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니까야모임

오온에 집착된 존재는 모두 악마

담마다사 이병욱 2024. 4. 12. 10:56

오온에 집착된 존재는 모두 악마
 
 
오늘은 금요니까야모임 가는 날이다. 카톡방에 “오늘 금요니까야모임날입니다.”라고 짤막하게 메시지를 남겼다.
 
모임에는 누가 올지 모른다. 고정멤버들은 빠지지 않는다. 그러나 대부분 한두 번 오고 만다. 감각을 즐기는 데는 바빠도 공부하는 것은 쉽지 않은 것 같다.
 
모임에 참석했으면 기록을 남겨야 한다. 보통 세 개 가량의 경을 합송한다. 세 개의 글을 남겨야 하나 무리가 있다. 두 개의 글을 남기면 연말에 책으로 한 권 된다.
 
지난 3월 22일 모임이 열렸다. 이날 모임에 참석한 사람은 도현스님을 비롯하여 장계영, 홍광순, 방기연, 김종선, 김영인, 김종선, 유경민 선생이다.
 
불교에서 악마는 어떤 의미일까?
 
3월 22일 금요니까야 모임에서는 악마에 대하여 이야기했다. 경의 제목은 ‘악마의 경(māra sutta)’(S23.1)이다. 불교에서 악마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악마는 마라(māra)를 번역한 말이다. 마라는 어원적으로 ‘죽이다’ 또는 ‘죽다’를 뜻하는 mr에서 파생된 말이다. 마라는 죽음과 관련된 말인 것이다.
 
죽음은 파괴를 뜻한다. 이렇게 본다면 마라는 파괴의 화신이 된다. 초기경전에서 등장하는 마라는 크게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정리된다.
 
(1) 사악함의 화신으로서의 마라:
사악한 자, 악마라는 뜻의 빠삐만(波旬, Pāpiman), 해탈을 방해하는 자라는 뜻의 나무찌(Namuci), 검은 자라는 뜻의 깐하(Kaha), 끝을 내는 자라는 뜻의 안따까(Antaka), 방일함의 친척이란 뜻의 파라마타반두(pamatta-bhandu) 등으로 불린다.
 
(2) 천인으로서의 마라:
욕계의 최고 높은 천상인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 Paranimmitavasavatti)에 주재하는 천인이다. 그래서 마라는 중생들이 욕계를 못 벗어나도록 방해한다고 한다.(SnA.i.44; MA.i.28) 이런 마라는 범천(梵天, Brahmā)이나 제석(帝釋, Sakka)처럼 대단한 위력을 가졌고 마군(魔軍, Marāsena)이라는 군대도 가지고 있다.
 
(3) 세간적인 모든 존재로서의 마라:
이 마라는 열반(nibbāna)과 반대되는 개념으로서 윤회계, 즉 오온(五蘊)을 상징한다.
 

 
이 세 가지는 김한상 선생이 정리한 불교용어사전에서 가져 온 것이다. 후대 주석서에서는 더 확장하여 다섯 가지 마라를 들고 있다. 이는 (1) 신으로서의 마라(devaputta-māra) (2) 번뇌로서의 마라(kilesa-māra) (3) 오온으로서의 마라(khandha-māra) (4) 업으로서의 마라(kamma-māra) (5) 죽음으로서의 마라(maccu-māra)를 말한다.
 
악마를 뜻하는 마라에는 다섯 종류가 있다. 이 중에서 세 번째 오온으로서 마라가 크게 와 닿는다. 왜 그런가? 오온은 이 몸과 마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오온이 악마라면 나도 악마
 
오온이 악마라면 나는 악마가 된다. 어떻게 내가 악마가 될 수 있을까? 이는 오온에 집착했을 때 악마가 되는 것이다. 물질, 느낌, 지각, 형성, 의식에 집착했을 때 악마에 사로 잡혀 있는 것이 된다.
 
어떤 이는 얼굴을 소중히 여긴다. 아마 내세울 것은 미모밖에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이런 사람이 얼굴에 흉터라도 생기면 어떻게 될까? 마치 세상이 끝날 것처럼 괴로워할 것이다. 이런 모습을 누군가 보았다면 악마의 얼굴로 볼 것이다. 느낌이나 지각, 형성, 의식도 다름 없다.
 
정말 이 몸과 마음은 악마일까? 이는 경전적 근거가 있다.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오온 중에 느낌에 대한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라다여, 느낌이 있다면, 악마나 살해하는 자나 살해되는 자가 있을 수 있다. 라다여, 그러므로 세상에서 느낌을 악마라고 보고, 살해하는 자라고 보고, 살해되는 자라고 보아야 한다. 느낌을 질병이라고 보고, 종기라고 보고, 화살이라고 보고, 고통이라고 보고, 고통의 근원이라고 보아야 한다. 느낌을 이와 같이 보는 사람은 올바로 보는 것이다.”(S23.1)
 
 
참으로 놀라운 가르침이다. 이제까지 오온에 대하여 악마라고 말한 사람은 없었다. 더구나 오온에 대하여 살인자라고 보았다. 또한 오온에 질병이라고 보고 보았다. 더 나아가 오온에 대하여 고통의 근원이라고 보았다.
 
오온이 왜 악마이고 살인자이고 고통의 근원일까? 부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으니 그렇게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잘 살펴 보면 오온이 악마이고 살인자이고 고통의 근원인 것은 오온에 대해서 집착했을 때이다.
 
오온에 대한 집착은 어떤 것인가? 이는 “이것은 나의 것이고, 이것은 나이고, 이것은 나의 자아이다.”라는 정형구에 따른다. 여기서 ‘이것은 나의 것’이라고 하는 것은 ‘갈애’를 말하고, ‘이것은 나’라고 하는 것은 ‘자만’을 말하고, ‘이것은 나의 자아’라고 하는 것은 ‘견해’를 말한다.
 
오온에 대하여 갈애와 자만과 견해가 있는 한 괴로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오온에 대하여 자신의 것이라고 집착해 있기 때문이다. 이는 악마의 영역에 있는 것이나 다름 없다. 악마에게 붙들려 있는 것이다. 그래서 악마가 된다.
 
무조건적인 열반
 
오온에 대하여 악마로 보는 자는 올바로 보는 자이다. 오온을 살해자라고 보는 것도 올바로 보는 자이다. 오온을 괴로움이라고 보는 자도 올바로 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위해서 올바로 보아야 할까? 이에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문답식으로 알 수 있다.
 
 
세존이시여, 무엇을 위해 올바로 봅니까?”
“라다여, 싫어하여 떠나기 위해 올바로 본다.”
“세존이시여, 무엇을 위해 싫어하여 떠납니까?”
“라다여, 사라지기 위해 싫어하여 떠난다.”
“세존이시여, 무엇을 위해 사라집니까?”

라다여, 해탈하기 위해 사라진다.”
“세존이시여, 무엇을 위해 해탈합니까?”
“라다여, 열반에 들기 위해 해탈한다.”
“세존이시여, 무엇을 위해 열반에 듭니까?”
“라다여, 그 질문은 너무 멀리 나갔다. 그대는 그 질문의 한계를 파악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라다여, 청정한 삶은 열반을 토대로 하고 열반을 피안으로 하고 열반을 궁극으로 하는 삶이기 때 문이다.”(S23.1)

 
 
불교는 무엇을 위한 종교일까? 그것은 명백하다. 열반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이다. 열반 없는 불교는 상상할 수 없는 것이다. 마치 모든 강물이 바다로 향하는 것처럼 어떠한 부처님 가르침도 열반을 향한다.
 
열반에 이르기 위한 과정이 있다. 경에서는 싫어하여 떠남(nibbidā), 사라짐(virāga), 해탈(vimutti), 열반(nibbāna)이라고 했다. 네 단계의 과정이 있다.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닙비다에 대하여 염오, 위라가에 대하여 탐욕의 빛바램이라고 번역했다.
 
동아시아불교에서는 해탈을 말한다. 열반에 대해서는 잘 말하지 않는 것 같다. 그러나 해탈은 열반의 전단계에 지나지 않는다. 이렇게 본다면 해탈과 열반은 같은 것이 아니다.
 
라다는 부처님에게 “무엇을 위해 해탈합니까?”라고 물어 보았다. 이에 부처님은 “열반에 들기 위해 해탈한다.”라고 말했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열반이 궁극적 목표임을 알 수 있다.
 
열반은 정신-물질이 사라지는 궁극적 경지이다. 그런데 라다는 “무엇을 위해 열반에 듭니까?”라고 물어 본다. 이는 열반 너머에 또 다른 어떤 경지가 있는지 물어 본 것이다. 그러나 열반은 궁극적 경지이고 종착지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그 질문은 너무 멀리 나갔다.”라고 말한 것이다. 이는 한계를 파악하지 못하고 질문한 것이다.
 
열반은 무엇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열반이 무엇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라면 열반은 궁극이 아닌 것이 된다. 그렇다면 왜 열반이 궁극인가? 이는 복주석에 따르면, “열반은 그 반대개념으로 조건 지어진 상태, 즉 유위라는 표현이 대응하는 것으로 정의될 수 있으나 엄밀히 고찰하면, 무조건적인 열반에 어떤 조건적인 것이 대응하거나 보충될 수 있다면 무조건적인 것이 아닌 것이 되어 버린다.”(KPTS본 맛지마 810번 각주)라고 했다.
 
열반은 조건 지어지지 않은 것이다. 만약 열반이 조건 지어진 것이라면 열반은 무엇인가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 되어 버린다. 열반은 무조건적인 것이기 때문에 열반은 무엇인가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 될 수 없다.
 
궁극의 경지를 맛 보았다면
 
불교인이라면 누구나 열반을 목적으로 한다. 열반을 증득해야 사향사과의 성자가 될 수 있다. 열반 없는 사향사과 성자는 있을 수 없다. 이는 궁극의 경지를 맛 보아야 성자의 흐름에 들 수 있다는 말과 같다.
 
궁극의 경지를 맛 보았다면 견도가 된다. 그런데 궁극의 경지를 맛 본 자는 자신에게 남아 있는 번뇌가 어떤 것인지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남은 생은 자신에게 남아 있는 번뇌를 소멸하기 위한 삶을 살게 된다. 이것이 수행도이다. 사다함과 아나함의 단계를 말한다. 마침내 모든 번뇌를 소멸했을 때 아라한 선언을 하게 된다.
 
열반을 증득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것은 청정한 삶으로 완성된다. 여기서 청정한 삶은 브라흐마짜리야(brahmacārīya)를 번역한 말로서 바라문의 인생사주기에서 학습기가 연장된 것을 말한다. 집에서 집없는 곳으로 출가하여 걸식하며 사는 것도 청정한 삶을 살기 위한 것이다.
 
귀신이나 악마는 있는 것일까?
 
귀신은 정말 있는 것일까? 어떤 이는 귀신이 있다고 믿으면 귀신이 있고, 귀신이 없다고 믿으면 귀신이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는 요리조리 빠져 나가는 뱀장어이론 같은 것이다. 부처님은 이런 식으로 말씀하지 않았다.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세상 그 어떤 것도 연기법을 따르지 않는 것이 없다. 이는 원인과 조건과 결과에 대한 것이다. 그렇다면 귀신이나 악마는 있는 것일까?
 
초기경전에 따르면 귀신이나 악마는 있다. 이는 인간과 다른 세계에 사는 존재를 말한다. 아귀의 세계에 사는 존재는 귀신과 같은 것이다. 아수라의 세계에서 사는 존재는 악마와 같은 것이다. 그런데 욕계천상에 사는 존재도 악마와 같다는 것이다. 이는 욕계 육욕천 타화자재천에 사는 천신을 말한다.
 
부처님은 악마의 개념을 확장했다. 오온도 악마로 보았기 때문이다. 이는 윤회계에 사는 모든 존재가 악마인 것과 같다. 왜 그런가? 오온에 집착하는 존재는 모두 악마로 본 것이다. 그래서 ‘물질을 악마라고 보아야 한다. 느낌을 악마라고 보아야 한다. 지각을 악마로 보아야 한다. 형성을 악마로 보아야 한다. 의식을 악마로 보아야 한다.’(S23.1)라고 말했다.
 
오온이 악마라면 나도 악마와 같다. 이는 오온에 집착된 존재, 즉 오취온적 존재는 모두 악마가 되는 것이다.
 
생각도 악마가 된다. 이는 악마 빠삐만이 “허공 가운데 움직이는 생각이라는 올가미 내가 그대를 묶으리. 수행자여, 내게서 벗어나지 못하리.”(S4.15)라고 말한 것으로 알 수 있다. 이는 감각적 인상은 모든 측면에서 사유에 침투하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악마의 영역에서 벗어난 자이다. 그래서 “형상과 소리와 냄새와 맛과 감촉의 즐거운 것들 거기서 나의 욕망은 떠났으니 죽음의 신이여, 그대가 패했다.”(S4.15)라고 했다.
 
초기경전에 등장하는 악마는 부처님의 반대편에 서 있다. 악마는 늘 세속적인 즐거움에 대하여 이야기 한다. 그래서 악마는 젊은 수행승들을 유혹한다. 악마는 늙은 성직자의 모습으로 변신하여 콜록거리면서 “존자들은 젊고 머리카락이 아주 검고 행복한 청춘을 부여받았으나 인생의 꽃다운 시절에 감각적 쾌락을 즐기지 않고 출가했습니다. 존자들은 인간의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즐기십시오. 시간에 매인 것을 좇기 위해 현재를 버리지 마십시오.”(S4.21)라며 유혹한다.
 
오늘날 각종 매체에서 행복을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른바 행복전도사들이다. 그런데 그들이 말하는 행복은 지금 여기서 행복하게 사는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닌 감각을 즐기는 삶이다. 특히 젊었을 때 즐기며 살자고 말한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악마의 속삭임과 같다.
 
악마는 젊은 수행자를 유혹한다. 악마는 인생의 꽃다운 시절에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즐기십시오.”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욕망을 부추기는 모든 것들은 악마의 속삭임과 같은 것이다.
 
오온에 집착된 존재는 모두 악마
 
현존을 말하는 자들이 있다. 지금 여기서 행복하게 살자는 것이다. 행복하게 살자는 것은 즐겁게 살자는 말과 같다. 그러나 부처님 제자들은 악마의 속삭임에 넘어 가지 않았다. 부처님 제자들은 “성직자여, 우리들은 시간에 매인 것을 좇기 위해 현재를 버리지 않습니다. 성직자여 감각적 쾌락의 욕망은 시간에 매이는 것이고, 괴로움으로 가득찬 것이고, 아픔으로 가득 찬 것이고, 그 안에 도사린 위험은 휠씬 더 큰 것이라고 세존께서 말씀 하셨습니다.”(S4.21)라고 말한다.
 
도처에 악마의 유혹이 있다. 즐기는 삶을 사는 자는 악마의 영역에 있는 것과 같다. 감각을 즐기는 삶 역시 악마의 영역에 있다. 그런데 악마의 영역에 있다는 것은 악마와 같다는 것이다. 오온에 집착된 존재는 모두 악마로 본다.
 
 
2024-04-12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