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린내 나는 세상
비린내 나는 세상이다. 여기서도 비린내가 있고 저기서도 비린내가 있다. 도처에 비린내 나지 않는 곳이 없다.
나에게도 비린내가 있을 것이다. 나는 알지 못하지만 남이 봤을 때 비린내가 날 것임에 틀림 없다. 그렇다면 나의 비린내는 어떤 것일까?
며칠 전의 일이다. 고양에서 열리는 니까야모임에 참석하기 위해서 전철을 탔다. 모임은 저녁 7시에 시작된다. 오후 4시대에 길로 나서갔다.
오후 4시대의 전철은 한산했다. 앉아서 갈 수 있었다. 평소와 달리 눈을 감았다. 평소에는 스마트폰을 보거나 글을 쓴다. 그러나 그 날은 눈을 감고자 했다. 왜 그런가? 비린내가 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비린내는 공항에서도 느낄 수 있다. 그때가 언제였던가? 코로나 이전 2019년 1월달이었다. 그때 미얀마 담마마마까 국제선원에서 보름간의 집중수행을 마치고 귀국 했을 때였다.
하노이에서 한번 갈아 탔다. 그때 일단의 한국관광객 무리를 볼 수 있었다. 그들에게서 비린내가 나는 것 같았다.
외국에서 한국사람은 한눈에 구별된다. 그 사람이 중국사람인지 일본사람인지 한국사람인지 구별하는데 0.5초도 걸리지 않는다. 왜 그런가? 한국사람에게만 있는 독특한 비린내가 있기 때문이다.
관광객들은 사오십대 중년으로 보였다. 그들은 한결 같이 왁자지껄하며 웃고 떠들고 있었다. 점원들 보기에도 민망할 정도였다. 그들의 모습에서 자만을 보았다. 우월적 자만이라는 비린내가 나는 것 같았다.
해외여행은 대부분 즐기는 여행이기 쉽다. 자신의 돈을 내서 놀러 가는 여행을 말한다. 그런데 수행하러 가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이다. 미얀마 위빠사나 수행센터가 대표적이다.
보름동안 미얀마에 있었다. 보름동안 매일 새벽 구계를 받고 살았다. 하루 종일 수행하며 사는 것이 일상인 것을 말한다. 프로야구선수는 밥만 먹으면 야구만 한다. 선원에서 수행자는 밥만 먹으면 수행만 하는 것이다.
보름동안 마음이 조금 청정해진 것 같았다. 하노이 공항에서 일단의 남녀여행객들을 보자 비린내가 나는 것 같아 견딜 수 없었다. 아주 조금 선원생활 했음에도 차이가 나는 것 같았다. 하물며 오랜 세월 수행한 사람들 눈에는 일반사람들의 행태는 어떻게 비추어질까?
전철과 지하철을 타는 내내 눈을 감고 있었다. 스마트폰을 보면 시간이 잘 갈 것같았다. 이어폰까지 준비했으므로 유튜브도 시청할 수 있다. 그러나 전철 안이나 지하철 안에서 스마트폰 보는 것은 피곤하다.
침침해 보이는 듯한 형광등 불빛 아래 사람들은 무표정하다. 피곤에 찌든 듯한 모습이다. 옷도 두껍고 어두운 옷을 입어서 칙칙하고 우중충해 보인다.
사람들 표정을 보았다. 대체로 젊은 사람들 얼굴은 순수한 기가 남아 있다. 그러나 나이 든 사람들 얼굴을 보면 추해 보인다. 어떤 이는 심술이 덕지덕지 붙은 듯 하다 또 어떤 이는 욕심 가득한 얼굴이다.
전철과 지하철에서 비린내가 나는 것 같았다. 종로3가 환승역에서 3호선을 갈아 탔는데 만원이었다. 더욱더 비린내가 나는 것 같았다. 역시 눈을 감았다.
요즘 TV를 전혀 보지 않는다. 처음부터 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대선 이후 뉴스를 보지 않았다. 그 대신 영화채널만 봤다. 그 마저 작년 우안거가 시작될 때 꺼 버렸다. 케이블을 아예 뽑아 버린 것이다.
TV는 비린내로 가득하다. 특히 뉴스채널이 그렇다. 일방적으로 방송되는 뉴스는 감내하기 힘들다. 보기 싫은 사람도 보아야 하고 듣기 싫은 것도 들어야 한다.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것은 일방적으로 끊을 권리가 있다. 뉴스를 보지 않는 것은 권리이다. 그 대신 보고 싶은 것만 보고자 했다. 유튜브에서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고자 한 것이다.
요즘 선거철이다. 정치를 멀리하고자 했으나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나라가 엉망이 되는 것 같아 참을 수 없다. 이런 때 희망을 보았다. 잘하면 탄핵까지 가능할 것으로 본 것이다.
유튜브는 요지경이다. 요즘 속된 말로 개나 소나 유튜브 방송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비린내가 진동한다는 것이다. 어떤 비린내인가? 그것은 거짓말, 이간질, 욕설, 입에 발린 말이다. 모두 팔정도의 정어(正語) 네 가지에 어긋나는 것이다.
세상은 비린내 천지이다. 어디를 가나 비린내가 난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떤 비린내가 있을까? 초기경전에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분노, 거짓, 잘못, 사기, 속임수,
인색, 자만, 질투,
욕망, 의심, 타인에 대한 폭력,
탐욕, 성냄, 취기, 어리석음,
이러한 것들에 묶여 비린내를 벗어나지 못하니
하느님 세계는 차단되고 나쁜 곳으로 떨어집니다.”(D19.29)
디가니까야 19번 경에 실려 있는 게송이다. 이 게송은 싸낭꾸마라 하느님(Brahma)이 읊은 게송이다.
초기경전 니까야에 하느님 개념이 있다. 이는 색계 초선천의 하느님이기 쉽다. 색계와 무색계를 아울러서 범천이라고 하는데 범천에 사는 중생을 하느님(Brahma)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하느님이 출현할 때는 먼저 빛을 낸다. 마치 해가 뜨기 전에 새벽이라는 전조현상이 있는 것과 같다. 그래서 측량할 수 없는 광대한 빛이 나타나면 하느님이 출현할 전조로 보는 것이다.
하느님은 빛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하느님은 인간을 비롯한 천신들이 있는 회당에 나타날 때는 인간의 모습으로 화현하여 나타난다는 것이다. 니까야를 보면 아름다운 청년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했다.
게송은 빤짜씨카라는 청년이 읊은 것이다. 하느님이 아름다운 청년 모습으로 나타났는데 ‘빤짜씨카’라고 한다. 그런데 빤짜씨카는 건달바의 대명사라는 것이다.
건달바는 하급신이다. 오늘날 건달의 어원이 되는 건달바를 말한다. 머리에 기름을 발라 뒤로 넘기고 멋 있는 이미지의 건달이다. 마치 영화 토요일밤의 열기에서 주연을 맡은 ‘존 트라볼타’가 연상된다.
범천의 하느님은 신들의 세계에서 지위가 높다. 이런 싸낭꾸마라 하느님이 건달바 빤짜씨카 모습으로 회당으로 나타난 것이다.
건달 빤짜씨카 모습으로 화현한 하느님 싸낭쿠마라는 비린내에 대하여 말했다. 이는 회당에서 왕립사제 마하고빈다가 “어떤 것에 덮여 뭇삶이 비린내를 풍기며 하느님의 세계는 차단되고 나쁜 곳으로 떨어집니까?”(D19.29)라는 물음에 대하여 게송으로 답한 것이다.
누구나 선정을 닦으면 하느님 세계에 태어날 수 있다. 이는 색계와 무색계 천상을 말한다. 성자의 흐름에 들지 못했다면 윤회하는 중생에 지나지 않는 천상이다. 당연히 하느님도 중생으로서 윤회할 수밖에 없는 존재에 해당된다.
선정에 들면 다섯 가지 장애는 사라진다. 악하고 불건전한 법이 있으면 선정에 들 수 없다. 그래서 건달 빤짜씨카 모습을 한 하느님 싸낭쿠마라는 “분노, 거짓, 잘못, 사기, 속임수, 인색, 자만, 질투, 욕망, 의심, 타인에 대한 폭력, 탐욕, 성냄, 취기, 어리석음”(D19.29)이와 같은 것들을 비린내와 같은 것이라고 했다.
비린내가 있으면 하느님 세계는 차단된다고 한다. 감각적 욕망에 탐닉하는 등 악하고 불건전한 불선법들에 지배받으면 색계나 무색계 천상에 태어날 수 없음을 말한다.
천상의 존재는 어떤 것일까? 아마 한번 보기만 해도 마음이 청정해질 것 같다. 마치 선정의 상태처럼 맑고 깨끗한 마음만 있게 되었을 때 가까이 있으면 저절로 청정해질 것 같다.
언젠가 아름다운 수행자를 만났다. 그 사람은 눈이 맑고 깨끗했다. 커다랗고 둥그러운 눈은 깊고 그윽했다. 그 사람의 눈을 바로 보고 있으면 나도 몰래 저절로 청정해지는 것 같았다.
한 사람의 사기꾼이 출현하면 세상은 혼탁해진다. 반면에 한 사람의 도인이 출현하면 세상이 깨끗해진다. 어떤 사람과 가까이하느냐에 따라 자신도 달라진다.
사기꾼은 비린내가 나는 사람이다. 도인은 향기가 나는 사람이다. 비린내는 악하고 불건전한 불선법으로 가득한 자를 말한다. 반면에 도인은 착하고 건전한 선법으로 가득한 자로서 자애와 연민이 넘치는 사람이다.
수행처에 가면 향기롭다. 왜 그런가? 마음이 깨끗한 자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관광지에 가면 마음이 혼탁해질 것 같다. 왜 그런가? 오욕락을 즐기는 사람들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비린내 나는 세상이다. 세상은 온통 비린내 투성인 것 같다. 탐욕의 비린내, 성냄의 비린내, 어리석음의 비린내로 가득하다. 어떻게 해야 향기 나는 세상을 만들 수 있을까?
금요니까야 시간에 ‘케마까의 경’(S22.89)을 합송했다. 경에서는 비린내를 제거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한 가르침이 실려 있다.
비린내는 단계적으로 제거해야 한다. 한번에 비린내가 사라지지 않는다. 경에서는 이를 낮은 단계의 결박(오하분결)과 높은 단계의 결박(오상분결)로 나누어 설명했다.
여기 낮은 단계의 결박이 있다. 대표적으로 유신견(有身見)을 들 수 있다. 이는 자아가 있다는 견해를 말한다. 오온을 나의 것으로 보았을 때 유신견이라는 삿된 견해에 갇혀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수행승 케마까는 낮은 단계의 결박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세탁의 비유를 들었다.
“벗들이여, 예를 들어 더러워져 때가 묻은 옷이 있는데, 주인은 그것을 세탁업자에게 맡겼고, 세탁업자는 그것을 소금물이나 잿물이나 쇠똥에 고루 뒤섞여, 맑은 물에 세탁했다고 칩시다.”(S22.89)
흔히 이런 말을 한다. 걸레는 빨아도 걸레라는 것이다. 똥 묻은 걸레를 아무리 빨아도 완전히 똥 냄새는 지워버리지 못한다. 그러나 세탁비누나 세제 냄새는 날 것이다. 유신견을 부순 것은 세제로 빨래 한 것과 같다.
유신견을 부수면 성자의 흐름에 들어간다. 그러나 탐, 진, 치는 여전히 남아 있다. 다만 약화 되어 있을 뿐이다. 낮은 단계의 결박만 풀렸을 뿐이다.
보다 높은 단계의 결박이 있다. 이는 미세한 번뇌를 말한다. 그 중에 자만이 대표적이다. 어떤 자만인가?
세 가지 자만이 있다. 우월적 자만, 동등적 자만, 열등적 자만을 말한다. 이런 자만이 있는 한 번뇌에서 벗어날 수 없다. 왜 그런가? 타인과 비교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유신견을 타파하여 성자의 흐름에 든 성자에게도 자만은 여전히 남아 있다는 것이다.
성자의 자만은 어떤 것일까? 그것은 아마 “내가 누구인데”라는 자만이기 쉽다. 그 사람이 아나함의 지위를 가지고 있다면 아마도 “내가 아나함인데”라며 자만할 것이다.
자만은 매우 미세한 것이다. 미세해서 잘 드러나지 않는다. 성자의 흐름에 들었다면 대개 우월적 자만이기 쉽다. 은연중에 “내가 수다원인데”라든가, “내가 아나함인데”라며 자만하기 쉽다.
자만은 높은 단계의 미세한 번뇌이다. 유신견을 타파했더라도 “내가 누군데”라는 자만은 남아 있는 한 번뇌 다한 아라한이 될 수 없다. 마치 똥 묻은 걸레를 세제를 이용하여 세탁을 했다고 하더라도 세제 냄새는 남아 있는 것과 같다.
똥걸레를 빨았을 때 똥냄새는 사라진다. 그러나 세제냄새는 남아 있다. 이 세제냄새마저 사라지게 하는 것이 높은 단계의 결박(오상분결)을 부수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수행승 케마카는 다음과 같이 향기박스 비유로 설명한다.
“아무리 그 옷이 청정하고 깨끗하더라도 아직 거기에는 남아 있는 소금물냄새나 잿물냄새나 쇠똥냄새가 가신 것은 아닙니다. 세탁업자가 그것을 주인에게 주면, 주인은 그것을 향기가 밴 상자에 넣어 보관해서, 그는 거기에 배어 있는 소금물이나 잿물냄새나 쇠똥냄새를 없애 버립니다.”(S22.89)
오물이 묻은 옷을 세탁업자에게 맡기면 깨끗해진다. 그러나 세제냄새는 남아 있다. 그렇다고 세탁업자에게 세제냄새까지 없애 달라고 할 수 없다.
세제냄새는 자신이 없애야 한다. 그것은 향기박스에 넣는 것이다. 향기가 나는 박스에 넣으면 세제냄새마저 잡을 수 있음을 말한다.
음식을 요리할 때 조미료를 사용한다. 돼지고기 냄새가 날 때는 마늘을 사용한다. 또한 월계수 잎을 사용하라고도 말한다. 이럴 때 요리사는 냄새를 잡아 준다고 말한다.
비린내를 잡을 때는 특별한 재료를 써야 한다. 마찬가지로 세제냄새를 잡기 위해서는 향기박스에 넣어야 한다. 그렇다면 자만이라는 미세한 불선법을 잡기 위한 향기박스는 어떤 것일까? 주석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 ‘번뇌를 부순 자가 가진 계행의 향기(khīṇāsavassa sīlagandhadhi)’와 비교된다. 배우지 못한 범부의 정신은 흙 묻은 옷과 같다. 세 가지 특징(三法印)에 대한 명상은 그것을 씻는 세 가지 세척제와 같다. 돌아오지 않는 님[不還者]의 정신은 이 세 가지 세척제로 세탁을 한 것과 같다. 거룩한 경지를 향한 길에서 제거되는 번뇌들은 마치 옷에 남아 있는 세척제의 냄새와 같다. 거룩한 경지로 향하는 길의 지혜는 향기로운 냄새가 배어 있는 상자와 같다. 길을 통한 모든 번뇌의 파괴는 옷이 향기 상자에 넣어진 뒤에 세척제의 남은 냄새가 모두 제거되는 것과 같다.”(Srp.II.317)
범부는 흙 묻은 옷을 입은 자와 같다고 한다. 그런데 성자의 흐름에 들면 세탁된 옷을 입은 자와 같다고 한다. 이는 무상, 고, 무아라는 세 개의 세제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제냄새는 여전히 남아 있다.
번뇌가 다한 아라한은 향기나는 사람과도 같다. 마치 향기 나는 옷을 입은 자와 같다. 이는 세재냄새마저 제거한 것과 같다. 어떤 비린내도 나지 않음을 말한다. 향기박스에 넣은 옷처럼 향기 나는 사람이 된다.
향기로운 사람이 있다. 어떤 사람인가? 이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마치 냄새가 완전히 제거된 옷을 입고 축제일에 여러 곳으로 좋은 향기를 뿜으면서 다니는 것처럼 번뇌 다한 자는 계의 향기가 난다.”(SA.ii.317)라고 했다.
이제 3월이 되었으니 라일락꽃 볼 날이 머지 않았다. 해마다 라일락 꽃이 필 때는 향기로운 세상이 되는 것 같다. 라일락 특유의 향내가 나는 것이다. 그러나 라일락 향기는 바람을 거슬러 가지 못한다.
자스민이 최상의 향기라고 한다. 이는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어 어떠한 꽃의 향이 있든지 그들 가운데 재스민 향을 최상이라 한다.”(S22.102)라는 경전적 근거에 따른다.
자스민꽃 향기를 맡아 보면 라일락과 비슷하다. 그러나 어떤 꽃 향기이든지 바람을 거슬러 가지 못한다. 꽃에 코를 가까이 대어 보지만 바람이 반대로 불면 향기가 나지 않는다. 그러나 바람을 거스르는 향기가 있다. 바로 그것은 계의 향기이다.
“꽃향기는 바람을 거슬러 가지 못한다.
전단향도 따가라향도 말리까향도,
그러나 참사람의 향기는 바람을 거슬러 가니
참사람의 향기는 모든 방향으로 퍼져간다.”(Dhp.54)
여기서 말리까향은 자스민향을 말한다. 이런 꽃향기는 바람을 거슬러 퍼질 수 없다. 그러나 계의 향기는 바람을 거슬러 간다. 그것도 천리, 만리까지 가는데 더 나아가 천상에까지 이른다고 한다.
바람을 거슬러 가는 것에는 계의 향기만 있는 것은 아니다. 선정의 향기도 있고 지혜의 향기도 있다. 이렇게 본다면 수행하는 사람은 향기로운 사람이다.
그 수행자에게서 향기가 났다. 그 수행자의 커다랗고 동그랗고 맑고 투명한 눈을 바라 보고 있으면 저절로 청정해지는 것 같았다. 부처님 당시에도 그랬을 것이다. 부처님과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청정해졌을 것이다.
수행자는 향기박스와도 같은 존재이다. 일체의 비린내를 제거한 자와도 같다. 세제냄새마저 제거해 버렸을 때 하나의 향기로운 꽃과 같다. 그런데 바람을 거스르는 향내가 난다는 것이다. 그것은 계의 향기, 정의 향기, 혜의 향기이다.
이 세상에 한 사람의 사기꾼이 출현하면 세상이 혼탁해진다. 이 세상에 한 사람의 도인이 출현하면 세상이 향기로워진다. 이렇게 본다면 도인은 향기박스와 같은 존재이다.
한사람의 도인은 세상을 맑고 향기롭게 만든다. 설령 도인이 깊은 산중에 있어도, 아무리 멀리 있어도 향기가 난다. 계의 향기, 정의 향기, 혜의 향기, 해탈의 향기는 천리만리 퍼져 나간다. 나의 비린내는 언제나 없어질까?
2024-03-12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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