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니까야모임

연기적 관계속의 하느님

담마다사 이병욱 2024. 6. 11. 17:50

연기적 관계속의 하느님
 
 
하느님, 어떤 불자는 이 용어에 대하여 불편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하느님이라는 말은 우리 고유의 말이다. 어떤 종교를 막론하고 누구나 쓸 수 있는 말이다.
 
현재 한국에는 두 종류의 빠알리니까야 번역서가 있다. 한국빠알리성전협회 번역서와 초기불전연구원 번역서를 말한다. 그런데 두 번역서를 보면 용어에 있어서 차이를 보인다. 그 중에 하나는 ‘브라흐마(Brahma)’에 대한 번역어이다.
 
브라흐마(Brahma) 번역어
 
오월 두 번째 금요니까야모임이 5월 24일 한국빠알리성전협회에서 있었다. 모임에서 합송한 경 가운데 하나는 ‘로힛짜의 경’(S35.132)이다. 이 경에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마음이 잘 삼매에 들어
청정해지고 오염에서 벗어나
모든 존재에 대하여 우호적인 것
그것이 하느님의 길이네.”(S35.132)
 

 

 
게송에서 ‘하느님의 길’이 나온다. 이 말은 ‘brahmapatti’를 번역한 말이다.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브라흐마를 증득하는 길이로다.”라고 번역했다. 브라흐마에 대하여 원어 그대로 사용한 것이다.
 
브라흐마(Brahma)는 브라만교의 절대신을 말한다. 오늘날 유일신교의 창조주와 같은 개념이다. 그런데 이 말에 대하여 한국빠알리성전협회에서는 ‘하느님’으로 번역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한역을 따라 ‘범천(梵天)’으로 번역했다. 때로 빠알리 원어 브라흐마를 그대로 사용했다.
 
브라흐마는 창조주
 
브라흐마에 대하여 빠알리사전을 찾아 보았다. 남성명서로 ‘the Creator’로 나와 있다. 창조주라는 뜻이다.
 
초기경전에서 보는 하느님은 어떤 의미일까? 이는 디가니까야 1번 경에서 하느님이 독백하듯이 말하는 장면에서 알 수 있다. 먼저 하느님은 “나는 하느님, 위대한 하느님, 정복자, 정복되지 않는 자, 모든 것을 보는 자, 지배자, 주재자, 작자, 창조주, 최상자, 조물주, 전능자, 존재하는 것과 존재할 것의 아버지이다. (hamasmi brahmā mahābrahmā abhibhū anabhibhūto aññadatthudaso vasavattī issaro kattā nimmātā seṭṭho sajitā vasī pitā bhūtabhabyāna) (D1.38)라고 선언한다.
 
니까야에서 설명된 하느님은 오늘날 기독교나 이슬람교 등 유일신교의 하느님과 다를 바 없다. 오히려 더 강화된 느낌이다. 창조주를 넘어서 최상, 전능자 등 무려 열세 가지 수식어가 붙는다.
 
위대한 사람에게 부여 되는 명칭은 대체로 긴 편이다. 옛날 역사책을 보면 장군이나 왕에게는 긴 시호가 부여 되었다. 천지를 창조한 하느님 역시 열세 가지 명칭으로 길다. 그런데 가장 중시 여기는 호칭이 있다는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닌 창조주로서의 하느님이다. 그래서 경에서는 “이 뭇삶들은 나에 의해서 창조되었다.(mayā ime sattā nimmitā)(D1.38)라고 선언한 것이다.
 
외로운 창조주
 
유일신교에서는 창조론을 믿는다. 창조주가 사람을 만들었다고 믿는 것이다. 사람뿐만 아니라 삼라만상 모든 것을 만들었다고 믿는다. 우주를 창조한 것이나 다름 없다. 그런데 초기경전을 보면 창조주의 고뇌가 엿보인다는 것이다. 이는 “다른 뭇삶이라도 이곳에 오면 얼마나 좋을까?”(D1.38)라고 바란 것을 말한다.
 
창조주의 바람은 이루어 졌다. 자신이 처음 이 세상에 왔는데 어느 날 사람이 온 것이다. 홀로 사는 사람에게 낯선 자가 찾아 오는 것과 같다.
 
먼저 온 사람에게 우선권이 있다. 군대에서도 하루라도 먼저 온 사람이 선임이다. 우주가 성겁기가 되었을 때 텅 비었는데 가장 먼저 온 사람이 창조주가 된 것이다. 나중에 온 자는 피조물이 된다.
 
이 세상에 먼저 온 사람은 주인이 된다. 나중에 온 사람은 종이 된다. 먼저 온 사람은 창조주가 되고 나중에 온 사람들은 피조물이 된다. 이는 피조물이 “이 존귀한 자는 하느님, 위대한 하느님, 정복자, 정복되지 않는 자, 모든 것을 보는 자, 지배자, 주재자, 작자, 창조주, 최상자, 조물주, 전능자, 존재하는 것과 존재할 것의 아버지이다. 우리는 이 존귀한 하느님에 의해서 창조되었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우리는 여기 먼저 태어난 자를 보았고 우리는 나중 여기에 태어났기 때문이다.”(D1.38)라며 독백하듯이 말하는 장면으로 알 수 있다.
 
세상에 홀로 남겨졌을 때 어떤 생각이 들까? 말벗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성겁기가 시작될 때 텅 빈 우주의 어느 공간에서 하나의 존재가 태어났는데 외로움을 참을 수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 “다른 뭇삶이라도 이곳에 오면 얼마나 좋을까?”(D1.38)라고 바란 것이다.
 
창조주의 소원은 이루어졌다. 복과 수명이 다한 천신들이 죽어서 아래 세상으로 내려오기 시작한 것이다. 나중에 온 자들은 먼저 온 자에 대하여 “이 존귀한 자는 하느님, 위대한 하느님, 정복자, 정복되지 않는 자, 모든 것을 보는 자, 지배자, 주재자, 작자, 창조주, 최상자, 조물주, 전능자, 존재하는 것과 존재할 것의 아버지이다.”(D1.38)라며 극존칭을 붙였다. 더구나 “우리는 이 존귀한 하느님에 의해서 창조되었다.”(D1.38)라며 선언한 것이다. 창조주와 피조물과의 관계가 형성된 것이다.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
 
니까야를 보면 놀라움으로 가득하다.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것들이 들어 있다. 인식을 초월한 것이다. 인식의 지평이 넓어지지 않을 수 없다. 창조주와 피조물에 대한 이야기도 그렇다.
 
어렸을 적에 교회 나간 적이 있다. 서울 삼양동 산동네달동네에 살 때의 일이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아이들은 교회에 가기 시작했다. 빵이나 과자 등 먹거리를 바라고 갔다.
 
교회에서는 처음 온 아이들을 교육시켰다. 크리스마스가 가까이 되어서 온 줄 아는 것이다.
 
교회 선생은 아이들에게 노래를 알려 주었다. 지금도 기억 나는 무시무시한 가사이다. 가사는 ‘하느님 믿다 믿지 않으면 유황불이 펄펄 끓는 지옥에 빠진다’라는 내용이다.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다. 아마도 그것은 초등학교 시절 교회에서 배운 노래 영향이 큰 것 같다. 믿었다고 믿지 않으면 큰 일 날 것 같았다.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은 고교시절에도 있었다. 추첨으로 들어간 학교가 미션스쿨이었기 때문이다.
 
학교는 마치 교회 같았다. 일주일 내내 예배와 찬송이 끊이지 않았다. 일주일에 두 번 있는 성경시간, 일주일에 두 번 있는 방송예배 시간이 있었다. 거의 매일 예배와 찬송이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학교에서는 학생들을 신자로 만들기로 작정했던 것 같다. 성경시간에는 돌아가며 기도하게 하기도 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고역이었을 것이다. 기도할 때 “하나님 아버지”부터 시작했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때 하나님을 받아 들이지 않았다. 한번 받아 들이면 빠져 나오지 못할 것 같았다. 초등학교 시절 교회에서 부른 유황불노래도 생각났다. 두려움의 하나님, 공포의 하나님이었던 것이다.
 
더 이상 하느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이제 더 이상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공포의 대상으로 여기지도 않는다. 왜 그런가? 하느님의 실체를 알아 버렸기 때문이다. 맞지마니까야 1번 경에 다음과 같은 가르침이 있다.
 
 
이 세상의 배우지 못한 일반사람은 고귀한 님을 인정하지 않고, 고귀한 님의 가르침을 알지 못하고, 고귀한 님의 가르침에 이끌리지 않고, 참사람을 인정하지 않고, 참사람의 가르침을 알지 못하고, 참사람의 가르침에 이끌리지 않는다. 그는 하느님을 하느님으로 여기고 하느님을 하느님으로 여기고 나서, 하느님을 생각하고 하느님 가운데 생각하고 하느님으로부터 생각하며 ‘하느님은 내 것이다.’고 생각하며 하느님에 대해 즐거워한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그는 그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고 나는 말한다.”(M1)
 
 
여기서 핵심은 “하느님을 생각하고 하느님 가운데 생각하고 하느님으로부터 생각하며 ‘하느님은 내 것이다.’고 생각한다.”라는 말이다. 이 문장은 “ A를 생각하고, A 가운데 생각하고, A로부터 생각하며, ‘A는 내 것이다.’라 고 생각한다.  (~ maññati, ~ maññati, ~ maññati,  ~ meti maññati)”라는 구조로 되어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생각한다(maññati)’라는 말이다.
 
위 문장은 정형구이다. A에 그 어떤 것도 대입할 수 있다. 이름 지어진 것이나 명칭으로 불리우는 것이 대상이다. 그래서 맛지마 1번경을 보면 A에 불(teja), 바람(vāya), 존재(bhūta), 신(deva), pajāpati(창조주), 하느님(brahma) 등이 들어간다. 명칭 지어진 모든 것들이 들어간다. 심지어 열반도 들어간다. 이런 것들을 생각한다고 했다.
 
정형구에서 ‘생각한다’는 말은 만냐띠를 번역한 말이다. 만냐띠 (maññati)는 왜곡된 사유에 대한 것이다.
 
만냐띠는 어떤 대상에 대하여 어떤 특징이나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 사유를 말한다. 이런 사유는 왜곡되기 쉽다. 단지 머리 속에서만 존재하는 생각이 되기 쉬운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런 사유가 발생할까? 이는 오온에 대하여 자신의 것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것은 나의 것이고, 이것은 나이고, 이것은 나의 자아이다.”라고 여긴다. 이는 다름 아닌 갈애와 자만, 견해에 따른 것이다.
 
하느님의 실체를 알아 버렸을 때
 
인식론적 왜곡은 망상이다. 이렇게 본다면 만냐띠는 망상이 된다. 어떤 대상에 대하여 의미를 부여 했을 때 자신의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은 내것이다.”라고 여기게 된다.
 
인식론적 왜곡은 실재하지 않는 것이다. 다만 생각 속에서만 존재한다. 오온에 대하여 내것으로 여긴다면 이는 존재론적으로 보는 것이다.
 
사람들은 명칭 붙여진 것이 존재하는 것으로 본다. 존재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어떤 변치 않는 실체가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생각으로 이루어진 것은 실체가 있을 수 없다. 있다면 생각 속에서나 있게 된다.
 
실재하는 것은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그러나 생각은 생멸하지 않는다. 항상 그대로 있다. 이렇게 본다면 생각은 실재하지 않는 것이다.
 
이 세상 그 어떤 것도 실체가 없다. 모두 조건 지어진 것이다. 오온에도 어떤 고정불변하는 실체가 있을 수 없다.
 
생각 속에서 존재하는 것은 있다. 이름이나 명칭 같은 것이다. 맛지마니까야 1번경에서는 “불을…, 바람을…, 존재들을…, 신들을…, 창조신을…, 하느님을…, 빛이 흐르는 하느님 나라의 신들을…, 영광으로 충만한 하느님 나라의 신들을…, 위대한 경지로 얻은 하느님 나라의 신들을…, 승리하는 하느님 나라의 신들을…, 무한한 공간의 세계를…, 무한한 의식의 세계를…, 아무 것도 없는 세계를…, 지각하는 것도 아니고 지각하지 않는 것도 아닌 세계를…, 보여진 것을…, 들려진 것을…, 경험된 것을…, 인식된 것을…, 하나인 것을…, 다양한 것을…, 모든 것을…, 열반을”(M1)을 들고 있다. 모두 언어적으로 명칭 붙여진 것이다.
 
이름이나 명칭은 언어적 형성에 대한 것이다. 언어적 형성은 생멸이 없다. 생멸이 없다는 것은 실재하지 않음을 말한다. 언어적으로만 존재하기 때문에 누군가 이름이나 명칭을 기억하는 한 죽지 않는다.
 
사람들은 착각 속에 빠져 살아간다. 실재하지도 않는 것에 대하여 존재한다고 믿는 것이다. 단지 이름이나 명칭에 지나지 않은 것임에도 실재로 있다고 믿는 것이다. 그러나 이름이나 명칭에서는 그 어떤 실체도 발견할 수 없다. 당연히 창조주, 하느님도 없는 것이다. 있다면 생각속에서나 있다.
 
만냐띠에는 열반도 있다. 경에서 언급 되어 있는 열반은 유사열반을 말한다. 속된 말로 가짜열반인 것이다. 이는 디가니까야 1번경에서 언급되어 있는 62견 중에 일부에 해당된다. 감각적 즐거움에 대하여 열반으로 여기는 것과 선정의 즐거움을 열반으로 여기는 것이 이에 해당된다.
 
하느님은 있을까? 어린 시절 교회에 나갔을 때는 하느님이 있는 것처럼 믿었다. 고교시절 미션스쿨에서 예배를 볼 때도 하느님이 있는 것으로 믿었다. “하나님 아버지” 하는 순간 나의 혼이 빼앗길 것 같았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그런 생각을 하지 않는다. 하느님의 실체를 알아 버렸기 때문이다.
 
오로지 다른 것들과의 관계속에서만 경험되었을 때
 
사람들이 말하는 하느님은 머리 속에 있는 하느님이다. 이는 다름 아닌 왜곡된 인식에 따른 것이다. 이와 같은 인식론적 왜곡에 대하여 “순간적인 지각의 경험 가운데서도 자아중심적인 관점이 침투함으로써 일어난다.”(한국빠알리성전협회본 맛지마니까야 1번경 13번 각주)라고 설명한다.
 
인식론적 왜곡은 자아중심적인 관점이 침투함으로써 일어난다 했다. 이는 갈애와 자만과 견해에 따른 것이다. 단지 이름이나 명칭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이는 실재하지도 않고 실체도 없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이와 같은 만냐띠(망상)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즉, 땅은 땅이라는 것으로 경험되지 않는 것이며, 물은 물이라는 것으로 경험되지 않는 것이며, 불은 불이라는 것으로 경험되지 않는 것이며, 바람은 바람이라는 것으로 경험되지 않는 것이며, 존재는 존재라는 것으로 경험되지 않는 것이며, 신들은 신들이라는 것으로 경험되지 않는 것이며, 창조주는 창조주라는 것으로 경험되지 않는 것이며, 하느님은 하느님이라는 것으로 경험되지 않는 것이며, ‘빛이 흐르는 하느님 나라의 신들’은 ‘빛이 흐르는 하느님 나라의 신들’이라는 것으로 경험되지 않는 것이며, ‘영광으로 충만한 하느님 나라의 신들’은 ‘영광으로 충만한 하느님 나라의 신들’이라는 것으로 경험되지 않는 것이며, ‘위대한 경지로 얻은 하느님 나라의 신들’은 ‘위대한 경지로 얻은 하느님 나라의 신들’이라는 것으로 경험되지 않는 것이며, ‘승리하는 하느님 나라의 신들’은 ‘승리하는 하느님 나라의 신들’이라는 것으로 경험되지 않는 것이며, 모든 것은 모든 것이라는 것으로 경험되지 않는 것입니다.”(M49)
 
 
부처님에 따르면 땅 등 언어적으로 명칭 붙여진 것은 경험되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이에 대하여 “땅은 땅의 실체가 없으므로 오로지 다른 것들과의 관계속에서만 경험된다.”(한국빠알리성전협회본 맛지마니까야 49번경 861번 각주)라고 설명된다.
 
어떤 것이든지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홀로 존재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있다면 생각속에서나 있을 것이다. 생각속에서 존재하는 것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당연히 실체가 없다.
 
땅은 땅이라는 것으로 경험되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땅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말한다. 언어적 명칭으로는 존재할 것이다. 땅이 존재하려면 관계속에서 있어야 한다. 연기적 관계를 말한다. 마찬가지로 창조주가 존재하려면 연기적 관계속에서 존재해야 한다. 관계속의 창조주를 말한다. 하느님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관계속의 하느님은 있지만 홀로 떨어져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그런 하느님은 없는 것이다.
 
망상형 하느님 바까(Baka)
 
니까야에는 다양한 하느님이 등장한다. 그 중에는 망상형 하느님도 있다. 하느님 바까를 말한다.
 
하느님 바까는 영원주의자이다. 그러나 수명이 있다. 색계 초선천에서 사는데 수명은 일겁이다. 우주가 성주괴공하는 기간에 해당된다.
 
하느님 바까는 왜 영원주의라는 삿된 견해를 갖게 되었을까? 그것은 오래 살기 때문이다. 우주가 무너질 때까지 오래 사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전생을 잊어 버렸다. 영원히 사는 것으로 착각한 것이다.
 
부처님은 하느님 바까를 깨우쳐 주고자 했다. 영원히 사는 존재가 아니라 윤회하는 중생에 지나지 않은 존재임을 알려 주기 위함이다. 다음과 같이 알려 주었다.
 
 
만약 그대가 무상한 것을 실로 항상하다고 말한다면, 견고 하지 않은 것을 실로 견고하다고 말한다면, 영원하지 않은 것을 실로 영원하다고 말한다면, 완전하지 않은 것을 실로 완전하다고 말한 다면, 변하는 것을 실로 변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하느님 바까여, 그대는 무명에 빠진 것입니다. 하느님 바까여, 그대는 무명에 빠진 것입니다. 또한 그대가 늙고 쇠퇴하고 사라지고 생겨나는 것을 늙지 않고 쇠퇴하지 않고 사라지지 않고 생겨나지 않는 것이라고 말 한다면, 그리고 그대가 다른 벗어남이 있는데도 다른 보다 높은 벗어남이 없다고 말한다면, 하느님 바까여, 그대는 무명에 빠진 것입니다. 하느님 바까여, 그대는 무명에 빠진 것입니다.”(M49)
 
 
부처님은 하느님 바까에게 무명에 빠졌다고 말했다. 이는 영원주의에 대한 것이다. 이는 “자아와 세계는 영원한 것으로 새로운 것을 낳지 못하고, 산봉우리처럼 확립되어 있고, 기둥처럼 고정되어 있어, 뭇삶들은 유전하고 윤회 하며 죽어서 다시 태어나지만, 영원히 존재한다.”(D1.31)라는 견해를 말한다.
 
부처님 당시 영원주의는 브라만교에 대한 것이다. 어떤 자아가 있어서윤회를 하지만 그 자아는 변치 않는 것이라고 한다. 자아뿐만 아니라 세계도 변치 않는다고 말한다. 자아와 세계는 영원하다는 것이다. 이는 홀로 존재하는 것이 된다.
 
홀로 존재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오로지 관계속에서만 존재한다. 원인과 조건과 결과라는 연기법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이런 것을 모르면 무명이 된다. 부처님이 하느님 바까에게 “그대는 무명에 빠진 것입니다.”라고 말한 이유가 된다.
 
하느님으로 태어나려면
 
초기경전을 보면 부처님은 인간뿐만 아니라 천상에서도 설법 했다. 불교에서 천상은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속에서 존재하는 것이다. 각자 지은 업에 적합한 세계에 태어나는 것이다.
 
하느님으로 태어났다면 하느님으로 태어날 업을 지은 것이다. 이는 앙굿따라니까야 ‘일곱개의 태양의 출현에 대한 경’에서 부처님이 “수행승들이여, 그래서 스승인 쑤넷따는 칠년간 자애의 마음을 닦았다. 칠년간 자애의 마음을 닦고 나서 일곱 파괴의 겁과 생성의 겁 기간 동안 이 세계에 돌아오지 않았다.”(A7.66)라고 말한 것으로 알 수 있다.
 
누구든지 자애의 마음을 닦으면 하느님이 될 수 있다. 경에서는 칠년 동안 자애수행을 한 자가 하느님으로 태어난 것임을 알 수 있다. 우주가 성주괴공하기를 일곱 번 했을 때까지 인간 세계에 오지 않은 것이다. 색계 이선천 중에서 수명이 팔겁인 극광천에 태어난 것이다.
 
연기적 관계속에서의 하느님
 
하느님이 된 것은 자애수행을 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하느님은 자애의 하느님이 된다. 하나님을 믿다 믿지 않으면 유황불이 펄펄 끓는 지옥으로 보낸다는 두려움과 공포의 하나님이 아닌 것이다.
 
경에서 자애의 하느님에 대한 호칭이 있다. 이는 “일곱 번이나 하느님, 위대한 하느님, 승리자, 정복되지 않는 자, 널리 관찰하는 자, 자재한 자였다. “(A7.66)라는 말이다. 이는 연기적 관계로서의 하느님을 뜻한다. 홀로 독립한 하느님이라면 “작자, 창조주, 최상자, 조물주, 전능자, 존재하는 것과 존재할 것의 아버지”(D1)라는 명칭이 더 붙을 것이다.
 
이 세상에 그 어떤 것도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자연인이 산 속에서 홀로 산다고 하지만 로빈슨 크루소처럼 완전히 홀로 살 수 없다. 관계를 맺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 마찬가지로 하느님도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관계속에서 존재한다.
 
하느님이 두려움과 전율과 감동에 빠진 것은
 
누구나 하느님이 될 수 있다. 자애수행을 해서 초선정의 경지에 오르면 색계 초선천, 즉 수명이 일겁인 대범천의 하느님이 되는 것이다. 경전에 등장하는 하느님 ‘싸함빠띠’나 망상적 하느님 ‘바까’도 수명이 일겁인 하느님이다.
 
부처님은 하느님 바까에게 전생을 알려 주었다. 또한 부처님은 무명을 깨우쳐 주었다. 수명이 너무 길어서 영원히 살 것처럼 사는 천상의 존재에게 무상, 고, 무아의 가르침을 설한 것이다. 이런 가르침을 받았을 때 충격받았을 것이다. 어떤 충격인가? 다음과 같은 가르침이 잘 말해 준다.
 
 
수행승들이여, 저 장수하는 하늘사람들은 아름답고 지극히 행복 하고 높은 궁전에 오래도록 살아도 여래의 설법을 듣고 대부분 벗이여, 우리들은 영원하지 않은 것을 영원하다고 여겼다. 벗이여, 우리들은 견고하지 않은 것을 견고하다고 여겼다. 벗이여, 우리들은 상주하지 않는 것을 상주한다고 여겼다. 벗이여, 우리는 실로 영원 하지 않고 견고하지 않고 상주하지 않지만 개체가 있다는 견해에 사로잡혀 있었다.’라고 두려움과 전율과 감동에 빠진다.”(S22.78)
 
 
천상의 존재들은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충격에 빠졌다. 이는 부처님의 사자후를설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사자후는 최상의 진리에 대한 당당하고 의미 있는 선언을 말한다.
 
천상의 존재들은 상락아정(常樂我淨)으로 살았다. 그런데 부처님은 정반대로 무상, 고, 무아, 부정의 가르침을 설했다는 것이다. 이런 가르침에 쇼크 받았을 것이다. 왜 그런가? 신념체계가 무너졌기 때문이다. 요즘 말로 멘붕이 된 것이다.
 
영원주의자들은 자아와 세계는 영원하다고 믿는다. 그러나 연기법적 관계로 보았을 때 영원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 어떤 것도 홀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없는 것이다. 그래서 무상, 고, 무아, 부정의 가르침을 설했을 때 큰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이에 대하여 “두려움과 전율과 감동에 빠진다.”(S22.78)라고 했다.
 
천신들은 왜 두려움(bhaya)과 전율(santāsa)과 감동(savega)에 빠졌을까? 이는 다름 아닌 ‘지혜에 의한 두려움’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무상, 고, 무아의 지혜가 생겨나자 존재에 대한 두려움이 일어난 것이다.
 
천신들은 부처님 설법을 듣고 두려움이 생겨났다. 그런데 두려움은 전율과 감동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이는 부처님 가르침에 해결방법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불사(不死)’의 가르침이다. 아마도 영원주의자들에게는 전율과 같은 가르침이 될 것이다. 마침내 감동의 물결이 일었을 것이다.
 
원인과 조건과 결과의 연기적 관계속에서만
 
사람들은 누구나 오래 살고자 한다. 더 나아가 영원히 살고자 한다. 이는 다름 아닌 갈애이다. 이런 갈애가 있기 때문에 세세생생 윤회한다.
 
부처님은 이 세상에 영원히 사는 것은 없다고 했다. 당연히 자아개념이 있을 수 없다. 있다면 언어적으로나 있을 것이다. 홀로 독립해서 있는 것이다. 그러나 관계 속에서 있지 않은 것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자아는 망상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름 붙여진 것은 실체가 없다. 오로지 원인과 조건과 결과라는 관계속에서만 존재하게 된다. 그런데 이런 존재는 생멸이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생멸이 없는 것은 모두 개념이 된다.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도 개념이 된다. 자아, 창조주, 하느님도 관계가 없다면 개념이 된다. 실체도 없고 실재도 없는 것이다. 이런 사실을 알았을 때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2024-06-11
담마다사 이병욱