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니까야모임

이교도 지역에서 목숨 건 전법(轉法)

담마다사 이병욱 2024. 5. 24. 09:59

이교도 지역에서 목숨 건 전법(轉法)
 
 
무슨 일이든지 죽기살기로 하면 이루어지지 않는 일이 없다. 그렇다고 과도한 노력을 하면 휩쓸려 버린다. 가면 있으면 가라 앉아 버린다. 중도가 요청된다.
 
죽기살기로 하는 것들이 몇 개 있다. 올해가 시작 될 때 다짐하던 것들이다. 글쓰기, 좌선하기, 책만들기, 경전읽기, 그리고 빠알리공부하기를 말한다. 이를 오대의무라고 했다.
 
오대의무는 일상이 되어야 한다. 매일매일 빠짐없이 실행하는 것이다. 그러나 생업도 있어서 일상이 되기는 쉽지 않다.
 
오대의무에서 일상은 글쓰기와 경전읽기이다. 글쓰기는 백권당 자리에 앉자마자 시작된다. 두세 시간 가량 집중한다. 경전은 머리맡에 놓고 읽는다. 니까야와 논서를 병행해서 읽고 있다. 요즘에는 밀린다팡하 교정본을 읽고 있다.
 
일상이 되기 힘든 것이 있다. 좌선하기는 하루 걸러 한번 앉다시피 하고 있다. 일감이 있을 때는 납기가 우선이므로 앉아 있을 여유가 없다. 그럼에도 삼십분이라도 앉아 있고자 노력한다.
 
책만들기도 일상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일상으로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시간 날 때마다 틈틈이 편집 작업해야 한다. 목차를 만들고 제목을 새로 붙이고 사진 사이즈를 조정하는 등 책처럼 보이게 하기 위한 것이다. 진짜 책처럼 보이기 위해서는 서문을 쓰는 것이다. 서문은 책의 화룡점정과도 같다. 올해 이십권 이상 만드는 것이 목표이다.
 
현재 오대의무에서 가장 안되는 것이 있다. 사실상 손 놓고 있다. 빠알리어공부하기를 말한다. 백도수 선생이 진행하는 경전공부 줌방에 가입했으나 시간내기가 힘들다. 설령 들어가서 들는다고 해도 진전이 잘 되지 않는다. 도중에 들어갔기 때문일 것이다. 월반한 자가 애쓰며 듣는 것 같다.
 
빠알리공부는 자신의 방법대로 하기로 했다. 과거 외었던 빠알리경이나 게송에 대하여 다시 풀이 해 보는 식이다. 빠알리문법 구조를 배웠기 때문에 문법적 지식을 동원해서 글로 표현해 보고자 하는 것이다. 어느 정도 자신감을 가졌을 때 백도수 선생 방에 들어가고자 한다.
 
무슨 일이든지 죽기기로 해야 한다. 이를 달리 말하면 미치도록 해야 함을 말한다. 설령 이것이 과도한 것일지라도 이런 마음 가짐이 없으면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에 집착은 고통만 야기한다. 집착 없는 함을 해야 한다.
 
뿐나 만따니뿟따(puṇṇa mantāiputta)

오월 첫번째 금요니까야모임(5월 10일) 시간에 목숨을 건 전법에 대한 경을 합송했다. 이는 다름 아닌 ‘뿐나의 경’(S35.88)을 말한다.
 
뿐나는 부처님의 팔십대 제자 중에 하나이다. 앙굿따라니까야 ‘제일의 품’에 따르면 “수행승들이여, 나의 제자 수행승 가운데 뿐나 만따니뿟따는 가르침을 설하는 님 가운데 제일이다.”(A1.204)라고 했다.
 
대승불교에 부처님의 십대제자가 있다. 그 중에 부루나(富樓那) 존자가 있다. 부루나 존자는 설법제일(說法第一)로 알려져 있다. 이는 앙굿따라니까야 “뿐나 만따니뿟따는 가르침을 설하는 님 가운데 제일이다.”(A1.204)라는 가르침에 근거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한국불자들에게 부루나는 익숙하다. 대승경전에 등장하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니까야 경전에서는 뿐나 만따니뿟따(puṇṇa mantāiputta)라고 한다.
 
빠알리 사전을 찾아 보니
 
뿐나 만따니뿟따에 대하여 빠알리 사전을 찾아 보았다.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구글 번역한 것이다.
 
 
“Punna Mantānīputta Thera그는 Kapilavathu 근처 Donavathu의 브라만 가족에 속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Aññākondañña의 자매인 Mantānī였습니다.
 
부처님께서 담마짝까왓따나경(Dhammacakkappavattana Sutta)을 설하신 후 라자가하(Rājagaha)에 계실 때, 안냐콘단냐(Aññākondañña)는 카필라왓투(Kapilavatthu)로 가서 뿐나(Punna)를 계도하셨습니다. 그 후 콘단냐는 라자가하(Rājagaha)로 돌아왔고, 그곳에서 부처님과 작별한 후 은퇴하여 차단타다하(Chaddantadaha) 강둑에 살았습니다. 그러나 뿐나는 수행에 열중하면서 카필라바투에 남아 곧 아라한이 되었습니다.
 
그는 500명의 씨족을 모아 모두 수행자가 되었고 그들에게 자신이 배운 10가지 설법(dasa kathāvatthūni)을 가르쳤고 그들은 아라한이 되었습니다. 그들이 부처님을 만나기를 원했을 때 뿐나는 그들을 미리 라자가하로 보내어 그의 이름으로 부처님께 경의를 표할 것을 요청했습니다. 나중에 부처님께서 라자가하에서 사왓티로 오셨을 때, 뿐나는 그를 방문하여 부처님의 간다쿠티에서 법을 배웠습니다.
 
사리뿟타는 뿐나의 명성을 듣고 그를 만나고 싶어 안다바나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뿐나는 낮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Sāriputta는 그에게 일곱 가지 청정 행위에 대해 질문했고 Punna는 그에게 대답했습니다. 두 스님은 서로의 말에 큰 기쁨을 느꼈습니다. Sāriputta와의 인터뷰는 Rathavinīta Sutta (M.i.146 ff.)에 나와 있습니다. Buddha는 (MA.i.362) 두 장로가 공통점이 많았다고 말했습니다.
 
나중에 부처님께서는 뿐나(Punna)를 담마(Dhamma)를 설한 사람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으로 선언하셨습니다. (A.i.23; S.ii.156)
 
Padumuttara Buddha 시대에 Punna는 Buddha가 탄생하기 전에 Hamsavatī의 부유한 브라만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성인이 된 그는 어느 날 부처님을 방문했고, 그가 많은 군중 가장자리에 앉아 그의 설법을 듣고 있을 때, 부처님께서는 그의 비구 중 한 명을 설교자 중에서 탁월한 사람이라고 선언하셨고, 뿐나는 미래에도 같은 명예를 기원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파두뭇타라(Padumuttara)에게 큰 경의를 표하셨습니다. (ThagA.i.37ff)
 
그러나 Anguttara 주석서(AA.i.113 ff)에서 우리는 Padumuttara Buddha 시대에 Punna가 Gotama로 명명되었으며 Vedas의 전문가였다고 전합니다. 그러나 그는 베다의 가르침에서 위안을 찾지 못했고 18,000명의 자틸라(Jatilas)를 따르는 금욕주의자가 되었는데, 그들 모두는 그의 지도 아래 큰 이디(iddhi) 능력을 발전시켰습니다.
 
Punna는 Padumuttara가 깨달음을 얻었을 때 이미 늙었습니다. 어느 날 부처님께서 고타마의 암자를 방문하셨고, 고타마와 그의 제자들은 그에게 식사를 대접했습니다. 그 후 붓다는 그의 수석 제자 마하데바(Mahādeva)가 십만 명의 비구들과 함께 암자에 오기를 원했습니다. 그는 그렇게 했고 수행자들은 자리에 꽃을 마련했습니다. 7일 동안 부처님과 그의 수행자들은 자리에 앉아 무아지경에 머물렀고, 그 기간이 끝날 무렵 부처님께서는 가장 저명한 설법자에게 감사를 표할 것을 요청하셨습니다. 설교가 끝날 무렵 고타마를 제외한 모든 사람은 아라한이 되었습니다. 고타마는 미래의 붓다 밑에서 설법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얻고자 했고, 파두뭇타라는 그의 소원이 성취될 것이라고 선언했습니다. Apadāna(Ap.i.38, ThagA.i.362에서 인용됨)에는 또 다른 버전이 포함되어 있는데, 그에 따르면 Padumuttara 시대의 Punna의 이름은 Sunanda였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Rathavinīta Sutta(n. 1) 외에 Punna의 설교자로서의 기술을 증언하는 Samyutta Nikāya(S.iii.105f.; ThagA.ii.124에 따르면 Ananda는 이후 예류자가 되었습니다. 뿐나의 설교를 듣는다)는 아난다가 모인 승려들에게 뿐나가 아직 초보자였을 때 그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고 말하는 것을 나타냅니다. 뿐나는 그들에게 인과관계에 관해 설교했고, 그의 능숙한 해설 덕분에 그들은 교리를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아마도 Kurudhamma Jātaka(J.ii.381)의 문지기(dovārika) 및 Bhisa Jātaka(J.iv.314)의 일곱 형제 중 한 명과 동일시되는 사람은 바로 이 Punna일 것입니다.
 
Mahāvastu(iii.382)에는 Pūrna Maitrayānīputra의 것으로 추정되는 20개의 구절이 포함되어 있습니다.”(빠알리 사전)
 
빅쿠보디의 영역 각주를 보니

뿐나와 관련하여 쌍윳따니까야 주석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빅쿠 보디 영역을 구글번역한 것이다.
 
 
“Spk에 따르면 Punna는 사업차 Savatthi에 온 Sunaparanta 국가의 상인이었습니다.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그는 비구가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는 계명을 받은 후 사왓티 주변 지역이 명상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고국으로 돌아가 수행을 계속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는 떠나기 전에 부처님께 지도를 받기 위해 다가갔습니다. 자세한 전기 내용은 DPPN 2:220-21을 참조하십시오. Sunāparanta는 인도 서해안에 있었습니다. 수도는 수파라카(Suppāraka)였으며, 근처의 타나(Thāna) 지역에 있는 현대의 소파라(Sopara)였습니다.”(빅쿠보디역 상윳따니까야 1408쪽 58번 각주)
 
 
이 각주는 쌍윳따니까야 뿐나의 경을 근거로 한 것이다. 뿐나가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 설법하기 위한 것을 설명하고 있다. 그 지역은 인도 서부라고 한다. 오늘날 뭄바이 근처이다.
 
부처님 가르침이 좋은 줄 알아서
 
쌍윳따니까야에 ‘뿐나의 경’(S35.88)이 있다. 뿐나를 보면 전법제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왜 그런가? 목숨을 건 전법을 했기 때문이다. 서부지방의 이교도가 다수인 지역에서 전법하고자 한 것이다.
 
부처님은 염려가 되었다. 그래서 “뿐나여, 쑤나빠란따까의 사람들은 포악하다. 뿐나여, 쑤나빠란따까의 사람들은 잔인하다. 뿐나여, 만약 쑤나빠란따까의 사람들이 그대를 비난하고 욕한다면 뿐나여, 그 때는 어떻게 할 것인가?”(S35.88)라고 물었다.
 
이교도 지역에서 포교하는 것은 목숨을 걸어야 한다. 거의 십 년 전의 일이다. 그때 샘물교회 전도사는 아프가니스탄 이슬람교도 지역에서 전도했다. 그 결과 목숨 잃는 일이 발생했다.
 
뿐나 존자의 고향은 인도서부였다. 뿐나 존자는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서 부처님 가르침을 알리고자 했다. 부처님 가르침이 좋은 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존이시여, 만약에 쑤나빠란따까의 사람들이 저를 비난 하고 욕한다면, 그 때 저는 이와 같이 ‘나를 손으로 때리지 않으니 쑤나빠란따까의 사람들은 매우 친절하고 쑤나빠란따까의 사람들은 아주 친절하다.’라고 말하겠습니다.”(S35.88)라고 말했다.
 

 
뿐나 존자는 비난을 감수했다. 자신이 믿는 것과 다른 이야기를 했을 때 비난이 따를지 모른다. 사람들은 탐, 진, 치로 사는데 무탐, 무진, 무치로 살라고 말했을 때 세 가지 반응이 있을 것이다. 대부분은 웃어 보릴 것이다. 소수는 반신반의할 것이다. 극소수는 귀담아 들을 것이다.
 
이교도 지역에서 목숨을 건 전법
 
사람들은 대부분 욕망으로 살아간다. 욕계에서 욕망으로 살아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 모른다. 그래서 감각을 즐기는 삶을 살아간다. 그런데 이런 행위가 불선업을 짓는 것으로서 악처에 떨어진다고 말하면 어떻게 될까? 자신의 종교적 교리와 반대의 입장에 있다면 가만 두지 않을지 모른다.
 
부처님은 계속 물어 보았다. 이번에는 때리면 어떻게 하는지 물어 본 것이다. 이에 뿐나 존자는 흙덩이를 던지지 않는 것만으로 다행으로 여기겠다고 말했다. 더 나아가 몽둥이로 때리려 했을 때 칼로 목숨을 끊으려 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으로 여기겠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칼로 목숨을 끊으려 할 때 어떻게 해야 할까? 이에 뿐나 존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세존이시여, 만약에 쑤나빠란따까의 사람들이 날카로운 칼로 저의 목숨을 빼앗으면, 그 때 저는 이와 같이 ‘몸 때문에 목숨 때문에 오히려 괴로워하고 참괴하고 혐오하여 칼로 자결하길 원하는 세존의 제자들도 있다. 나는 그것을 원하지 않고도 칼로 자결하는 셈이다.’라고 말하겠습니다. 세상의 존귀한 님이여, 그 때는 이와 같이 말할 것입니다. 올바른 길로 잘 가신 님이여, 그 때는 이와 같이 말할 것입니다.”(S35.88)
 
 
뿐나 존자는 전법에 목숨을 걸었다. 이렇게 목숨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목숨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는
 
무아인 자에게 죽음은 두렵지 않다. 이는 밀린다팡하에서도 획인된다.
 
밀린다왕은 경전을 근거로 해서 질문했다. 이는 양도논법, 삼키지도 못하고 뱉지도 못하는 답을 유도하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모든 존재들은 죽음이 두렵다.”라는 말과 거룩한 님(아라한)은 모든 두려움을 초월해 있다.”라는 말이 서로 충돌 되는 모순을 지적한 것이다. 이에 나가쎄나 존자는 다음과 같이 답한다.
 
 
대왕이여, 세존께서 거룩한 님에 관하여 ‘어느 누구나 폭력을 무서워한다. 모든 존재들에게 죽음은 두렵기 때문이다.’라는 이러한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 진술에는 거룩한 님은 제외되어 있습니다. 거룩한 님에게는 두려움의 원인이 제거되어 있습니다. 대왕이여, 번뇌가 있고 극단적으로 자아의 견해에 사로잡혀 있고 즐거움과 괴로움 속에서 오르락내리락 하고 있는 뭇삶들이 있는데, 그들에 관하 여 세존께서는 ‘어느 누구나 폭력을 무서워한다. 모든 존재들에게 죽음 은 두렵기 때문이다.’라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대왕이여, 거룩한 님에게는 모든 존재의 운명은 끊어졌고 모태는 파괴되었으며, 결생은 단절되었고, 서까래는 부서졌고, 일체 존재에 대한 집착은 제거되었고, 일체의 조건지어진 것들이 근절되었고, 선악이 종식되었고, 무명은 파괴되었고, 종자 없이 의식이 생겨나고, 모든 번뇌가 불타버리고, 세속적인 것들은 정복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거룩한 님은 일체의 두려움 에 흔들리지 않습니다.”(Mil.146)
 
 
범부는 죽음을 두려워한다. 이에 대하여 자아의 견해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라고 했다. 이는 번뇌에 따른 것이다. 이 몸과 마음을 자신의 것이라고 집착하고 있는 한 죽음이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라한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왜 그런가? 아라한에게는 자아에 대한 실체적 관념이 없기 때문이다. 이 몸과 마음을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죽음이 있을 수 없다. 자아관념이 없는 무아의 성자에게 있어서 죽어야 할 존재를 자신에게서 발견할 수 없는 것이다.
 
뿐나 존자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교도들이 칼로 찌른다고 해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다. 오히려 기뻐했다. 이는 “몸 때문에 목숨 때문에 오히려 괴로워하고 참괴하고 혐오하여 칼로 자결하길 원하는 세존의 제자들도 있다. 나는 그것을 원하지 않고도 칼로 자결하는 셈이다.”라고 말한 것으로 알 수 있다.
 
부처님 당시에 칼로 자결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부처님의 부정관 수행을 듣고 몸에 대하여 혐오를 일으켜 자결한 것이다. 이는 뿐나 존자가 “몸 때문에 목숨 때문에 오히려 괴로워하고 참괴하고 혐오하여 칼로 자결하길 원하는 세존의 제자들도 있다.”라고 말한 것으로 알 수 있다.
 
부정관은 부처님의 핵심 가르침 중의 하나이다. 그런데 부정관 수행 중에 자결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부처님은 이를 호흡관 수행으로 대체 했다. 이는 쌍윳따니까야 ‘베쌀리의 경’에서 “수행승들이여, 호흡새김에 의한 집중을 닦고 호흡새김에 의한 집중을 익히면, 고요하고 승묘한 감로의 지복에 들어, 악하고 불건전한 현상이 생겨날 때마다 즉시 사라지게 하고 그치게 한다.”(S54.9)라는 가르침으로 알 수 있다.
 
뿐나 존자의 최후는 어땠을까?
 
뿐나 존자는 목숨을 건 전법을 했다. 그 결과 쑤나빠란따까 지방에서 우기 중에 오백명을 교화 할 수 있었다. 그런데 경에 따르면 “우기 중에 완전한 열반에 들었다.”라고 되어 있다.
 
뿐나 존자의 최후는 어땠을까? 경에서는 이교도들의 칼에 맞아 죽었다는 말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정황상 칼에 맞아 죽었을 것으로 본다. 금요니까야 멤버들도 모두 동의 했다.
 
진리에 목숨 걸 수 있다. 이는 설산동자의 투신 설화에서도 알 수 있다. 자타카가 원류이다. 그래서일까 법구경에서는 “불사의 진리를 보지 못하고 백 년을 사는 것보다 불사의 진리를 보면서 하루를 사는 것이 낫다.”(Dhp.114)라고 했다.
 
불사의 진리에 이르면 죽지 않는다. 죽지 않으므로 태어남도 없다. 불사의 진리에 이르기 위해서는 자아관념이 없어야 한다. 자아관념이 없는 무아의 성자에게 있어서 죽어야 할 존재를 자신에게서 발견할 수 없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가 된다.
 
여덟 가지 청법조건
 
부처님 가르침이 좋아서 매일 글을 쓰고 경전을 읽는다. 그렇다고 아무나 붙잡고 이야기하지 않는다.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에게 가르침을 전해야 한다. 무엇보다 청법하는 사람이 대상이 되어야 한다. 그것도 세 번 청법해야 한다.
 
아무에게나 법을 설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1)믿음을 갖추었고, 2)찾아와서, 3)가까이 앉아, 4)질문하고, 5)귀를 기울여 가르침을 듣고, 6)가르침을 기억하고, 7)기억한 가르침의 의미를 탐구하더라도, 8)의미를 알고 원리를 알아 가르침을 여법하게 실천하지 않는다면, 그 때까지 여래가 가르침을 설하지 않는다.”(A8.82)라고 말했다.
 
뿐나 존자는 이교도 지역에서 어떻게 설법했을까? 부처님 가르침이 좋다고 하여 길거리 전도사처럼 아무나 붙잡고 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마 자신의 청정한 모습을 보여 주는 것으로 감화 시켰을지 모른다.
 
자신의 청정한 모습을 보여 주는 것으로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은 누구일까? 얼굴이 예쁘면 아름다울까? 마음이 아름다운 사람이 가장 예쁜 사람일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청정한 마음이다. 자아개념을 없는 사람을 접했을 때 끌린다.
 
자아개념이 없는 사람은 번뇌가 없는 사람이다. 무아의 성자는 청정 그 자체이다. 이런 사람과 가까이 있는 것만으로도 청정해지는 것 같다. 자신의 청정한 모습을 보여 주면 자연스럽게 전법이 되는 것이다.
 
 
2024-05-24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