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니까야모임

강물이 흐르는 것처럼 마음도

담마다사 이병욱 2024. 4. 18. 09:51

강물이 흐르는 것처럼 마음도
 
 
마음에 드는 문구를 보면 기억하고자 한다. 새기고자 하는 것이다. 오늘새벽에도 그랬다.
 
오늘 새벽에는 세 개의 책을 보았다. 쌍윳따니까야, 냐나띨로까스님의 생애, 그리고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을 보았다. 머리맡에 있어서 본 것이다.
 
책을 볼 때는 한꺼번에 많이 보지 않는다. 여러 번에 나누어 조금씩 본다. 마치 소설 읽듯이 하루 밤에 다 보지 않는다. 왜 그런가? 새기면서 보기 때문이다.
 
무엇이든지 습관들이기 나름이다. 독서도 습관이다. 책을 머리맡에 두고 읽으면 습관이 된다. 새벽에 잠이 깨면 자동으로 손이 가는 것이다.
 
욕망의 세월을 살았는데
 
오늘 새벽 쌍윳따니까야를 읽다가 새기고 싶은 내용을 발견했다. 이미 오래 전에 여러 번 읽었지만 읽을 때마다 새롭다. 그것은 욕망과 관련이 있다.
 
부처님은 정각을 이루었다. 그러나 부처님은 부처님이 발견한 진리를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것은 이 진리가 일반사람들에게는 너무나 심오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진리는 지혜를 갖춘 자만이 알 수 있다. 무엇보다 욕망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그러나 사람들은 욕망의 경향을 즐기고 욕망의 경향을 기뻐하고 욕망의 경향에 만족해하면, 이와 같은 도리, 즉 조건적 발생의 법칙인 연기를 보기 어렵다.”(S6.1)라고 한 것이다.
 
부처님이 발견한 것은 연기법이다. 연기법은 부처가 출현하든 출현하지 않든 이미 원리로서 확정된 것이다. 따라서 누구든지 연기법을 발견하면 부처가 된다. 그런데 욕계, 욕망의 세계에서는 부처님이 발견한 심오한 진리, 즉 연기법을 알기 어렵다는 것이다.
 
지난 시절을 돌아본다. 한마디로 욕망의 세월을 살았다. 이는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 모른다. 태어날 때부터 욕망이 세팅된 채로 태어났기 때문이다. 식욕, 성욕 등 갖가지 욕망이 세팅되어 태어났기 때문에 욕망의 세월을 산 것이다.
 
부처님은 욕망을 버리라고 했다. 이는 다름 아닌 위대한 포기에 해당된다. 가진 것을 포기해야만 “심오하고 보기 어렵고, 깨닫기 어렵고, 고요하고, 탁월하고, 사유의 영역을 초월하고, 극히 미묘한 진리”(S6.1)를 얻을 수 있다는 말이다.
 
냐나띨로까스님을 출가로 이끈 두 권의 책
 
냐나띨로까스님의 일생 읽기를 시동 걸었다. 오늘 새벽 두 번째로 읽은 것은 스님이 스스로 작성한 자서전 부분이다. 흥미롭게도 출가이유가 있었다.
 
출가자에게는 출가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불자들은 “스님은 왜 출가하셨어요?”라고 물어 본다. 냐나띨로까 스님의 출가이유를 보니 책을 읽은 것이 결정적이다. 어떤 책인가? 그것은 ‘불교교리문답’과 ‘붓다의 일생과 업적’이다.
 
어느 스님은 반야심경을 읽고서 발심하여 출가했다고 들었다. 냐나띨로까 스님은 ‘불교교리문답’과 ‘붓다의 일생과 업적’을 읽고 출가했다. 전자는 수바드라 빅슈가 지은 것이다. 후자는 퐁스트가 번역한 것이다.
 
냐나띨로까 스님 당시에 불교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식자층 위주로 알려졌는데 오늘날과 같이 사부니까야는 아니었다. 다만 불교개론서 정도의 책이 알려졌다. 그것은 ‘불교교리문답’과 ‘붓다의 일생과 업적’으로 보인다.
 
불교교리문답’은 어떤 책일까? 각주를 보니 독일어판은 1888년에 출간되었다. 영어로 된 것은 1907년에 출간되었다. 그런데 이 책은 인기가 있었던 것 같다. 이후 프랑스어, 러시아어, 일본어로도 출간되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스리랑카 수망갈라 스님에 의해 공식으로 인정된 바 있다.
 
붓다의 일생과 업적’은 어떤 책일까? 이 책은 1887년 리스 데이비스에 의해서 영국에서 출간되었다. 독일어판은 2년 후인 1889년에 출간되었다. 그런데 냐니띨로까 스님은 책이 출간된 해인 1889년에 이 책을 읽었다는 사실이다.
 
중학교 시절 ‘부처님의 일생’을 배웠다. 중학교를 불교학교인 동대부중에 배정되었기 때문이다. 중학교 1학년 때 불교시간 교재가 ‘부처님의 일생’이었다. 그런데 부처님의 일생이 어린 학생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는 사실이다. 사문유관에 대한 이야기가 기억에 남는다.
 
한권의 책은 사람의 일생에 영향을 준다. 이십대의 냐니띨로까 스님이 ‘불교교리문답’과 ‘붓다의 일생과 업적’을 접했을 때 앞으로의 인생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스님은 이 두 책을 읽고서 출가를 결심했기 때문이다.
 
언제 읽어도 새로운 위빳사나 수행방법론’
 
오늘 새벽 세 번째로 읽은 책은 위빳사나 수행방법론’ 이다. 이미 한번 읽은 바 있다. 책에는 분홍 형광메모리펜 칠이 잔뜩 되어 있다. 마치 복습하는 것처럼 다시 읽고 있다. 그런데 언제 읽어도 새롭다는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체화(體化) 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갈 때, 앉을 때, 설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옷을 입을 때, 밥을 먹을 때, 대소변을 눌 때 어떻게 해야 할까? 대부분 아무 생각 없이 할 것이다. 그러나 위빠사나 수행에서는 모두 새길 것을 말한다.
 
진리는 말로 잘 설명되지 않는다. 비유를 들면 이해하기 쉽다. 행주좌와어묵동정간에 새겨야 하는 것에 대하여 어미소의 비유를 들었다. “어미소가 어린 송아지를 보면서 여물을 먹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수행주제를 중시하면서, 수행주제에 마음기울이면서 보아야 한다.”(1권, 463쪽)라고 설명되어 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운전할 때 전방을 주시하면서 말을 하는 것과 같다.
 
책은 온통 울긋불긋 하다. 처음 읽었을 때 분홍색 칠을 해 놓았는데 두 번째 읽을 때는 노랑 형광메모리펜 칠을 해 놓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강조된 부위가 또 강조된다. 처음 읽을 때나 두 번째 읽을 때나 중요하기는 마찬가지인 것 같다.
 
4월 12일 금요니까야 모임
 
금요니까야 모임이 4월 12일 금요일에 열렸다. 이날 모임에는 도현스님을 비롯하여 장계영, 김영인, 김기현, 홍광순, 안진현, 유경민, 이이선, 김영훈 선생이 참석했다. 이 중에서 김기현, 이이선, 김영훈 님은 처음 온 분들이다.
 

 
모임에 오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열 명 안팍이다. 열 명이 안될 때가 휠씬 더 많다. 새로 온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이럴 때는 자기소개시간을 가져야 한다. 그래서 “어떤 인연으로 오게 되었습니까?”라며 물어 본다.
 
모임에 꾸준히 나오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한두 번 나오고 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왜 그들은 도중에 그만 두는 것일까? 거리가 먼 것도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한국빠알리성전협회 사무실 겸 서고는 고양시에 위치하고 있다. 여러 지하철이 교차하는 종로2가나 종로3가 등에서 모임이 열린다면 좋을 것이다. 그러나 찾아가서 듣는 모임이다. 학생이 선생을 찾아 가는 것과 같다. 선생이 학생을 찾아서 가는 것이 아닌 것이다. 돈을 바란다면 선생이 학생을 찾아 갈 수도 있을 것이다.
 
모임에는 돈이 들지 않는다. 수강료도 없고 회비도 없다. 누구든지 마음만 내면 참가할 수 있다. 다만 자율적으로 보시는 할 수 있을 것이다.
 
모임은 강제성이 없다. 출석체크를 하는 것도 아니다. 회비를 내는 것도 아니다. 누구든지 시간 되는 사람은 들을 수 있고 토론할 수 있다. 그런데 한번 빠지고 두 번 빠지다 보면 아예 나오지 않게 된다. 그렇다고 나오라고 말하지 않는다. 오는 사람 막지 않고 가는 사람 잡지 않는다는 말이 맞을 것 같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일체는
 
모임에 참석하면 후기를 작성한다. 이는 오래된 습관이다. 늘 노트를 준비하고 있어서 받아 적는 것이다. 노트를 보고서 글을 쓴다. 가능하면 모임에서 말을 자제한다. 내가 말을 많이 하면 타인에게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타인이 말하는 것도 배우는 것이다. 타인의 말도 받아 적게 된다.
 
4월 12일 모임에서는 네 개의 경을 합송했다. 모두 여섯 감역에 대한 것이다. 이 중에서 일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부처님의 선언이 가장 인상적이다.
 
 
수행승들이여, 누군가가 ‘나는 이러한 일체를 부인하고 다른 일체를 알려주겠다.’고 말하면 그것은 단지 말 뿐이며 질문을 받으면 답변하지 못할 것이고, 더 나아가 곤혹에 빠질 것이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수행승들이여, 그것은 그의 영역 안에 있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S35.23)
 
 
부처님이 말씀하신 일체는 여섯 감역에 대한 것이다. 이는 눈의 감역, 귀의 감역 등 여섯 감역을 일체라고 했다. 시각의 경우 시각이 일체인 것이다. 시각은 시각의 세계가 있고 청각은 청각의 세계가 각각 있음을 말한다. 이렇게 본다면 여섯 가지 세계가 있다.
 
여섯 감역에 대하여 십이처라고 한다. 이는 감각기관과 감각대상으로 구분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십이처가 일체가 된다. 그런데 부처님은 이와 같은 일체를 부인한다면 곤혹에 빠질 것이라고 했다. 왜 그럴까? 그것은 인식을 넘어선 것이기 때문이다.
 
여섯 감역을 벗어난 것에 대하여 말한다면 이는 개념에 해당된다. 개념은 진리일수도 있지만 진리가 아닐 수도 있다. 이런 경우는 진리가 아닌 것으로 본다. 그러나 여섯 감역에서 보고, 듣고, 냄새 맡는 등 접촉되어진 것은 실재에 해당된다. 실재는 진리로 본다. 언어적 개념이 개입 되지 않은 감각접촉은 진실된 것이기 때문에 진리로 보는 것이다.
 
두 가지 새김이 있는데
 
쌍윳따니까야는 주제별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각각의 주제는 모두 수행과 관련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쌍윳따니까야를 읽으면 마치 수행지침서를 읽는 것 같다. 특히 명상을 하여 체험을 한 자가 읽으면 틀림 없는 사실이라고 말한다.
 
금요니까야모임에서는 쌍윳따니까야 선집을 교재로 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듬성듬성 보게 된다. 제대로 보고자 한다면 쌍윳따니까야를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 보아야 한다. 그것도 각주에 실려 있는 내용도 꼼꼼히 살펴 보아야 한다. 더 나아가 타번역서도 함께 보아야 한다.
 
책을 보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된다. 책을 보았으면 내용을 새겨야 한다. 강의를 듣는 것으로 그쳐서 안되는 것과 같다. 마치 시험공부하듯이 다시 들여다 보아야 한다. 이렇게 모임 후기를 작성하는 것도 다시 새기기 위한 것이다.
 
 
매일 경전을 읽고 매일 글을 쓴다. 그러나 좀처럼 마음의 향상은 이루어지지 않는 것 같다. 늘 제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 같다. 책을 읽을 때 뿐이다. 현실에서 경계에 부딪치면 여지없이 무너진다. 이런 괴리를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
 
새벽이 되면 고요한 마음이 된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이런 마음이 계속 유지되기를 바란다. 그러나 여섯 감역에서 접촉이 일어나면 무너진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할까? 새기는 것 밖에 달리 할 것이 없다. 그것은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을 새기는 것도 되지만 부처님 가르침을 새기는 것도 된다. 이렇게 새기는 것에는 두 가지가 있다.
 
수행주제를 놓지 않는 삶
 
새김만 있으면 어떤 장애도 극복할 수 있다. 갈 때는 간다고 알고, 볼 때는 본다고 아는 것이다. 옷 입을 때는 옷 입는 다고 알고 밥 먹을 때는 밥 먹는다고 아는 것이다. 마치 운전할 때 대화하지만 전방주시하며 새기는 것과 같다.
 
수행자는 잠 잘 때도 새겨야 한다고 말한다. 어떻게 새기는가? 깰 때를 염두에 두고 자는 것을 말한다. “깰 때는 먼저 생각하는 마음을 ‘깬다’하며 새겨야 한다.”(위빳사나 수행방법론 1권, 468쪽)라는 설명으로 알 수 있다. 누가 이렇게 새길 수 있을까? 범부에게 수행자의 길은 아득하기만 하다.
 
일상에서 수행 아닌 것이 없다. 여섯 감역을 새기는 것이 수행이다. 볼 때는 볼 뿐이고 들을 때는 들을 뿐이라고 새겨야 한다. 이렇게 새기지 못하면 내가 보는 것이 되고 내가 듣는 것이 된다.
 
일상에서 내가 개입되면 괴로움에 빠지게 된다. 내가 개입되지 않으면 당연히 괴로움도 없게 된다. 그렇게 하려면 수행주제를 놓지 말라고 했다. 이를 ‘고짜라삼빠잔냐(gocarasampajañña)’라 하여 ‘영역 바른 앎’이라고 말한다.
 
수행자는 자신의 수행주제의 영역에서만 머물러야 한다. 영역을 벗어나면 마음이 다른 곳에 가 있게 된다. 개념의 영역에 가 있을 때 실재를 보지 못한다. 수행주제를 놓지 않는 삶이다.
 
강물이 흐르는 것처럼 마음도
 
행선을 할 때 발을 들 때 밀 때 내릴 때 새김이 있어야 한다. 이는 정신과 물질적 현상을 아는 것이다. 발을 들 때는 들 때 뿐이고 발을 밀 때는 밀 때뿐이다. 각각 순간 정신과 물질 현상이 생겨났다가 사라진다. 이럴 때 발을 드는 사람도 없고 발을 미는 사람도 없다. 다만 행위와 이를 아는 마음만 있을 뿐이다.
 
갈 때 ‘내가 간다’라고 말하면 범부이다. 그러나 갈 때 ‘오온이 간다’라고 말하면 위빠사나 수행자이다. 일체 언어적 개념을 배제하는 것이다.
 
수행자에게 나라는 개념은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스스로 직접 경험하여 알 수 있는 거룩한 의미인 빠라맛타 실재성품으로 보면 중생, 나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요소들이 가고, 요소들이 서고, 요소들이 앉고, 요소들이 눕는다.” (위빳사나 수행방법론 1권, 457쪽)라고 말한다. 그래서 주석에서 마음에 대한 다음과 같은 멋진 게송이 있다.
 
 
별개인 이전의 마음이 소멸하고
별개의 새로운 마음이 생겨난다.
마치 강물이 흐르는 것처럼
마음의 연속은 끊임없이 생겨난다.”(DA.i172)
 
 
2024-04-18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