답을 할 수 없다. 케마는 갠지스 강의 모래알 비유 뿐만 아니라 또 하나의 비유를 든다. 그것은 “대왕이여, 어떠한 경리나 회계사나 수학자가 큰 바다의 물을 두고 물이 얼마만큼의 뒷박이고 물이 얼마만큼의 백 됫박이고 물이 얼마만큼의 백천 됫박인지 계산할 수가 있습니까?”(S44.1)라는 비유를 말한다.
 
진리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말로 설명하는 순간 진리가 아닌 것이 되어 버린다. 왜 그런가 진리가 개념화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리는 비유로 설명될 수 있다.
 
케마는 빠쎄나디 왕에게 비유를 들어 설명했다. 이에 왕은 갠지스 강의 모래알의 비유와 바다 물의 됫박의 비유를 이해했다. 이는 여래가 사후에 존재하는지 존재하지 않는지 등 사구로 분별하는 것은 의미가 없음을 말한다.
 
만일 어떤 이가 존재의 사후유무를 알기 위해서 갠지스 강의 모래알을 샌다면 어떻게 될까? 모래알을 다 새기도 전에 죽고 말 것이다. 또한 바다의 물을 됫박으로 다 퍼내기도 전에 죽고 말 것이다.
 
존재론에 대하여 설명하고자 한다면 이는 갠지스 강의 모래알을 새는 것과 같고 바다의 물을 됫박으로 퍼내는 것과 같다. 이런 행위는 쓸데 없는 짓이다. 그래서 케마는 사구분별하는 것에 대하여 “옳지 않습니다.”(S44.1)라고 말했다.
 
 
부처님이 사구분별에 대하여 답하지 않은 것은 옳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사구분별은 답이 없는 것임을 말한다. 또한 사구분별하는 것은 허망한 정열인 것을 말한다. 답도 없는 형이상학적 논제에 대하여 연구하고 토론하는 것은 시간낭비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부처님은 독화살 비유로 설명했다.
 
아누라다의 경은 두 번 발견된다. 한번은 ‘존재의 다발 모음’(S22)이고 또 하나는 ‘시설되지 않은 것의 모음’(S44)이다. 두 모음에서 내용은 같다. 다만 비유가 다르다. 공통적으로 “예전이나 지금이나 나는 괴로움과 괴로움의 소멸에 관해서 시설한다.” (S22.86, S44.1)라는 가르침이 있다.
 
먼 거리를 이동하는 것이 힘들기는 하지만
 
금요니까야모임 8년 째이다. 이 모임의 공부는 끝이 없다. 이 공부를 언제까지 해야 할까? 아마 이 교재를 다 볼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이삼년 갈 것 같다.
 
안양에서 고양까지는 먼 거리이다. 지난번 모임 때는 전철과 지하철로 이동했다. 차를 가져 가지 않은 것이다.
 
차가 없으면 매우 불편하다. 전철과 지하철 타는 것만 한시간 사십분 가량 걸린다. 여기에 기다리는 시간과 버스 타는 시간을 추가해야 한다. 모임이 있기 세 시간 전에는 움직여야 한다.
 
전철로 이동할 때 눈을 감았다. 스마트폰을 볼 수는 있으나 피곤하다. 차라리 눈을 감는 것이 낫다. 이렇게 어렵게 도착했다.
 
모임에 오래 다니다 보니 지치기도 한다.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반복학습하는 것 같다. 그러나 듣다 보면 얻는 것도 많다. 토론하는 것을 듣는 것만으로도 공부가 된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렇게 글로 정리하는 것이 더욱더 공부가 된다.
 
매일 글을 쓰는 것은 일상이다. 이 글이 끝나면 좌선에 들어간다. 글 쓸 때 형성된 집중을 좌선에 활용하는 것이다. 그런데 모임에 참여하는 것도 습관이 되어야한다는 것이다.
 
모임에 한번 빠지면 다음에도 빠진다. 이는 관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임에 계속 참여하면 계속 나가게 된다. 이 또한 관성이 있기 때문이다.
 
먼 거리를 이동하는 것은 힘들다. 더구나 8년동안 참여하다 보니 지치기도 하다. 그러나 모임을 이끌어 가는 전재성 선생은 여전하다.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이는 자비의 마음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인지 모른다. 이런 생각을 하면 힘을 내게 된다.
 
 
2024-03-11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