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니까야모임

최상의 효도는 믿음 없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제도(濟度)하는 것

담마다사 이병욱 2024. 5. 30. 10:53

최상의 효도는 믿음 없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제도(濟度)하는 것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이 있다. 가족과 함께 법당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리고 부처님 앞에 삼배 올리는 것이다.
 
가족제도가 쉽지 않다. 신심 깊은 불자는 가족과 따로 노는 경우도 많다. 그런데 가족과 함께 불교행사에 참여 했다면 가족제도는 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오월 두 번째 금요니까야모임
 
오월 두 번째 금요니까야모임이 5월 24일 한국빠알리성전협회에서 열렸다. 이날 참석자는 도현스님을 비롯하여 장계영, 홍광순, 방기연, 김종선, 김인규, 유경민, 정진영, 정보영, 김희숙 선생이다.
 

 
한달에 두 번 열리는 모임이다. 마치 학기처럼 여름과 겨울에는 방학이 있다. 방학이 있는 것은 전재성 선생이 미국에 있는 가족과 보내야 하기 때문이다.
 
전재성 선생은 늘 지치고 피곤한 모습이다. 어떤 날은 마치 탈진한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번역에 너무 몰두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하나 둘 오기 시작 할 때 멈춘다. 어쩌면 모임 시간은 쉬는 시간인지 모른다.
 
전재성 선생은 방학 때도 일을 한다. 컴퓨터를 가져 가면 움직이는 사무실이 될 것이다. 미국에서도 번역에 몰두 한다.
 
멀고 먼 한국빠알리성전협회
 
한국빠알리성전협회는 멀기도 하다. 고양시에 있으니 서울을 벗어나 있는 것이다. 그것도 동북쪽으로 치우쳐 있다 보니 동남쪽에 있는 사람들은 동선이 길어질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오는 꿋꿋이 사람들이 있다.
 
도현스님은 거의 빠지지 않는다. 남양주 정혜사에서 온다. 항상 장계영 선생과 함께 온다. 카풀해서 오는 것이다.
 
모임에 가려면 넉넉 잡고 두 시간 잡아야 한다. 갈아타고 이동하는 시간까지 합하면 더 잡아야 한다. 특히 삼송역에서 서고까지는 500미터가 넘는다. 십여분 걸어야 한다.
 
전재성 선생에게 삼배한 노보살
 
모임이 시작 된지 만 7년이 넘었다. 모임은 한결 같다. 매달 둘째와 넷째 금요일이 모임 날이다. 오후 7시에 시작해서 9시에 끝난다. 2017년 2월 이래 한번도 바뀐 적이 없다.
 
수많은 사람들이 왔다. 모임을 소개하는 블로그 글을 보고 온 사람들이 많다. 누군가의 소개로 온 사람들도 있다. 인상 깊은 사람들이 없지 않을 수 없다.
 
어느 해인가 어떤 노보살이 왔다. 노보살은 전재성 선생에게 삼배를 했다. 마치 법당에서 부처님 앞에 삼배하듯이, 스님 앞에서 삼배하듯이 정중하게 인사한 것이다.
 
대부분 한두 번 오다 만다. 지속적으로 꾸준히 나오는 사람은 드물다. 아마 무미 건조한 모임이기 때문일 것이다. 경을 함께 합송하고, 전재성 선생의 설명을 듣고, 궁금한 것을 질문하는 형식이 재미 없어서 그런지 모른다.
 
오는 사람 막지 않고 가는 사람 잡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인연 따라 왔다가 가는 것이다. 이익이 된다면 계속 오게 될 것이다.
 
법에는 맛이 있다. 가르침의 맛이다. 이는 경전을 읽어 보면 알 수 있다. 수행을 해서 체험하면 더 좋을 것이다. 그러나 니까야에서 게송 하나만 보아도 맛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가르침의 맛은 일체를 이긴다.” (Dhp.354)라고 했다.
 
법의 맛을 느낄 때가 있다. 경전에서도 맛 보지만 전재성 선생의 설명을 들을 때도 맛을 본다. 빠알리삼장 대부분을 번역한 관록에서 나온 것이다. 하나도 버릴 것이 없다. 부지런히 받아 쓴다. 이렇게 쓴 노트가 열 권이 넘는다.
 
모임에는 회장도 없고 회비도 없고
 
인터넷 시대를 살고 있다. 인터넷에 올린 정보는 공유된다. 블로그에 올린 글을 보고 찾아 왔다는 사람을 보면 알 수 있다.
 
먼 길을 찾아 온 사람들이 있다. 초행길은 찾아 오기 힘들다. 그럼에도 마음을 내서 찾아 온 사람들에게 선물을 한다. 늘 가지고 다니는 이미우이 음악씨디를 선물하는 것이다. 그리고 카톡방에 초대한다.
 
현재 카톡방에는 60명이 있다. 한번이라도 모임에 나온 사람이 대상이다. 모임과 관련된 정보를 공유한다.
 
모임에서 가장 오래 되었다. 그러다 보니 총무 비슷한 역할을 하고 있다. 새로 온 사람을 안내하는 역할도 하고 있다. 또한 입정시간에 불을 끄는 역할도 하고 있다.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다.
 
모임에 회장은 없다. 총무도 없다. 당연히 회비도 없다. 누구도 나오라거나 나오지 말라고 하는 것이 없다. 편한 시간에 오면 된다. 바쁘면 오지 않아도 된다. 와서 조용히 빈 자리에 앉으면 그만이다.
 
오로지 대면으로만
 
모임에 대하여 이런 저런 제안을 하는 사람이 있다. 모임을 활성화 하자는 것이다. 사람을 많이 오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줌’으로 하자는 말도 있었고 유튜브에 공개하자는 말도 있었다. 오래 전부터 제안된 것이다.
 
줌으로 모임 한 적이 있었다. 코로나 때이다. 그때는 줌으로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코로나가 시들해지기 시작했을 때 대면모임으로 전환 했다.
 
어떤 이는 유튜브 중계를 제안한다. 이렇게 하면 많은 사람들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전재성 선생은 관심이 없는 것 같다. 오래 전부터 여러 사람들이 제안했지만 현재와 같은 방식을 고수하고 있다.
 
두 가지 배움의 방식이 있는데
 
금요니까야모임은 요청에 의해서 만들어졌다. 2017년 2월 정혜사 도현스님과 수행자들의 요청에 의해서 모임이 시작되었다. 이는 전재성 선생이 시간을 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전재성 선생은 늘 번역 일에 바쁘다. 앞으로 번역해야 할 것이 많다. 그럼에도 시간을 낸 것은 자비의 마음일 것이다. 어쩌면 대중과의 소통하기 위한 것인지 모른다.
 
금요니까야모임은 전재성 선생과의 만남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찾아 가야 한다. 고양시 삼송역 근처 삼송테크노벨리에 있는 서고에 가는 것이다.
 
어떤 이는 모임을 종로에서 갖자고 제안한다. 지하철이 교차하는 종로2가나 3가, 또는 장충동 같은 곳에서의 모임을 제안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장소가 필요하다. 또한 비용이 들지 않을 수 없다. 무엇보다 전재성 선생의 시간이 문제가 된다.
 
전재성 선생은 번역 일에 바쁘다. 모임을 유지하는 것은 큰 마음을 내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런데 종로 등 교통이 편한 곳에 장소를 만든다면 전재성 선생의 시간을 빼앗는 것이 된다.
 
배움에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 학생이 선생을 찾아 가는 방식과 선생이 학생을 찾아 가는 방식이다. 전자는 학교와 같고 후자는 학원과 같다.
 
금요니까야모임은 선생을 찾아 가는 방식이다. 그래서 먼 길을 간다. 두세 시간 걸려서 찾아 가는 것이다. 선생이 학생을 찾아 간다면 학원과 같은 형태가 될 것이다. 학생은 수업료를 내야 할 것이다.
 
금요니까야모임에 수업료는 없다. 회원이 없기 때문에 회비가 있을 수 없다. 누구나 시간 되면 조용히 와서 들으면 그만이다. 그러다 보니 오랜 만에 오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인연의 끝을 놓지 않기 위한 것인지 모른다.
 
누나와 어머니와 함께 온 정진영 선생
 
김종선 선생의 활약이 대단하다. 김종선 선생은 방통대 불교학생회 도반과 함께 온다. 이번 모임에서는 불교학생회 회장과 왔다. 그 분은 박근혜 전대통령과 나이가 같다고 소개하면서 경찰공무원으로 35년 재직했다고 한다.
 
이번 모임에서 가족이 왔다. 정진영 선생 가족이 온 것이다. 누나와 어머니와 함께 온 것이다. 이런 경우는 처음 보았다. 참으로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가족제도가 어렵다고 한다. 한 가정에 모두 불자인 경우는 그다지 많지 않은 것 같다. 다종교사회인 우리나라에서 가족 구성원마다 종교가 다른 경우가 많다. 그런데 세 가족이 온 것이다.
 
정진영 선생은 모임에서 가장 나이가 가장 적다. 이십대 후반이다. 누나도 이십대 후반으로 알고 있다. 어머니는 젊어 보인다. 그래서일까 자기소개가 있기 전에 정진영 선생의 누나와 어머니는 자매처럼 보였다.
 
종교가 서로 다르면
 
세 가족의 모습이 좋아 보였다. 사람들도 감탄했다. 더구나 니까야 경전공부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케이스는 흔치 않은 일이라고 본다.
 
가족의 종교가 같으면 화합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것 같다. 종교가 서로 다르면 길등이 있을 수 있다. 서로 다른 세계에서 사는 것이다.
 
불교인이라면 가족제도 해야 한다. 부처님 가르침을 알려 주는 것이다. 자신 혼자만 절에 다닐 것이 아니라 함께 다녀야 한다. 그러나 쉽지 않다. 한사람의 믿음과 사상을 바뀌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종교는 믿음이다. 그런데 기존 믿음이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새로운 믿음을 받아 들이기 힘들 것이다. 가족제도가 쉽지 않은 이유이다.
 
부처님 가르침은 훌륭하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이 아무리 훌륭해도 믿음이 있는 사람의 마음을 돌리기가 쉽지 않다. 잘못 하면 역효과를 낼 수 있다.
 
무례한 길거리전도사
 
백권당 근처에 명학공원이 있다. 일이 끝나면 산책 나간다. 머리도 식히고 운동도 하기 위한 목적이다. 그런데 공원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길거리전도사를 말한다.
 
길거리전도사는 대체로 무례한 편이다. 아무나 붙잡고 “예수믿으세요”라고 말하는 것이다. 요즘은 약간 세련 된 같다. 건빵이나 티슈 같은 선물을 주면서 말을 건네는 것이다.
 
길거리전도사를 내치지 않는다. 예전에는 불쾌한 표정으로 외면 했다. 이제는 미소로 받아 준다. 서로서로 좋은 것이다. 그렇다고 신앙체계가 바뀌지 않는다.
 
새술은 새부대에
 
하늘에 두 개의 태양이 있을 수 없다. 불교를 믿으면서 동시에 기독교를 믿을 수 없다. 하나는 포기해야 한다. 자신에게 맞는 것을 선택해야 한다. 새로운 신앙이라면 기존 것을 버려야 한다. 그래서일까 부처님은 정각을 이루고 난 다음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그들에게 불사의 문은 열렸다.
듣는 자들은 자신의 신앙을 버려라.
하느님이여, 곤란을 예견하고
나는 승묘한 진리를 설하지 않았네.”(S6.1)
 
 
쌍윳따니까야 ‘하느님의 청원에 대한 경(brahmāyācanasutta)’에 실려 있는 게송이다. 싸함빠띠 하느님(Brahma)가 부처님에게 법을 설해 달라고 간청 했을 때 말한 것이다.
 
절에 가면 주련을 볼 수 있다. 특히 입구에서 “입차문내막존지해(入此門內莫存知解)라는문구를 볼 수 있다. 이 문구는 “부처님 법 닦는 이 문중에 들어와서는 알음알이의 분별 따위는 던져버려라”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 말의 모티가 되는 말이 니까야에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ye sotavante pamuñcantu saddha이라는 말이다. 이 말을 번역한 것이 게송에 있는 “듣는 자들은 자신의 신앙을 버려라”라이다.
 
자신의 신앙을 가진 채 다른 신앙을 받아 들일 수 없다. 왜 그런가? 충돌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교리적으로 정반대일 수 있다. 그래서 먼저 기존 믿음이나 사상체계를 비워내야 한다.
 
새술은 새부대에”라는 말이 있다. 새로운 사상체계를 받아 들이려면 기존 사상을 버려야 한다. 부처님 가르침을 받아 들이려면 먼저 기존에 형성되어 있는 신앙을 버려야 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영원주의 또는 허무주의 등과 같은 외도 사상은 양립할 수 없다.
 
 
왜 하느님이 청원 했을까?
 
요즘 밀린다팡하를 읽고 있다. 교정본이다. 놀라운 이야기로 가득하다. 그 중에 싸함빠띠 하느님의 등장에 관한 질의응답이 있다.
 
부처님이 정각을 이루었을 때 하느님이 청원했다. 여기서 하느님은 바라문교의 유일신 ‘브라흐마(Brahma)’를 번역한 것이다.
 
하느님은 부처님에게 합장공경했다. 한쪽 무릎을 끓고서 법을 설해달라고 간청한 것이다. 왜 하필이면 하느님이 간청했을까? 이에 나가쎄나 존자는 다음과 같이 답한다.
 
 
대왕이여, 그런데 하느님의 권청으로 가르침을 설하는 것은 모든 여래의 본질적 특성입니다. 그런데 그 무슨 까닭인가요? 그 당시 사람들, 고행자들, 유행자들, 수행자들, 성직자들 그 모두가 하느님을 신으로 섬기고 하느님을 존승하고, 하느님을 피안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므로 ‘그 힘있고 명성있고 잘 알려졌고 저명하고 드높은 최상자가 귀의한다면 신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귀의하고 신뢰하고 신해할 것이다.’라는 이유로 대왕이여, 여래께서는 하느님의 권청으로 가르침을 설했습니다.”(Mil.234)
 
 
니까야에서 하느님이 청원한 이유를 분명히 알 수 있다. 권위 있는 자, 힘 있는 자가 청원 했을 때 대중들이 믿고 따를 수 있음을 말한다.
 
하느님이 부처님에게 귀의 한다면
 
오늘날 한국은 종교시장과도 같다. 가장 영향력 있는 종교는 기독교이다. 개신교와 천주교를 합하면 30프로 가까이 된다. 불교의 20프로보다 훨씬 더 많다.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의 유일신은 고대인도에서 브라만교의 유일신과 매우 유사하다는 것이다.
 
브라흐마가 왜 유일신과 유사한가? 이는 디가니까야에서 브라흐마가“나는 하느님, 위대한 하느님, 정복자, 정복되지 않는 자, 모든 것을 보는 자, 지배자, 주재자, 작자, 창조주, 최상자, 조물주, 전능자, 존재하는 것과 존재할 것의 아버지 이다. 이 뭇삶들은 나에 의해서 창조되었다.”(D1.38)라고 선언하는 것에서 알 수 있다. 오늘날 기독교의 유일신과 매우 유사하다.
 
부처님이 정각을 이루었을 때 싸함빠띠 하느님이 찾아 왔다. 그리고 “알아듣는자가 있으리니, 세존께서는 가르침을 설하여 주소서.”(S6.1)라고 간청했다. 부처님 당시 고대인도의 최고 신이 간청한 것이다. 이에 부처님은 먼저 자신의 신앙을 버릴 것을 말했다. 기존 믿음과 상충되기 때문이다.
 
권위자의 말에는 권위가 있다. 같은 말을 해도 많이 배운 자가 말하면 설득력이 있다. 권력 있는 자가 말하면 먹혀 들어간다. 그런데 부처님 당시 고대인도에서 최고의 권위자는 싸함빠띠 하느님이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나가쎄나 존자는 다음과 같이 이어서 말한다.
 
 
대왕이여, 어떠한 자에게든 왕이나 총리대신이 귀의하고 경의를 표한다면, 그 한층 유력한 자에게 귀의하는 것으로 나머지 사람들도 그에게 귀의하고 경의를 표합니다. 대왕이여, 이와 마찬가지로 하느님이 귀의하면, 모든 여래에게 신들을 포함한 모든 세상이 귀의할 것입니다.”(Mil.234)
 
 
전쟁을 할 때 적의 장수를 항복하면 병사들도 따라서 항복하게 된다. 하느님이 부처님에게 귀의 한다면 모든 중생들도 따라서 귀의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대왕이여, 세상은 존경받는 자를 존경합니다. 그러므로 그 하느님은 모든 여래에게 가르침을 설할 것을 권정하였습니다. 그러한 이유로 여래에서는 하느님의 권청으로 가르침을 설한 것입니다.”(Mil.234)라고 말했다.
 
믿음 없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제도 (濟度) 해야 하는 이유
 
불자들은 얼마나 가족제도를 하고 있을까? 배우자는 물론 자식에게도 법을 알려 주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받아 들이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그렇다고 길거리전도사처럼 강요할 수 없다. 그럼에도 가족제도는 불자의 사명이나 다름 없다.
 
가족제도에는 부모도 대상이 된다. 믿음이 없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제도 (濟度) 하는 것이다. 고해의 바다에서 피안으로 건너가게 하는 것이다. 효도 보다 더 중요한 것이다. 그래서 앙굿따라니까야에 다음과 같은 가르침이 있다.
 
 
수행승들이여, 두 분에 대하여는 은혜를 갚기가 쉽지 않다. 두 분이란 어떠한 분인가? 어머니와 아버지이다. 수행승들이여, 한똑 어깨에 어머니를 이고 한쪽 어깨에 아버지를 이고 백년을 지내고 백년을 살면서, 향료를 바르고 안마를 해주고 목욕시키고 맛사지를 해드리며 간호하는데, 그들이 어깨 위에서 똥오줌을 싸더라도 수행승들이여, 어머니와 아버지의 은혜를 갚지 못한다. 수행승들이여, 어머니와 아버지로 하여금 이 칠보로 가득한 대륙의 지배자로서 왕위에 취임하도록 하여도 어머니와 아버지의 은혜를 갚지 못한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수행승들이여, 어머니와 아버지는 아이들을 낳고 양육하며 세상에 내보내는 많은 일을 하기 때문이다.”(A2.32)
 
 
사람들은 부모 생일잔치를 해 준다. 맛 있는 음식으로 대접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단지 먹는 것으로 지나지 않았을 때 진정으로 은혜를 갚는 것이 못 된다.
 
부모의 은혜는 한량 없다. 효도를 하면 부모은혜를 갚는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부모가 죽었을 때가 문제가 된다. 부모는 어떤 세계에 태어날지 모른다.
 
부모의 은혜를 갚으려면 방법을 달리 해야 한다. 먹을 것과 입을 것, 거처를 마련해서 편안하게 살게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부처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수행승들이여, 그러나 믿음이 없는 어머니와 아버지에게 믿음을 권하고, 믿음에 들게 하여 믿음을 확고하게 하고, 계행이 없는 어머니와 아버지에게 계행을 권하고, 계행에 들게 하여 계행을 확고하게 하고, 인색한 어머니와 아버지에게 보시를 권하고, 보시에 들게 하여 보시를 확고하게 하고, 지혜가 없는 어머니와 아버지에게 지혜를 권하고, 지혜에 들게 하여 지혜를 확고하게 하면, 어머니와 아버지의 은혜를 넘치게 갚는 것이며, 넘치게 갚는 것이다.”(A2.32)
 
 
최상의 효도는 부모를 부처님 가르침으로 이끄는 것이다. 아무리 맛있는 것을 사드리고 돈을 드리고 심지어 안마를 해 준다고 해도 부처님 가르침을 한마디 알려 주는 것만 못하다. 왜 그런가? 부처님의 담마는 사람들로 하여금 천상에 이르게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경에서는 “믿음이 없는 어머니와 아버지에게 믿음을 권하라.”라고 했다.
 
가장 가까운 사람 제도하기
 
믿음이 없는 가족에게 부처님 가르침을 알려 주어야 한다. 부모뿐만 아니라 자식에게도 알려 주고, 형제에게도 알려 주고 친척과 친지에게도 알려 주어야 한다. 아귀와 같은 악처에 떨어지지 않고 천상에 나게 하기 위한 것이다.
 
나는 가족제도를 했는가? 작고한 부모님은 정서적으로 불자였다. 그렇다고 부처님 가르침을 적극적으로 말한 것은 아니었다. 가족 중에 처는 확실히 제도 되었다.
 
오래 전의 일이다. 삼십년도 더 된 일이다. 그때 처가 성당에 나가겠다고 말했다. 그때 정서적 불자였는데 참으로 난감했었다.
 
요즘 여행 가면 절에 반드시 들른다. 법당에서 처와 함께 삼배한다. 재작년인 2022년 봉정사 법당에 함께 들어간 것이 처음이다. 이전에는 따로따로 참배 했었다.
 
무엇이든지 한번 하기 시작하면 그 다음부터는 자동적으로 되는 것 같다. 처와 함께 법당에 들어가게 되자 그 다음부터는 자동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가장 가까운 사람을 제도에 성공한 것이다.
 
 
최상의 효도
 
이번 니까야모임에서 가족이 왔다. 정진영 선생의 어머니와 누나가 온 것이다. 이런 일은 처음이다. 사람들은 감탄했다. 부처님 가르침이 좋은 것을 알기 때문일 것이다. 더구나 초기불교에 대한 것이다.
 
가족제도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부처님 가르침이 좋은 줄 안다면 혼자서만 알아서는 안될 것이다. 주변사람들에게 권유해야 한다. 특히 가족을 제도해야 한다. 믿음 없는 부모를 제도하면 최상의 효도가 된다.
 
오로지 자신만을 아는 삶을 살면 아귀로 태어나기 쉽다. 살아 있을 때 부처님 가르침을 알려 주면 믿음과 보시와 지계로 인하여 천상에 날 수 있다. 세상에 이것 보다 더한 효도가 어디 있을까? 정진영 선생 가족은 아름다웠다.
 
 
2024-05-30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