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니까야모임

답이 없는 형이상학적 질문

담마다사 이병욱 2024. 2. 28. 11:40

답이 없는 형이상학적 질문
 
 
앞으로 나아갈 수도 없고 뒤로 물러설 수도 없다. 진퇴양난이다. 이를 어찌해야 할까? 참으로 답답했다. 해법은 없을까?
 
금요니까야모임 8년차 15학기가 2024년 2월 23일 금요일에 개강되었다. 두 달 이상 되는 방학을 끝내고 신학기를 시작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학교처럼 가르치고 배우는 것이 아니다. 듣고 토론하는 식이다.
 
늘 그렇듯이 고정멤버들이 모였다. 도현스님을 비롯하여 홍광순, 장계영, 방기현, 유경민 선생이 왔다. 처음 온 사람도 있었다. 김원숙 선생이다. 블로그 ‘진흙속의연꽃’에서 글을 보고 찾아왔다고 한다.
 
두 개의 경을 합송했다. 교재 오늘 부처님께 묻는다면에서 제3권 존재의 다발 모아역음에 있는 10번 경과 11번 경이다. 10번 경은 ‘수행승들이 말썽을 부리면 부처님께서 어떻게 하셨을까’가 제목이다. 이 경은 쌍윳따니까야 ‘걸식의 경’(S22.80)에 해당된다. 11번 경은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는가, 존재하지 않는가’에 대한 것이다. 이 경은 쌍윳따까야 ‘야마까의 경’(S22.85)에 해당된다.
 

야마까의 단멸론적 견해
 
여래는 사후에 존재할까 존재하지 않을까? 이에 대한 토론이 있었다. 각자 생각하고 있는 것을 말해 보는 시간이다. 다양한 의견이 있었다. 그러나 좀처럼 진도는 나가지 않았다. 하나를 생각하면 다음 것이 막히는 식이었다. 왜 그럴까?
 
야마까경은 사리뿟따존자와 수행승 야마까와의 대화에 대한 것이다. 그런데 야마까에게 “몸이 파괴되어 죽은 뒤에 단멸하여 존재하지 않게 된다.”(S22.85)라는 삿된 견해가 생겼다. 이는 부처님이 “번뇌를 소멸시킨 수행승은 몸이 파괴되어 죽은 뒤에 단멸하여 존재하지 않게 된다.”(S22.85)라는 가르침을 잘못 해석한 것이다.
 
야마까는 왜 단멸론적 견해를 가지게 되었을까? 그것은 아마도 법을 잘 이해 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결정적으로는 체험을 해보지 않았기 때문일지 모른다.
 
야마까는 죽으면 단멸한다는 말을 하고 다녔다. 이에 수행승들은 악한 견해를 가진 야마까를 우려했다. 수행승들은 법의 장군이라 불리우는 사리뿟따에게 이런 사실을 말했다. 그러자 사리뿟따는 야마까를 불러서 확인 하고자 했다.
 
야마까는 사리뿟따에게 사실대로 말했다. 야마까는 “번뇌를 소멸시킨 수행승은 몸이 파괴되어 죽은 뒤에 단멸하여 존재하지 않게 된다.”라고 알고 있던 것이다. 이에 사리뿟따 존재는 “벗이여, 야마까여, 어떻게 생각합니까? 물질은 영원합니까 무상합니까?”로 시작되는 문답식 법문을 해주었다.
 
야마까는 사리뿟따의 법문을 듣고 자신의 견해가 잘못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이는 오온 무상과 오온 괴로움, 그리고 오온무아에 대한 법문이다. 오온이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고 실체가 없다는 법문을 말한다.
 
사리뿟따는 문답식 법문을 한 다음에 “여래는 진실로 실재로 파악될 수 없습니다.”(S22.85)라고 말했다. 번뇌를 소멸한 자는 죽은 뒤에 단멸하여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한다. 단멸론을 부정한 것이다.
 
여래는 진실로 실재로 파악될 수 없다고 했다. 여기서 “진실로 실재로”라는 말은 ‘saccato thetato’를 번역한 말이다. 이 말은 진실로 ‘그렇게(tathato)’ 파악될 수 없다는 말이다. 여기서 tathato는 ‘As it is, rightly, correctly, truly’의 뜻이다.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지금 여기에서도”라고 번역했다. 이 말은 무슨 뜻일까? 오온을 존재론적으로 파악하지 말라는 말과 같다.
 
부처님은 오온에 대하여 나의 것이 아니라고 했다. 심지어 오온에 대하여 살인자라고 했다. 또한 오온에 대하여 악마와도 같다고 말했다. 그래서 오온은 나의 것이 아니고 내가 아니고 나의 자아가 아니라고 했다. 그럼에도 여래를 오온으로 파악하여 오온을 여래라고 한다든가, 오온 안에 여래가 있는 등 존재론적으로 파악한다면 단멸론에 빠질 수 있음을 말한다.
 
존재론적 질문에 대하여
 
여래는 죽어서 존재하는가 존재하지 않는가? 이런 의문은 외도들에게 있었다. 그래서 외도들은 “여래는 사후에 존재한다.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지 않는다.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기도 하고 존재하지 않기도 하다.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S22.86)라는 의문을 가지고 부처님 제자들에게 물었다. 그러나 현명한 제자들은 이런 사구를 모두 부정했다. 그래서 부처님의 제자들은 “네 가지 명제로 시설하지 못합니다.”(S22.86)라고 말했다.
 
초기경전에서 사구에 대한 것은 수도 없이 등장한다. 여러 가지로 형태를 달리 하여 나온다. 여래라는 말 대신에 ‘세상’을 넣을 수 있다. 그래서 쌍윳따까야 맛지마니까야 ‘말룽끼야뿟따에 대한 작은 경’(M63)을 보면 ‘세상은 유한한가 무한한가’ 등의 질문이 있다. 그런데 이런 질문에는 답이 없다는 것이다.
 
답이 없는 질문에는 어떻게 답해야 할까? 답이 없는 질문에는 답을 할 수가 없다. 답을 하는 순간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세상은 유한한가 무한한가’ 등의 형이상학적 질문에는 답을 하지 않았다. 무기한 한 것이다. 이는 “네 가지 명제로 시설하지 못합니다.”(S22.86)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말로 할 수 있는 것이 있고 말로 할 수 없는 것이 있다. 진리는 말로 할 수 있다. 그러나 진리가 아닌 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그래서 시설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우주는 유한한가 무한한가? 참으로 궁금하다. 부처님 당시에도 이런 의문이 있었던 것 같다. 세상은 유한한 것인지 무한한 것인지에 대한 것이다. 이는 죽음과도 관련이 있다. 죽은 다음에도 존재하는 것인지 죽음 다음에 단멸하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다. 이런 의문에 어떻게 답해야 할까?
 
부처님은 답이 없는 질문에는 답을 하지 않았다. 답을 하면 어긋난다. 그럼에도 외도들은 넌지시 물어 본다. 곤란에 빠뜨리고자 하는 것이다. 자아가 사후 존재한다고 해도 어긋나는 것이고 사후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도 어긋나는 것이다. 이는 존재론에 대한 것이다.
 
야마까는 부처님 가르침을 존재론적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이는 존재하느냐 존재하지 않느냐에 대한 것이다. 그런데 초기경전을 보면 이런 문제에 대하여 명확하게 정리되어 있다. 쌍윳따니까야 ‘깟짜야나곳따의 경’(S12.15)이 바로 그것이다.
 
깟짜야나곳따의 경에 따르면 부처님은 “세상 사람들은 대부분 존재 또는 비존재 두 가지에 의존한다.”(S12.15)라고 말했다.  여기서 존재는 절대로 존재한다는 ‘절대유’에 대한 것을 말하며 이는 영원주의적 견해를 말한다. 비존재는 절대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절대무’에 대한 것을 말하여 허무적 견해를 말한다. 그런데 절대유와 절대무는 양극단이라는 것이다.
 
양극단은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한다면 머리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절대유와 절대유는 단지 언어적으로만 존재하는 개념일 뿐이라는 것이다. 실제적인 것도 아니고 실재도 아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여래는 양극단을 떠나서 중도로 가르침을 설한다.”(S12.15)라고 했다.
 
부처님의 중도 가르침은 어떤 것일까? 이는 이어지는 가르침을 보면 알 수 있다. 부처님은 “여래는 양극단을 떠나서 중도로 가르침을 설한다.”라고 말씀하시고 나서 이어서 곧바로 “무명을 조건으로 형성이…”로 시작되는 십이연기의 가르침을 설했다.
 
부처님의 중도는 연기법이다. 연기법은 조건법이기도 하다. 어떤 것이든지 원인과 조건과 결과의 법칙에 따름을 말한다. 그러나 절대유와 절대무는 연기법을 따르지 않는다. 이 세상에 절대는 있을 수 없다. 절대로 존재한다거나 절대로 존재하지 않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있다면 개념적으로 있을 것이다. 언어로 표현 된 것으로는 있게 된다. 바로 그것은 견해이다.
 


질문이 잘못 되었다면
 
올바른 질문에 올바른 답을 할 수 있다. 질문이 잘못 되었다면 답을 할 수가 없다. 수행승 몰리야 팍구나가 “세존이시여, 누가 의식의 자양분을 섭취합니까?”(S12.12)라고 질문했다. 이런 질문은 잘못된 것이다. 이런 질문에 답을 할 수 없다. 그래서 부처님은 “그와 같은 질문은 적당하지 않다. 나는 ‘사람이 존재한다’라고 말하지 않았다. 만약 내가 ‘사람이 존재한다.’라고 말했다면 ‘세존이시여, 누가 존재합니까?’라는 질문은 옳은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S12.12)라고 말했다.
 
부처님은 제자의 질문이 잘못 되었다고 말했다. 질문할 때 “누가”라고 말하면 안되는 것이다. 왜 그런가? 이는 존재론적 질문이기 때문이다. 자아가 있을 수 없음에도 “누가”로 시작되는 질문에 어떻게 답할 수 있을까? 그래서 부처님은 적절한 질문이 아니라고 말하면서 “무엇 때문에 자양분이 생겨납니까?”(S12.12)라며 질문하는 것이 바른 질문이라고 했다. 연기법적으로 질문하라는 말이다.
 
존재론적 질문은 외도가 했다. 외도들은 이른바 ‘세상은 유한한가 무한한가’라든가, ‘여래는 존재하는가 존재하지 않는가’등의 사구로 된 질문을 했다. 모두 존재론 질문이다. 이는 다름 아닌 유무에 대한 것이다. 더 나아가 절대유와 절대무에 대한 것이다. 이런 질문에는 답이 없다. 형이상학적 질문이기 때문이다. 형이상학적 질문에는 답이 없다. 질문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형이상학적 질문은 번뇌만 야기할 뿐
 
불교에서 형이상학은 세속철학이라고 한다. “나는 누구인가”라며 의문하는 것도 형이상적 질문이다.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라며 묻는 것도 형이상학적 질문이다. 그런데 이런 질문에는 답이 없다는 것이다. 마치 ‘우주는 유한한가 무한한가’라며 묻는 것과 같다.
 
형이상학적 질문에는 왜 답이 없을까? 그것은 존재론적 질문이기 때문이다. 이는 절대유와 절대무에 대한 것이다. 영원주의와 허무주의에 대한 것이기도 한다. 이런 질문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있다고 해도 문제가 되고 없다고 해도 문제가 된다.
 
형이상학적 질문에는 답이 있을 수 없다. 외도들이 사구로 물어 보는 것은 곤혹하게 만들게 하기 위한 것도 있다. 답을 하면 문제가 된다. 그래서 답을 하지 않는 것이다. 진리가 아니기 때문에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언어적 개념으로 된 형이상학은 실제도 아니고 실재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답을 할 수 없다. 그래서 부처님은 시설하지 않았다. 그 대신에 연기법을 설했다.
 
부처님은 누군가 물어 보면 친절하게 답해 주었다. 제자가 잘 몰라서 “누가”로 시작되는 존재론적 질문을 했을 때 질문이 잘못되었음을 지적하면서 연기법적으로 설명했다. 그러나 외도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사구로 질문했을 때 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외도가 배우려는 자세로 공손하게 물어 보았을 때는 답을 했다. 연기법적으로 답을 한 것이다.
 
부처님은 형이상학적 질문에 모두 무기한 것은 아니다. 어떤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넌지시 떠보는 형이상학적 질문에는 답을 하지 않았지만 배우려는 자세를 가지고 질문한 경우에는 답했다. 제자들이 형이상학적 질문 했을 때 이를 바로 잡아 주고서 답을 한 것이다. 이는 쌍윳따니까야 ‘말룽끼야뿟따의 경’에서 독화살의 비유로 답을 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형이상학적 질문은 번뇌만 야기할 뿐이다. 실제도 아니고 실재하지도 않는 형이상학은 진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맛지마니까야 ‘모든 번뇌의 경’에 따르면, “나는 과거세에 있었을까?”(M2)로 시작되는 형이상학적이고 존재론적 질문에 대하여 정신활동을 기울이지 말아야 할 것에 정신활동을 기울이는 것과 같다고 말씀하시면서 “아직 생겨나지 않은 번뇌가 생겨나고, 이미 생겨난 번뇌가 성장한다.”(M2)라고 했다.
 
형이상학적 질문에는 답이 없다. 답을 하려고 하면 할수록 오리무중에 빠진다. 번뇌만 일어나는 것이다. 이는 쓸데 없는 것에 마음을 기울이는 것과 같다. 그래서 부처님은 율장에서 “수행승들이여, 세속철학을 배우지 말아야 한다. 배우면 악작죄가 된다.” (VIN.II.139, 율장소품, 제5장 사소한 것의 다발, 32삼림)라고 했다.
 
불교에서 말하는 세속철학은 일종의 형이상학을 말한다. 또한 세속철학은 이교도의 학문을 말한다. 오늘날 철학이라고 말하는 것들은 형이상학에 해당된다. 이는 ‘나는 존재하는가 존재하지 않는가’라든가, ‘세상은 유한한가 무한한가’라는 것들을 말한다. 이런 세속적 철학에는 답이 없다. 왜 그런가? 존재론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또한 언어적 개념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실제도 아니고 실재하는 것도 아님을 말한다.
 

거짓과 진실이 혼재된 빤냣띠(槪念)


부처님 가르침은 실제적이고 또한 실재적이다. 이는 실제적도 아니고 실재도 아닌 형이상학적 가르침과는 다른 것이다. 이를 빠라맛타와 빤냣띠로 설명할 수 있다.
 
빠라맛타는 실재에 대한 것이다. 이는 언어적 개념을 걷어낸 것이다. 언어적 개념으로 되어 있다면 이는 빤냣띠에 해당된다.
 
부처님은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보라고 했다. 그렇게 보기 위해서는 언어적 개념을 걷어 내야 한다. 언어적 개념이 있는 상태에서 보면 제대로 볼 수 없다. 자신이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한 대로 보는 것이다. 이렇게 색안경을 끼고 보면 진리를 제대로 볼 수 없다.
 
진리를 보려면 언어적 개념을 걷어 내야 한다. 언어적 개념이 조금이라도 끼여 있으면 제대로 보는 것이 되지 않기 때문에 있는 그대로 볼 수 없다.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은 실재를 보는 것이다. 이것이 빠라맛타이다.
 
빤냣띠는 개념으로 보는 것이다. 자신의 생각이 개입해서 보는 것을 말한다. 그러다 보니 보는 사람들마다 다 다르다. 그래서 마하시 사야도의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에 따르면 빳냣띠에 대하여 “마음으로 만들어 내어 드러나는 모두는 빤냣띠일 뿐이다.”(1권, 276쪽)라고 했다. 또한“생각속에서 단지 드러나는 것은 모두 빤냣띠이다.”(1권, 277쪽)라고 했다.
 
어느 스승이 말했다. 그 스승은 “이것만이 진실이고 다른 것은 모두 거짓이다.”라고 말했다. 이는 독단이다. 이런 스승의 말을 얼마나 믿어야 할까? 이렇게 단정적으로 말하는 것은 진리가 아닐 가능성이 있다. 그래서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에서는 “할아버지, 할머니, 부모 등을 통해 대대로 전해져 내려온 말에 의해 알아지는 의미들은 거짓과 진실, 두 가지 모두 생겨날 수 있다. 그러므로 빠라맛타라고 할 수 없다.”(1권, 259쪽)라고 했다.
 
농경시대 때 노인은 지혜로운 자였다. 조상 대대로 전승되어 온 가르침을 후손에게 전달했다. 이는 언어적으로 전달한 것이다. 언어적 개념으로 전승되어 온 가르침이다. 스승의 가르침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언어적 개념으로 형성된 가르침은 진실된 것도 있지만 진실이 아닌 것도 있을 수 있다는 말이다.
 
진리란 무엇일까? 허위가 없어야 진리라고 말할 수 있다. 부분적으로는 맞고 부분적으로 틀리면 진리라고 말할 수 없다. 어느 경우에는 맞고 또 어느 경우에는 맞지 않는다면 역시 진리라고 말할 수 없다. 전승된 가르침이 그렇다는 것이다.
 
스승의 가르침은 전승된 것이다. 말로만 전승된 가르침은 맞을 수도 있고 맞지 않을 수도 있다. 이런 가르침은 진리가 될 수 없다. 또 다른 말로 빠라맛타가 될 수 없음을 말한다.
 
빠라맛타가 아니면 그것은 빤냣띠가 된다. 이런 빤냣띠의 특징에 대하여 “거짓과 진실, 두 가지 모두 생겨날 수 있다.”라고 했다. 어느 경우에는 진실이지만 또 어떤 경우에는 진실이 아닐 때 이를 진리라고 말할 수 있을까?
 
전승되 가르침, 인용된 가르침, 문헌의 권위는 빠라맛타가 아니다. 경험하거나 체험으로 아는 지혜가 아니다. 들어서 아는 것이다. 이런 지식은 빠라맛타가 아닌 것이어서 빤냣띠인 것이다. 그런데 이런 빤냣띠는 진실일 수도 있고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다.
 
위빠사나 수행에서는 빠라맛타와 빤냣띠를 명확하게 구분한다. 위빠사나 수행은 빠라맛타를 보기 위한 것이지 빤냣띠로 하는 것이 아니다. 이를 달리 말하면 개념으로 수행하는 것이 아님을 말한다. 생각으로 수행하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생각하고 숙고하여 취해지는 의미들도 거짓과 진실 두 가지 모두 생겨날 수 있으므로 빠라맛타라고 볼 수 없다.”(1권 259쪽)라고 했다.
 
형이상학은 빤냣띠에 대한 것
 
이른바 세속철학, 즉 형이상학은 빤냣띠에 대한 것이다. 언어적 개념으로 형성된 것이다. 예로부터 전승되어 온 것도 있고 스승으로부터 배운 것도 있고, 책에 써 있는 것도 있고 자신의 생각으로 된 것도 있다. 그렇다고 하여 빤냣띠가 모두 거짓이나 허위는 아니라는 것이다. 진실인 것도 있고 진실이 아닌 것도 있다. 이렇게 두 가지가 혼재 되어 있을 때 이를 진리로 보기 어렵다.
 
진리는 두 가지가 있을 수 없다. 때로 진실이기도 하고 때로 진실이 아니기도 한다면 진리라고 볼 수 없다. 그런데 사구게로 설명되는 형이상학적 질문은 때로 진리이기도 하고 때로 진리가 아니기도 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다나 ‘다양한 이교도의 경’(Ud.66)에서는 외도들의 견해에 대하여 마치 봉사가 코끼리를 만지는 것과 같다고 했다.
 
선천적으로 눈 먼 봉사가 코끼리를 만질 때 부분적으로는 맞는 것이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현상을 개념적으로 본다면 정확하게 보지 못하는 것이 된다. 마치 자신만의 안경을 끼고 보는 것과 같다.
 
부처님은 질문 같지 않은 질문에는 답을 하지 않았다. 질문이 성립되지 않는 질문에는 답을 할 수 없다. 그래서 입을 닫은 것이다. 입을 열면 어긋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몰라서 묻는 경우에는 연기법적으로 답변했다. 외도라도 배우고자 한다면 역시 연기법적으로 답변했다.
 
야마까가 이해한 것은
 
금요니까야모임 시간에 여래는 존재하는지 존재하지 않는지에 대하여 토론했다. 토론 하다 보니 결론이 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본래 답이 없는 질문이기 때문이다. 이는 다름아닌 형이상학적 질문이다. 존재론적 질문이기도 하다.
 
야마까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잘못 이해했다. 번뇌가 소멸한 자는 죽어서 단멸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는 가르침을 존재론적으로 본 것이다. 이에 사리뿟따는 무상, 고, 무아의 가르침을 문답식으로 알려 주었다. 그래서 야마까는 마침내 사리뿟따의 가르침을 이해 하게 되었다. 야마까는 이렇게 말했다.
 
 
벗이여 나에게 이와 같이 ‘벗이여 야마까여, 번뇌를 소멸시킨 거룩한 님이 몸이 파괴되어 죽은 뒤에 어떻게 되는가?’라고 물으면, 그와 같은 질문을 받고 벗이여 싸리뿟따여, 나는 이와 같이 ‘벗이여, 물질은 무상한 것입니다. 무상한 것은 괴로운 것입니다. 괴로운 것은 소멸하고 사라지는 것입니다. 느낌은 무상한 것입니다. 무상한 것은 괴로운 것입니다. 괴로운 것은 소멸하고 사라지는 것입니다. 지각은 무상한 것입니다. 무상한 것은 괴로운 것입니다. 괴로운 것은 소멸하고 사라지는 것입니다. 형성은 무상한 것입니다. 무상한 것은 괴로운 것입니다. 괴로운 것은 소멸하고 사라지 는 것입니다. 의식은 무상한 것입니다. 무상한 것은 괴로운 것입니다. 괴로운 것은 소멸하고 사라지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하겠습니다. 이와 같은 질문을 받으면 벗이여, 그와 같이 대답하겠습니다.”(S22.85)
 
 
부처님 당시에 제자들은 외도와 논쟁했다. 외도들은 곤혹스럽게 만들게 하기 위하여 사후에 존재하는지 하지 않는지 등에 대하여 사구로 질문했다. 이런 질문은 형이상학적이고 존재론적 질문으로서 답이 없는 것이다.
 
질문 같지 않은 질문에는 무기하면 될 것이다. 그럼에도 굳이 답을 한다면 오온에 대하여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고, 실체가 없는 것이라고 말하면 될 것이다. 이는 오온이 나의 것이 아니고 내가 아니고 나의 자아가 아님을 말한다. 오온이 내 것이 아닌데 어떻게 사후에 존재하거나 존재하지 않을 수 있을까? 번뇌 다한 아라한에게 자아개념은 있을 수 없다.
 
현실 직시에 대한 가르침
 
부처님 가르침에 있어서 형이상학적 담론은 잡담에 지나지 않는다. 마치 우물가에서 왕에 대한 이야기, 대신에 대한 이야기 등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하는 것과 같다. 지금 당면한 괴로운 상황에 도움이 되지 않음을 말한다. 그래서 야마까는 사리뿟따의 문답식 오온의 무상, 고, 무아의 가르침을 듣고서는 “무상한 것은 괴로운 것입니다. 괴로운 것은 소멸하고 사라지는 것입니다.”라고 답하겠다고 말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부처님의 핵심 가르침을 꿰뚫어 본 것이다. 어떤 가르침인가? 그것은 괴로움과 괴로움의 소멸에 대한 가르침이다.
 
부처님의 핵심 가르침은 사성제이다. 이를 간단히 말하면 괴로움과 괴로움의 소멸에 대한 가르침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답이 없는 형이상학적 질문에 대해서는 “그것은 유익하지 않고, 청정한 삶과는 관계가 없다.”(M63)라고 말하며 또한 “열반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M63)라고 말했다. 그래서 형이상학적 질문에 대해서는 제자나 배우고자 하는 자에 한해서 무기하지 않고 연기법적 가르침을 설했다. 이는 다름 아닌 괴로움과 괴로움 소멸에 대한 것이다.
 
지금 당면한 문제는 무엇인가? 우주는 유한한가 무한한가라는 형이상학적 질문은 현재 내가 처해 있는 괴로움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질문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다름 아닌 존재론적 질문이다.
 
존재론적 질문에는 답이 없다. 나가 존재한다고 여겼을 때 답을 할 수가 없다. 나를 가정해서 질문했을 때 수많은 답이 나올 수 있다. 진실인 것도 있고 진실이 아닌 것도 있을 수 있다. 이렇게 혼재 되어 있다면 진리가 될 수 없다.
 
형이상학적 질문에는 답이 없다. 입을 열면 틀리는 것이다. 그래서 요즘 말로 ‘노답’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빠라맛타는 진실이다. 언어적 개념을 걷어 냈을 때 실제인 것이고 실재로 있는 것이다. 그것은 오온을 관찰하는 것으로 알 수 있다.
 
오온에서 지금 이 순간 생멸을 거듭하고 있다. 여기에 생각이 개입하게 되면 빤냣띠가 된다. 언어적으로 개념화 되면 괴로워진다. 존재론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본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말했다. 현실을 직시하는 것이다.
 
부처님은 사성제를 설했다. 형이상학적 질문에 답하지 않고 사성제를 말한 것이다. 마치 독화살을 맞은 것 같은 현실을 직시하자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나는 괴로움과 괴로움의 소멸에 관하여 설한다.”(S22.86)라고 했다.
 
 
2024-02-28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