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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한 사명을 띠고 인간으로 태어난 설계된 존재

담마다사 이병욱 2024. 5. 2. 11:19

특별한 사명을 띠고 인간으로 태어난 설계된 존재
 
 
종종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있다. 내가 천상에서 온 사람 아닐까 하는 것이다.
 
어렸을 적 아버지에게 들은 이야기가 있다. 꿈에 내가 천상에 있었던 존재라는 것이다. 이런 얘기를 몇 번 들었다.
 
아버지에게 꿈 이야기를 들었을 때 우쭐했다. “정말 나는 고귀한 존재가 아닐까?”라고 생각한 것이다.
 
순수의 시기가 있었는데
 
사람의 전생은 알 수 없다. 인간으로 태어날 때 깨끗이 잊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생을 연구하는 사람들에 따르면 어렸을 때 기억이 남아 있다고 한다.
 
어렸을 때 무척 힘들었다. 아마 초등학교 3-4학년 시절이었던 것 같다. 이 세상이 너무나 맞지 않았던것 같았다. 도저히 살 수 없을 정도였다. 죽음을 생각하기도 했다.
 
유년기 시절 시골에 있었다. 자아의식이 막 형성되는 대여섯 살 시점부터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아름다운 경험이 있었다. 세상과 하나가 되는 황홀한 경험을 말한다.
 

(함평)

 
시골의 하늘과 땅이 풍요로울 때가 있다. 세상물정 모르는 아이에게 근심, 걱정, 번뇌가 있을 수 없다. 세상의 풍광을 있는 그대로 받아 들였다.
 
유행가 중에 ‘하늘 색 꿈’이 있다. 로커스트가 부른 노래이다. 가사를 보면 어린 시절 경험이 그대로 녹아 있다. 아마도 누구나 경험하는 것이라고 본다.
 
나에게도 순수기가 있었다. 아마 초등학교 3학년 때까지 였던 것 같다. 초등학교 4학년이 되면서 하나 둘 깨졌다. 나쁜 생각이 날 때“이러면 안되는데”라고 생각했다.
 
한번 타락하면 이전으로 돌아가기 힘들다.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마음이 오염되기 시작했는데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흔히 중2병이라고 한다. 중2가 가장 무섭다고 한다. 제1차 성징이 시작되는 중2의 시기야말로 마음의 오염이 절정에 달한다. 이럴 때마다 순수의 시절을 떠올렸다.
 
꽃공양 올린 공덕으로
 
나는 정말 하늘에서 왔을까? 착각일 수 있다. 왜 그런가? 육도윤회 하는 중생은 누구나 천상에 태어난 적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선업 지은 자가 천상에 태어난다고 한다. 이는 초기경전 인연담에서 수없이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그도 이전의 부처님들 아래에서 덕성을 쌓고 이러저러한 생에서 해탈을 위해 착하고 건전한 업을 쌓고 씨킨 부처님 당시에 하늘아들로 태어났다. 어느 날 스승을 뵙고, 청정한 믿음을 내어 낀끼라따 꽃으로 꽃공양을 올렸다. 그는 그 공덕으로 천상계와 인간계를 윤회하다가 고따마 부처님께서 탄생할 무렵, 마가다 국의 젠따라는 마을의 한 지역왕의 아들로 태어나 젠따라는 이름을 얻었다.”(ThagA.I.233)
 
 
테라가타에서 젠따 장로에 대한 인연담이다. 인연담을 보면 장로는 천상계와 인간계를 윤회했다. 선처에서 태어난 것이다.
 
공덕을 지은 자는 선처에서 태어난다. 그런데 젠따 장로의 경우 씨킨 부처님에게 꽃공양을 한 공덕으로 천상계와 인간계를 윤회했다는 것이다. 꽃공양 이후로 악처에 태어나지 않았음을 말한다.
 
과거에 지은 업이 언제 어떻게 작용될지 몰라
 
범부는 윤회하는 중생이다. 인간으로 살다가 죽으면 어떤 존재로 태어날지 모른다. 보시공덕과 지계공덕을 쌓으면 천상이나 인간으로 태어날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고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보시하는 삶과 지계하는 삶은 아름답다. 그렇다고 하여 모두 선처에 태어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가능성은 높다. 제아무리 보시를 많이 하고 지계하는 삶을 살았어도 악처에 태어날 수 있음을 말한다.
 
인간의 삶은 수명이 보장되지 않는다. 이 말은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말과 같다. 왜 그런가? 중생은 업생(業生)이기 때문이다. 과거에 지은 업은 언제 어떻게 작용될지 모른다.
 
행위를 하면 반드시 과보가 따른다. 즉각적으로 따르기도 하지만 시간을 두기도 한다. 이 생에서 언제가 받을 수 있다. 내생에 받을 수도 있고 먼 후생에 받을 수도 있다. 이렇게 본다면 인간의 미래는 알 수 없다.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다. 죽었을 때 어떤 존재로 태어날지도 알 수 없다. 제아무리 많은 보시를 하고 지계하는 삶을 살았어도 악처에 떨어질 수도 있다는 말이다.
 
악처에 떨어지지 않는 방법이 있다. 그것은 성자의 흐름에 드는 것이다. 성자의 흐름에 들면 못 잡아도 일곱 생 이내에 완전한 열반에 들어가게 되어 있다. 이 말은 천상이나 인간과 같은 선처에 태어나는 것이 보장되어 있는 것과 같다. 이는 다음과 같은 경전적 근거가 있다.
 

“통찰을 성취함과 동시에, 개체가 있다는 견해 매사의 의심, 규범과 금계에 집착의 어떤 것이라도, 그 세 가지의 상태는 즉시 소멸되고, 네 가지의 악한 운명을 벗어나고, 또한 여섯 가지의 큰 죄악을 저지르지 않습니다.”(Stn.231)
 

수타니파타 라따나경(Sn.2.1)에 실려 있는 부처님 가르침이다. 게송을 보면 세 가지 상태는 즉시 소멸된다고 했다. 이는 지옥, 축생, 아귀와 같은 악처의 문이 닫힘을 말한다. 그리고 여섯 가지 큰 죄악을 저지르지 않는다고 했다. 이는 육무간업을 짓지 않는 것이다.
 
조건적 발생의 법칙에 따라
 
살다 보면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 일어난다. 사랑하지 않는 것과의 만남이 대표적이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 아마 원인이 있어서 결과로서 나타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행위를 하면 반드시 과보가 따른다. 그런데 시간을 두고 익는다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여건이 갖추어지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조건이 맞아 떨어졌을 때 과보로 나타나는 것이다.
 
부처님은 연기법을 발견했다. 이런 연기법에 대하여 ‘조건발생의 법칙’이라고 한다. 이는 빠띳짜사뭅빠다(paiccasamuppāda)라는 빠알리어에서 그대로 드러나 있다. 조건을 뜻하는 빠띳짜(paicca)와 함께발생함을 뜻하는 사뭅빠다(samuppāda)의 결합어이기 때문이다.
 
사건은 일어날만해서 일어난다. 일어날만한 조건을 갖춘 것이다. 그런데 한가지 조건만 갖춘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복합적 조건에 따라 일어난다.
 
그 때에 다시 태어날 업의 메커니즘에 이끌려 가는 존재
 
한 존재가 세상에 태어난다는 것은 어마어마한 우주적 사건이다. 단지 부모의 성교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태어날만한 조건을 갖춘 것이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어머니와 아버지가 결합하고, 어머니에게 경수가 있고, 태어나야 할 존재가 현존하여, 이러한 세 가지 일이 조화가 되어 입태가 이루어진다.”(M38)라고 했다.
 
태어남의 조건에는 세 가지가 있다. 부모의 결합과 어머니의 경수, 그리고 태어나야 할 존재가 있다. 여기서 ‘태어나야 할 존재’는 간답바를 말한다.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간답바’라 하여 원어 그대로 사용했다. 빅쿠보디는 ‘the being to be reborn’라고 영역했다.
 
불교에서는 영혼을 인정하지 않는다. 간답바를 영혼으로 인정하면 유아윤회가 된다. 몸만 바꾸어 태어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주석에 따르면 ‘업의 힘에 의해 태어날 존재’(Pps.II.310)로 보고 있다. 빅쿠보디의 각주를 보면 “a being driven on by the mechanism of kamma”(n.411)라 하여 “그 때에 다시 태어날 업의 메커니즘에 이끌려 가는 존재”라고 설명해 놓았다.
 
존재가 육도윤회하는 것은 업의 힘에 따른다. 이는 자신이 행위한 대로 태어남을 말한다. 악처에 태어나는 자는 악처에 태어날 행위를 했기 때문이다. 선처에 태어날 자는 선처에 태어날 행위를 한 것이다.
 
나의 전생은 어떤 것일까? 혹시 전생을 본다면 비참할 것 같다. 반드시 선처에만 있었던 것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때는 선업을 쌓고 또 어떤 때는 악업을 쌓았을 것이기 때문에 악처에 태어난 적도 있었을 것이다.
 
선업을 쌓으면 선처에 태어날 가능성이 높다. 이는 테라가타 인연담에서도 확인된다. 그러나 언제 어느 때인가 악업을 지은 것이 익었을 때 악처로 떨어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불교적 세계관에서는 모든 존재는 윤회한다. 이는 영혼이 윤회하는 유아윤회는 아니다. 업의 힘으로 윤회하는 무아윤회이다. 그런데 천상과 인간을 윤회하다가 부처님 당시에 인간으로 태어났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자타카 윤회관을 보면
 
초기경전 중에 자타카가 있다. 부처님이 보살로 살 때 전생 이야기에 대한 것이다. 그런데 자타카를 읽어 보면 윤회하는 보살을 볼 수 있다. 천상과 인간, 축생으로 태어나는 이야기 위주로 되어 있다.
 
한국불교에서 어느 스님은 윤회에 대하여 몸만 바꾸는 것으로 설명한다. 전형적인 영혼윤회에 대한 것이다. 힌두교의 윤회를 말하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자타카에서 보살의 윤회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이에 대하여 전재성 선생은 자타카 해제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해 놓았다.
 
 
그러나 ≪자타카≫에서 제공하는 윤회의 형식이 불교적 무아윤회의 원리에 합당한 것인가라는 질문을 제기해 볼 수 있다.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이라면 학자들 사이에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인과적 시공간의 무한대의 확장이라는 원리적 측면에서나, 힌두교식의 ‘영원한 자아의 윤회’라는 논리적 모순을 극복한다는 측면에서 보면, 가장 합리적인 철학을 반영하는 것이다.
 
보살은 윤회하는 상이한 삶의 형태들 가운데 그가 태어난 시험적 상황의 조건들 속에서 완성되고 규정된다. 각각의 새로운 이야기는, 보살이 되기로 맹세한 태고적 서원의 계기를 바탕으로 선천적·후천적 조건을 만나서 창출되는 계기적 자아의 활동을 나타내는 것이다.
 
자아는, 영원하지 않고, 우리가 처한 조건 아래서 자유의지에 따른 행위의 결과로서 규정되는 존재이다. 따라서 자아는 우리가 선택하는 삶에 의해서 창조되고 지배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악하고 불건전한 행위를 선택하면, 불행한 결과를 가져오고, 착하고 건전한 행위를 선택하면 행복한 결과를 가져온다.”(한국빠알리성전협회본 자타카 해제, 27쪽)
 
 
자타카에서 보살은 유아윤회가 아니다. 이는 인과적 시간을 무한대로 확장하는 것으로 설명된다. 오늘은 어제의 연속이고, 이번 생은 이전 생의 연속인 것을 말한다. 그렇다고 하여 어떤 변치 않는 영혼이 윤회하는 것이 아니라 행위에 따라 윤회함을 말한다. 이는 “악하고 불건전한 행위를 선택하면, 불행한 결과를 가져오고, 착하고 건전한 행위를 선택하면 행복한 결과를 가져온다.”라는 말로 설명된다.
 
자타카의 구조를 보면 천상에서 인간으로 윤회하는 경우가 있다. 이런 경우 천상의 존재는 자신이 태어날 부모를 선택할 수 있다. 이는 천상의 존재는 매우 수승한 존재임을 말한다.
 
업(業)이 이끄는 대로
 
페이스북에서 어느 스님이 강아지 사진을 올렸다. 자신이 키운 개가 새끼를 낳은 것이다. 이에 대하여 여러 편의 글을 썼다.
 
스님은 강아지들이 태어났을 때 “얘네들은 어디서 왔을까?”라며 호기심을 내었다. 그런데 강아지로 태어났다는 것은 매우 불행한 일이라는 것이다.
 
축생으로 태어나면 깨달음에 이를 수 없다. 이는 윤회를 탈출할 수 없음을 말한다. 희로애락이 있는 인간이 윤회에서 벗어나기 위한 좋은 환경이다.
 
강아지들은 어디서 왔을까? 아마 어디서 온지도 모르고 왔을 것이다. 부모개의 교미가 원인이다. 더 근본적으로는 어미개의 발정기 때문이다. 결정적으로는 간답바가 있었기 때문이다.
 
간답바는 ‘그 때에 다시 태어날 업의 메커니즘에 이끌려 가는 존재’라고 했다. 간답바가 축생의 태에 든다면 축생으로 태어나게 될 것이다. 간답바가 인간의 태에 든다면 인간으로 태어나게 될 것이다.
 
인간이나 축생은 다음에 어디서 태어날지 모른다. 업이 이끄는 대로 어느 존재로든지 태어날 것이다. 그런데 초기경전에 따르면 천상의 존재는 자신이 태어날 부모를 선택한다는 사실이다.
 
인간계는 많은 일이 벌어지는 곳
 
요즘 밀린다팡하를 읽고 있다. 전재성 선생이 한국 최초로 빠알리원문 밀린다팡하를 번역했기 때문에 교정본을 읽고 있다. 그런데 교정본 서사(pubbabhāgapāha) 에 제석천과 천자(하늘아들)의 대화가 눈길을 끌었다. 그것은 태어남의 설계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삼십삼천 천상에 마하쎄나라는 천자가 있었다. 어느 날 제석천은 천자에게 “존자여, 수행승들의 무리는 그대가 인간계에 태어나길 요청하고 있습니다.”(Mil.7)라고 말했다.
 
밀린다왕은 토론에 있어서 대적할 자가 없었다. 그 어떤 논사도 날카로운 질문을 하여 꼼짝 못하게 만들었다. 그러자 밀린다왕은 “나와 대론하여 의혹을 없애줄 수 있는 수행자나 성직자가 없구나.” (Mil.5)라며 한탄했다.
 
히말라야 산록에는 수많은 수행승들이 있었다. 그러나 누구 하나 밀린다왕과 대론하여 의혹을 풀어 줄 수 있는 자가 없었다. 이에 삼십삼천 천상의 제석천에게 부탁했다. 천상에서 가장 수승한 존재를 인간계에 태어나게 하여 대론하게 해달라는 요청을 말한다.
 
제석천은 나가쎄나라는 하늘아들(天子)를 지목했다. 그리고 인간계에 태어나서 밀린다왕의 의혹을 해소시켜 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자 천자는 “존자여, 저는 많은 일이 벌어지는 인간계는 원하지 않습니다.”(Mil.5)라고 말했다.
 
나가쎄나 천자는 인간으로 태어나고 싶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 말했다. 그것은 많은 일이 벌어지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렇게 본다면 천상은 사건이나 사고가 거의 없는 곳임을 알 수 있다.
 
평화로운 광경을 접할 때가 있다. 목가적 풍경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한적한 시골이 연상된다. 아무 일도 일어날 것 같지 않은 분위기이다. 천상과 같은 조건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사람 사는 곳은 사건과 사고가 다반사로 일어난다. 특히 도시에서의 삶이 그렇다. 사람과 사람이 접촉하는 곳에서 빈번하게 일어난다. 인간사가 그렇다는 것이다.
 
인간계에서는 나가쎄나 천자의 도움이 필요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인간으로 태어나야 한다. 인간의 태에 들어야 한다. 그런데 천자는 거절한다. 인간세계에서는 너무나 많은 일이 일어나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는 인간사에서 볼 수 있는 희로애락일 것이다.
 
인간사의 희로애락은 근본적으로 괴로운 것이다.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 자체가 괴로움이다. 천상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괴로울 일이 없을 것이다.
 
천상에서는 항상 즐거운 일만 있다. 그래서 나가쎄나 천자는 “인간계는 고통스럽다.”라고 말하면서 “저는 여기 신들의 천상계에서 다음의 보다 높은 천상세계로 올라가서 완전한 열반에 들것입니다.”(Mil.)라고 말했다.
 
제석천은 세 번 간청했다. 천자는 요청을 들어주지 않을 수 없었다. 험난한 인간계에 태어나기로 한 것이다. 그렇다면 어느 부모에게 태어나야 할까? 이에 대하여 히말라야에서 온 수행승은 하나의 바라문 가문을 지목한다.
 
타고난 지혜
 
하늘아들 나가쎄나는 바라문 집안에 태어났다. 이는 히말라야 산록에 사는 수행승들의 계획에 따른 것이다. 마치 계획출산하는 것 같다.
 
수행승들은 바라문 가문에 아들이 태어나면 출가시키고자 했다. 그렇게 하려면 일곱 살이 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왜 일곱 살일까? 이는 아마도 자의식이 생겨나고 언어적 능력이 있어서 사물과 이치를 이해할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나가쎄나 존자는 히말라야 수행승들의 설계에 의해서 인간으로 태어났다. 밀린다왕과 대론시켜 승리하게 만들기 위한 인간설계에 해당된다.
 
바라문은 아들에게 베다를 교육시켰다. 바라문 가문에 태어났으니 당연한 것이었는지 모른다. 그런데 바라문 선생이 갖가지 베다를 교육시키자 모두 통달했다는 것이다.
 
나가쎄나는 일곱살이 되었을 때 베다를 통달했다. 그런 어느 날 명상에 들었다. 이에 대하여 “전생의 경향에 입각한 내적 성향에 따라 홀로 명상하며 자신의 능력의 처음과 중간과 종극을 살핀다.”(Mil.10)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지혜가 타고난 것임을 말한다.
 
이번생에 수행자로 사는 사람은 전생에서도 수행자로 살았을 가능성이 높다. 이는 전생에서 무탐, 무진, 무치의 수행을 한 과보로, 이 세 가지를 원인으로 해서 결생했기 때문이다. 나가쎄나도 이와 다르지 않다고 본다.
 
나가쎄나는 일곱 살 때 출가했다. 이는 히말라야 산록의 수행승들의 설계에 따른다. 가문이 좋은 바라문계급에 태어나게 한 것이 가장 크다. 만약 노예의 집에 태어났다면 배우지 못했을 것이다. 다음 단계는 출가시키는 것이다.
 
수행승들의 설계에 위해서 태어난 나가쎄나
 
히말라야 산록의 수행승들은 나가쎄나를 인간으로 태어나도록 설계했다. 다음으로 일곱 살이 되었을 때 출가를 시켜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담당을 정해서 칠년동안 바라문 집 앞으로 탁발 나가도록 했다.
 
마침내 나가쎄나는 일곱 살 때 출가했다. 나가쎄나는 논장부터 배웠다. 아비담마 칠론을 배운 것이다. 그리고 삼장을 통달했다.
 
나가쎄나는 나이가 이십세가 되었을 때 구족계를 받았다. 삼장을 통달했기 때문에 대적할 자가 없었다. 그리고 아라한이 되었다. 이제 밀린다왕과의 대론만 남았다.
 
밀린다팡하 교정본 서사까지 읽었다. 나가쎄나 존자 인연담에 대한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히말라야 산록의 수행승들의 설계에 위해서 태어났다는 것이다. 이런 나가쎄나 존자에 대하여 서사에서는 “깊은 지혜를 지니고 슬기롭고, 길과 길 아닌 길에 밝고 최상의 목표에 이르러, 나가쎄나에게는 두려움이 없었다.”(Mil.22)라는 게송으로 마무리하고 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천상
 
나의 이전 생은 무엇이었을까? 기억 나지 않으니 알 수 없다. 그래서일까 어느 수학자는 “설령 윤회가 참이라고 하더라도 전생을 기억하지 못한다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라는 취지로 말했다.
 
전생을 기억한다면 큰 혼란에 빠질 것 같다. 전생에서의 일은 좋은 것보다는 나쁜 것이 훨씬 더 많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느 스님은 전생에 수행자였다고 한다. 그런데 계속 수행자로 태어났다는 것이다. 물론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량없는 윤회의 과정에서 수행자로만 태어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윤도윤회했다면 축생으로도 태어나고 지옥에도 떨어졌을 것이다.
 
전생은 알고 싶지 않다. 행복한 때보다는 비참한 때가 더 많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생, 노, 병, 사는 기본적으로 괴로운 것이기 때문에 모든 전생은 괴로운 것이 된다. 설령 천상에 태어나도 죽을 때는 괴로운 것이 된다. 이는 밀린다팡하에서 “명근이 파괴된 천자처럼 두려워한다.”(Mil.23)라는 말로도 알 수 있다.
 
천상의 존재는 인간세계에 태어나지 않기를 바란다. 천상의 삶이 인간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좋은 것이다. 이는 인간세계가 다사다난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존자여, 저는 많은 일이 벌어지는 인간계는 원하지 않습니다.”(Mil.5)라고 했다.
 
천상과도 같은 삶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일상이 평온할 때 천상과도 같은 삶이 된다. 그러나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으면 도와 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희로애락이 있는 인간에서 도와 과를 이루기 쉬운 이유가 된다. 그래서일까 천자 나가쎄나는 인간으로 태어나 도와 과를 이루어 아라한이 되었다.
 
특별한 사명을 띠고 인간으로 태어난 설계된 존재
 
어느 시인은 천상에 태어날 것이라고 했다. 인간계에서 소풍을 마치고 마치 집으로 돌아가듯이 천상으로 갈 것이라고 했다.
 
누구나 천상에서 태어나고자 한다. 그러나 천상에 태어나라면 선업공덕을 쌓아야 한다. 그런데 천상에서 인간으로 태어나는 존재도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특별한 사명을 띠고 태어나는 존재를 말한다.
 
나가쎄나는 설계에 의해서 태어났다. 이는 특별한 능력을 지녔기 때문이다. 천상의 존재 중에서도 가장 수승한 존재가 인간의 태에 든 것은 요청이 있었기 때문이다. 부처님도 이와 다르지 않다.
 
부처님은 도솔천에 있다가 인간의 태에 들었다. 이런 것도 계획된 것이다. 어쩌면 설계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는 위대한 사람들에게서 볼 수 있다. 그래서 맛지마니까야에서는 “아난다여, 보살은 새김을 확립하고 올바로 알아차리며 만족을 아는 신들의 하늘나라 무리에서 죽어서 어머니의 자궁으로 들어왔다.”(M123)라고 했다.
 
천상의 존재가 인간으로 태어날 수 있다. 그런데 계획에 의해서 또는 설계에 의해서 태어나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를 자타카에서 보았다. 삼십삼천 천상에서 어떤 천상의 존재가 어떤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서 인간의 태에 드는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 밀린다팡하 교정본을 보다가 똑 같은 내용을 발견했다.


나는 천상에서 왔을까? 이 인간계에 어떤 특수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인간의 태에 든 것일까? 이는 착각일 수 있다. 누구나 한번쯤 꿈 꾸어 보는 것이다.
 
 
2024-05-02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