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니까야모임

노년수행이 힘든 것은

담마다사 이병욱 2024. 4. 24. 10:53

노년수행이 힘든 것은

 

 

봄 비 내리는 촉촉한 아침이다. 배낭에 늘 우산을 가지고 다닌다. 접을 수 있는 작은 우산이다. 오늘 백권당 가는 길에 써 먹었다.

 

우산에 빗방울이 떨어진다. 툭툭 떨어지는 소리가 음악처럼 들린다. 몸 컨디션에 좋은 것이다. 잠을 잘 잔 것도 하나의 이유에 해당된다.

 

 

흔히 늙어서는 수행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처음에는 이 말이 이해되지 않았다. 그러나 몸이 불편 했을 때 이 말을 실감 했다. 몸이 아프면 수행을 할 수 없는 것이다.

 

수행은 젊어서 해야 한다고 말한다. 왜 그런가? 빤냐와로 스님은 “75세 이상되면 도와 과를 이루기 힘듭니다.”라고 말한 것에서 알 수 있다. 75세가 되면 수행하기 힘든 것임을 말한다.

 

수행은 젊어서 해야 효과가 있다. 빤냐와로 스님에 따르면 “1-25세에 수행하면 불환자(아나함)가 될 수 있고, 26-50세 수행하면 일래자(사다함)이 될 수 있고, 51-75세에 수행하면 예류자(수다원)이 될 수 있습니다. 75세 이상은 힘듭니다.”라고 말했다.

 

수행할 수 있는 해가 얼마 남지 않았다. 빤냐와로 스님 말대로라면 이제 고작 십년 남은 것이다. 과연 십 년 이내에 도와 과를 이룰 수 있을까?

 

80세가 넘으면

 

수행은 힘 있을 때 해야 한다. 힘이 없으면 수행하기 힘들다. 위빠사나 수행지침서에도 수행할 수 있는 나이가 설명되어 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20대에서 40대에 올바른 수행을 한다면한 달 안에 지혜를 완성할 수 있다. 50대에서 60대가 되어 건강이 예전 같지 않은 시기에는 지혜를 완성하는데 두 달이 걸린다어떤 이는 그렇게 하더라도 만족할 만한 지혜에 이르지 못할 수도 있다. 70대를 넘어 80대가 되면인내심을 가지고 수행하더라도 분명하게 법을 이해하려면 긴 시간이 필요하다수행은 어렵고 노력을 해도 성과가 없다늦게 수행을 시작한 사람으로서 법을 완전히 이해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80세가 넘으면 수행을 하기에는 이미 너무 늦었다.” (위빠사나 수행자의 근기를 돕는 아홉요인, 275-276)

 

 

수행지침서에 따르면 70대를 넘어 80대가 되면 수행은 어렵고 노력을 해도 성과가 없다고 했다. 이렇게 본다면 수행은 75세가 한계가 되는 것 같다.

 

노년에 수행하기 힘들다. 초기경전에서도 언급되어 있다. 어떤 내용인가? 이는  “세상에 수행승이 늙어서 늙음에 정복당했다수행승들이여이것이 첫번째 정근하기에 알맞지 않은 시기이다.”(A5.54)라든가, “수행승들이여노년의 출가자가 총명을 얻기가 어렵다위의를 갖추기가 어렵다박학하기가 어렵다설법을 하기 어렵다계율을 수지하기가 어렵다.”(A5.59)라는 가르침으로 알 수 있다.

 

노년에 수행에 어려운 것은 나이 탓만은 아닐 것이다. 건강이 허락되면 누구나 도와 과를 이룰 수 있다. 이는 테리가타에서 쏘나 장로니에 대한 인연담을 보면 알 수 있다.

 

쏘나 장로니는 나이 들어 노령에 출가했다. 아들과 딸들에게 재산을 모두 분배해 주고 난 다음에 버림 받아 오갈 데가 없어서 출가한 것이다. 그때 나이가 80세였다고 한다. 그래서 “나는 나이가 들어 출가했으니방일하지 말아야 한다.”(Thig.A.93)라며 밤새도록 수행해서 도와 과를 이루었다는 말이다.

 

이 젊음과 건강은 천년만년 지속되지 않는다. 젊음의 교만, 건강의 교만으로 지내다 보면 늙음에 종속되고 질병에 종속된다. 나이가 80세가 넘으면 너무 늙어 버린 것이다.

 

노년의 수행이 힘든 것은

 

늙는다는 의미는 무엇일까? 이는 신체와 정신의 기능이 모두 늙었음을 말한다. 신체기능만 약화된 것뿐만 아니라 정신기능도 약화되었음을 말한다. 그래서 신체적으로 늙으면 주의력도 떨어지고 몸도 무거워진다. 걷기도 힘들고 앉아 있기도 힘들다. 더구나 남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이런 상태로는 수행을 할 수 없는 것이다.

 

나이를 먹어 늙으면 정신적 기능도 퇴화된다. 잊어 버리는 것이 가장 큰 문제이다. 무언가를 가지러 방에 들어갔다가도 무엇을 하러 방에 들어 왔는지 모른다면 기억력이 감퇴된 것이다. 그래서 가르친 것을 기억하기 어렵다.” (A5.60)라고 했다.

 

70대 또는 80대가 되면 정신이 나태해진다. 앉아 있기도 힘들다. 이런 이유로 수행지침서에서는 노년의 수행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되어 있다.

 

 

나이가 든 수행자의 몸은 건강하지 못하기 때문에 좌선을 할 때 자주 자세를 바꾸고 싶어진다. 건강하지 못하므로 같은 자세를 오랫동안 유지하지 못하며 자주 쉬러 들어가게 된다. 마음이 나태해져서 의식에 무엇이 일어나더라도 적절한 시기에 알아차리지 못한다. 나이가 들면 이것이 불편하다.”(위빠사나 수행자의 근기를 돕는 아홉요인, 277)

 

 

위빠사나 수행처에서는 자세를 자주 바꾸지 말라고 한다. 한시간 좌선하면 다리가 아파도 참고 견디라고 말한다. 이렇게 참고 견디어야 생멸하는 법의 성품을 볼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노년에는 앉아 있기도 힘들다. 그러다 보니 자꾸 눕고 싶어진다. 이런 상태라면수행하기 힘들다. 더구나 질병이 있다면 어떻게 될까? 이에 대하여 수행지침서에서는 고통이 지배하게 되면 수행자는 힘을 잃는다. 알아차릴 힘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아서 수행을 할 수 없게 된다.”(281-282)라고 했다.

 

질병 때문에

 

노년 수행이 어려운 것은 나이가 먹어서 어려운 것이 아니다. 질병 때문에 어렵다고 본다. 이는 몸의 고통으로 인하여 마음도 비참해진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질병이 오기 전에 빨리 열심히 수행하는 것이 좋다.

병이 오고 나면 고통이 나를 지배하여 집중을 하기가 어렵다.

힘을 잃고 고통이 나를 지배하게 되면,

더 이상 수행할 수 없을 것이다.”

(위빠사나 수행자의 근기를 돕는 아홉요인, 281)

 

 

질병이 오기 전에 수행하라고 했다. 이는 젊을 때 수행하기 좋음을 말한다. 나이 들었더라도 건강할 때 수행하라는 말과 같다. 고통 속에서는 법의 성품을 볼 수 없음을 말한다. 그래서 지침서에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 수행자여,

그대에게 병이 왔을 때 법을 보지 못하면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괴로움을 느낄 것이며,

낮은 세계로 가게 될 것이다.

법을 얻을 가능성이 있는 지금,

어찌하여 게으름을 피우고

자기 단속을 하지 않고 있는가?”

(위빠사나 수행자의 근기를 돕는 아홉요인, 283-284)

 

 

흔히 이렇게 말한다. 젊었을 때는 인생을 즐기다가 수행은 노년에 해도 늦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노년은 우리를 기다려 주지 않는다.

 

우리는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다. 왜 그런가? 우리는 모두 업생(業生)이기 때문이다. 과거 지은 행위에 대한 과보가 언제 익을지 알 수 없다.

 

젊어서 놀기만 한 자가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이했다면 어떤 세계에 태어나게 될까? 아마 지은 행위에 적합한 세계에 태어날 것이다.

 

젊어서 놀고 노년에 수행하자고 말하는 것은 악마의 속삭임이라고 알아야 한다. 무엇보다 노년이 오지 않을 수도 있다. 노년이 오기 전에 죽음을 맞을 수 있다.

 

노년 수행은 어렵다고 한다. 이는 부처님이 노년출가의 어려움에 대하여 수행승들이여노년의 출가자가 총명을 얻기가 어렵다위의를 갖추기가 어렵다박학하기가 어렵다설법을 하기 어렵다계율을 수지하기가 어렵다.”(A5.59)라고 말씀하신 것에서도 알 수 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질병 때문에 수행하기 어려운 것으로 본다.

 

수행은 나이가 한살이라도 젊었을 때 해야 한다. 수행은 조금이라도 건강할 때 해야 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세상에 수행승이 젊어서검은 머리를 하고 꽃다운 청춘이고 젊음을 지니고 나이 어린 청년이다수행승들이여이것이 첫번째 정근하기에 좋은 시기이다.”(A5.54)라고 했다.

 

빤냐와로 스님에 따르면 “1-25세에 수행하면 불환자(아나함)가 될 수 있다.”라고 했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과위가 낮아진다. 나이가 75세가 되면 도와 과를 이루기 힘들어 한계로 보았다.

 

위빠사나 수행지침서에서 “20대에서 40대에 올바른 수행을 한다면한 달 안에 지혜를 완성할 수 있다.”라고 했다. 그래서일까 부처님의 제자들은 머리가 칠흑처럼 검을 때 출가했다. 힘이 있고 질병이 없는 연령대에 해당된다. 이렇게 본다면 수행은 한살이라도 젊었을 때 해야 하는 것이다.

 

우연의 피습

 

초기경전에서는 젊었을 때 출가하여 아라한이 된 이야기가 많다. 금요니까야 시간에 합송한 우빠쎄나의 경’(S35.69)에서도 젊은 출가자가 아라한이 되어 생을 마감한 이야기가 있다.

 

사람들은 대부분 젊음의 교만, 건강의 교만, 삶의 교만으로 살아간다. 그러나 세월은 이를 가만 내버려 두지 않는다. 젊음의 교만은 늙음에 종속되고, 건강의 교만은 질병에 종속되고, 삶의 교만은 죽음에 종속된다.

 

누구나 죽게 되어 있다. 지금 이 젊음과 건강이 천년만년 갈 것 같지만 결국 늙음, 질병, 죽음으로 귀결된다. 더구나 내일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다. 이런 이유로 부처님 당시에 양가집 자제들은 앞다투어 출가했을 것이다. 수행승 우빠쎄나도 그런 사람 중의 하나였다.

 

수행승 우빠사나는 동굴에 살았다. 그런데 어느 날 동굴 천정에서 독사가 어깨에 떨어졌다.

 

우빠쎄나는 독사에 물렸다. 독은 빠른 속도로 퍼져 나갔다. 이런 것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다. 업보의 성숙과도 관련 없는 것이다. 이를 불운한 사건(Visamaparihārajāni) 또는 우연의 피습(Opakkamikāni)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사람이 세상을 살다 보면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는다. 억울한 일을 당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금요니까야 시간에 장계영 선생에게 들은 이야기도 이에 해당된다.

 

어떤 이가 적색등이 켜지자 차를 멈추고 정지했다고 한다. 뒤따라 오던 트럭도 당연히 정지할 줄 알았다고 한다. 그런데 트럭은 정지하지 않고 자신의 차를 그대로 받았다는 것이다. 이런 것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흔히 액땜했다는 말을 한다. 사고가 났을 때 그만하기를 다행이다라고 말한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업보의 성숙으로 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사고는 우연히 발생된 것이다. 사고는 업보의 성숙과는 무관한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세상에 어떠한 느낌들은 우연한 피습에서 생겨난다는 사실을 세상의 진실로서 인정해야 합니다.(S36.21)라고 말했다.

 

우빠쎄나가 독사에 물린 것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업보의 성숙으로 보는 것은 무리이다. 이는 우연의 피습으로 보아야 한다. 이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굶주림이나 목마름중독물림불타고익사하고살해되는 것은 제때에 업보에 따라 죽지 못한 것으로 본다. (Milp.302)”라고 설명해 놓았다.

 

한 줌의 왕겨처럼

 

우빠쎄나는 젊은 나이에 죽었다. 그러나 이미 아라한이었다. 아라한은 삶과 죽음을 초월해 있기 때문에 죽음이라는 말 자체가 시설되지 않는다. 그래서 우빠쎄나는 독이 퍼져 죽음이 임박했을 때벗들이여, 오십시오, 이 몸이 곧 한 줌의 왕겨처럼 흩어지기 전에 나의 이 몸을 침상에 올려서 밖으로 옮기십시오.”(S35.69)라고 말했다.

 

 

벗이여 싸리뿟따여, 시각이라든가, ‘나의 것이 시각이라든가, 또는 청각이라든가, ‘나의 것이 청각이라든가, 또는 후각이라든가, ‘나의 것이 후각이라든가, 또는 미각이라든가, ‘나의 것이 미각이라든가, 또는 촉각이라든가, ‘나의 것이 촉각이라든가, 또는 정신이라든가, ‘나의 것이 정신이라고 생각하는 자 에게는 신체의 변형, 감각능력의 쇠퇴가 있을 것입니다.” (S35.69)

 

 

여섯 감역에 대하여 나의 것또는 라고 여겼을 때 신체의 변형이나 감각능력의 쇠퇴가 있을 것이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맛지마니까야 87번 경에서   부처님이 장자여, 그대의 정신능력들은 그대 자신의 마음의 통제를 벗어났다. 그대의 정신능력들은 혼란되었다.”(M87)라고 말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을 때 어떤 반응을 보일까? 장자는 자신의 아들이 죽었을 때 무척 슬퍼했다. 이럴 때 신체의 변형과 감각능력 쇠퇴가 일어난다. 그러나 우빠쎄나는 여섯 감역에 대하여 나의 것이라든가 나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신체의 변형과 감각능력 쇠퇴가 일어나지 않았다.

 

아라한의 인생관

 

우빠쎄나는 급작스럽게 죽음을 맞이했다. 이런 죽음은 예측하지 못한 것이다. 우연의 피습에 의한 죽음이다. 그런데 우빠쎄나는 언제든지 죽을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는 아라한의 인생관과 관련이 있다.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잘 말해준다.

 

 

불사의 진리를 보지 못하고

백년을 사는 것보다

불사의 진리를 보면서

하루를 사는 것이 낫다.”(Dhp.114)

 

 죽음을 기뻐하지도 않고

삶을 환희하지도 않는다.

일꾼이 급여를 기다리듯,

단지 나는 때를 기다린다.”(Thag.606)

 

 

아라한은 하루를 사나 백년을 사나 똑같다. 불사의 경지에 이른 아라한은 오늘 죽어도 좋다. 십년을 더 살거나 이십년을 더 사는 것은 의미가 없다. 그렇다고 죽음을 바라는 것은 아니다.

 

삶과 죽음을 초월한 무아의 성자에게는 죽음이라는 말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때를 기다린다고 했다. 그것은 완전한 열반이다. 마치 월급생활자가 월급날자를 기다리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우빠쎄나는 젊은 나이에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했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마음의 동요가 없었다. 이는 존자 우빠쎄나에게는 오랜 세월 동안 라는 환상, ‘나의 것이라는 환상, 교만의 경향이 철저하게 뿌리뽑혔기 때문이다.”(S35.69)라는 말로 설명될 수 있다.

 

 

경에서 인상적인 표현이 있다. 이는 그러자 우빠쎄나의 몸은 곧 한줌의 왕겨처럼 흩어졌다. (atha kho āyasmato upasenassa kāyo tattheva vikiri; seyyathāpi bhusamuṭṭhīti)라는 말이다. 여기서 왕겨라는 말은 bhusa’를 번역한 말이다.

 

부사는 ‘chaff; husks (of corn)’의 뜻이다. 우빠쎄나의 몸은 산산조각이 나서 사라져버렸다는 뜻이다. 몸뿐만 아니라 마음도 산산조각났을 것이다. 이에 대하여 빅쿠보디의 영역에 대한 각주를 보면 내가 만드는 것등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우빠띳싸의 경’(S21.2)을 참조하라고 했다.

 

우빠띳싸의 경을 열어 보았다. 경을 열어 보니 오랜 세월 동안 나라는 환상, 나의 것이라는 환상, 교만의 경향을 제거한 자, 즉 아라한에게 있어서 변화하고 달라지는 것 때문에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나의 것 또는 나라는 관념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죽음 앞에서도 괴로움이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아라한의 인생관일 것이다.

 

한살이라도 젊을 때 조금이라도 건강할 때

 

몸도 마음도 편안한 비 오는 날 오전이다. 어제 까지만 해도 몸이 불편했다. 하루 밤 잘 자고 났더니 살만 하다. 그러나 언제 또 다시 몸 상태가 바뀔지 알 수 없다.

 

지금 이 건강은 내 건강이 아니다. 내일 어떤 상태가 될지 알 수 없다. 나이가 한살이라도 젊었을 때는 이러지 않았다. 지금으로부터 십년전이나 이십년전과는 다른 양상이다.

 

젊었을 때 수행하라고 말한다. 수행은 힘 있을 때 하라는 것이다. 힘이 없으면 수행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병이 있으면 수행하지 못하는 것이다.

 

병에 걸렸을 때 죽을 날만 기다릴 것이다. 그러나 수행자라면 병도 이용할 수 있다. 고통스러운 느낌을 알아차림 하여 성스러운 도와 과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어느 수행승이 임종을 맞이하고 있었다. 수행승은 고통스러운 느낌을 계속 새기고 있었다. 그 느낌이 사라진 순간 아라한이 되어서 숨을 거두었다. 임종과 동시에 아라한이 되어 완전한 열반에 이른 것이다. 이를 웨다나 사마시시라고 한다.

 

사마시시라는 말은 한꺼번에 두 가지를 잡는 사람을 말한다. 대개 임종순간에 일어난다. 임종순간에 느낌을 알아차려 아라한이 됨과 동시에 완전한 열반에 드는 것을 말한다. 이상적인 죽음이라 아니할 수 없다.

 

나이가 들어 늙었을 때 수행하기 힘들다. 서 있기도 힘들고 앉아 있기도 힘들다면 법을 보기 힘들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한살이라도 젊을 때 수행해야 한다. 조금이라도 건강할 때 수행해야 한다.

 

 

2024-04-24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